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의 곡예사
R. O. 블레크먼 각색 및 그림, 박중서 옮김 / 샨티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한 엉뚱한 소녀의 '예쁜 어린이 대회' 참가기 <리틀 미스 선샤인>을 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이 책을 읽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 건물 지하의 식품 매장에서
종무식을 마치고 한 시간쯤  일찍 퇴근한 남편을 만났는데
그의 손에 갓 나온 빵처럼 따끈따끈한 이 책이 들려 있었다.

새해를 코앞에 둬서 그런지 앞으로 사정없이 초라하게 늙는 일밖에
남은 게 없는 것 같아 서글펐는데
누군가로부터 몰래 쪽지를 전해 받은 그런 기분이었다.

-- 너만의 춤을 추어라. 아무것도 의식하지 말고......

그날 본 영화와 책의 한결같은 메시지!

거리 한 모퉁이에서 아무도 봐주지 않는 곡예를 펼치다가 늙고 지친 캉탈베르는 수도원에 들어갔다.
자신의 곡예가 언젠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진작에 무너졌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는커녕 그는 일생동안 단 한 명의 관객도 확보하지 못했다.

수도원에서도 무능하고 쓸모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과연 무엇으로 신께 영광을 돌려야 할까?

크리스마스를 맞아 수도원의 모든 형제들은 각자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성모 마리아께 바칠 선물을 마련하기에 바빴다.
누구는 책을 쓰고 누구는 조각을 하고 누구는 요리를 하고 누구는 시를 짓고
누구는 작곡을 하고 누구는 그림을 그렸지만 캉탈베르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본문)

기도문도 외우지 못하고 찬양도 못하고 주방 보조 일도 제대로 수행 못하자
함께 생활하는 수도사들이 투덜대기 시작하는데.......

<성모의 수도사>는 중세 유럽에 전해지던 민간전설로 아나톨 프랑스의 단편으로 유명하다.
1952년 책이 출간되었을 때,  <깊은 밤 부엌에서>의 작가 모리스 센닥이
그리니치 빌리지의 8번가 서점에서 이 책을 만난 날의 기쁨(그의 해설이 뒤에 실려 있다)이나, 
역자 박중서 씨가 용산역 근처의 헌책방에서 우연히 이 만화의 원서를 발견하고 가슴 두근거리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R. O. 블레크먼 특유의 꾸불텅한 선의 코믹한 그림과 군더더기 없는 짧은 글.
'일종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적절한 부제.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이 생이라는 무대,
변변한 대본도 없이 팔과 다리가 여전히 따로 노는 나의 막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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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7-01-09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지금 다진 마늘을 품은 제게 꼭 필요한 구절이네요 ㅎㅎ
춤은 잘 못추지만 일단 무대에 올라가면 숨은 끼가 나올지도 모르겠지요 ^^
리틀 미스 선샤인, 아우, 그거 꼭 보고 싶어요. 보고싶은데... 이놈의 게으름! ㅠㅠ

로드무비 2007-01-09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 님, 카메라 혹은 무대 체질이라면서요.ㅎㅎ
바쁜 일 마무리 잘하고 보러 가시기 바랍니다.
전 숨은 끼도 없어요. 흑=3

waits 2007-01-11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느끼는 신산함은, 항상 아련하고 그리운 느낌이예요.
쓸쓸하고 무력한 당사자가 되는 일에도 좀 용감해져야 하는데...
마음놀이는 열심히 하면서도, 현실이 될까 싶으면 무서워지더라고요. ^^

로드무비 2007-01-1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택, 나어릴때 님, 저란 인간이 워낙 신산스럽습니다.ㅎㅎ
저도 마음놀이로만 끝내고 싶어요.
이 이상 쓸쓸하고 무능해지면 곤란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