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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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 엄청 감상적인 주제에, 소설가  윤대녕의 감상주의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예를 들어 패션에 대한 너무 세세한 묘사와, 그림이나 음악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소설 속에 걸핏하면  등장시키는 짓이 점잖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쓸쓸함도 어쩐지 포즈 같았다.
지나치게 우연이 남발하고 폼만 잡는 것으로 보이는 연애 행각도 시덥잖았다.
윤후명의 초기 소설에 열광하다가 어느 때부턴가 그의 소설이라면 아예 읽지도 못하게 된 것처럼
윤대녕의 소설들도 내게 그랬다.

<제비를 기르다>는 십여 년 만에 읽는 윤대녕의 소설집인데
맨 앞의 '연'부터  매력적이고 분위기 있는 단편들이 몇 눈에 띈다.

북한산 초입의 노천식당에서 등산을 마치고 혼자 두부김치와 막걸리를 마시던 '나'는
구멍가게에서 생수를 사고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한 여성(정연)과 시선이 마주친다.
장사가 안 되어 문을 닫기 직전인 백마의 한 주점에서 함께 술을 마셨던 게 6년 전.
그때 그 주점의 주인이었던 친구와, 함께 술을 마셨던 정연의 언니 미선은 건대사태 때
함께 구속되었다 풀려난 친구 사이.

그로부터 얼마나 세월이 흘렀나.
그들이 가는 인사동의 술집이며 광화문의 밥집이며 야반도주로 살림을 차린
절 밑 동네 진관외동의 허름한 골목이 어느 시절 나의 동선과 거의 비슷하게 겹친다.
여차하면 술판으로 변하는 '상회'라는 이름이 붙은 가게의 평상만큼
거나하고 좋은 술자리를 나는 알지 못한다.
스니커즈를 벗고 운동화를 꺾어 신은 소설가가, 그 평상 한 귀퉁이에 궁둥이를 걸친 느낌.

해마다 제비들이 떠나고 첫눈이 내릴 때쯤이면 입은 옷대로 가출,
돌아오면 뒤란 헛간 속으로 끌려가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게 연례행사인 어머니.
그 어머니를 닮은 듯한 애인의 이야기 '제비를 기르다'는
이 소설가의 18번 철지난 유행가를 듣는 느낌이었고.
(그의 여성관은 내 눈에 고루하고 진부한 감이 있다.)

'연애'가 중심이 아니고, 존재의 시원(始原)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가는 각자의 구체적인 쓸쓸함에 방점이 찍힌  이번 그의 소설들은 꽤나 재미있게 읽힌다.
여주인공들의 미모와 개성도 묘하게  조정되어 리얼리티를 획득하고 있고.

'남과 대면할 때는 방금 익모초즙을 마시고 나온 듯한 얼굴'로,
'누구한테나 남이었고 어쩌면 자신에게조차 평생 남으로 살아온'  윤대녕 소설의 주인공들.
서먹한 얼굴의 그들이 오늘은 정답다.

중국의 비단길을 함께 여행하고 온 무리가 광화문에서 오랜만에 만나 맥주를 마시는데
각자 사진을 교환하고 맥주 두어 잔을 마신 후 훗날 또 만나자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긴 채
뿔뿔이 흩어진다.

--고작 이건가? 그 추운 사막의 먼짓구뎅이에서 보름을 함께 지냈건만 그래,
두 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다들 허둥지둥 내뺀단 말인가
?('낙타 주머니'  198쪽)

이상하게 나는 이런 사소한 구절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다.
옛날 옛날 최인훈의 소설 구보 씨의 이런 독백에도 좍좍 밑줄을 그었던 기억.

--의사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고의적으로 무의식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심리적인 이유야 각기 다르겠지만 개중에 그런 환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편백나무숲 쪽으로 160쪽)

병상에 누워 고의적으로 무의식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라니
'고의적인 무의식 상태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고독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라고 말하려는데, 가슴 철렁하게도 뭔가 짚이는 것이 있다.

--삶을 완수하는 방식이 저마다 다르다는 건 얼마나 갸륵하고 오묘한 사실인가.('고래등', 188쪽)

윤대녕의 소설이 이렇게 다르게 다가오다니,  이것도 세월의 선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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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7-02-02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윤대녕 소설집을 읽으셨군요. ^^;

에로이카 2007-02-02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친구들이랑 남도여행을 다녀온적이 있었어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고 해남, 땅끝, 고창을 둘러보며, 유홍준 선생이 책에 소개한 화려한 풍광과 맛집들에 감탄한 후, 완도 쪽으로 방향을 잡고 윤대녕의 '천지간'에 나오는 구계등에 갔었지요. 소설들에서 상점이나 술집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한동안 유행했었잖아요?.. 윤대녕이 거기 한 몫 한 것 같긴 해요.. 어쨌든 구계등 풍경은 괜찮았으나, 그가 거기서 소개해놓은 횟집을 겸하는 여관은 그저 그랬어요... 유홍준 선생 책들에 나오는 집들은 정말 맛있었는데, 윤대녕 글빨에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하긴 천지간 소설에 그집 음식맛이 훌륭하다는 말은 없었지요... 헤헤..

waits 2007-02-02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받아놓고 며칠째 아쉽게 표지만 쳐다보고 있는데, 벌써 읽으셨군요.
게다가 좋다는 말씀이시라 더 반가운 걸요!
급한 일 끝나면 저도 '택일'해서 읽어야겠어요. ㅎㅎ

2007-02-02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2-02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편한 느낌 님, 아까 급히 써서 올리느라(주하와 약속한 시간이 되어ㅠ,.ㅠ)
표현이 거칠었답니다. 빼먹은 구절도 있고요. 다시 읽어주시길! 헤헤~
몇 단편은 참 재밌게 읽었답니다.
스니커즈와 운동화가 쓰면 느낌이 참 다르잖아요.
그런데 어쩐지 운동화를 꺾어서 신은 모습으로 다가왔어요.
아마 그동안 이 작가의 소설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세월의 선물은 제가 보내드릴게요.

평택, 나어릴때 님, 안 그래도 이 책 받고 님은 사셨을까 궁금했는데.
이번 주말이나 다음 주말 중 택일하여 읽으시고 리뷰 올려주셔요.ㅎㅎ
궁금합니다.^^


에로이카 님, 저는 수덕사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읽고.
땅끝마을이나 다산초당도 빠트릴 수 없네요.
윤대녕의 '천지간'은 저도 재밌게 읽었어요.
맛집이나 술집이 세세하게 묘사되면 글이나 화면이 갑자기
생생하게 살지 않아요?
그 냄새와 소음까지 그대로 들려오는 듯하고요.
밥집과 술집이라면 눈을 빛내는 에로이카 님이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요.^^

하루 님, 윤대녕 하면 또 하루 님이 떠오르지요. 헤헤~


건우와 연우 2007-02-02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너무 미끈하고 감상적인것 같아 자꾸만 꺼리던 윤대녕의 신간이 나왔단 기사를 신문에서 보고, 젊고 재능있는 작가들 이름사이로 이젠 그의 작품이 저도 반가워지기 시작하더군요.
로드무비님의 리뷰를 보니, 이젠 읽어야겠구나...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드무비 2007-02-02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 님, '연'은 정말 좋았어요.
진관외동의 허름한 길가 셋방 묘사에 자지러졌답니다.
아마 님도 그러시지 않을까.^^

2007-02-02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2-0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핫, 전 별 다섯 개 님,
저도 재밌게 읽었는데요, 갑자기 별 다섯 개를 주려니
뭔지 낯간지러워서......
(이런 걸 이른바 본처기질이라고 하던가?ㅋㅋ)
옷, 그분들, 안목이 보통 아니군요.
즐거운 소식입니다.
가끔 속삭여 주세요.^^

2007-02-02 1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2-02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향'이라는 표현이 여성의 외모를 내맘대로 재단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암튼 샤프하시다니까요.^^

2007-02-03 0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2-05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성이 산들산들 님, 절로 몰입이 되던데요?
아마 님도 펼치기만 하면 즐기실 수 있지 않을까.
작가도 작품도 만나는 때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2007-02-06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2-06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달래 2007-02-06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책읽기... 반갑습니다~ 재밌게 읽은 것도 비슷하나 리뷰 느낌은 사뭇 다르네요. 님의 시각이 참 흥미롭습니다. 은근히 윤대녕의 무덤덤한 매력을 닮은 듯도... ^^ 윤대녕에게도 우리에게도 세월의 선물 같아요...

로드무비 2007-02-1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페인 님, 무덤덤한 매력은 제가 갖고 싶은 것인데, 하하.
카페인 님을 윤대녕의 리뷰로 만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