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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동이와 영팔이 ㅣ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만화애니메이션총서 10
방영진 지음 / 새만화책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지난주, 1963년에 나온 이래 전설로만 떠돌던 이 만화의 출간 소식을 뒤늦게 알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책을 주문했다.
10여 년 전 부천 만화박물관이 처음 생겼을 때 이 만화를 전시해 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으니 1초 만의 책 주문은 사실 이야깃거리도 못된다.
교복치마 단이 튿어지면 옷핀 같은 걸로 대강 처리해놓고 시치미 뗀 얼굴로 학교에 다니던 나는
칠칠치 못한 것이 이 만화의 주인공 약동이보다는 영팔이 쪽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임창의 만화 주인공 땡이와 칠칠이도 생각나는구나.
언젠가 선인장님께 '미스 부산' 후보에 나가 박수부대로 나를 동원하려고 졸업하고 연락 끊긴 지
몇 년 만에 전화를 걸어왔던 어느 친구 이야기를 페이퍼로 올리겠다 약속했었다.
<약동이와 영팔이>를 읽고 있자니 문득 그 친구가 생각나고.
초등학교 문예반 시절 이야기 한 자락을 얼렁뚱땅 이 만화 리뷰와 함께 풀어봐야겠다.
초등학교 때 나는 문예반이었는데 '현희'라는 친구와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 아이는 시 쪽을 주름잡고 있었고, 나는 산문 쪽의 강자였다.
그런데 규모가 꽤 큰 어느 백일장에 둘이 학교 대표로 출전했던 어느 날,
현희의 시는 장원을 했는데 나의 산문은 등수 안에 들지도 못했다.
텅빈 운동장을 똥개가 천천히 가로질러간다는 초현실적(?)인 화풍을 도입한 글이었으니
이해받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도 외우고 있는 현희가 상을 받은 시 클라이막스 부분은 이렇다.
--봄은 날아다니는 양탄자, 살아 있는 그림이다
멋진 그림과 함께 판넬로 장식된 그 아이의 시는 우리 학교 6학년 교실 복도 중앙에
몇 개월을 걸려 있었는데,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그런데 얼마 후 현희의 판넬 작품이 복도 벽에서 끌어내려졌다.
어느 잡지 문예란에 실린 시를 베껴 쓴 것이 발각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와는 달리 외모가 출중했던 현희라는 소녀는 그런 사실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같은 여중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문예반을 주름잡았다.
나는 문예반에 가입하지도 않고 글로 두각을 나타낼 기회조차 없이 그렇게 글을 쓰는 것과 멀어져 갔다.
그러면서도 남자애들과 몰려 다니는 게 전부로 보이는 시화전 같은 게 내 눈에는 우스워만 보였으니
나름대로 잘나고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소녀였던 것.
그렇게 학교 대표로 백일장에 갈 때나 몇 마디 나눠본 것이 전부인 친구가 대학 3학년 때인가
전화를 걸어왔다.
미스 부산으로 출전했으니 시민회관에 와서 응원 좀 해달라고.
이상이 선인장님께 언젠가 내가 페이퍼로 올리겠다고 한 문예반 친구와 관련된 글이다.
<약동이와 영팔이>라는 만화를 보면서 왜 갑자기 현희라는 친구가 생각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1960년대 초를 배경으로 약동이와 영팔이, 뚱뚱이와 갈비 등의 중학생 친구들과 함께
영팔이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약동이 동생 약분이의 새초롬하면서도 수더분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봄'을 소재로 글을 쓰는데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똥개의 그림자가 어쩌고 저쩌고 쓰고 앉았던
몇십 년 전 어린 날의 내 모습이 문득 떠오르는 것이다.
'생활 속의 자연스런 유머를 그려낸 작가'라는 제목으로 박재동 화백의 애정 넘치는 긴 소개글이
책 뒤에 실려 있다.
자기들끼리는 웃고 까불고 우당탕하다가 선생님의 한 마디에 아무 대꾸없이 우르르 몰려나가
나무를 심고 옮기는 어려운 과업을 수행하는 까까머리 단발머리들의 모습을 보니
가슴 한켠이 더워왔다.
총 40권 중 앞의 세 권을 한 권으로 묶은 거라는데 앞으로도 부디 이 작업이 계속되어
그들이 서울의 학교로 옮겨 펼치는 학창 생활과 자췻방의 꾀죄죄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바란다.
우리나라 만화 중 거의 처음으로 '현재, 이곳을 있는 그대로' 그려 나갔다는
<약동이와 영팔이> 만화가 주는 재미와 감동은, 내게는 조금도 빛바랜 풍경이 아니었으니......
구두쇠 아버지가 졸업여행비를 안 주실 것 같으니까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내는
소년소녀들의 모습이 정다우면서도 너무 그리워서 눈물이 다 난다. 찔끔, 어쩌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