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 전집 나남문학선 3
권명옥 엮음 / 나남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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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김종삼 시인의  ‘묵화(墨畵)’라는 시를 무척 좋아했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묵화’ 전문)


목숨을 부지하는 인간의 노고와 적막을 이토록 간명한 시로 표현할 줄 알았던 김종삼 시인.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 내내  마음먹고 그의 전집을 읽는데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는 수묵화
몇 점이  펼쳐지고  귀에는 헨델의 ‘메시아’에서부터 ‘드빗시’까지 듣기 좋은 음악이 흐른다.


늘 속 맑은

새 소리 하나

물방울 소리 하나

마음 한 줄기 비추이는

라산스카 (‘라산스카’ 전문, 255쪽)


평생 변변한 직업을 가져보지 못한 시인은 단칸방 월세살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런 말을 옮기는 것도 시인에 대한 결례라는 생각이 든다.)

‘라산스카’라는 제목으로 시인은 모두 여섯 편의 시를 남겼는데 라산스카는
지상 어디엔가 있는 지명도 아니고 생전에 그는 이 말뜻의 풀이를 완곡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이 전집을 엮은 이(권명옥)의 해설에 의하면 라산스카는 그러니까 시인이 꿈꾸는 내세의
어떤 장소 귀거래의 처소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살아가노라면 어디서나 굴욕 따위를 맛볼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되건 안 되건 무엇인가
그적거리고 싶었다. 무엇인가 장난삼아 그적거리고 싶었다
.(산문 ’이 공백을‘ 중 300쪽)


어느 날의 시인의 진술대로 그의 시들은 하나같이 장난삼아 긁적여 본 것들 같다.
그런데 그의  무욕이 도리어 기가 막힌 절창들을 낳는다.


나의 本은 선바위, 山의 얼굴이다.

사이

그루의 나무이다.
희미한 소릴 가끔 내었던

뻐꾹새다.
희대(稀代)의 거미줄이다.


해질 무렵 나타내이는 石家이다. (詩 ‘나의 本’ 전문, 85쪽)


소주병을 꿰차고 산으로 올라가 혼자 바위 위에서 술을 즐겨 마셨다는 시인은 그렇게
선선하고 적막한 산의 얼굴을  하고 희미한 뻐꾸기 울음소리 같은 시를 썼다.

‘아침엔 라면을 맛있게들 먹었지 / 엄만 장사를 잘할 줄 모르는 行商이란다’(시 ‘엄마’ 첫 연 136쪽)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고 하고 또 자신의 시를 시가 아니라는 뜻으로 ‘非詩’라고 제목을
적어 넣었던 높은 자존의 시인은 이렇게 대수로울 것 없는 구절들로 오늘 아침
나의 마음을 울리고 웃겼다.


김종삼 시인의 시를 가지고 어쩌고저쩌고 길게 이야기하는 것만큼 웃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물통’ 북치는 소년‘ ’어부‘ 등 그의 널리 알려진 시들 외에도
앞에서 소개한 ’나의 본‘이나 이어서 소개할 ’오늘‘ 같은 시들이 나의 수첩 속에 새로이
추가되었으니 이 기쁨을 나누고 싶어 리뷰를 올린다.


이 하루도 살아가고 있다. 토큰 열여덟 개를 사서 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며칠 동안은 넉넉하다.

나는 덕지덕지한 늙은

아마추어 시인이다.

그마치라도

지덕지함을 탈피해 보자.

골짜기로 가 보자.

기 좋은 그 바위에 또 앉아 보자.

두 홉들이 소주 반만 먹자. 반은 버리자.(시 ‘오늘’ 전문,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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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1-09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2005-11-09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11-09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시들의 향에 취해서 가슴 두근거리며 쓴 리뷰예요.^^

따개비님 안녕하세요?
다른 분 방에서 몇 번 댓글로 뵌 것 같은데.
시를 나누어 읽고 싶다는 마음 알아주셔서 고맙습니다.^^

2005-11-09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1-09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11-09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따~ 이십 오도 짜리 막쐬주 한 잔 입에 턴 거 맹키로 조옿습니다~ ㅡ_ㅡ;;..흐..짧은 단문이지만 긴 여운을 주는 시!! 그리고 로드무비님의 조심스럽고 겸손한 리뷰!! '묵화'와 '오늘'이란 시가 애잔하네요..너무 애잔해서 지금 딱 낮잠 한숨 때렸으면 좋겠시유..어엉~

로드무비 2005-11-09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시하고 소소하고 사사로운 속물님, 마지막 말씀에 동감입니다.ㅎㅎ
시를 찾는 수고를 덜게 했다니 기뻐요.
엑스레이에 드러난 뼈, 처럼 견고하고 단순하게!
저도 그걸 꿈꿉니다.^^

속삭이신 님, 전 진심을 알아보는 사람입니다.
다행이죠?^^

로드무비 2005-11-09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막쐬주!
저도 술병 하나 꿰차고 동네 뒷산을 오르고 싶어요.
김종삼의 시를 읽으면 하염없어지는데 또 이상한 용기가 생겨요.^^
그나저나 낮잠 한숨 꼭 때리시길...^^

산사춘 2005-11-09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비님이 아니시면 전 시를 전혀 읽지 않아요.
무비님의 덧글 때문인가 합니다. 감사해요.

mong 2005-11-0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잘 모르지만
질박한 삶의 얘기 같아 가슴이 찌르르 하네요
로드무비님 덕에 좋은 시 읽고 가네요 ^^

로드무비 2005-11-09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시를 옮겨 적는 게 행복했어요.^^

산사춘님, 좋은 시 읽으면 정화되는 느낌이 있어요.
가끔 그 기쁨을 누리게 해드릴게요.^^*

검둥개 2005-11-09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이 시인의 시들은 교과서에서만 읽어서 이렇게 좋은 시들이 더 많은 줄 몰랐어요. *^^* 감동만빵입니다.

플레져 2005-11-09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너무 좋습니다. 늙은 아마추어 시인.
로드무비님이 추천해 주시는 다른 책들 보다 시집은 특히, 맘에 듭니다.

달팽이 2005-11-09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화를 보고 감동했던 기억이 있는데....음 김 종삼 시인이었군요...
그리고 저는 라산스카도 너무 좋군요...
가슴이 떨리네요...
좋은 시 보고 갑니다. 보관함으로...

로드무비 2005-11-09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일부러 너무 많이 알려진 시는 안 올렸어요.
가슴이 떨리신다니 저도 가슴이 떨립니다.
오늘 아침에 살짝 흥분했었거든요. 시 읽으며......^^

플레져님, 전집이 좀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은데
김종삼 전집은 너무 훌륭합니다. 이 정도로만...^^

검둥개님, 펼치는 시들마다 다 좋습니다.^^

니르바나 2005-11-10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주한잔 마시고 소금한손가락 목에 털어넣던 시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인간이란 우주의 세계, 그 영성을 그리려면 천상 자신의 생명력을 소진해야 하는
시인의 운명이란게 로드무비님이 소개하신 김종삼시인의 시를 보며 갖게 되는 상념입니다.

2005-11-10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Muse 2005-11-10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서도 예금 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에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천상병 -나의 가난은-)

그냥 말없이 추천만 하고 가요...

로드무비 2005-11-10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연사랑님, 저도 이 리뷰 쓰면서 저 시를 떠올렸답니다.
좋은 시 다시 읽게 해주셔서 고마워요.
추천도!^^

속삭이신 님, 외출했다가 좀전에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님 방에 갈게요.
저녁준비할 시간이라...^^

2005-11-12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1-12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브리즈 2005-11-16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었던 어느 때 혹은 어렸던 어느 때 한동안 들여다보던 시인이에요, 김종삼은.
간결한 시구만큼이나 마음이 쓸쓸해져서는 산책을 나가던 기억이 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

로드무비 2005-11-17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즈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7-10-31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드무비님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의 글을 이 아침 읽으니 참 좋습니다.. 단점은 바위에 앉아서 소주한잔 하고 싶은 기분이 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