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선적으로 말하긴 어폐가 있지만, 사람마다 쌓였던 울분과 슬픔이 어떤 계기로 함께 폭발하는 경우가 바로 요즘이다.  그래도 세상은 굴러가고, 굴려가야하고, 밥을 먹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하고, 배설을 해야한다. 눈물도 배설의 방편이 된다면 그래서 속이 다 후련하도록 모조리 쏟아내어 내다버릴 수 있다면... 소통은 역시 어렵고 뒷끝에는 늘 허무함과 외로움만 남는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르지 않는 마음일 거라 위로하고, 독선과 위선의 옴팡한 구멍에 빠지지 않기를 경계해본다. (생전에 언론을 살짝 비꼬는 말이었지만) 말조심하겠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등 망자가 남긴 어록 중에서 짧게 치고 들어오는 말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요즘이기도 하다.

오늘 내게 주어진 시간표대로 역시 녹음낭독을 하러갔다왔다. 마음 심란했지만 집중하여 글을 읽는 순간에는 다른 생각이 범접하지 못한다는 장점을 오늘 난 선용한 셈이다. 두꺼운 분량의 책 '지중해 철학기행'을 끝내고 새 책을 시작했다. 앞엣 것이 딱딱한 내용에다 어려운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 단어가 자주 나와 신경써서 발음하느라 턱이 무척 아팠다고 하니까 녹음실의 착한 두 아가씨가 "벌써 또 끝냈어요?"라며 웃어준다. 세상의 이치이기도 하지만, 슬픔과 안타까움의 바로 곁에도 이렇게 작은기쁨과 웃음이 함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쓴웃음이라 해도.

오늘 시작한 책은 좀 가볍고 말랑말랑한 책이라 금방 끝날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그녀의 소설은 한 권도 읽어본 게 없다. 아무튼 이 책의 원제는 '하찮은 것들'이다. 작가가 살아오면서 좋아하는 하찮은 것들을 소재로 여러 꼭지로 짧게 나눠 적은 가벼운 에세이류다. 그리 문학성 높은 것도, 그리 뛰어난 문장이나 깊은 사유의 맛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간혹 아래와 같은 내용처럼 뒷통수를 살짝 치는 대목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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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종종 상처를 낸다. 온갖 곳에다. 

예를 들면 페달을 밟으면 뚜껑이 열리는 쓰레기통, 뚜껑을 열 때마다 뒤쪽에 붙어있는 스프링이 벽에 상처를 낸다. 쓰레기통이란 대개 벽에 붙여놓게 마련이라, 벽을 보호한답시고 방 한가운데 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리고 사다리. 부엌의 높은 찬장에서 물건을 꺼내거나 전구를 갈아 끼울 때, 계단 위에 있는 창문을 닦을 때는 사다리가 필수품이다. 그런데 사다리는 크고 무거우니까 들고 다니다 보면 떨어뜨리거나 어디에 부딪치기 십상이다. 계단 모퉁이나자신의 무릎에. 

그런 상처에 관해서 나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내가 낸 것이든 남편이 낸 것이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저분한 것과는 다르니까. 

그런데 우리 남편은 정반대다. 저저분한 것보다 상처가 거슬리는 성격인 듯하다. 벽에 난 상처 하나, 내 손에 난 상처 하나도 남편은 절대 그냥 넘기는 법이 없다. 

"그런 조그만 상처 하나에 신경 쓰는 거, 좀 한심한 거 아냐?" 

어느날 나는 그렇게 지적했다. 

"살다보면 물건이든 사람이든 상처가 나잖아. 피할 수 없는 거잖아. 그보다는 지저분한 것에 신경을 쓰는 편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상처는 없앨 수 없지만, 지저분한 것은 치울 수 있으니까." 

"무슨 말씀!" 

남편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지저분한 거야말로 피할 수 없지. 그리고 치울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치울 수 있으니까 그냥 놔두는 거야. 하지만 상처는 피할 수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거지." 

그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사람은 저마다 (같이 사는 경우에도) 어쩌면 이렇게 생각이 다를까. 

"상처야말로 피할 수 없는 거지. 갑자기 생기잖아." 

나는 그렇게 주장했다. 

"생활하다 보면 이래저래 상처를 입잖아. 벽도 바닥도, 당신도 나도."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서, 왠지 슬퍼지고 말았다. 

 (77-79쪽)

                                          

                                         

  나도 여태껏 에쿠니 가오리와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불현듯, 저자의 남편의 생각에 훨씬 공감된다.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 에쿠니 가오리 / 소담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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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7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5-28 06:45   좋아요 0 | URL
고쳤어요. 아유, 심장이 그러니 손가락도 말을 잘 안 듣네요.
그렇더군요. 그녀, 64년생, 얼굴처럼 상큼하더군요.
때론 아니 자주 우리 삶에 필요한 것도 가벼움의 미덕이란 생각이 들어요.
진지함이 담긴 가벼움이요!

다락방 2009-05-2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픔과 안타까움의 바로 곁에도 이렇게 작은기쁨과 웃음이 함께 있는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이에요, 프레이야님.

프레이야 2009-05-28 15:42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고마워요.
오늘도 이리 가슴이 조이고 아픈데 또 좀 나아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