며칠 전 낭독을 시작한 책이다.   (출판사 산지니)

     부제는 '인문과 역사로 습지를 들여다보다'이다.

     저자 김훤주는 1963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2006년 12월 마산창원환경운동연합이 주는  

    녹색언론인상을 받았다. 2007년 1월부터는 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을 하 

    고 있다. 병들어 누워있는 아내와 아들 딸 하나씩을 둔 가장이다.  

    딱딱한 내용이지만 부드러운 인상으로 읽히는 이유는 그의 문체, 상당히 겸손한 문장과  

    겸양조의 높임체에서 오는 낮고 소박한 태도 때문이다.  도움말을 준 사람들의 말을 인용부호 

                                           를 이용하여 그대로 전하며 과격한 주장도 피한다.

                                           내용도 충실하여 낭독하는 재미가 있다. 

                                           습지와 인간 블로그 http://sobulman.tistory.com 

 

 내용 중에서 이런 시도 나온다. 책이 저자의 표정처럼 순하게 읽히는 비결이다.  

창녕 대지면 석동 출신의 시인 성기각의 시 "토평천"을 옮겨본다.  

 

화왕산 정기 받아 넓은 들 안고 

굽이쳐 흘러가는 맑은 토평천 

토끼풀 가는 모가지에 꽃을 맺는 냇가에 서면 

대지국민학교 나갈 종소리 낭랑하게 퍼져오고 

여름 내내 우리는 

선생님 몰래 멱을 감았다 

돌틈 사이로 메기 잡는 

병우가 냇물 깊은 곳으로 자맥질하면 

꼭순이는 

검정고무신 넘치도록 피라미를 잡았다 

말매미 울어샀는 버드나무 

마파람은 여지없이 거미줄에 걸리고 

수박서리 하러 갔던 홍경이가 멱살 잡혀 돌아오면 

오후 수업 시작종은 사분의 삼박자로 이어졌다 

종소리에 놀라 우리는 제각기 

물에 젖은 깜장빤쓰를 입고 

발목 붙잡는 고들빼기 농로를 지나 

물새궁둥이를 흔들며 교실로 달려갔다.  

 - 성기각,  [토평천]    54쪽

 

토평천은 화왕산 북서쪽 열왕산에서 비롯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암면 감리못을 거쳐 성 시인의 모교인 석동의 대지초등학교 앞을 지나 소벌(우포)로 나아갑니다. 토평천은 여기서 소벌의 막내 쪽지벌을 지난 다음 낙동강을 향해 느긋하게 흘러갑니다...... 토평천은 경관과 생태가 살아 있습니다...... 그이의 시 "토평천"은 여름철 물가 아이의 일상을 꼼지락꼼지락 보여줍니다...... 성 시인이 1960년생이니까 여기 정경은 '국민'학교 4-6학년, 1970-1972년으로 짐작되는 여름날 학교 풍경이겠지요. 중략... (55쪽) 
 

---------  

시골에서 자란 경험이 없는 나는 이 시에 나오는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다.  어린시절의 경험을 떠올려 소박하게 건져올린 시어들이 그 자체로 활동사진처럼 생생하다.  말매미 울어쌌는 버드나무, 사분의 삼박자 경쾌한 오후 수업 시작종소리, 물새궁둥이 닮은 아이들의 궁둥이!

내 국민학교 시절을 떠올려봐도 토평천은 아니어도 물이 먼저 생각난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완전히 주택가가 되었지만 당시는 소풍만 갔다하면 거기로 갈 정도의 멋진 장소가 학교 뒷산으로 올라가면 있었다. 무주구천동 계곡을 떠올릴만한 물 많고 물 맑고 물 깊은 계곡이 있었고 물소리가 요란했다. 물이 회오리 돌며 하얀 거품을 일으키던 곳에서 삼남매와 친정아버지 이렇게 넷이서 찍은 사진은 우리 네 명이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사진 속에서도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리는 것 같았는데 그 많던 물은 언젠가부터 다 사라져버렸다.  

또 한 번의 물은 국민학교 4학년 때 작은이모를 따라 서울 사는 큰이모집에 놀러가서 함께 갔던 청평유원지. 그 물은 넓고 깊어 보여 튜브를 타고도 너무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수영을 못하는 나는 물이 지금도 무섭다. 수영복을 입고 배 볼록해서 인상 쓰고 서있는 옆모습사진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 없어졌다. 당시 사촌오빠들과 언니가 그 사진을 보고 놀릴 때면 약이 올라 뾰로퉁하곤 했었다. 흑백사진 속의 아릿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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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06-07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이 녹음하신 거 듣고 싶어요.^^
어릴때 사진보고 놀림 당했던 기억이 있는 저도 늘 약이 올라 뾰로통했었답니다.ㅎㅎ

프레이야 2009-06-07 09:37   좋아요 0 | URL
지금은 얼굴색이 흰편인데 초등저학년 땐 약간 가무잡잡했어요.
특히 이마가 반지르하면서 가무잡잡했지요. 배도 볼록ㅎㅎ
섬님도 뽀로통 ㅋㅋ

반딧불이 2009-06-07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좋은 책들을 낭송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멀미때문에 차타고 책을 못보는 체질이라 Ipod을 이용하고 있어요. 혹시 프레이야님의 낭송 파일을 저도 들을 수 있는건가요?

2009-06-07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7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6-07 23:11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 하는 일이라 즐거워요. 고맙습니다.^^
 

단선적으로 말하긴 어폐가 있지만, 사람마다 쌓였던 울분과 슬픔이 어떤 계기로 함께 폭발하는 경우가 바로 요즘이다.  그래도 세상은 굴러가고, 굴려가야하고, 밥을 먹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하고, 배설을 해야한다. 눈물도 배설의 방편이 된다면 그래서 속이 다 후련하도록 모조리 쏟아내어 내다버릴 수 있다면... 소통은 역시 어렵고 뒷끝에는 늘 허무함과 외로움만 남는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르지 않는 마음일 거라 위로하고, 독선과 위선의 옴팡한 구멍에 빠지지 않기를 경계해본다. (생전에 언론을 살짝 비꼬는 말이었지만) 말조심하겠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등 망자가 남긴 어록 중에서 짧게 치고 들어오는 말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요즘이기도 하다.

오늘 내게 주어진 시간표대로 역시 녹음낭독을 하러갔다왔다. 마음 심란했지만 집중하여 글을 읽는 순간에는 다른 생각이 범접하지 못한다는 장점을 오늘 난 선용한 셈이다. 두꺼운 분량의 책 '지중해 철학기행'을 끝내고 새 책을 시작했다. 앞엣 것이 딱딱한 내용에다 어려운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 단어가 자주 나와 신경써서 발음하느라 턱이 무척 아팠다고 하니까 녹음실의 착한 두 아가씨가 "벌써 또 끝냈어요?"라며 웃어준다. 세상의 이치이기도 하지만, 슬픔과 안타까움의 바로 곁에도 이렇게 작은기쁨과 웃음이 함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쓴웃음이라 해도.

오늘 시작한 책은 좀 가볍고 말랑말랑한 책이라 금방 끝날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그녀의 소설은 한 권도 읽어본 게 없다. 아무튼 이 책의 원제는 '하찮은 것들'이다. 작가가 살아오면서 좋아하는 하찮은 것들을 소재로 여러 꼭지로 짧게 나눠 적은 가벼운 에세이류다. 그리 문학성 높은 것도, 그리 뛰어난 문장이나 깊은 사유의 맛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간혹 아래와 같은 내용처럼 뒷통수를 살짝 치는 대목도 있었다. 

-------- 

상처 

   

종종 상처를 낸다. 온갖 곳에다. 

예를 들면 페달을 밟으면 뚜껑이 열리는 쓰레기통, 뚜껑을 열 때마다 뒤쪽에 붙어있는 스프링이 벽에 상처를 낸다. 쓰레기통이란 대개 벽에 붙여놓게 마련이라, 벽을 보호한답시고 방 한가운데 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리고 사다리. 부엌의 높은 찬장에서 물건을 꺼내거나 전구를 갈아 끼울 때, 계단 위에 있는 창문을 닦을 때는 사다리가 필수품이다. 그런데 사다리는 크고 무거우니까 들고 다니다 보면 떨어뜨리거나 어디에 부딪치기 십상이다. 계단 모퉁이나자신의 무릎에. 

그런 상처에 관해서 나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내가 낸 것이든 남편이 낸 것이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저분한 것과는 다르니까. 

그런데 우리 남편은 정반대다. 저저분한 것보다 상처가 거슬리는 성격인 듯하다. 벽에 난 상처 하나, 내 손에 난 상처 하나도 남편은 절대 그냥 넘기는 법이 없다. 

"그런 조그만 상처 하나에 신경 쓰는 거, 좀 한심한 거 아냐?" 

어느날 나는 그렇게 지적했다. 

"살다보면 물건이든 사람이든 상처가 나잖아. 피할 수 없는 거잖아. 그보다는 지저분한 것에 신경을 쓰는 편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상처는 없앨 수 없지만, 지저분한 것은 치울 수 있으니까." 

"무슨 말씀!" 

남편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지저분한 거야말로 피할 수 없지. 그리고 치울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치울 수 있으니까 그냥 놔두는 거야. 하지만 상처는 피할 수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거지." 

그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사람은 저마다 (같이 사는 경우에도) 어쩌면 이렇게 생각이 다를까. 

"상처야말로 피할 수 없는 거지. 갑자기 생기잖아." 

나는 그렇게 주장했다. 

"생활하다 보면 이래저래 상처를 입잖아. 벽도 바닥도, 당신도 나도."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서, 왠지 슬퍼지고 말았다. 

 (77-79쪽)

                                          

                                         

  나도 여태껏 에쿠니 가오리와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불현듯, 저자의 남편의 생각에 훨씬 공감된다.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 에쿠니 가오리 / 소담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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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7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5-28 06:45   좋아요 0 | URL
고쳤어요. 아유, 심장이 그러니 손가락도 말을 잘 안 듣네요.
그렇더군요. 그녀, 64년생, 얼굴처럼 상큼하더군요.
때론 아니 자주 우리 삶에 필요한 것도 가벼움의 미덕이란 생각이 들어요.
진지함이 담긴 가벼움이요!

다락방 2009-05-2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픔과 안타까움의 바로 곁에도 이렇게 작은기쁨과 웃음이 함께 있는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이에요, 프레이야님.

프레이야 2009-05-28 15:42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고마워요.
오늘도 이리 가슴이 조이고 아픈데 또 좀 나아지겠지요.
 

 지난 주 금요일오후, 노 전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놓기 하루 전날 낭독한 부분이다. 지금의 상황에 와닿는 부분이 있어 옮겨둔다. 

-------------

 

기릴 만한 가치가 있는 정치적 업적을 수행할 능력을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어로 '비르투Virtu'라 부른다. 이 단어는 라틴어 '비르투스Virtus'의 이탈리아어 형태다. 우리말로는 통상적으로 이 개념을 '덕'으로 번역하고 '도덕적 올바름'으로 이해한다. 

정치적 세계에서 인간의 무력함은 충격적인 현상에서 드러난다. 즉 어떤 정치가가 중요하면 할수록, 그 정치인이 더 많은 '비르투'를 가지면 가질수록, 그는 더욱 더 실패할 위험이 크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점을 통찰하고는 왜 그런지를 설명한다. 모든 위대한 정치가는 계획을 관철할 수 있게 하는 어떤 가정을 갖고 있다. 이것은 특정한 지도 이념이거나 어떤 성질일 수 있다. 이 성질들은 자연이 그 정치가에게 부여했거나 그가 획득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일류 정치가는 유리한 기회와 위험천만한 상황들을 일찍 알아차려야 하고 단호하게 이용해야 한다. 그의 영리함은 단순한 적응 능력으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제한된다면 그는 곧장 기회주의자가 되어 신뢰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정치가는 반드시 강인한 끈기가 필요하다. 어떤 정황에서도 근본적인 이념과 성질을 견지해야 한다. 그의 성공은 이에 힘입은 것이다. 

그렇지만 언젠가 바로 이 이념과 성질이 일반적인 정치적, 문화적 조건과 더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념과 성질이 마키아벨리의 표현대로 하면 '시대상황'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치가는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항상 자신의 성공을 이끌었던 태도의 구성 요소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 정치가에게는 확실히 부조리하게 보일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 상황은 이 정치가에게 이를 요구한다. 그래서 이 정치가의 실패는 불가피하다. 우리 역시 전혀 다른 내력을 지닌 정치가들에게서 이런 점을 보아왔다. 고집불통 호네커(1912-1994)를 두고 고르바초프가 만들어낸 유명한 문장 "너무 늦게 오는 자는 삶의 벌을 받는다."는 마치 마키아벨리가 한 말처럼 보인다. 

언제, 어떤 정황에서 한 정치가의 삶에서 지금 묘사한 상황이 생겨날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우리를 그런 비극적 상황들로 몰아가고 그것의 주인이 될 수 없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마키아벨리는 이 보이지 않는 힘을 옛 로마식 단어로 '포르투나fortuna'라고 부른다. 

'포르투나'는 행운이지만 우연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상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기분에 따라 변덕이 심한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는 전체 르네상스 시기에 걸쳐 '비르투'의 놀라운 창조적 의지의 힘이 그 한계를 보일 때 일어나는 어떤 느낌에 대한 명칭이다. 마키아벨리는 비로소 이 느낌을 정치적 실패가 불가피하는 데 대한 냉정한 분석으로 전이시켜 놓았다. 이 불가피성에 대한 통찰이, 마키아벨리를 마찬가지로 르네상스에서 시작한 근대의 정치적 진보낙관주의로부터 지켜낸다. 아마도 오늘날 우리는 이 지점에서 마키아벨리로부터 가장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지중해 철학기행, 중 p544-547 중략 발췌 


 클라우스 헬트 지음 / 효형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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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09-05-28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 노무현 대통령님.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 인간 노무현으로서의 '어떠한 부분'이 그의 정치적 실패를 가져왔던 것일까요. 아님, 흔한 말대로 주위상황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요..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란 건 잘 알지만, 자꾸 묻게 됩니다. 그가 정치적으로 성공했으면 어땠을까.
故 노 대통형님의 하신 말 중에 그런 부분이 있었죠. '운명이다' 이 글을 읽고 보니 자꾸 질문을 하게 되네요.

프레이야 2009-05-28 15:44   좋아요 0 | URL
정치가는 실패가 운명적인 것이라는 말인데, 과연 성공했으면 어땠을까를 상상해보면
멋진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아니구요. 자꾸 묻게 되는 게 바람직한 현상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서 자유롭고 올바른 자세를 견지한다는 스토아사상은, 정치적 좌절과 그 밖의 모든 불행에 처할 때마다 그들의 마지막 위안이었다.  

동일한 정신에서 철학은 고통받는 보에티우스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네가 깊은 수렁에 빠졌다고 한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너는 출세와 성공에 매달리지 않았는가. 그것은 네 삶을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의 손에 맡긴 꼴이다. 행운의 여신의 본질은 성공과 좌절, 존경과 경멸, 즐거움과 괴로움의 오르내림이다. 네 삶은 행운의 여신이 지닌 수레바퀴와 같아서 끊임없이 돌아가면서,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올라가고 내려간다. 자신의 삶을 행운의 여신 손에 맡긴 사람은 갑자기 나쁜 일이 일어나도 놀라거나 한탄해서는 안 된다.  

행운이 여신이 다스리는 세계에서는 근본적으로 참된 행복이란 찾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한다. 행운의 여신의 왕국에서 행복을 찾는 이에게는 믿을만한 안식처가 없다. 행복에 이르는 가장 좋은 처방은 이렇다. 오로지 영혼의 내면에 들어있는 본래의 집,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가라! 

- <지중해 철학 기행> , 클라우스 헬트, 효형출판 (449-4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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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에티우스는 행운의 여신에게 얻는 재물이 진정한 행운의 선물이 되지 못하는 까닭을 묻는다. 철학의 대답은 재물이 인간의 기대를 채워주지(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원하는 재물이란 삶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것, 곧 善이다. 그것은 다섯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1,자족(충만) - 2,힘(지배력) - 3,존경(사회적,정치적 지위 등으로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는 방식) - 4.영광(신체적 장점 등으로 자신의 존재가 어둠이 아니라 환한 빛을 받고 감탄의 대상이 되는 방식) - 5, 편안함, 기쁨, 존재의 즐거움(육체적 쾌락)  그렇지만 이 다섯가지가 인간이 소망하는 것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인간이 소망하는 것은 지속적이고 완전하며 안정적인 삶의 성취를 보장하는 것, 곧 '선'이기 때문이다. 잡다한 것에 부산떨지 않고 보다 나은 가치를 위해 묵묵히 걸어가야겠다. 가다보면 어느새 그만 가야할 때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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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09-05-23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잡다한 것에 부산떨지 않고 보다 나은 가치를 위해 묵묵히 걸어가야겠다."
마음에 와 닿는 말입니다..

프레이야 2009-05-25 19:59   좋아요 0 | URL
턴님은 그렇게 보입니다. 묵묵히요..

하늘바람 2009-05-2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삶은 행운의 여신이 지닌 수레바퀴와 같아서 끊임없이 돌아가면서,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올라가고 내려간다. 자신의 삶을 행운의 여신 손에 맡긴 사람은 갑자기 나쁜 일이 일어나도 놀라거나 한탄해서는 안 된다.

프레이야 2009-05-25 20:01   좋아요 0 | URL
행운의 여신에 기대어 살아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드는 순간
삶이 좀더 나아질까요? 힘들어질까요?
저도 그 문장이 제일 와닿았어요.

하늘바람 2009-05-2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위의 문장이 인상깊어요

맥거핀 2009-05-28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때 술만 먹으면 '나는 참 즐겁고 싶다' 늘상 그랬었죠.
그리고 즐겁고 싶다는 핑계로 해야할 일들을 많이 안하기도 했구요.

지금은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그런 말 못하기도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어요. 그때 그런 '즐거움' 또는 행복'이란 걸 방패삼아,
참 여러가지를 안하려고 살았던 건 아닌지. 그게 일종의 자기합리화의 수단이 아니었던 것인지..

아이고..참 맥락없는 댓글이군요. 죄송합니다.

프레이야 2009-05-28 17:18   좋아요 0 | URL
즐겁고 싶다, 그건 행복하고 싶다와 동의어로 들려요.
행복하려면 해야될 일보다 안 해야될 일이 더 많은 게 맞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해야될 일과 안 해야될 일 사이에서 방황과 갈등을 하는 게 또 우리 사람이지만
의지의 문제겠지요. 제게도 그게 난제입니다.
맥락없는 댓글!, 그거 전 좋은데요.
 

내가 부러워하는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달리기 잘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춤을 출 수 있는 것.  나는 숫기가 없는 편이라 무대에 서는 걸 잘 못한다. 무대에 오르면 다리가 후덜거리고 눈앞이 아득하다. 작년부터 수필낭송회에서 활동하며 작은 무대에 몇 차례 서곤 했지만 어지럽고 휘청거리는 걸 견뎠던 것이다. 표현력도 부족한 부끄럼쟁이가 뭐하러 그런 걸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생각을 요즘 하게 된다. 내 선의와 열심이 어이없게도 남에겐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과시욕은 인정하지 않고 내가 드러나는 걸 마뜩치않아 하는 사람의 말도 내겐 스트레스다. 난 그저 조용히 혼자 소리내어 읽는 게 적성에 더 잘 맞다. 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삼천포로 빠졌다. 아무튼 무대체질은 아니란 얘긴데 내면엔 무대에 오르고싶은 욕구가 잠재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런 허영기, 조금은 가지고 있을 거다. 춤 얘기 하다가 삼천포로 빠진 이유는 '무대' 때문이다. 한마디로 무대체질은 아니란 말.

아무튼 난 온몸으로 우는 춤사위를 보면 전율이 인다. 언젠가 전생테스트를 재미삼아 해 본 적이 있다. 전생에 무희였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그래서 그 이후로 전생 얘기가 나오면 나는 무희였더라고 말하곤 한다. 내 속의 감춰져있는 끼와 에너지가, '무희'라는 말 하나 떠올렸을 뿐인데도, 폭발할 것 같아 짜릿해지는 것이다. 그리곤 행복한 상상을 하곤 한다. 특히 나는 부르카 속의 아라비아 여인, 아니트라가 되어 상상의 춤을 추는 꿈을 꾸어보기도 한다. 음악회에서 '아니트라의 춤'을 들으며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정말 무희였다면 이생에서 난 왜 그렇게 춤이 안 되지? 하다못해 재즈댄스도 에어로빅도 조금하다 그만 두었던 전례가 있다. 전생과는 반대로.. ^^   

무희의 꿈! 그저 꿈일 뿐이지만 그래서 난 무용수들을 보면 한없이 부럽고 탄성이 나온다.  

희령이와 친구 둘을 데리고 부산시립무용단 제60회 공연 <연산, 동백꽃 붉은 눈물이 되어>를 보러갔다.    



 

객석은 꽉 찼고, 학생들의 공연예절은 말이 아니었다. 막이 올랐는데도 웅성거리고 무용보다는 문자질에 열중하며 떠들고.. 그래도 차츰 몰입할 수 있었던 건 화려하거나 단조로운 무대미술과 한국미에 현대적으로 해석된 멋진 의상, 무용수들의 열정적인 몸짓 때문이었다.  연산이 고뇌로 몸부림치는 격정적이면서도 섬세한 몸짓에 가장 몰입되었다. 우리네 감정 중 즐거움도 그렇겠지만 괴로움이야말로 특히 저렇게 몸으로 요동치며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웅장하고 감각적인 음악도 한 몫을 하였다.  프롤로그와 5장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된 내용을 팜플렛에서 미리 조금 읽혀두고 무용을 보게 했다. 그래도 다보고 나오며 희령이 친구 하나가 하는 말 "대사가 없으니까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어요." - "괜찮아 보고 느꼈으면 됐지."

 

   
 

<안무 의도>  

 서른...  제왕이었으나 역사에서는 버림 받고... 군주였으나 시대에 의해 지워져 버린... 그 서른이라는 짧은 나이에... 마치 동백꽃처럼 붉은 꽃잎을 후드득 땅에 떨구었던 연산을 그린다. 수많은 피를 바람처럼 몰고 다녔고, 그래서 폭군의 상징으로 후대에 회자될 수밖에 없었던 그에 대한 수많은 이미지들을 떠올리며, 회환과 절망과 통탄의 눈물을 흘렸을 인간 '연산'을 그리고자 한다. 근자에 들어 연산은 통념적인 이미지가 아닌 다른 인물이었을 수 있다는 학계의 연구 결과물들이 세상 밖으로 그 모습을 내밀고 있고, 그 시점에 맞춰 무대에 '연산'을 올리게 됨 또한 다행스레 생각한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관료 세력과 격렬하게 충돌했고, 급진적인 변화를 시도하다 기득권과 마찰을 일으켰으며... 왕권강화의 지나친 집착이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임금이었으나 임금이 아니고... 영국안민(寧國安民)...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추구하기도 하였으나 폭군으로만 후세에 전해질 뿐인 인간 '연산'을 찬찬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 부산시립무용단 예술감독 겸 수석안무자 홍기태 

 
   

 

prologue  회한을 보듬다  (연산의 회상과 맞물려 폐비 윤씨의 죽음을 상징으로 함)

제1장      역사, 그리하여  (연산의 왕위 등극과 안정된 치세, 평화로운 서정을 중심으로 구성됨) 

제2장     시. 시와 여인 (인간 '연산'에 대한 성찰. 왕권강화를 빌미로 臣權과 마찰이 생기기 전의 연산은 시와 풍류를 즐겼으며, 가장 사랑했던 여인 '녹수'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맞이한다)    

제3장     비운의 함구령 (반목과 대립. 왕의 지위에 쉼없이 도전 받던 연산에 대한 고뇌에서 출발하여, 폐비 윤씨의 사건을 접한 후, 파괴되고 함몰해가는 자아에 대한 구체적이며 섬세한 묘사) 

제4장    폭정. 폭정과 사화 ( 희생자의 규모 뿐 아니라 그 형벌의 잔인함에서 가장 끔찍하고 처참한 사화로 기록된 갑자사화에 대한 묘사)   

제5장    연산. 연산의 눈물 (연산의 회한과 중종반정에 의해 강화도로 유배되는 고초에 대한 이미지) 

epilogue  폐왕 (130여 편의 시를 남긴 연산군은 30세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500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와 드라마, 소설의 화두가 될 만큼 연산군의 실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셈이다. 이 scene은 그런 연산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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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하나의 이미지로 시작해서 그 이미지로 이어지며 끝을 맺었다. 시종 붉은색 이미지는 이어진다. 사모, 사랑, 정열에서 피와 눈물로 그리고 사멸하는 동백꽃잎으로... 연산이 폐위 직전에 쓴 詩를 덮고 있던 붉은 동백꽃잎들이 한 장 한 장 떨어져 내리는 장면이 길게 이어지고 막이 내렸다. 정염과 분노의 눈물로 그려진 붉디 붉은 색감이 추락과 소멸의 이미지와 더불어 강렬했다. 마치 묘비석을 덮은 이슬이거나 먼지이거나 눈물이거나 바람 몇 줄기이거나...   

희령이랑 아래 시를 읊조리며 나왔다. 의미를 알겠다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 통통공주^^ 공연 오기 직전에, 처음 친 토익 점수 성적표를 받아봤는데 625점 나와서 지금 자신감 충천이다. 아자아자! 990만점에 도전해보고 싶어하는 애살맞은 여우.^^ 엄마에겐 네가 또 하나의 힘이고 위로다. 고마워.

 

人生如草露 (인생여초로)  

會合不多時 (회합부다시)  

인생이란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아 

만나고 또 만나는 날이 많지 않으리  

                  - 폐위 직전 쓴 연산군의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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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9-05-22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연산군 이야기였군요. 웅장했을듯.
저두 막연히 춤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이 있답니다.
고등학교때 지젤을 보고는 제가 무대에서 공연하는 듯한 착각을 할 정도로 흠뻑 빠졌던 기억이. ㅎㅎ

프레이야 2009-05-22 09:13   좋아요 0 | URL
세실님, 님도 춤에 대한 동경 그런 것 있으시군요.
이 공연, 참 좋더군요. 여러가지 장치와 상징과 이미지들이 몸짓과 함께요.
다음에도 종종 무용공연 보러 가자고 아이랑 약속했어요.
지젤, 저도 고등학생 때 처음 봤어요. 그때 무용샘이 발레전공자였거든요.
그 잔상이 아련히 떠오르네요.^^

꼬마요정 2009-05-22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가 멋있네요~~
개인적으로 연산군과 광해군을 좋아하는터라..(흑흑 제게 반골 기질이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중학교 때 연극영화감상반인가 뭔가 선택했더니 매달 토요일마다 이리저리 많이 보러다녔는데, 그 때 현대무용을 처음 봤어요~ 무용수가 표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 춤사위는 정말 멋있더라구요.. 사람이 아니에요~~ 연체동물이었어요~~~ 부산문화회관에서 한다는 거 보니 저도 가 보고 싶네요~^^

프레이야 2009-05-22 11:14   좋아요 0 | URL
이크, 요정님, 어제 끝나버렸어요.ㅠ
역사의 패자입장에서 승자의 기록으로 남다보니
인간적인 연민이 많이 가는 인물들 중 하나라 팬이 많지요.
저도 현대무용을 많이 접해본 건 아니지만 연체동물 ㅎㅎ
제게도 선망의 대상이에요.

꼬마요정 2009-05-22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어제로 끝났군요 ㅠㅠ

마노아 2009-05-22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의 연산군은 그럼 무용수겠군요. 포스가 압도적이에요. 무희 프레이야님, 문득 리진이 떠올랐어요.^^

프레이야 2009-05-22 11:17   좋아요 0 | URL
네, 신인이라고 해요. 여윈듯 탄력있는 몸매더군요. 날아오르고 구르고 뒤집고 웅크리고..
장녹수와의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선 나비처럼 가벼운 듯 농염하기도 하구요.
우힛~ 무희라 불러줘서 기분 좋아요.^^

Alicia 2009-05-22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나중에 무용이나 연극에 관한 논문을 하나 쓰고 싶어요.
사실 무용에 관해서 지금은 잘 모르는데, 그러니까 앞으로. :)
문득 시를 읽는 순간 연산은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두려움은 자주 폭력으로 나타나니까요..
잘 지내시죠? ^^

프레이야 2009-05-22 20:03   좋아요 0 | URL
네^^ 알리샤님^^ 앞으로 그런 쪽 논문 꼭 쓰시길요.
연산이 저런 시를 전해지는 것만해도 130편을 썼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의 내면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어요. 자신에 대한 두려움,
나약함이 오히려 적개심과 폭력으로 나타난다는 생각에 동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