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나리아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창해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밥인지 술인지를 먹으며 이십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후배가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난 어떤 놈하고 결혼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 너무 웃기지 않아요?”
“오오, 멋지다.  그 도저한 정신세계라니!  그런데 니 그동안 내 모르는 새 무슨 험한 일들을 그리 많이 겪었더란 말이고!”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게 자신을 내팽개치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엄청난 자신감을 내보이는 거였지만 난 이렇게 이기죽거리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말없이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다. 아무도 모르게 해치운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살아간다. 남들과 조금이라도 달라 보이는 생각이 스스로 너무나 대견한 나머지 심각한 얼굴로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들의 발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다.

야마모토 후미오의 <플라나리아>에는 어느 날 자신에게 닥친 불행 혹은 결단을 요구하는 일 앞에서도 호들갑 떨지 않고 흔연한 얼굴로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다음은 아내와 이혼 후 다니던 회사마저 관두고 가진 돈을 몽땅 털어 동네 모퉁이에 조그만 선술집을 차린 한 작품 속 주인공의 생각이다.


--나는 단골들만 북적거리는, 소위 가족적이라고 하는 가게가 싫었다. 우연히 지나치던 손님이라도 가볍게 들어올 수 있는 가게로 만들고 싶어서 단골이건 초면이건 똑같이 대하는 것이다.
메뉴도 일부러 별 연구 없이 그날 들여온 횟감과 아무런 특징도 없는 구이를 내놓았다. 술도 요즘 유행하는 술 따위는 고집으로라도 들여놓지 않았고, 정종이건 소주건 맥주건 딱 한 가지씩뿐이었다. 이런 가게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닐까?
(‘사랑 있는 내일’ 86쪽)


이런 가게가 어떻게 유지가 될까 싶지만 나름대로 그런 분위기를 속편하게 생각하는 단골들이 있어 말없이 포렴을 걷고 들어와 몇 개 안되는 의자에 궁둥이를 걸친다.
스미에도 그 중 한 명.  나이 서른여섯에 지친 몸 누일 방 한 칸이 있길 하나, 술집 손님들의 손금을 봐주고 그날 자기의 술값을 대신 내게 하는 이외에 한 푼의 수입도 의료보험증도 없는 처지이면서 그녀는 그토록 선선하고 자연스럽다.  도리어 애인과 직장과 젊음과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 중 하나를 잃을까봐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찾아와 떨리는 손을 내민다.

그 흔한 방황 한 번 않고 너무나 열심히 공부와 일에 매진하며 살다가 어느 날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받고 일자리마저 잃은 한 주인공은  하릴없이 심야의 만화카페와 자신의 방에서 허구헌 날 죽치며 이렇게 읊조린다.


--얼음이 깨지면서 빠져든 물밑에서 이제 나는 꼼짝없이 얼어 죽는구나 했더니, 뜻밖에도 거기에는 ‘남아도는 시간’이라는 이름의 뜨뜻미지근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거기에 흥건히 누워서 지내는 일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편안하고 아늑했다.(‘네이키드’ 150쪽)


인생에서 견고하고 확실한 것, 영원한 것이 과연 있을까? 꽝꽝 얼어 절대 녹을 것 같지 않은 내 발밑의 얼음도 언제 균열이 생기고 쩌억하니 아가리를 벌려 나를 집어삼킬지 모른다.

오래 전 나와 같은 사무실에 다니던 내 또래의 여성은 일찍 결혼하여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있고 공무원인 남편이 있었는데 항상 보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업무 때문에 만나 밥을 한 번 먹은 적이 있는 전직 장관님께, 역시 업무 때문에 만난 적 있는, 시인으로서 기업가로서 성공을 이룬 어느 노시인에게 정성껏 안부를 묻는 편지였다.
그녀의 야망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그로테스크하고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는 지금쯤은 그토록 원하던 신분 상승의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수 있었을까?


야망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책의 주인공들을 만나고 있는데 뜬금없이 까맣게 잊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스미에에게 손금을 봐달라고 손을 내밀었다가 결과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들고 있던 맥주를 확 부어버린 친구를 말리는 시늉을 하고 나서 영수증을 챙겨달라고 해 유유히 술집을 빠져나가던 짧은 머리의 여인.
남의 상처는 안중에도 없고, 어떤 상황이라도 아무리 조그만 것이라도 자기 것은 확실히 챙기는 사람들.


다섯 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뭐 하나 확실하게 붙잡을 줄 모르고 별 볼일 없고  후줄근한 인물들은 이른바 낙오자이고 사회부적응자로 분류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들이 훨씬 쿨하고 깨끗하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인생 부적응자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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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사랑 2005-10-29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소위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그런 사람들이 진정한 '인생부적응자'인 경우도 많죠. 돈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니까.

mong 2005-10-29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부적응자로 스스로 분류하고 있었는데...
로드무비님 리뷰를 보니 기운이 나요 ^^
로드무비님이 최고에요!

로드무비 2005-10-2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도 참 별 말씀을!
너무나 참하고 야물딱져 보이시더만......
제가 '최고'라고 하신 말 믿을게요. ㅎㅎ

서연사랑님, 남아도는 시간이라는 뜨뜻미지근한 물에
둥둥 떠있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blowup 2005-10-29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 님. 플라나리아 계를 만들어야 한다니까요. 인생 모토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사랑 있는 내일>이 우리나라에 판권이 팔렸대요. 어쩌면 영화화될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런 후줄근한 이야기가 제대로 옮겨질까요? 용이 감독(봄날의 곰)이 할 것 같은데... 정말 이 정서를 잘 살려낼 수 있을까 궁금해요.

깍두기 2005-10-29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여인 정말 그로테스크하고 부담스럽군요.(아, 저는 그 장면이 마구마구 상상이 되어요)
저도 그 남아도는 시간이라는 뜨뜻미지근한 물에 둥둥 떠 있어 보고 싶으나
미래에 대한 불안, 기타 등등의 이유로 그런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현재만을 즐기고 살 수 있다면!
그럼 인생이 백배는 행복해질 텐데.
요즘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아요.

로드무비 2005-10-29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그 여인은 참 야무지고 예뻤어요.
거기다 멋진 가족까지...
그런데도 그렇게 계속 욕심을 내더군요.
그리고 뭐 사실 우리도 이름과 모양이 다른 야망이
속에 들끓고 있는지도 모르죠.^^

namu님, 플라나리아계가 만들어지면 회계는 제가 맡겠습니다.ㅎㅎ
'사랑 있는 내일' 우리나라에서 영화화한다고요?
아아, 정말 기대되네요.
그런데 용이 감독은 좀 약하지 않나?^^;;

urblue 2005-10-2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은 회계 같은 거 절대로 하시면 안 될 것 같은데요. =3=3
(다음에 책 빌려주세요. ^^;)

로드무비 2005-10-29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아니 나를 뭘로 보고! (버럭버럭=3=3)
<장송>하고 바꿔봐요.ㅎㅎ

2005-10-29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10-2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어~ 제가 따로 로드무비님을 좋아하겠슴꽈! 리뷰를 넘 생생하게 잘 쓰시쟎아요..읽지 않아도 읽은 것처럼 맹글어버리는 남양주의 힘!!!
통찰력 있는 로드무비님께 꼬리 함 흔들고 살짝 엥겨봄돠..살랑살랑, 아잉~

로드무비 2005-10-29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이 책도 읽고나니 리뷰를 쓰고 싶어 근질거리더군요.
그런데 썩 마음에 들게 쓰진 못했어요.
아무튼 복돌이님이 좋아해 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살랑살랑~~

검둥개 2005-10-30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서기를 하면 어떨까요? 으흐흐 플라나리아 계를 하면요. ^ .^
로드무비님은 총무를 하시고 회계는 나무님께 맡기시는 것이 좋겠어요. ㅎㅎ

로드무비 2005-10-30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아니 제가 계산도 잘 못할 인간으로 보이십니까?
아니면 횡령하고 튈 쪽?ㅎㅎ
검둥개님은 서기 라니, 글씨에 자신이 있으신가요?^^

검둥개 2005-10-31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나리아계에 뭐 기록할 게 있겠어요. 당연히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리라는 예측으로 으하하 =3=3=3

로드무비 2005-10-31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정신으로 플라나리아계 만들면 안되는데...=3=3

히피드림~ 2005-11-04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아~~ 멋진 리뷰입니다.^^

로드무비 2005-11-05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펑크님, 왜 이리 늦게 보셨나요오?^^
멋진 리뷰라 해주시니 배시시~~

비로그인 2005-11-11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축하드려요..;;

로드무비 2005-11-1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 웬 적립금이 들어왔나 했더니만......
고맙습니다, 축하해 주셔서!^^

하루(春) 2005-11-11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기쁘시겠지요? 당연히 ^^

로드무비 2005-11-12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그럼요 기쁘죠. 오마 넌 돈이 생겼는데요.
고맙습니다.^^

balmas 2005-11-12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로드무비님!
너무 하시는 거 아녜요?
알라딘이 어렵다는데, 이렇게 거푸 마이리뷰에 당선되시면 ...
알라딘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셨을 것 같아요.

사죄의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멋진 책을 내셔서 베스트셀러에 올라 알라딘에 보은하는 길!!
(ㅎㅎ 너무 아부 모드인가?
어쨌든 축하드리고, 책 꼭 내셔야 해요.
제가 출판사를 한다면 당장 내고 싶구만 ...)

로드무비 2005-11-12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오랜만의 행차이시옵니다.
저 <소걸음...> 이후 처음 받는 건데요?ㅎㅎ
그리고 발마스님 빨리 출판사 하나 차리세요.
특별히 님께 원고 넘길게요.=3=3=3
(안 보이는 새 아부의 달인이 되어 돌아오셨군요.)

울보 2005-11-14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아영엄마 2005-11-15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로드무비님이 일전에 리뷰에 당선되신 걸 이 야밤에야 알게 됬네요. 뒤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로드무비 2005-11-15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 아영엄마님, 고맙습니다.^^

플레져 2005-11-15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님... 축하해요!!!!!
(제가 왜 이 리뷰를 못보았나 날짜 추적을 한 결과...제가 놀러간 날이로군요. 이런...ㅎㅎ) 정말이지 뜨끈한 국물이랑 함께 마셔도 좋을 사케 같은 리뷰에요!!

로드무비 2005-11-15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그러고보니 그날 님 오시기를 기다렸던 기억이!ㅎㅎ
플라나리아 계원들께 알릴까 하다가 너무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비로그인 2005-11-15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어떤 리뷰던 인상적이기 때문에 이 달의 리뷰가 무엇인지 한참 찾았어요. 흐흐..감축드리옵니다. 아, 저도 이 리뷰 읽고 참 담백하게 느껴졌는데, 결국 될 것이 되고 말았군요. 이 정도 알랑방구는 텍도 없을까요? 다른 분들 댓글은 얼마나 딸랑거리시는지..함 뚜루룩 훑어봐야겠숨돠, 흥!

로드무비 2005-11-15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님의 알랑방구가 '쵝오'예요. ㅎㅎ
제가 편집자면 김종삼 전집 리뷰를 뽑아줬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