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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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의 <습지생태보고서>라는 새 만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곰팡이 시커멓게 핀
골방에 서식하는 꾀죄죄한 청춘의 몰골들이 딱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때에 전 이불, 담뱃진이 켜켜이 찐득하게 달라붙은 조그만 방에
작가 자신인 최군, 바가지 머리에 보라색 추리님 하의의 패션(!) 감각이  돋보이는 재호,
넙데데한 얼굴의 사람 좋은 정군, 아예 컴퓨터 안에서 살다시피 하는 작업벌레 몽찬,
없는 자는 당당하게 괄시하고 있는 자는 공공연히 존경하는 사슴 녹용이가
빈대 붙어 살고 있었다.(그들을 보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즐겁다'는
신경림 시인의 시구가 절로  생각난다!)

동네 골목의 옷 수거함에서 입을 만한 옷을 몇 개 발견하고 희희낙락하는 최군과 재호를 보니
나의 어느 시절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길에서 주운 낡은 책상이랑 조잡한 비키니 옷장, 이불 한 채가 살림의 전부였던 북아현동 문간방.

갑자기 취직이 되어 상경하는 바람에 연남동 고모의 호화주택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남동생의 취직이 연달아 결정되는 바람에 아예 방을 얻어 나오기로 한 것이다.
내 수중에는 돈이 없었고 아버지가 몇 백만 원을 빌려주신다고 해서 예전부터 막연히
호감을 품고 있던 북아현동 한옥 골목을 샅샅이 훑게 되었다.

냉장고나 세탁기는 언감생심 꿈도 안 꿨고 황학동 벼룩시장에 같은 출판사에 다니는
후배를 데리고 가서  중고텔레비전이랑 남이 쓰던 전기밥솥을 하나 사왔으니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고지식하고 늘푼수없는 인간이었다.

어느 날 남동생이 당분간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만 더 놓자고 하며 수배중인 후배를
데리고 왔다.

한데나 다름없는 부엌 옆에 조그만 창고 같은 게 딸려 있었는데 남동생은 그곳을 치우고
전기담요를 깔고 후배랑 그곳에서 잠을 잤다.
이불만 달랑 한 채 있는 방에서 녀석은 무려 6개월을 웅크리고 지냈다. 담배만 뻑뻑 피우면서......
그 때 그 방의 냄새가 아마 이 책에 나오는 최군과 그 친구들의 아지트 냄새와 비슷하지 않을까!


나처럼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한 인간이 텔레비전에 비친 쓰러져가는 움막을 보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여름 무더위에 샤워는 제대로 할 수 있는지,
모든 연료 사용이 여의치 않을 때 전기장판이라도 한 장 있어 겨울을 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마음이 쓰이는 것은 다 그런 습지 서식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미팅에서 만나 부잣집 아가씨의 고생 않고 자란 특유의 한 점 티 없고 해맑은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게 된 최군의 일화는 나의 일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짠하다.
자기 아버지의 한 달 용돈이 4만 원인데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번 돈을 옷 사 입고 명색이 남자이니
데이트 비용으로도 써야 하고... 그건 최군의 독백처럼 절대 죄가 아니다.
남들 다 하는 연애도 빈털터리 지지리 궁상 청년들에게는 왜 그리도  어렵더라는 말이냐!

청춘은 죄가 없는데......


‘팔이 잘려본 사람은 손가락이 잘린 사람을 위로하지 못한다’는 일화도 아주 인상 깊었다.
가난이나 고통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다면 끝이 없다.
언젠가 전세금을 몽땅 날리고 이미 벌어진 일이니 겉으로는 선선한 얼굴로 받아들이면서도
속으로는 조금 끙끙대고 있을 때,  안양에서 식당을 하는 친한 언니에게서 50만 원을 급히
빌려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마침 그때 내 저금통장에는 모 출판사로부터 받은 교정료가 그 정도 들어 있었다.
나는 나의 사정을 말하고 그 돈이라도 지킬까 하다가, 몇 천만 원을 모르는 이 때문에 날렸는데
시장 볼 돈 50만 원이 없어서 전화한 언니에게 너무 야박한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내 사정은 말하지 않고 빌려주었고 결국 그 돈을 못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고 알 수 없는 이상한 심리였다.
일주일만 쓰겠다고 사정사정을 하여 나에게서 50만 원을 빌려간 그 언니는 그 뒤 돈도 안 갚고
연락을 끊었다.
그에게 또 내가 모르는  무슨 기막힌 사정이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어느 페이지나 펼치면 쿰쿰하고 시나부로 궁기가 줄줄 흐르지만 그래도 한편
무척이나 발랄한 구석이 있는 이 만화 청춘 보고서를 읽고 있으면
그 허름한 방의  청춘의 몰골이 꼭 서럽고  외면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다.
일화 하나하나를 만날 때마다 줄줄이 떠오른 나의 과거 장면들이 그리 부끄럽고 슬픈 것이
아닌 것처럼. 그렇다고 뭐 자랑할 것도 없지만......

다소의 낭만성까지 느껴지는 건 나의 가난은 어느 정도 자발적인 가난이었고 최군과 친구들의
것도 뭐 그리  참혹한 경지의 가난은 아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 세상에는 정말 못 보고 못 들은 것처럼 귀막고 눈을 돌리고 싶은 가난과 엄청난 고통이
엄연히 존재할 것이다.


아무튼 궁기 흐르는 인간의 모습과 관계와 심리와 방안 풍경을 사실적으로 심도있게
그려내는 재주가 탁월한 젊은 작가 최규석.  그에게 주목한다.

그들의 방에 멋들어진 술상을 봐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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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5-11-06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멋진글

mong 2005-11-06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규석이라는 이름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비애'를 그린 작가라기에 냉큼 주문을 해놨어요~
또 제가 아는 누군가가 이 사람을 주목해야 한다며
난리를 치길래 오-때마침 잘되었네 했는데....
로드무비님의 리뷰까지~차고 넘치는 우연속에
멋진 글이 마구 저를 기쁘게 하는군요 ^^

sudan 2005-11-0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저 제목에 시큰하죠? (난 별로 궁상 아닌데. 흠)

히피드림~ 2005-11-06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목만 보고 이게 뭐지? 무비님이 생물학을 전공하셨나?? 했답니다.^^;; 이 책 방금 구경하고 왔더니, 인디만화로 분류되어 있네요. 리뷰 제목도 너무 멋집니다.^^

울보 2005-11-06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로드무비님

뚜유 2005-11-06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룡 둘리...> 보고 사려고 했었는데 가난대폭발로 궁상 모드라 표지만 보고 얌전히 내려놓고 왔다는...T.T

로드무비 2005-11-06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슘두유님, 이 만화 저는 마음에 쏙 들어요.
다음엔 과감하게 사셔요.^^

울보님, 역시 로드무비님이라니, 좋은 뜻이겠죠?^^

펑크님, 쓰다보니 제 이야기를 너무 많이 집어넣어 조금 불쾌해요.
하지만 이왕 쓴 것 고치지 않을래요.
이 책과 함께 제게 빌려보고 싶은 책들 메모해서 신청하셔도 되는데....
(빈말 아닌 거 아시죠?)

수단님 궁상도 아니면서 제목만 보고도 시큰하다니 '알쪼'있습니다요.^^

mong님, 주문 잘하셨습니다.
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싸이런스님, 고맙습니다. 올려놓고 조금 찜찜했거든요.^^

2005-11-06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11-06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이 책은 꽤나 발랄하고 경쾌해서 웃으며 볼 수 있어요.
걱정 안하셔도......
그리고 짭잘한 정보 감사합니다.
마일리지냐 현금이냐, 그것이 문제로군요.^^

플레져 2005-11-06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오랜만에 리뷰를 썼더니 글이 잘 안써져서 애먹었어요 ㅎㅎ
님의 잘 쓴, 맛있는 리뷰에 침 흘리고 갑니다요...

날개 2005-11-06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리뷰는 님의 옛날얘기 듣는 재미가 더해요..^^

서연사랑 2005-11-06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바로 그 '자발적인 가난'조차도 부끄럽게 여기는 시대가 되어버렸잖아요.
우리들에게 '자발적인 가난'의 낭만을 느끼게 해주신 리뷰에 한 표!

비로그인 2005-11-06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술상은 언제 봐주실 건가요? =3=3=3

비로그인 2005-11-06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최규석이다!! 아, 여기저기서 리뷰가 막 뜨는군요. 에이구, 최규석의 연필 끝을 따라가다보면 정말 꾀죄죄한 내 자신과 딱 마주친다니깐요. 그 방안 풍경과 사람들이 딱 울덜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더라구요, 건배!! 흐흐.

산사춘 2005-11-06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들의 방에 멋들어진 술상을 봐주고 싶다"
날린 전세금에 심장이 울렸는데, 마지막 이 말은 심금을 울리네요.
각자 기억하는 방식으로 오감을 가동시키게 하는
'궁기'란 단어를 곱씹어 봅니다요.

검둥개 2005-11-07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게 당하고나면 생각하는 방식이 이상해지는 경험 저두 해봤답니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 50만원을 빌려주는 로드무비님의 행동이 저는 아주 잘 이해가 돼요. 으흐흐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머리 한 구석에서는 이미 알고 있으시지 않으셨나요? ^ .^ 정말 멋진 리뷰예요!!!

로드무비 2005-11-07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그 기분 아신다니 너무 반갑습니다.
덥썩!!!
까짓거, 하는 느낌도 있었고, 못 받을 것 각오했답니다. 물론!^^

산사춘님, 넘으 총각들 멋들어진 술상 봐주는 대신 식구들 밥이나 좀 제대로
챙겨야 되는데...
님의 댓글 보고 제정신이 돌아왔답니다. 찔려서~~
산사춘님의 궁기는 궁기라는 단어가 무색한 그런 것일 거라
상상해 봅니다.^^

복돌이님, 님도 읽으셨군요.
첫 책에서 치킨 한 마리 시켜먹는 장면 보고 배를 잡았는데
가공할 유머라고 생각했어요.
개인적으로 복돌이님의 습지 리뷰가 무지 기대됩니다. 건배!!

노파님, 술도 몬 드신담서...
노파님이 술상을 원하시면 '수수하게' 한상 차려야지요, 뭐.^^

서연사랑님, 자발적인 가난이라고 표현하고 보니 좀 거시기하네요.
그래도 뭐 여차하면 손을 벌릴 데가 있었으니까.
네, 스스로 구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분명 낭만도 있었던 거겠죠.^^

날개님, 리뷰 쓰는데 옛날 이야기가 줄줄이 떠올라가지고 좀 낭패스러웠어요.
님이 재밌다고 하시니 만족합니다.^^

플레져님, 별 말씀을...좋기만 하던데!
어여 빨리 최상의 컨디션으로 회복되시길...
님의 기분 저조는 느껴집니다.^^

니르바나 2005-11-07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록 나라 가난이 시민의 궁기를 만들어내지만
로드무비님같은 성정을 가진 분들과 같이 하늘을 머리이고 산다면
그래도 견딜만한 세상처럼 여겨집니다.

로드무비 2005-11-07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저 때만 해도 성정이 괜찮았던 것 같은데
요즘 많이 강팍해졌습니다.
더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노력 좀 해보겠습니다.^^
(님의 말씀에 찔려서!=3)

인터라겐 2005-11-07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전 아마 속으로 셈하느라 친정엄마가 사정해도 안줬을것 같아요..

로드무비 2005-11-07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이라면 저도 어림없습니다!^^

부리 2005-11-08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옹졸했습니다. 장안의 추천을 님이 다 쓸어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이 글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열다섯개를 넘은 추천갯수에 놀라 추천을 못했습니다. 두고두고 맘에 걸려서 지금 다시 와서 추천 꾸욱 누릅니다. 로드무비님, 정말 멋진 분입니다. 주하는 틀림없이 우리 사회를 맑게 만드는 데 일조할 것입니다.

로드무비 2005-11-08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추천 안 누르신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셨다고요?
어째야 쓰까나 우리 부리님!
님이 예뻐 죽겠습니다.^^*

2005-11-09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11-09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잘 다녀오너라!
너무너무 좋은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니가 여행간다는데 왜 눈물이 핑 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