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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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 엄청 감상적인 주제에, 소설가  윤대녕의 감상주의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예를 들어 패션에 대한 너무 세세한 묘사와, 그림이나 음악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소설 속에 걸핏하면  등장시키는 짓이 점잖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쓸쓸함도 어쩐지 포즈 같았다.
지나치게 우연이 남발하고 폼만 잡는 것으로 보이는 연애 행각도 시덥잖았다.
윤후명의 초기 소설에 열광하다가 어느 때부턴가 그의 소설이라면 아예 읽지도 못하게 된 것처럼
윤대녕의 소설들도 내게 그랬다.

<제비를 기르다>는 십여 년 만에 읽는 윤대녕의 소설집인데
맨 앞의 '연'부터  매력적이고 분위기 있는 단편들이 몇 눈에 띈다.

북한산 초입의 노천식당에서 등산을 마치고 혼자 두부김치와 막걸리를 마시던 '나'는
구멍가게에서 생수를 사고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한 여성(정연)과 시선이 마주친다.
장사가 안 되어 문을 닫기 직전인 백마의 한 주점에서 함께 술을 마셨던 게 6년 전.
그때 그 주점의 주인이었던 친구와, 함께 술을 마셨던 정연의 언니 미선은 건대사태 때
함께 구속되었다 풀려난 친구 사이.

그로부터 얼마나 세월이 흘렀나.
그들이 가는 인사동의 술집이며 광화문의 밥집이며 야반도주로 살림을 차린
절 밑 동네 진관외동의 허름한 골목이 어느 시절 나의 동선과 거의 비슷하게 겹친다.
여차하면 술판으로 변하는 '상회'라는 이름이 붙은 가게의 평상만큼
거나하고 좋은 술자리를 나는 알지 못한다.
스니커즈를 벗고 운동화를 꺾어 신은 소설가가, 그 평상 한 귀퉁이에 궁둥이를 걸친 느낌.

해마다 제비들이 떠나고 첫눈이 내릴 때쯤이면 입은 옷대로 가출,
돌아오면 뒤란 헛간 속으로 끌려가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게 연례행사인 어머니.
그 어머니를 닮은 듯한 애인의 이야기 '제비를 기르다'는
이 소설가의 18번 철지난 유행가를 듣는 느낌이었고.
(그의 여성관은 내 눈에 고루하고 진부한 감이 있다.)

'연애'가 중심이 아니고, 존재의 시원(始原)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가는 각자의 구체적인 쓸쓸함에 방점이 찍힌  이번 그의 소설들은 꽤나 재미있게 읽힌다.
여주인공들의 미모와 개성도 묘하게  조정되어 리얼리티를 획득하고 있고.

'남과 대면할 때는 방금 익모초즙을 마시고 나온 듯한 얼굴'로,
'누구한테나 남이었고 어쩌면 자신에게조차 평생 남으로 살아온'  윤대녕 소설의 주인공들.
서먹한 얼굴의 그들이 오늘은 정답다.

중국의 비단길을 함께 여행하고 온 무리가 광화문에서 오랜만에 만나 맥주를 마시는데
각자 사진을 교환하고 맥주 두어 잔을 마신 후 훗날 또 만나자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긴 채
뿔뿔이 흩어진다.

--고작 이건가? 그 추운 사막의 먼짓구뎅이에서 보름을 함께 지냈건만 그래,
두 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다들 허둥지둥 내뺀단 말인가
?('낙타 주머니'  198쪽)

이상하게 나는 이런 사소한 구절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다.
옛날 옛날 최인훈의 소설 구보 씨의 이런 독백에도 좍좍 밑줄을 그었던 기억.

--의사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고의적으로 무의식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심리적인 이유야 각기 다르겠지만 개중에 그런 환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편백나무숲 쪽으로 160쪽)

병상에 누워 고의적으로 무의식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라니
'고의적인 무의식 상태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고독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라고 말하려는데, 가슴 철렁하게도 뭔가 짚이는 것이 있다.

--삶을 완수하는 방식이 저마다 다르다는 건 얼마나 갸륵하고 오묘한 사실인가.('고래등', 188쪽)

윤대녕의 소설이 이렇게 다르게 다가오다니,  이것도 세월의 선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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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7-02-02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윤대녕 소설집을 읽으셨군요. ^^;

에로이카 2007-02-02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친구들이랑 남도여행을 다녀온적이 있었어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고 해남, 땅끝, 고창을 둘러보며, 유홍준 선생이 책에 소개한 화려한 풍광과 맛집들에 감탄한 후, 완도 쪽으로 방향을 잡고 윤대녕의 '천지간'에 나오는 구계등에 갔었지요. 소설들에서 상점이나 술집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한동안 유행했었잖아요?.. 윤대녕이 거기 한 몫 한 것 같긴 해요.. 어쨌든 구계등 풍경은 괜찮았으나, 그가 거기서 소개해놓은 횟집을 겸하는 여관은 그저 그랬어요... 유홍준 선생 책들에 나오는 집들은 정말 맛있었는데, 윤대녕 글빨에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하긴 천지간 소설에 그집 음식맛이 훌륭하다는 말은 없었지요... 헤헤..

waits 2007-02-02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받아놓고 며칠째 아쉽게 표지만 쳐다보고 있는데, 벌써 읽으셨군요.
게다가 좋다는 말씀이시라 더 반가운 걸요!
급한 일 끝나면 저도 '택일'해서 읽어야겠어요. ㅎㅎ

2007-02-02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2-02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편한 느낌 님, 아까 급히 써서 올리느라(주하와 약속한 시간이 되어ㅠ,.ㅠ)
표현이 거칠었답니다. 빼먹은 구절도 있고요. 다시 읽어주시길! 헤헤~
몇 단편은 참 재밌게 읽었답니다.
스니커즈와 운동화가 쓰면 느낌이 참 다르잖아요.
그런데 어쩐지 운동화를 꺾어서 신은 모습으로 다가왔어요.
아마 그동안 이 작가의 소설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세월의 선물은 제가 보내드릴게요.

평택, 나어릴때 님, 안 그래도 이 책 받고 님은 사셨을까 궁금했는데.
이번 주말이나 다음 주말 중 택일하여 읽으시고 리뷰 올려주셔요.ㅎㅎ
궁금합니다.^^


에로이카 님, 저는 수덕사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읽고.
땅끝마을이나 다산초당도 빠트릴 수 없네요.
윤대녕의 '천지간'은 저도 재밌게 읽었어요.
맛집이나 술집이 세세하게 묘사되면 글이나 화면이 갑자기
생생하게 살지 않아요?
그 냄새와 소음까지 그대로 들려오는 듯하고요.
밥집과 술집이라면 눈을 빛내는 에로이카 님이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요.^^

하루 님, 윤대녕 하면 또 하루 님이 떠오르지요. 헤헤~


건우와 연우 2007-02-02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너무 미끈하고 감상적인것 같아 자꾸만 꺼리던 윤대녕의 신간이 나왔단 기사를 신문에서 보고, 젊고 재능있는 작가들 이름사이로 이젠 그의 작품이 저도 반가워지기 시작하더군요.
로드무비님의 리뷰를 보니, 이젠 읽어야겠구나...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드무비 2007-02-02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 님, '연'은 정말 좋았어요.
진관외동의 허름한 길가 셋방 묘사에 자지러졌답니다.
아마 님도 그러시지 않을까.^^

2007-02-02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2-0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핫, 전 별 다섯 개 님,
저도 재밌게 읽었는데요, 갑자기 별 다섯 개를 주려니
뭔지 낯간지러워서......
(이런 걸 이른바 본처기질이라고 하던가?ㅋㅋ)
옷, 그분들, 안목이 보통 아니군요.
즐거운 소식입니다.
가끔 속삭여 주세요.^^

2007-02-02 1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2-02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향'이라는 표현이 여성의 외모를 내맘대로 재단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암튼 샤프하시다니까요.^^

2007-02-03 0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2-05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성이 산들산들 님, 절로 몰입이 되던데요?
아마 님도 펼치기만 하면 즐기실 수 있지 않을까.
작가도 작품도 만나는 때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2007-02-06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2-06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달래 2007-02-06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책읽기... 반갑습니다~ 재밌게 읽은 것도 비슷하나 리뷰 느낌은 사뭇 다르네요. 님의 시각이 참 흥미롭습니다. 은근히 윤대녕의 무덤덤한 매력을 닮은 듯도... ^^ 윤대녕에게도 우리에게도 세월의 선물 같아요...

로드무비 2007-02-1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페인 님, 무덤덤한 매력은 제가 갖고 싶은 것인데, 하하.
카페인 님을 윤대녕의 리뷰로 만나는군요.^^
 
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 나남포에지 1
김영승 지음 / 나남출판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가난'과 '술'이 이름 앞에 늘 따라다니는 시인 김영승.
제목에 이끌려 진작부터 사고 싶었던 그의 시집을 이제서야 읽었다.
'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이라니, 그의 시 '극빈' 중의 한 구절이다.
 이문재의 해설을 보니, 이 시집 제목이 어느 날 자신에게 영감처럼 왔다고 한다.

김영승 시인은 自序에서 태어나 자신을 한 번도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데,
그의 친구들은 내내 지지리도 가난하고 사는 데 요령이라곤 없는 이 시인의 존재가
뭔지 미안하고 무거운 돌덩이처럼 가슴에 탁 걸렸던가 보다.

술취해서 자고 있을 때
부엌에서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뭐, 씹는 게 먹고 싶어서요..."

다락에 두었던
먼지 쌓인
어머니가 갖다주신
北魚를 방망이로 두들겨
뜯어먹고 있었다

이제 아내는
나와 함께 늙어
몸도 아프고

"그럼 오징어라도 사다먹지..."
말이 없었다.

"돈이 없어요."
(詩  '北魚'  중, 80쪽)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되어 몸이 허한 아내가 한밤중에 북어대가리를
뜯어먹고 있는 걸 본 시인은 그 아픈 마음을 시로 썼고,
이문재는 해설을 쓰기 위해 친구의 원고를 읽으며 이런 시를 볼 때마다
달려나가 술을 퍼마셨다고 한다.

시인은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인천광역시 문화상 시상식에 수상자의 신분으로 참석해서
진행자로부터 '奇人'이라고 소개를 받았나 보다.

奇人?  奇人이라고?
(......) 내가 어쩌다가 奇人이
되었을꼬... 나는 운다

Elephant Man처럼

사는 날까지 살자
죽는 날까지 살지 말고
(詩  '奇人' 중에서, 114쪽)

십몇 년 전, 천상병 시인 추모행사장에서 직접 만나본 시인은
누구보다 눈빛이 맑고 여리고 수줍은 사람이었다.
행사 후 원고 때문에 잠시 찻집에 들렀는데 우리는 차 대신 술을 한잔 마셨다.
일 관계로 만나면 밥값이든 찻값이든 담당자가 내는 건 세상의 불문율.
그런데 시인은 계산대 앞에서 어쩔 줄 몰라했다.
몇푼 안되는 돈이었고 경비로 처리하면 됐는데.
모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소한 일조차 그에게는 어색하고 죽을 맛이었나 보다.

-- 너무 오랫동안 무슨 마른 '北魚대가리'같은 삶을 살아서 그런지 어떤 부드러움,
부드러운 육체와 영혼과의 스킨십이 조금은 그리웠나 보다.
좌우지간 7년 만에 일곱 번째 시집이라니... 폐일언하고 눈물겹다.
시집을 냄으로써 나는 겨우 이런 式으로 내가 그리워(?)한 이 세상과의 스킨십을 할 뿐이다.
"잘 먹고 갑니다..."
음식을 먹고 각자 음식값을 지불하듯 이 地上에 머무는 동안 나는,
아니 나도 겨우 이런 式으로 스킨십을 하며 이런 式으로 더치페이를 한다.
나는 堂堂하다.(시집 앞의 自序 중에서)

이렇게 영롱한 글과 시들을 읽으며 세상은 왜 그에게 자꾸
'기인'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못해  안달을 하는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멀쩡하고 당당하다.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게 웃길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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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7-01-29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던 시인이라, 반갑게 보관함에 넣습니다.

로드무비 2007-01-2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 님께 다소간의 여윳돈이 생기기를!=3=3=3
시집이 좀 비싸죠?^^


건우와 연우 2007-01-29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써 세상에 내보내는게 시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더치페이라면 제 몫은 사서 읽는 것이겠지요.^^
꼭 사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보관함에 담으며 살펴보니 로드무비님 말씀처럼 좀 비싸긴 합니다.^^

로드무비 2007-01-29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 님, 그래도 전혀 아깝지 않답니다.^^
(댓글이 예술입니다그려.)

2007-01-29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1-29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들은 참 해맑더군요 님, 시인이라고 뭐 모두 그럴라고요. ㅎㅎ
해맑은 소설가도 있겠죠.
요즘 이모저모 바쁘시군요.
그 너구리굴 속에서 님의 화사한 자태가 빛났을 듯.^^

waits 2007-01-30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예요. 십 년도 더 전에 '아름다운 폐인'이었나... 무지 심란하게(?) 읽으며 어줍잖게 황폐의 공감에 빠졌던 기억이 나네요.
세상 팍팍해도 다들 제 나름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주제넘는 안심이 새삼.
로드무비님 아니면 시집 들춰 볼 일도 없는데 좋은 시, 시인 얘기 자주 써주세요.^^

로드무비 2007-01-30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택, 나어릴때 님, 맞아요, 그런 제목의 책도 있었죠.
제목이 좀 웃겼어요.
'황폐함'의 정서가 예전에는 매력적이었는데 요즘은 무서워요.
끝장과 바로 연결이 된달까.
나이 탓일까요......

님의 그런 안심은 절대 주제넘지 않습니다.
얼매나 미더운데요.^^

라로 2007-02-09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보는 반가운 <시>리뷰군요~.^^
소설 리뷰가 대세인걸 보면
시 읽기가 쉽지 않아서겠죠~.
느리게 음미하며 읽어야 하니,,,,그런 시간이 어딨어지요...
<너무 오랫동안 무슨 마른 '北魚대가리'같은 삶을 살아서 그런지 어떤 부드러움,
부드러운 육체와 영혼과의 스킨십이 조금은 그리웠나 보다.> 라는말에 괜시리 눈물지어지네요...

로드무비 2007-02-10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bi 님, 반갑습니다.
시집은 자주 읽는데 리뷰를 쓸만큼 흥이 나진 않아요.
북어대가리는 씹기보다 국물로 오래오래 우리는 게 훨 나은데 말이지요.^^
 
산 2
이시즈카 신이치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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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즈카 신이치의 만화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가벼운 만보객이 아니라
대부분 인생의 조난자들이다.
'조난'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사업에 실패했다거나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았다거나 하는 등의
극적이고 어마어마한 사연들의 주인공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 멀쩡한 얼굴로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눈앞이 아득해지며 길을 잃는다.

<산>의 주인공, 시마자키 산포는 일본 알프스 기슭에 천막을 치고 살며
조난자들을 구조하는 자원봉사가.
누구보다 산의 엄격함과 근사함을 잘 알고 있다.

젊은 날 그와 뜻을 함께했던 스캇이라는 친구는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 더이상  산에서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만은 없겠구나.
건강에 뭔가 이상이 온 것이다.
그가 산포에게 하는 말.

"이렇게 되고 보니까 알겠어. 낮은 산도 즐거웠다는걸!"

이기적으로 자신의 예술활동에만 매달리다 오래 전 아내를 떠나 보낸 화가는
어느 날 홀로 산에 오르며 중얼거린다.

"우리 둘의 로프를, 인연을 끊은 것은 나야. 그런데 산이 남아 있었구나!

그는 산의 정상에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무릎을 굻는다.

--산에 오기 잘했다.
산포를 만나 좋았다.

등반 중 길을 잃고, 미끄러져 떨어지고, 눈사태에 휩쓸리고,
피로동사(눈보라 속에 피로와 동사가 동시에 진행되는)를 하는 등
산에 오른 인간들의 갖가지 사연과 긴박한 에피소드에 빨려들어가
두 권을 단숨에 읽었는데.
2권 뒷표지의 헤드카피가 눈에 들어왔다.
산에 오기 잘했다, 산포를 만나 좋았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갑자기 이 텁수룩한 사내를 눈앞에서 실제로 만난 듯
가슴이 설레는 것이었다.

Visibility?
None.  Complete white - out.(2권 161쪽)

외국인 등반가나 친구들이 등장하여 대화를 나눌 때는 영어를 함께 실어
극의 리얼리티를 살린 것도 좋았다.

당신의 시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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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8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1-29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날 술이나 님, 실컷 마시세요.=3=3=3
그때그때 올인했던 순간들이 그나마 남는 건데요.
만화 읽고 좋아서 리뷰 썼어요.
이나마의 흥이 고갈되지 않기만 바란답니다.
님은 주말, 맘껏 청춘을 구가하셨는지?^^*

 
평양프로젝트 - 얼렁뚱땅 오공식의 만화 북한기행
오영진 지음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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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고 마른 오이 꽁다리같이 생긴 소설가 오공식이 남한의 작가 대표로 평양에 파견된다.
'북남교류협력단'의 총책임자로 오공식을 맞이하게 된 조동식과 노총각 김철수, 그리고
중학교 교원 리영희의 안내로 그는 평양에 머무르며 시민들의 생활상을 가까이서 취재하게 되는데.

자신의 희망사항을  만화로 설정한 오영진은 <평양 프로젝트>에서 생활 중심의
소소한 에피소드 별로 '있는 그대로'의 북한과 북한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하는데,
몇 년 전 경수로건설사업 건으로 북한에 파견되어 1년 넘게 신포에서 머무른 경험을 토대로 
더할 수 없이 사실적인 만화를 그렸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에 대표적인 부의 상징으로 '타워팰리스'라는 주거공간이 존재한다면,
평양에는 신흥부유층의 호화주거지로 '딸라 아빠트'가 있다.
오공식의 취재활동을 돕는 조동식은 퇴근 후 기세좋게 딸라아파트 앞에 내리는데,
바로 옆 장마당에 들러 아내의 부탁대로 콩나물, 둥근파 등의 남새(채소) 몇 가지를 산다.
저녁 반찬거리다.
장마당은 아파트 단지에 한 번씩 들어서는 알뜰시장 같은 것으로 짐작된다.
시장과 작은 교회가 있는 북한의 주택가 골목 풍경과 냄새를 상상해 본다.

북한에도 지역색이 존재하는데 함경도민은 좀 얄밉다고 하여 '정평 짜드라기' 또 잘 나선다고 하여
'찔락찔락'이라고도 하고, 평양 사람들은 타지역의 질시를 받는 편으로 깍쟁이라는 뜻의 '깜찍하다',
황해도는 성향이 좀 둔하고 게으르다 하여 '띵해도'라  한단다.
남한의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와 북한의 지역들을 의인화하여 나는 미팅 장소에 나온 처녀총각처럼
테이블에 마주보게 하고 사랑의 짝대기를 교차해 보았다.

북한에서 인기있는 신랑감 순서는 '군.당.대.기.실'이었는데, 여기서 '기'는 '5장 6기'라는 뜻으로
'5장'은 이불장, 양복장, 책장, 찬장, 신발장을 말하고 '6기'는 텔레비전 수상기 등 가전제품들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지금은 '현.장.대.기.실'로 바뀌었다니,
1위 '현'은 현물(외국돈),  '장'은 장사능력이다.
통일 후를 막연하게 생각하면 북한의 타락상(?)이 되려 반가웠다고 할까.

<평양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이 만화는 남한의 별볼일 없는 작가와
북한의 말단관리가 만나 간식으로 군고구마를 사다먹고 더러는 술잔을 기울이는 등의
소소한 풍경을 통해 북한을 보여준다.


"보라, 보라, 우리 영미 나왔다!"
"와 길케 느리배기를 부립네까! 날래 찍지 않구서리."(59쪽 '국제아동절')


남한으로 치면 어린이날 유치원의 재롱잔치에 참석한 북한 젊은 부부의 대화이다.
내가 정말 궁금하고 보고싶었던 건 우물쭈물하다가 딸아이의 멋진 포즈를 놓쳤다고 
아내에게 야단을 맞는 남편, 바로 그런 장면들이었다.
이 만화는 그런 장면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못 그린 기린 그림 같은 오영진의 그림과 
평양 에세이가  아주 잘 어울린다.



('꾹돈'은 '뇌물'을 뜻하는 북한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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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1-1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래 플레져동무와 로드무비동무 때문에 이 책을 꼭 봐야 되겠시요..~!
동무들 뽐뿌질에 내래 못살겠시요~

반딧불,, 2007-01-10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래 보관함이 넘쳐서리 죽겠시요!
추천을 무슨 수로 피해가나요~

산사춘 2007-01-10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무들 뽐뿌질에 내래 못살겠시요~ ------> ㅎㅎㅎㅎㅎㅎㅎ (정색하고) 맞습네다!
찔락찔락, 꾹돈... 내용과 상관없이 넘 어감이 좋네요.

sandcat 2007-01-10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꾹 질러줘서, 양심이 꾹 찔려서 꾹돈일라나요.
궁금하군요, 이 책.

2007-01-10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waits 2007-01-11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일 되기 전까지 북한의 '정감'은 좀 남아있어줬음 싶어요.
로드무비님 따라다니다가는 보관함에 책 담다가 파산할 듯. ㅎㅎ

로드무비 2007-01-1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어릴때 님의 리뷰 보고 산 책이 몇 권이더라?ㅎㅎ
사기사와 메구무의 책은 주문 직후 절판이라고 뜨더군요.
그런데 결국 받지 못했으니, 아쉽습니다.
이 만화 별 기대없이 집어들었는데 재밌게 읽었어요.^^

브루크너 님, 아침에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장바구니 내용도 닮아가는군요. 흐뭇.
그 청년 라이터가 있냐고 묻다니, 무지 재밌습니다.
피씨방 가고 싶네요. 컵라면 먹으러.
빨리 정상화되기를.^^

샌드캣 님, 아무도 모르게 꾹 찔러줘서 꾹돈이겠지요.
북한 말 참 재밌어요.
이상한 것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정겹죠.
맞선 보는 풍경 같은 것도 나오고 아조 재밌게 읽었습니다.^^


산사춘 님, 어감이 정답죠?
술집도 있고 시장도 있고 북한도 많이 달라진 듯해요.^^

반딧불 동무, 메피스토 동무, 내레 님들 땜에 웃습네다.^^

2007-01-14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14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17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26 0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성모의 곡예사
R. O. 블레크먼 각색 및 그림, 박중서 옮김 / 샨티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한 엉뚱한 소녀의 '예쁜 어린이 대회' 참가기 <리틀 미스 선샤인>을 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이 책을 읽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 건물 지하의 식품 매장에서
종무식을 마치고 한 시간쯤  일찍 퇴근한 남편을 만났는데
그의 손에 갓 나온 빵처럼 따끈따끈한 이 책이 들려 있었다.

새해를 코앞에 둬서 그런지 앞으로 사정없이 초라하게 늙는 일밖에
남은 게 없는 것 같아 서글펐는데
누군가로부터 몰래 쪽지를 전해 받은 그런 기분이었다.

-- 너만의 춤을 추어라. 아무것도 의식하지 말고......

그날 본 영화와 책의 한결같은 메시지!

거리 한 모퉁이에서 아무도 봐주지 않는 곡예를 펼치다가 늙고 지친 캉탈베르는 수도원에 들어갔다.
자신의 곡예가 언젠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진작에 무너졌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는커녕 그는 일생동안 단 한 명의 관객도 확보하지 못했다.

수도원에서도 무능하고 쓸모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과연 무엇으로 신께 영광을 돌려야 할까?

크리스마스를 맞아 수도원의 모든 형제들은 각자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성모 마리아께 바칠 선물을 마련하기에 바빴다.
누구는 책을 쓰고 누구는 조각을 하고 누구는 요리를 하고 누구는 시를 짓고
누구는 작곡을 하고 누구는 그림을 그렸지만 캉탈베르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본문)

기도문도 외우지 못하고 찬양도 못하고 주방 보조 일도 제대로 수행 못하자
함께 생활하는 수도사들이 투덜대기 시작하는데.......

<성모의 수도사>는 중세 유럽에 전해지던 민간전설로 아나톨 프랑스의 단편으로 유명하다.
1952년 책이 출간되었을 때,  <깊은 밤 부엌에서>의 작가 모리스 센닥이
그리니치 빌리지의 8번가 서점에서 이 책을 만난 날의 기쁨(그의 해설이 뒤에 실려 있다)이나, 
역자 박중서 씨가 용산역 근처의 헌책방에서 우연히 이 만화의 원서를 발견하고 가슴 두근거리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R. O. 블레크먼 특유의 꾸불텅한 선의 코믹한 그림과 군더더기 없는 짧은 글.
'일종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적절한 부제.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이 생이라는 무대,
변변한 대본도 없이 팔과 다리가 여전히 따로 노는 나의 막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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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7-01-09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지금 다진 마늘을 품은 제게 꼭 필요한 구절이네요 ㅎㅎ
춤은 잘 못추지만 일단 무대에 올라가면 숨은 끼가 나올지도 모르겠지요 ^^
리틀 미스 선샤인, 아우, 그거 꼭 보고 싶어요. 보고싶은데... 이놈의 게으름! ㅠㅠ

로드무비 2007-01-09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 님, 카메라 혹은 무대 체질이라면서요.ㅎㅎ
바쁜 일 마무리 잘하고 보러 가시기 바랍니다.
전 숨은 끼도 없어요. 흑=3

waits 2007-01-11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느끼는 신산함은, 항상 아련하고 그리운 느낌이예요.
쓸쓸하고 무력한 당사자가 되는 일에도 좀 용감해져야 하는데...
마음놀이는 열심히 하면서도, 현실이 될까 싶으면 무서워지더라고요. ^^

로드무비 2007-01-1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택, 나어릴때 님, 저란 인간이 워낙 신산스럽습니다.ㅎㅎ
저도 마음놀이로만 끝내고 싶어요.
이 이상 쓸쓸하고 무능해지면 곤란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