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 나남포에지 1
김영승 지음 / 나남출판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가난'과 '술'이 이름 앞에 늘 따라다니는 시인 김영승.
제목에 이끌려 진작부터 사고 싶었던 그의 시집을 이제서야 읽었다.
'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이라니, 그의 시 '극빈' 중의 한 구절이다.
 이문재의 해설을 보니, 이 시집 제목이 어느 날 자신에게 영감처럼 왔다고 한다.

김영승 시인은 自序에서 태어나 자신을 한 번도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데,
그의 친구들은 내내 지지리도 가난하고 사는 데 요령이라곤 없는 이 시인의 존재가
뭔지 미안하고 무거운 돌덩이처럼 가슴에 탁 걸렸던가 보다.

술취해서 자고 있을 때
부엌에서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뭐, 씹는 게 먹고 싶어서요..."

다락에 두었던
먼지 쌓인
어머니가 갖다주신
北魚를 방망이로 두들겨
뜯어먹고 있었다

이제 아내는
나와 함께 늙어
몸도 아프고

"그럼 오징어라도 사다먹지..."
말이 없었다.

"돈이 없어요."
(詩  '北魚'  중, 80쪽)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되어 몸이 허한 아내가 한밤중에 북어대가리를
뜯어먹고 있는 걸 본 시인은 그 아픈 마음을 시로 썼고,
이문재는 해설을 쓰기 위해 친구의 원고를 읽으며 이런 시를 볼 때마다
달려나가 술을 퍼마셨다고 한다.

시인은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인천광역시 문화상 시상식에 수상자의 신분으로 참석해서
진행자로부터 '奇人'이라고 소개를 받았나 보다.

奇人?  奇人이라고?
(......) 내가 어쩌다가 奇人이
되었을꼬... 나는 운다

Elephant Man처럼

사는 날까지 살자
죽는 날까지 살지 말고
(詩  '奇人' 중에서, 114쪽)

십몇 년 전, 천상병 시인 추모행사장에서 직접 만나본 시인은
누구보다 눈빛이 맑고 여리고 수줍은 사람이었다.
행사 후 원고 때문에 잠시 찻집에 들렀는데 우리는 차 대신 술을 한잔 마셨다.
일 관계로 만나면 밥값이든 찻값이든 담당자가 내는 건 세상의 불문율.
그런데 시인은 계산대 앞에서 어쩔 줄 몰라했다.
몇푼 안되는 돈이었고 경비로 처리하면 됐는데.
모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소한 일조차 그에게는 어색하고 죽을 맛이었나 보다.

-- 너무 오랫동안 무슨 마른 '北魚대가리'같은 삶을 살아서 그런지 어떤 부드러움,
부드러운 육체와 영혼과의 스킨십이 조금은 그리웠나 보다.
좌우지간 7년 만에 일곱 번째 시집이라니... 폐일언하고 눈물겹다.
시집을 냄으로써 나는 겨우 이런 式으로 내가 그리워(?)한 이 세상과의 스킨십을 할 뿐이다.
"잘 먹고 갑니다..."
음식을 먹고 각자 음식값을 지불하듯 이 地上에 머무는 동안 나는,
아니 나도 겨우 이런 式으로 스킨십을 하며 이런 式으로 더치페이를 한다.
나는 堂堂하다.(시집 앞의 自序 중에서)

이렇게 영롱한 글과 시들을 읽으며 세상은 왜 그에게 자꾸
'기인'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못해  안달을 하는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멀쩡하고 당당하다.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게 웃길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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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7-01-29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던 시인이라, 반갑게 보관함에 넣습니다.

로드무비 2007-01-2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 님께 다소간의 여윳돈이 생기기를!=3=3=3
시집이 좀 비싸죠?^^


건우와 연우 2007-01-29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써 세상에 내보내는게 시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더치페이라면 제 몫은 사서 읽는 것이겠지요.^^
꼭 사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보관함에 담으며 살펴보니 로드무비님 말씀처럼 좀 비싸긴 합니다.^^

로드무비 2007-01-29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 님, 그래도 전혀 아깝지 않답니다.^^
(댓글이 예술입니다그려.)

2007-01-29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1-29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들은 참 해맑더군요 님, 시인이라고 뭐 모두 그럴라고요. ㅎㅎ
해맑은 소설가도 있겠죠.
요즘 이모저모 바쁘시군요.
그 너구리굴 속에서 님의 화사한 자태가 빛났을 듯.^^

waits 2007-01-30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예요. 십 년도 더 전에 '아름다운 폐인'이었나... 무지 심란하게(?) 읽으며 어줍잖게 황폐의 공감에 빠졌던 기억이 나네요.
세상 팍팍해도 다들 제 나름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주제넘는 안심이 새삼.
로드무비님 아니면 시집 들춰 볼 일도 없는데 좋은 시, 시인 얘기 자주 써주세요.^^

로드무비 2007-01-30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택, 나어릴때 님, 맞아요, 그런 제목의 책도 있었죠.
제목이 좀 웃겼어요.
'황폐함'의 정서가 예전에는 매력적이었는데 요즘은 무서워요.
끝장과 바로 연결이 된달까.
나이 탓일까요......

님의 그런 안심은 절대 주제넘지 않습니다.
얼매나 미더운데요.^^

라로 2007-02-09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보는 반가운 <시>리뷰군요~.^^
소설 리뷰가 대세인걸 보면
시 읽기가 쉽지 않아서겠죠~.
느리게 음미하며 읽어야 하니,,,,그런 시간이 어딨어지요...
<너무 오랫동안 무슨 마른 '北魚대가리'같은 삶을 살아서 그런지 어떤 부드러움,
부드러운 육체와 영혼과의 스킨십이 조금은 그리웠나 보다.> 라는말에 괜시리 눈물지어지네요...

로드무비 2007-02-10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bi 님, 반갑습니다.
시집은 자주 읽는데 리뷰를 쓸만큼 흥이 나진 않아요.
북어대가리는 씹기보다 국물로 오래오래 우리는 게 훨 나은데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