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박범준.장길연 지음, 서원 사진 / 정신세계원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몇 해 전 늦은 가을, 속초로 가는 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휙휙 스쳐 지나가는
산등성이의 드문드문한 집들을 보며 남편이 내게 물었다.
“언젠가 깊은 산골에 오두막을 짓고 살아보고 싶은 생각 없어?”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는데......그런데 괜찮을 것 같지 않아? 최소한의 일감만 확보되면
산골 오지에 사는 것도. 거기도 인터넷은 될 거 아냐!”
그러니까 나의 산골 생활 전제조건은 ‘최소한의 일감’과 ‘인터넷이 가능할 것
(컴맹이나 마찬가지인 주제에!)’, 심심하지 않도록 ‘많은 책과 영화 테이프를
미리 확보할 것’ 등이었다.
그때 남편은 왜 그런지 고개를 절레절레 옆으로 내저었다.

올해 초, ‘인간극장’이라는 한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자신들의 시골생활을
공개한 30대 초반의 젊은 부부가 있다.

박범준, 장길연 부부. 서울대와 카이스트를 나오고 너무나 도회적으로 생긴 이 부부는
얼마나 닮았는지 처음 봤을 때 오누이 같았다.
얼굴만 한 번 쳐다봐도 운명의 끈으로 묶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 커플이 더러 있는데
이들이 바로 그런 드문 경우였다.
이름만 그럴듯하지 벗겨놓고 보면 더욱 탐욕스럽고 사람들을 차별화시키는 웰빙,
상품화된 웰빙이 세상에는 지천인데 이들 부부가 사는 모습은 진정한 웰빙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했다.

방송으로 봤을 때 도시에 사는 시아버지의 생신선물을 준비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직접 따서 꾸덕꾸덕하게 말린 곶감을, 버리지 않고 모아둔 튼실한 상자를 예쁘게 꾸며 담고,
자신이 바느질한 조각보 같은 것으로 예쁘게 싸는데, 세상에나!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솜씨요,
예쁜 마음씀씀이였다.
그 모습에서 나는 냉장고 속에 너무 오래 굴러다닌 재료를 버릴까 어쩔까 망설이다
솜씨를 부려 맛난 음식으로 완성했을 때, 그걸 너무 맛있게 아귀아귀 먹는 가족의 모습을
지켜볼 때나 느낄 법한  희열을 맛보았다.
그것은 어느 비싼 식당의 외식과도 비교할 수 없다.

직접 고안하여 만든 마당 귀퉁이의 재래식 화장실과, 목욕 한 번 하려면 불 때랴,
물 데우랴 난리도 아닌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그들이 시골 생활을 택한 이유는?
한마디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


--과연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두어야 그것이 건강에 대한 현실적인 대책이 될 수 있을까?
한 20억 정도 모아두면 어느 날 갑자기 암에 걸려도 걱정 없는 훌륭한 대책을 세워둔 것일까?
건강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겠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생계대책이었다.
“뭐 먹고 살려고 그래?”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글을 쓰고, 아내는 천연염색을
할 거라고 간단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건강을 잘 지키고 소비를 줄여 나갈 것이라는 말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57쪽)

이렇게 담담한 술회처럼 그들의 결정은 뭔가 원대한 야망을 숨긴 수단으로서의 특별한 
선택이 아니었다.
가끔 도시에 나가 밀린 볼일을 보고 무주 그 산골짝 임시 거처로 돌아가면 부부는
그렇게 기쁘고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고 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방그레 웃으며 눈감고 싶다'라는 길연 씨의 소망에 나의 고개도 끄덕여진다.

그뿐 아니다, 너무나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이 만나서 결혼을 하고 서로 맞추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웠다.

'지금 살고 있는 오늘 하루하루가 행복해야 먼 훗날에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미루지 않고,
과감하게 실천하여 땀을 뻘뻘 흘리며 밭일을 하고 자신들의 노동으로 한 끼의 양식을 버는
이 젊은 부부의 사는 모습을 담은 몇 장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그 깨끗하고 순명한 에너지가
내 속으로도  흘러들어 오는 듯했다.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도(道)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길연’(182쪽)

이처럼 꼭지 하나하나마다 제목 아래  부부가 교대로 가벼운 단상을 적어놓았는데
그걸 읽는 재미도 아주 쏠쏠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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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개 2005-11-26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 이름이 눈에 익어요. ^^ (과거의 정신세계사???)
미리보기로 사진을 보니까 정말 좋으네요. 보관함에 쏙, 넣었답니다.^^

mong 2005-11-26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덜가지고 고단하게 사는 삶을 택한 그들의
따뜻한 살림을 엿보는 재미가 있을것 같네요
로드무비님의 엄마다운(냉장고의 오래된 재료로 마법도 부리시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국경을넘어 2005-11-26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러울 따름입니다. 저도 저렇게 살고 싶은데...

울보 2005-11-26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그네들 사는모습을 보고 좋다라기보다는 ,,
저는 너무 현실에 길들여져버렸나 봐요,,,

로드무비 2005-11-2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폐인촌님, 꼭 그렇게 사시길 빌어드릴게요.^^

mong님, 특히 연애와 결혼이 이상하게 어렵게만 느껴지는 청춘남녀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어요.
(저 가끔 알뜰할 때도 있어요, 뭐.ㅎㅎ)

검둥개님 맞아요.
사진들이 꽤 실려 있고요.
멋부리지 않은 은은한 사진들이 참 좋아요.^^

로드무비 2005-11-26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 저도 자신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부러웠어요.^^

kleinsusun 2005-11-26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애와 결혼이 이상하게 어렵게만 느껴지는 청춘남녀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어요." - 꼭 읽어야 겠군요.ㅎㅎ
이 사람들 정말 용기있군요.근데....오래오래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인데....
아름다운 부부의 용기가 부럽지만...저는 용기도 자신도 없네요. 솔직히...
Thanks to하고 갑니당.^^

히피드림~ 2005-11-26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부부가 시골에 살면서 농사도 짓나요? (갑자기 궁금하다는...)

플레져 2005-11-26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골에 살면 하루종일 일이라는 어른들의 말 그대로 하루종일 끼니에 올릴 당근, 추위에 견딜 지붕을 손보는 부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을 연상시키는 식단도! 특히, 길연씨가 만든 두부 조림이 엄청 먹음직스러웠던 그 장면, 두부조림 할 때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되버렸어요. ㅎㅎ

로드무비 2005-11-26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그 자급자족의 검소한 식탁이 정말 좋아 보였죠?
둘의 연애사도 재밌었고요.
두부조림, 저도 잘하는데...ㅎㅎ

펑크님, 쌀농사는 짓지 않고요.
웬만한 채소는 다 직접 키워 먹더라고요.
그것만 해도...^^

수선님,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데요, 뭐.
저들은 제가 보기에 절반은 스님이고 수녀였어요.
인생길을 함께 걸어가는 도반.
수선님껜 수선님과 어울리는 사람이 준비되어 있을 거예요.
확실합니다.^^


2005-11-26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히피드림~ 2005-11-27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말씀처럼 시골에서의 일상이 보통일이 아닐텐데 젊은 분들이 대단하네요.^^

로드무비 2005-11-27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펑크님, 그렇죠?

하루(春) 2005-11-27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저도 이 부부 나온 프로그램 봤는데 책도 냈군요. 공감가는 얘기 잘 읽었어요.

로드무비 2005-11-27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재밌게 보셨죠? 그 프로?^^

2005-11-27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11-2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사진 너무 마음에 들고요.
말씀하신 대로 주문은 좀 미룰게요.
고맙습니다.^^
(주말 잘 보내셨어요?)

DJ뽀스 2005-12-27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길연씨가 제 친구의 친구의 친구라는 -_-;;
정말 읽고 싶은 책인데 매번 대출중입니다.

김찬성 2011-11-05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선 어머니와 가족의 살고 계신 자본주의적 바람에 대해, 설득할수 있는 타당성을 지닌 건강한 영에 무한한 생명력을 느낍니다. 우주의 법칙을 바라보고 그에 따르려는,순리를 어렵게 발견하려고 노력하다가 늙으막 하게 찿아서 이재서야 찿았네 하고 눈물짓곤하는 원리를, 찿아서 행동하는 당신들 부부에게서 무한한 POWER를 지닌 따뜨함을 느낍니디.
 
김종삼 전집 나남문학선 3
권명옥 엮음 / 나남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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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김종삼 시인의  ‘묵화(墨畵)’라는 시를 무척 좋아했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묵화’ 전문)


목숨을 부지하는 인간의 노고와 적막을 이토록 간명한 시로 표현할 줄 알았던 김종삼 시인.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 내내  마음먹고 그의 전집을 읽는데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는 수묵화
몇 점이  펼쳐지고  귀에는 헨델의 ‘메시아’에서부터 ‘드빗시’까지 듣기 좋은 음악이 흐른다.


늘 속 맑은

새 소리 하나

물방울 소리 하나

마음 한 줄기 비추이는

라산스카 (‘라산스카’ 전문, 255쪽)


평생 변변한 직업을 가져보지 못한 시인은 단칸방 월세살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런 말을 옮기는 것도 시인에 대한 결례라는 생각이 든다.)

‘라산스카’라는 제목으로 시인은 모두 여섯 편의 시를 남겼는데 라산스카는
지상 어디엔가 있는 지명도 아니고 생전에 그는 이 말뜻의 풀이를 완곡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이 전집을 엮은 이(권명옥)의 해설에 의하면 라산스카는 그러니까 시인이 꿈꾸는 내세의
어떤 장소 귀거래의 처소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살아가노라면 어디서나 굴욕 따위를 맛볼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되건 안 되건 무엇인가
그적거리고 싶었다. 무엇인가 장난삼아 그적거리고 싶었다
.(산문 ’이 공백을‘ 중 300쪽)


어느 날의 시인의 진술대로 그의 시들은 하나같이 장난삼아 긁적여 본 것들 같다.
그런데 그의  무욕이 도리어 기가 막힌 절창들을 낳는다.


나의 本은 선바위, 山의 얼굴이다.

사이

그루의 나무이다.
희미한 소릴 가끔 내었던

뻐꾹새다.
희대(稀代)의 거미줄이다.


해질 무렵 나타내이는 石家이다. (詩 ‘나의 本’ 전문, 85쪽)


소주병을 꿰차고 산으로 올라가 혼자 바위 위에서 술을 즐겨 마셨다는 시인은 그렇게
선선하고 적막한 산의 얼굴을  하고 희미한 뻐꾸기 울음소리 같은 시를 썼다.

‘아침엔 라면을 맛있게들 먹었지 / 엄만 장사를 잘할 줄 모르는 行商이란다’(시 ‘엄마’ 첫 연 136쪽)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고 하고 또 자신의 시를 시가 아니라는 뜻으로 ‘非詩’라고 제목을
적어 넣었던 높은 자존의 시인은 이렇게 대수로울 것 없는 구절들로 오늘 아침
나의 마음을 울리고 웃겼다.


김종삼 시인의 시를 가지고 어쩌고저쩌고 길게 이야기하는 것만큼 웃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물통’ 북치는 소년‘ ’어부‘ 등 그의 널리 알려진 시들 외에도
앞에서 소개한 ’나의 본‘이나 이어서 소개할 ’오늘‘ 같은 시들이 나의 수첩 속에 새로이
추가되었으니 이 기쁨을 나누고 싶어 리뷰를 올린다.


이 하루도 살아가고 있다. 토큰 열여덟 개를 사서 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며칠 동안은 넉넉하다.

나는 덕지덕지한 늙은

아마추어 시인이다.

그마치라도

지덕지함을 탈피해 보자.

골짜기로 가 보자.

기 좋은 그 바위에 또 앉아 보자.

두 홉들이 소주 반만 먹자. 반은 버리자.(시 ‘오늘’ 전문,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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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1-09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2005-11-09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11-09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시들의 향에 취해서 가슴 두근거리며 쓴 리뷰예요.^^

따개비님 안녕하세요?
다른 분 방에서 몇 번 댓글로 뵌 것 같은데.
시를 나누어 읽고 싶다는 마음 알아주셔서 고맙습니다.^^

2005-11-09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1-09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11-09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따~ 이십 오도 짜리 막쐬주 한 잔 입에 턴 거 맹키로 조옿습니다~ ㅡ_ㅡ;;..흐..짧은 단문이지만 긴 여운을 주는 시!! 그리고 로드무비님의 조심스럽고 겸손한 리뷰!! '묵화'와 '오늘'이란 시가 애잔하네요..너무 애잔해서 지금 딱 낮잠 한숨 때렸으면 좋겠시유..어엉~

로드무비 2005-11-09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시하고 소소하고 사사로운 속물님, 마지막 말씀에 동감입니다.ㅎㅎ
시를 찾는 수고를 덜게 했다니 기뻐요.
엑스레이에 드러난 뼈, 처럼 견고하고 단순하게!
저도 그걸 꿈꿉니다.^^

속삭이신 님, 전 진심을 알아보는 사람입니다.
다행이죠?^^

로드무비 2005-11-09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막쐬주!
저도 술병 하나 꿰차고 동네 뒷산을 오르고 싶어요.
김종삼의 시를 읽으면 하염없어지는데 또 이상한 용기가 생겨요.^^
그나저나 낮잠 한숨 꼭 때리시길...^^

산사춘 2005-11-09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비님이 아니시면 전 시를 전혀 읽지 않아요.
무비님의 덧글 때문인가 합니다. 감사해요.

mong 2005-11-0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잘 모르지만
질박한 삶의 얘기 같아 가슴이 찌르르 하네요
로드무비님 덕에 좋은 시 읽고 가네요 ^^

로드무비 2005-11-09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시를 옮겨 적는 게 행복했어요.^^

산사춘님, 좋은 시 읽으면 정화되는 느낌이 있어요.
가끔 그 기쁨을 누리게 해드릴게요.^^*

검둥개 2005-11-09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이 시인의 시들은 교과서에서만 읽어서 이렇게 좋은 시들이 더 많은 줄 몰랐어요. *^^* 감동만빵입니다.

플레져 2005-11-09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너무 좋습니다. 늙은 아마추어 시인.
로드무비님이 추천해 주시는 다른 책들 보다 시집은 특히, 맘에 듭니다.

달팽이 2005-11-09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화를 보고 감동했던 기억이 있는데....음 김 종삼 시인이었군요...
그리고 저는 라산스카도 너무 좋군요...
가슴이 떨리네요...
좋은 시 보고 갑니다. 보관함으로...

로드무비 2005-11-09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일부러 너무 많이 알려진 시는 안 올렸어요.
가슴이 떨리신다니 저도 가슴이 떨립니다.
오늘 아침에 살짝 흥분했었거든요. 시 읽으며......^^

플레져님, 전집이 좀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은데
김종삼 전집은 너무 훌륭합니다. 이 정도로만...^^

검둥개님, 펼치는 시들마다 다 좋습니다.^^

니르바나 2005-11-10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주한잔 마시고 소금한손가락 목에 털어넣던 시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인간이란 우주의 세계, 그 영성을 그리려면 천상 자신의 생명력을 소진해야 하는
시인의 운명이란게 로드무비님이 소개하신 김종삼시인의 시를 보며 갖게 되는 상념입니다.

2005-11-10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연사랑 2005-11-10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서도 예금 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에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천상병 -나의 가난은-)

그냥 말없이 추천만 하고 가요...

로드무비 2005-11-10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연사랑님, 저도 이 리뷰 쓰면서 저 시를 떠올렸답니다.
좋은 시 다시 읽게 해주셔서 고마워요.
추천도!^^

속삭이신 님, 외출했다가 좀전에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님 방에 갈게요.
저녁준비할 시간이라...^^

2005-11-12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1-12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브리즈 2005-11-16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었던 어느 때 혹은 어렸던 어느 때 한동안 들여다보던 시인이에요, 김종삼은.
간결한 시구만큼이나 마음이 쓸쓸해져서는 산책을 나가던 기억이 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

로드무비 2005-11-17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즈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7-10-31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드무비님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의 글을 이 아침 읽으니 참 좋습니다.. 단점은 바위에 앉아서 소주한잔 하고 싶은 기분이 드네요 ..
 
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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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의 <습지생태보고서>라는 새 만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곰팡이 시커멓게 핀
골방에 서식하는 꾀죄죄한 청춘의 몰골들이 딱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때에 전 이불, 담뱃진이 켜켜이 찐득하게 달라붙은 조그만 방에
작가 자신인 최군, 바가지 머리에 보라색 추리님 하의의 패션(!) 감각이  돋보이는 재호,
넙데데한 얼굴의 사람 좋은 정군, 아예 컴퓨터 안에서 살다시피 하는 작업벌레 몽찬,
없는 자는 당당하게 괄시하고 있는 자는 공공연히 존경하는 사슴 녹용이가
빈대 붙어 살고 있었다.(그들을 보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즐겁다'는
신경림 시인의 시구가 절로  생각난다!)

동네 골목의 옷 수거함에서 입을 만한 옷을 몇 개 발견하고 희희낙락하는 최군과 재호를 보니
나의 어느 시절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길에서 주운 낡은 책상이랑 조잡한 비키니 옷장, 이불 한 채가 살림의 전부였던 북아현동 문간방.

갑자기 취직이 되어 상경하는 바람에 연남동 고모의 호화주택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남동생의 취직이 연달아 결정되는 바람에 아예 방을 얻어 나오기로 한 것이다.
내 수중에는 돈이 없었고 아버지가 몇 백만 원을 빌려주신다고 해서 예전부터 막연히
호감을 품고 있던 북아현동 한옥 골목을 샅샅이 훑게 되었다.

냉장고나 세탁기는 언감생심 꿈도 안 꿨고 황학동 벼룩시장에 같은 출판사에 다니는
후배를 데리고 가서  중고텔레비전이랑 남이 쓰던 전기밥솥을 하나 사왔으니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고지식하고 늘푼수없는 인간이었다.

어느 날 남동생이 당분간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만 더 놓자고 하며 수배중인 후배를
데리고 왔다.

한데나 다름없는 부엌 옆에 조그만 창고 같은 게 딸려 있었는데 남동생은 그곳을 치우고
전기담요를 깔고 후배랑 그곳에서 잠을 잤다.
이불만 달랑 한 채 있는 방에서 녀석은 무려 6개월을 웅크리고 지냈다. 담배만 뻑뻑 피우면서......
그 때 그 방의 냄새가 아마 이 책에 나오는 최군과 그 친구들의 아지트 냄새와 비슷하지 않을까!


나처럼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한 인간이 텔레비전에 비친 쓰러져가는 움막을 보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여름 무더위에 샤워는 제대로 할 수 있는지,
모든 연료 사용이 여의치 않을 때 전기장판이라도 한 장 있어 겨울을 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마음이 쓰이는 것은 다 그런 습지 서식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미팅에서 만나 부잣집 아가씨의 고생 않고 자란 특유의 한 점 티 없고 해맑은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게 된 최군의 일화는 나의 일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짠하다.
자기 아버지의 한 달 용돈이 4만 원인데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번 돈을 옷 사 입고 명색이 남자이니
데이트 비용으로도 써야 하고... 그건 최군의 독백처럼 절대 죄가 아니다.
남들 다 하는 연애도 빈털터리 지지리 궁상 청년들에게는 왜 그리도  어렵더라는 말이냐!

청춘은 죄가 없는데......


‘팔이 잘려본 사람은 손가락이 잘린 사람을 위로하지 못한다’는 일화도 아주 인상 깊었다.
가난이나 고통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다면 끝이 없다.
언젠가 전세금을 몽땅 날리고 이미 벌어진 일이니 겉으로는 선선한 얼굴로 받아들이면서도
속으로는 조금 끙끙대고 있을 때,  안양에서 식당을 하는 친한 언니에게서 50만 원을 급히
빌려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마침 그때 내 저금통장에는 모 출판사로부터 받은 교정료가 그 정도 들어 있었다.
나는 나의 사정을 말하고 그 돈이라도 지킬까 하다가, 몇 천만 원을 모르는 이 때문에 날렸는데
시장 볼 돈 50만 원이 없어서 전화한 언니에게 너무 야박한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내 사정은 말하지 않고 빌려주었고 결국 그 돈을 못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고 알 수 없는 이상한 심리였다.
일주일만 쓰겠다고 사정사정을 하여 나에게서 50만 원을 빌려간 그 언니는 그 뒤 돈도 안 갚고
연락을 끊었다.
그에게 또 내가 모르는  무슨 기막힌 사정이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어느 페이지나 펼치면 쿰쿰하고 시나부로 궁기가 줄줄 흐르지만 그래도 한편
무척이나 발랄한 구석이 있는 이 만화 청춘 보고서를 읽고 있으면
그 허름한 방의  청춘의 몰골이 꼭 서럽고  외면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다.
일화 하나하나를 만날 때마다 줄줄이 떠오른 나의 과거 장면들이 그리 부끄럽고 슬픈 것이
아닌 것처럼. 그렇다고 뭐 자랑할 것도 없지만......

다소의 낭만성까지 느껴지는 건 나의 가난은 어느 정도 자발적인 가난이었고 최군과 친구들의
것도 뭐 그리  참혹한 경지의 가난은 아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 세상에는 정말 못 보고 못 들은 것처럼 귀막고 눈을 돌리고 싶은 가난과 엄청난 고통이
엄연히 존재할 것이다.


아무튼 궁기 흐르는 인간의 모습과 관계와 심리와 방안 풍경을 사실적으로 심도있게
그려내는 재주가 탁월한 젊은 작가 최규석.  그에게 주목한다.

그들의 방에 멋들어진 술상을 봐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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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5-11-06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멋진글

mong 2005-11-06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규석이라는 이름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비애'를 그린 작가라기에 냉큼 주문을 해놨어요~
또 제가 아는 누군가가 이 사람을 주목해야 한다며
난리를 치길래 오-때마침 잘되었네 했는데....
로드무비님의 리뷰까지~차고 넘치는 우연속에
멋진 글이 마구 저를 기쁘게 하는군요 ^^

sudan 2005-11-0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저 제목에 시큰하죠? (난 별로 궁상 아닌데. 흠)

히피드림~ 2005-11-06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목만 보고 이게 뭐지? 무비님이 생물학을 전공하셨나?? 했답니다.^^;; 이 책 방금 구경하고 왔더니, 인디만화로 분류되어 있네요. 리뷰 제목도 너무 멋집니다.^^

울보 2005-11-06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로드무비님

뚜유 2005-11-06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룡 둘리...> 보고 사려고 했었는데 가난대폭발로 궁상 모드라 표지만 보고 얌전히 내려놓고 왔다는...T.T

로드무비 2005-11-06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슘두유님, 이 만화 저는 마음에 쏙 들어요.
다음엔 과감하게 사셔요.^^

울보님, 역시 로드무비님이라니, 좋은 뜻이겠죠?^^

펑크님, 쓰다보니 제 이야기를 너무 많이 집어넣어 조금 불쾌해요.
하지만 이왕 쓴 것 고치지 않을래요.
이 책과 함께 제게 빌려보고 싶은 책들 메모해서 신청하셔도 되는데....
(빈말 아닌 거 아시죠?)

수단님 궁상도 아니면서 제목만 보고도 시큰하다니 '알쪼'있습니다요.^^

mong님, 주문 잘하셨습니다.
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싸이런스님, 고맙습니다. 올려놓고 조금 찜찜했거든요.^^

2005-11-06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11-06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이 책은 꽤나 발랄하고 경쾌해서 웃으며 볼 수 있어요.
걱정 안하셔도......
그리고 짭잘한 정보 감사합니다.
마일리지냐 현금이냐, 그것이 문제로군요.^^

플레져 2005-11-06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오랜만에 리뷰를 썼더니 글이 잘 안써져서 애먹었어요 ㅎㅎ
님의 잘 쓴, 맛있는 리뷰에 침 흘리고 갑니다요...

날개 2005-11-06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리뷰는 님의 옛날얘기 듣는 재미가 더해요..^^

서연사랑 2005-11-06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바로 그 '자발적인 가난'조차도 부끄럽게 여기는 시대가 되어버렸잖아요.
우리들에게 '자발적인 가난'의 낭만을 느끼게 해주신 리뷰에 한 표!

비로그인 2005-11-06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술상은 언제 봐주실 건가요? =3=3=3

비로그인 2005-11-06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최규석이다!! 아, 여기저기서 리뷰가 막 뜨는군요. 에이구, 최규석의 연필 끝을 따라가다보면 정말 꾀죄죄한 내 자신과 딱 마주친다니깐요. 그 방안 풍경과 사람들이 딱 울덜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더라구요, 건배!! 흐흐.

산사춘 2005-11-06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들의 방에 멋들어진 술상을 봐주고 싶다"
날린 전세금에 심장이 울렸는데, 마지막 이 말은 심금을 울리네요.
각자 기억하는 방식으로 오감을 가동시키게 하는
'궁기'란 단어를 곱씹어 봅니다요.

검둥개 2005-11-07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게 당하고나면 생각하는 방식이 이상해지는 경험 저두 해봤답니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 50만원을 빌려주는 로드무비님의 행동이 저는 아주 잘 이해가 돼요. 으흐흐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머리 한 구석에서는 이미 알고 있으시지 않으셨나요? ^ .^ 정말 멋진 리뷰예요!!!

로드무비 2005-11-07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그 기분 아신다니 너무 반갑습니다.
덥썩!!!
까짓거, 하는 느낌도 있었고, 못 받을 것 각오했답니다. 물론!^^

산사춘님, 넘으 총각들 멋들어진 술상 봐주는 대신 식구들 밥이나 좀 제대로
챙겨야 되는데...
님의 댓글 보고 제정신이 돌아왔답니다. 찔려서~~
산사춘님의 궁기는 궁기라는 단어가 무색한 그런 것일 거라
상상해 봅니다.^^

복돌이님, 님도 읽으셨군요.
첫 책에서 치킨 한 마리 시켜먹는 장면 보고 배를 잡았는데
가공할 유머라고 생각했어요.
개인적으로 복돌이님의 습지 리뷰가 무지 기대됩니다. 건배!!

노파님, 술도 몬 드신담서...
노파님이 술상을 원하시면 '수수하게' 한상 차려야지요, 뭐.^^

서연사랑님, 자발적인 가난이라고 표현하고 보니 좀 거시기하네요.
그래도 뭐 여차하면 손을 벌릴 데가 있었으니까.
네, 스스로 구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분명 낭만도 있었던 거겠죠.^^

날개님, 리뷰 쓰는데 옛날 이야기가 줄줄이 떠올라가지고 좀 낭패스러웠어요.
님이 재밌다고 하시니 만족합니다.^^

플레져님, 별 말씀을...좋기만 하던데!
어여 빨리 최상의 컨디션으로 회복되시길...
님의 기분 저조는 느껴집니다.^^

니르바나 2005-11-07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록 나라 가난이 시민의 궁기를 만들어내지만
로드무비님같은 성정을 가진 분들과 같이 하늘을 머리이고 산다면
그래도 견딜만한 세상처럼 여겨집니다.

로드무비 2005-11-07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저 때만 해도 성정이 괜찮았던 것 같은데
요즘 많이 강팍해졌습니다.
더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노력 좀 해보겠습니다.^^
(님의 말씀에 찔려서!=3)

인터라겐 2005-11-07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전 아마 속으로 셈하느라 친정엄마가 사정해도 안줬을것 같아요..

로드무비 2005-11-07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이라면 저도 어림없습니다!^^

부리 2005-11-08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옹졸했습니다. 장안의 추천을 님이 다 쓸어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이 글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열다섯개를 넘은 추천갯수에 놀라 추천을 못했습니다. 두고두고 맘에 걸려서 지금 다시 와서 추천 꾸욱 누릅니다. 로드무비님, 정말 멋진 분입니다. 주하는 틀림없이 우리 사회를 맑게 만드는 데 일조할 것입니다.

로드무비 2005-11-08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추천 안 누르신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셨다고요?
어째야 쓰까나 우리 부리님!
님이 예뻐 죽겠습니다.^^*

2005-11-09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11-09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잘 다녀오너라!
너무너무 좋은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니가 여행간다는데 왜 눈물이 핑 돌지?^^
 
플라나리아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창해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밥인지 술인지를 먹으며 이십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후배가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난 어떤 놈하고 결혼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 너무 웃기지 않아요?”
“오오, 멋지다.  그 도저한 정신세계라니!  그런데 니 그동안 내 모르는 새 무슨 험한 일들을 그리 많이 겪었더란 말이고!”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게 자신을 내팽개치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엄청난 자신감을 내보이는 거였지만 난 이렇게 이기죽거리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말없이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다. 아무도 모르게 해치운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살아간다. 남들과 조금이라도 달라 보이는 생각이 스스로 너무나 대견한 나머지 심각한 얼굴로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들의 발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다.

야마모토 후미오의 <플라나리아>에는 어느 날 자신에게 닥친 불행 혹은 결단을 요구하는 일 앞에서도 호들갑 떨지 않고 흔연한 얼굴로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다음은 아내와 이혼 후 다니던 회사마저 관두고 가진 돈을 몽땅 털어 동네 모퉁이에 조그만 선술집을 차린 한 작품 속 주인공의 생각이다.


--나는 단골들만 북적거리는, 소위 가족적이라고 하는 가게가 싫었다. 우연히 지나치던 손님이라도 가볍게 들어올 수 있는 가게로 만들고 싶어서 단골이건 초면이건 똑같이 대하는 것이다.
메뉴도 일부러 별 연구 없이 그날 들여온 횟감과 아무런 특징도 없는 구이를 내놓았다. 술도 요즘 유행하는 술 따위는 고집으로라도 들여놓지 않았고, 정종이건 소주건 맥주건 딱 한 가지씩뿐이었다. 이런 가게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닐까?
(‘사랑 있는 내일’ 86쪽)


이런 가게가 어떻게 유지가 될까 싶지만 나름대로 그런 분위기를 속편하게 생각하는 단골들이 있어 말없이 포렴을 걷고 들어와 몇 개 안되는 의자에 궁둥이를 걸친다.
스미에도 그 중 한 명.  나이 서른여섯에 지친 몸 누일 방 한 칸이 있길 하나, 술집 손님들의 손금을 봐주고 그날 자기의 술값을 대신 내게 하는 이외에 한 푼의 수입도 의료보험증도 없는 처지이면서 그녀는 그토록 선선하고 자연스럽다.  도리어 애인과 직장과 젊음과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 중 하나를 잃을까봐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찾아와 떨리는 손을 내민다.

그 흔한 방황 한 번 않고 너무나 열심히 공부와 일에 매진하며 살다가 어느 날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받고 일자리마저 잃은 한 주인공은  하릴없이 심야의 만화카페와 자신의 방에서 허구헌 날 죽치며 이렇게 읊조린다.


--얼음이 깨지면서 빠져든 물밑에서 이제 나는 꼼짝없이 얼어 죽는구나 했더니, 뜻밖에도 거기에는 ‘남아도는 시간’이라는 이름의 뜨뜻미지근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거기에 흥건히 누워서 지내는 일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편안하고 아늑했다.(‘네이키드’ 150쪽)


인생에서 견고하고 확실한 것, 영원한 것이 과연 있을까? 꽝꽝 얼어 절대 녹을 것 같지 않은 내 발밑의 얼음도 언제 균열이 생기고 쩌억하니 아가리를 벌려 나를 집어삼킬지 모른다.

오래 전 나와 같은 사무실에 다니던 내 또래의 여성은 일찍 결혼하여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있고 공무원인 남편이 있었는데 항상 보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업무 때문에 만나 밥을 한 번 먹은 적이 있는 전직 장관님께, 역시 업무 때문에 만난 적 있는, 시인으로서 기업가로서 성공을 이룬 어느 노시인에게 정성껏 안부를 묻는 편지였다.
그녀의 야망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그로테스크하고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는 지금쯤은 그토록 원하던 신분 상승의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수 있었을까?


야망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책의 주인공들을 만나고 있는데 뜬금없이 까맣게 잊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스미에에게 손금을 봐달라고 손을 내밀었다가 결과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들고 있던 맥주를 확 부어버린 친구를 말리는 시늉을 하고 나서 영수증을 챙겨달라고 해 유유히 술집을 빠져나가던 짧은 머리의 여인.
남의 상처는 안중에도 없고, 어떤 상황이라도 아무리 조그만 것이라도 자기 것은 확실히 챙기는 사람들.


다섯 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뭐 하나 확실하게 붙잡을 줄 모르고 별 볼일 없고  후줄근한 인물들은 이른바 낙오자이고 사회부적응자로 분류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들이 훨씬 쿨하고 깨끗하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인생 부적응자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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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사랑 2005-10-29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소위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그런 사람들이 진정한 '인생부적응자'인 경우도 많죠. 돈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니까.

mong 2005-10-29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부적응자로 스스로 분류하고 있었는데...
로드무비님 리뷰를 보니 기운이 나요 ^^
로드무비님이 최고에요!

로드무비 2005-10-2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도 참 별 말씀을!
너무나 참하고 야물딱져 보이시더만......
제가 '최고'라고 하신 말 믿을게요. ㅎㅎ

서연사랑님, 남아도는 시간이라는 뜨뜻미지근한 물에
둥둥 떠있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blowup 2005-10-29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 님. 플라나리아 계를 만들어야 한다니까요. 인생 모토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사랑 있는 내일>이 우리나라에 판권이 팔렸대요. 어쩌면 영화화될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런 후줄근한 이야기가 제대로 옮겨질까요? 용이 감독(봄날의 곰)이 할 것 같은데... 정말 이 정서를 잘 살려낼 수 있을까 궁금해요.

깍두기 2005-10-29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여인 정말 그로테스크하고 부담스럽군요.(아, 저는 그 장면이 마구마구 상상이 되어요)
저도 그 남아도는 시간이라는 뜨뜻미지근한 물에 둥둥 떠 있어 보고 싶으나
미래에 대한 불안, 기타 등등의 이유로 그런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현재만을 즐기고 살 수 있다면!
그럼 인생이 백배는 행복해질 텐데.
요즘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아요.

로드무비 2005-10-29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그 여인은 참 야무지고 예뻤어요.
거기다 멋진 가족까지...
그런데도 그렇게 계속 욕심을 내더군요.
그리고 뭐 사실 우리도 이름과 모양이 다른 야망이
속에 들끓고 있는지도 모르죠.^^

namu님, 플라나리아계가 만들어지면 회계는 제가 맡겠습니다.ㅎㅎ
'사랑 있는 내일' 우리나라에서 영화화한다고요?
아아, 정말 기대되네요.
그런데 용이 감독은 좀 약하지 않나?^^;;

urblue 2005-10-2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은 회계 같은 거 절대로 하시면 안 될 것 같은데요. =3=3
(다음에 책 빌려주세요. ^^;)

로드무비 2005-10-29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아니 나를 뭘로 보고! (버럭버럭=3=3)
<장송>하고 바꿔봐요.ㅎㅎ

2005-10-29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10-2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어~ 제가 따로 로드무비님을 좋아하겠슴꽈! 리뷰를 넘 생생하게 잘 쓰시쟎아요..읽지 않아도 읽은 것처럼 맹글어버리는 남양주의 힘!!!
통찰력 있는 로드무비님께 꼬리 함 흔들고 살짝 엥겨봄돠..살랑살랑, 아잉~

로드무비 2005-10-29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이 책도 읽고나니 리뷰를 쓰고 싶어 근질거리더군요.
그런데 썩 마음에 들게 쓰진 못했어요.
아무튼 복돌이님이 좋아해 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살랑살랑~~

검둥개 2005-10-30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서기를 하면 어떨까요? 으흐흐 플라나리아 계를 하면요. ^ .^
로드무비님은 총무를 하시고 회계는 나무님께 맡기시는 것이 좋겠어요. ㅎㅎ

로드무비 2005-10-30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아니 제가 계산도 잘 못할 인간으로 보이십니까?
아니면 횡령하고 튈 쪽?ㅎㅎ
검둥개님은 서기 라니, 글씨에 자신이 있으신가요?^^

검둥개 2005-10-31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나리아계에 뭐 기록할 게 있겠어요. 당연히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리라는 예측으로 으하하 =3=3=3

로드무비 2005-10-31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정신으로 플라나리아계 만들면 안되는데...=3=3

히피드림~ 2005-11-04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아~~ 멋진 리뷰입니다.^^

로드무비 2005-11-05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펑크님, 왜 이리 늦게 보셨나요오?^^
멋진 리뷰라 해주시니 배시시~~

비로그인 2005-11-11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축하드려요..;;

로드무비 2005-11-1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 웬 적립금이 들어왔나 했더니만......
고맙습니다, 축하해 주셔서!^^

하루(春) 2005-11-11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기쁘시겠지요? 당연히 ^^

로드무비 2005-11-12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그럼요 기쁘죠. 오마 넌 돈이 생겼는데요.
고맙습니다.^^

balmas 2005-11-12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로드무비님!
너무 하시는 거 아녜요?
알라딘이 어렵다는데, 이렇게 거푸 마이리뷰에 당선되시면 ...
알라딘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셨을 것 같아요.

사죄의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멋진 책을 내셔서 베스트셀러에 올라 알라딘에 보은하는 길!!
(ㅎㅎ 너무 아부 모드인가?
어쨌든 축하드리고, 책 꼭 내셔야 해요.
제가 출판사를 한다면 당장 내고 싶구만 ...)

로드무비 2005-11-12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오랜만의 행차이시옵니다.
저 <소걸음...> 이후 처음 받는 건데요?ㅎㅎ
그리고 발마스님 빨리 출판사 하나 차리세요.
특별히 님께 원고 넘길게요.=3=3=3
(안 보이는 새 아부의 달인이 되어 돌아오셨군요.)

울보 2005-11-14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아영엄마 2005-11-15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로드무비님이 일전에 리뷰에 당선되신 걸 이 야밤에야 알게 됬네요. 뒤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로드무비 2005-11-15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 아영엄마님, 고맙습니다.^^

플레져 2005-11-15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님... 축하해요!!!!!
(제가 왜 이 리뷰를 못보았나 날짜 추적을 한 결과...제가 놀러간 날이로군요. 이런...ㅎㅎ) 정말이지 뜨끈한 국물이랑 함께 마셔도 좋을 사케 같은 리뷰에요!!

로드무비 2005-11-15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그러고보니 그날 님 오시기를 기다렸던 기억이!ㅎㅎ
플라나리아 계원들께 알릴까 하다가 너무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비로그인 2005-11-15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어떤 리뷰던 인상적이기 때문에 이 달의 리뷰가 무엇인지 한참 찾았어요. 흐흐..감축드리옵니다. 아, 저도 이 리뷰 읽고 참 담백하게 느껴졌는데, 결국 될 것이 되고 말았군요. 이 정도 알랑방구는 텍도 없을까요? 다른 분들 댓글은 얼마나 딸랑거리시는지..함 뚜루룩 훑어봐야겠숨돠, 흥!

로드무비 2005-11-15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님의 알랑방구가 '쵝오'예요. ㅎㅎ
제가 편집자면 김종삼 전집 리뷰를 뽑아줬을 텐데...^^
 
앰 아이 블루?
마리온 데인 바우어 외 12인 지음, 조응주 옮김 / 낭기열라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년 전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재경(在京) 동창회 연락을 받았다.
신기하고 궁금해서 그 모임에 나갔다.
무릇 소녀들은  공부도 잘하고 보이시한 외모와 성격의 아이에게 매력적인 이성을 바라보는
눈길을 줄 때가 있는데 내게도 그런 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아이가 짙은 화장에 어색한 ‘파마’ 머리, 새빨간 색 재킷을 입고
가장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는 게 아닌가.
내 속에서 뭔가가 부서져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이후 나는 동창회 모임이 있다는 연락이 와도 나가지 않는다.


저명한 청소년 문학 작가 13인이 쓴 레즈비언과 게이를 다룬 청소년 대상의 소설집
<앰 아이 블루>를 아주 재밌게 읽었다.
13편의 단편은 ‘동성애 받아들이기’라는 큰 주제 아래 한 권의 책으로 묶였지만
사실 그다지 노골적이지도 않고 계몽적이지도 않다.
남들과 다른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청소년들이 주로 나오지만
각각의 단편은 한 편의 훌륭한 성장소설로 손색없다.
그리고 성장소설이라고 해서 꼭 청소년으로 독자를 한정시킬 필요도 없다.
우선 나만 해도 리뷰 때문에 집어 들긴 했지만 마음이 이끌려서 단숨에 읽어내려 갔으니까.

호모로 의심받아 한 친구의 습격을 받고 흙탕물 웅덩이에 처박힌 소년 빈센트의 눈앞에
자칭 ‘요정 대부’라는, 여자처럼 말하고 걷는 수상한 아저씨 멜빈이 나타난다.
‘호모’로 찍혔는데 멜빈처럼 걷는 사람과 같이 다니다가는 상황이 나빠질 건 뻔한 일.
소년은 꼭 그렇게 걸어야 되냐고 불평을 털어놓는다.

멜빈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말한다.


“자기야, 난 이렇게 걷고 싶어서 목숨까지 버린 사람이야.
지금 와서 그만두라니!”
(‘앰 아이 블루’ 19쪽)

보통 남자가 여자한테 데이트 신청을 하면 최악의 결과라고 해봤자 비웃음을 사는 정도.
그런데 남자가 남자한테 데이트하자고 했다가는 뼈도 못 추리는 것이 이 세상의 현실인 것이다.

저세상 사람인 멜빈의 말이 너무 웃긴다.

알렉산더 대왕도 카이사르도 저세상에서 만났는데 그들도 호모였다며 “사람 괜찮더라!”고
표현하는 대목.
맨 앞에 실린 ‘앰 아이 블루’를 읽으면서 이 책이 꽤 괜찮겠다는 예감이 스쳐지나갔다.


각각의 단편에는 성 정체성 뿐만 아니라 인종, 연령, 남녀, 에이즈, 가족 관계 등
인생의 모든 문제가 가볍게 스케치되어 있다.
그리고 교묘하게 만난다.
성 정체성의 문제도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일 중 하나일 뿐이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나는 특히 ‘학부모의 밤’이라는 단편을 아주 재밌게 감동적으로 읽었다.


“에이즈 환자를 배정받는 사람들 대다수는 가족이 없는 걸로 알고 있거든.
심지어 그런 환자를 맡겠다고 자원하는 사람도 있어.
난 단지 정상적인 사람을 돕고 싶을 뿐이야.
자기가 잘못해서 사회복지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 말고.”('학부모의 밤' 182쪽)

사회복지사인 엄마가 자신은 가족의 건강을 위해 혹 있을지도 모를 감염이 염려되어
에이즈 환자를 맡지 않았다며 자랑스레 말하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어떻게 알릴까
고민하던 소녀 캐런의 화가 폭발한다.

“자기 잘못? 정상적인 사람? 세상에 그렇게 불공평한 말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우리 동성애자들이 에이즈에 걸리는 건 그 사람들 잘못이고
병들어도 싸단 말이잖아!”
(같은 작품 182~183쪽)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도록 망설이다 내가 동성애자임을 가족에게 알린 것처럼
속이 시원하였다.
사회복지사이면서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고 편견에 가득한 캐런의 엄마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다른 일을 하던 중 밀쳐두고 기꺼이 이 책의 번역을 맡았다는 역자의 결단에 찬사를 보낸다.
그의 번역은 단편 하나하나의 특성과 주인공들의 개성을 기가 막히게 잘 살려놓았다.
그리고 13인의 작가는 자신의 작품 뒤에 너무나 진솔한 자기 소개를 덧붙여 놓았는데
각자의 이력과 생각을 조근조근 밝혀놓은 것이 꼭 13통의 편지를 읽는 것 같았다.

동성애는 절대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래도 노력하면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동안의 나의 막연한 생각이었다.

 

(**우리 동성애자들이 에이즈에 걸리는 건 그 사람들 잘못이고 ~는 문장이 잘못되었습니다. 
뒤쪽도  당연히 '우리'여야죠. 재판시 수정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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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5-10-23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약간의 푸른빛이라는 제목과
리뷰에 담긴 내용이 따뜻하네요
푸른색도 따뜻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신 리뷰
잘 읽었습니다 ^^

플레져 2005-10-2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과 이 제목은 약간 다른듯 하지만, 알고보면 같을듯 ^^
막막~ 읽고 싶어져요. 두편 읽었는데, 아직 저는 필이 팍~ 안와서리...;;;

하이드 2005-10-2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책을 읽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제목이네요~ ^^

로드무비 2005-10-23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방금 님의 리뷰 읽고 왔어요.
이 책 의외로 근사하죠?^^

플레져님, 읽고나면 리뷰를 쓰고 싶은 책.
아니 읽는 중에도 빨리 읽고 리뷰를 쓰고 싶은 책입니다.
(마저 빨랑 읽으시라요.^^)

mong님, 님 이 책 읽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보내드릴게요.^^

kleinsusun 2005-10-23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로드무비님의 리뷰는 항상 최고예요.

"난 단지 정상적인 사람을 돕고 싶을 뿐이야.
자기가 잘못해서 사회복지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 말고"

이런 편견들이 실제로 세상에 가득하죠? 사회복지사가 이런 말을 할 정도니....
이 책이 어린이 권장도서가 되어야 겠어요. 그래야...세상의 편견이 조금씩 깨질 수 있겠죠? 열렬한 추천.ㅎㅎ

히피드림~ 2005-10-23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서평단 모집 늦게 알았을때 좀 아쉽더군요. 무비님 리뷰 보니까 좋은 책 같네요. ^^

서연사랑 2005-10-2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반가와 하실 것 같은....땡스투!를 날리며^^

mong 2005-10-23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로드무비님 정말이요 @..@ (게슴츠레한 눈 커짐)
그럼 나중에 '조소' 남길께요 ㅎㅎ

로드무비 2005-10-23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펑크님, 늦게 아셨군요.
저도 운좋게 이 책을 받았는데 읽고보니 너무 좋았어요.
몽님께 드린다고 했으니 드릴 수도 없고. ^^;;

수선님, 우와, 기분좋은 칭찬!
자기자신만이 옳다는 잘못된 확신을 깨트려 줄 수 있는 책이에요.
청소년과 어른들 모두 읽으면 좋아요.
모처럼 쉬고 계신가요?^^

로드무비 2005-10-23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조소' 남기세요.^^

서연사랑님, 땡스투 너무 좋아요.헤헤~

비로그인 2005-10-23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년은 울지 않는다였나. 무진장 가슴 아팠던 영화가 생각나네요..

로드무비 2005-10-23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힐러리 스왱크 나왔던 영화죠?
사야님, 그 영화 보며 그렇게 가심이 아프셨어요?^^

비로그인 2005-10-23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상으나..저두 동경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농구선수같았거든요. 10년 후에 그 아이를 봤는데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남자친구와 함께 팔짱을 끼구 걷고 있더라구요!! 음..성정체성..누구나 한 번쯤 청소년기에 느낄만한 감정이구요. 그런 혼란과 아픔을 겪으면서 다시 한 번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는 거 같아요. 저두 굳이 고백하자면 양성애자의 측면이 강했어요. 글구 이성애자, 동성애자로 편가르는 사회도 우습단 생각이 들어요..그냥 그런갑다, 하면 되지..꼭 캐내어서 소외시키구 말에요..나빠요!!

로드무비 2005-10-23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동경하는 친구.ㅎㅎㅎ
복돌이님을 동경하는 친구들이 많지 않았을라나요?
전 그런 경우 한 번도 없었습니다만.
항상 짝사랑만 열심히!^^

이누아 2005-10-23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읽고 쌓인 책도 가득한데도 이 책 사볼래요. 그러고 보니 별도 다섯 개네.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영엄마 2005-10-24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책 못 읽었어서 제목보고도 미소를 지을 수 없군요! 에잉~ ^^;;

로드무비 2005-10-24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다른 제목 생각해 드려요?ㅎㅎ
(너무 신기합니다.)
잔말 말고 쓰셔야 합니다. 왜냐? 따우님의 이 책 리뷰가 궁금하니까!^^

로드무비 2005-10-24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 님도 이 책 읽고 함께 웃으셔야 하는데. 에잇.^^;;

이누아님, 네, 이 책 아무 망설임 없이 추천합니다.
일단 아주 재밌어요.^^

검둥개 2005-10-26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리뷰는 언제나 감동입니다. ^ .^
그런데 로드무비님을 짝사랑하는 학우들이 없었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어욧!
복돌이님 만큼이나 인기가 많으셨죠, 그렇죠? ㅎㅎ

로드무비 2005-10-26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ㅎㅎ 흥이 나서 금방 써내려간 리뷰예요.
그리고 전 정말 인기가 없었다니까요.
공부를 잘하나, 예쁘기를 하나, 그런데 글은 좀 잘 썼어요.
(너무 자신을 깎아 내리는 게 미안해서 한마디 보탠 거 아시죠?^^)

라주미힌 2005-10-27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낭랑한 리뷰...
저도 얼렁 읽고 써야징... 아압!

로드무비 2005-10-27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 제 목소리가 좀 낭랑했습지요.(그런데 과거완료.)
이 책 아주 재미납니다. 빨랑 읽으시라요.^^
(님의 리뷰는 또 어떨지 궁금.)

인터라겐 2005-10-27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업정신 투철하신 로드무비님...

비로그인 2005-10-27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로드무비님.^^ 좋은 리뷰도 감사드리고 지적해주신 것도 정말 감사드려요. 독자분들 서평에 댓글 달기가 주저되어 방명록에 자세한 말씀을 올리려다 지적해주신 글에 바로 답글을 올려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 여기에 말씀드립니다. 지적해주신 문장, 2쇄 때 다시 잘 다듬어 싣도록 하겠습니다. 궁금하신 점이나 지적해주실 점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이런 고견들이 저희에게 큰 도움이 되어요. 좋은 책으로 또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로드무비 2005-10-28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낭기열라 분이 메모 남겨주셨군요.
앞으로도 좋은 책 기대할게요.^^

인터라겐님, 못 봤으면 모를까!^^

DJ뽀스 2007-02-02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년용 책이라 초반에 조금 머쓱했는데 뒤로 갈수록 가슴을 파고 들더군요. 아버지의 파트너에 관한 단편(홀딩?)이 인상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