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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는 어떤 집에서 살까 - 특별하지 않게 특별하게 사는 집 스토리
김인철, 김진애 외 지음, 김재경 사진 / 서울포럼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세 종류의 집에서 동시에 거주한다.
유년 시절을 보냈던 기억의 집, 현재 살고 있는 집, 그리고 우리가 아직 용기 있고 열정이 있다면
살아보고 싶은 꿈속의 집.(본문 90쪽)
‘우리가 아직 용기 있고 열정이 있다면...’이라는 대목에서 나는 잠시 울컥한다.
용기와 열정이 남아 있지 않아서냐고? 아니다.
나는 용기와 열정을 내 것으로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새삼스럽게 사무친다.
이 책을 맨 처음 발견했을 때 ‘건축가들이 사는 집이라고 뭐 특별한 게 있으려고?’ 하는 마음이
반, ‘아니 그래도 집에 관한 전문가들인데 뭐라도 하나씩은 특별한 게 있지 않겠어?’ 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느낌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 한 명 한 명, 그리고 그들의 집들은 자기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되 또 어찌 보면
그 개성마저도 지극히 평범하다.
건축가들의 사는 집의 특색은 몇 가지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고쳐 사는 집이 의외로 많다는 것, 집과 일터가 같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
느린 삶과 오래된 시간을 즐긴다는 것,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며 나름대로의
정신적인 사치를 부리는 부분이 있다는 것.
통일연수원을 지었다는 김원이라는 건축가의 집을 살펴보자.
반포아파트에 오래도록 살던 그는 어느 날 문득 북촌 근방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집을 나선다.
여러 날 인왕산 근처를 맴돌다가 마음에 쏙 들어오는 오래 된 한옥을 발견, 복덕방에 들어가 앞으로 그 집을 주인이 내놓으면 자기에게 꼭 연락을 달라고 청을 넣어놓고 온다.
2년 뒤, 그 집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와 집주인과 계약을 체결한 그.
그는 아주 오래 된 한옥을 전부 헐지 않고 고쳐야 할 부분만 고쳐서 살고 있다.
매일아침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인왕산을 변기 위에 앉아 느긋하게 감상한다니
세상에 이런 호사가 또 있을까!
건축가 김원의 인왕산 밑 한옥
열세 명의 건축가 중 내가 제일 매료된 이는 ‘느낌표’ 도서관 프로젝트를 맡았던 건축가 정기용.
‘나의 집은 백만 평!’이라고 호기를 부리는 그는 명륜동의 허름한 다가구주택에서 혼자(!) 살고 있다.
--눈 내리는 날, 초라하던 한옥들이 갑자기 눈에 띄게 그 실존적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본다.
반복하는 기와골들이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흑백의 대비들은 다가구집들을 압도하고,
새벽녘 푸르스름한 도시 풍경은 사랑스럽다.
(...)나는 내가 사는 곳이 집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나의 방’이라고 여긴다.
나의 집은 공용면적을 포함해서 임대계약상 31평이 아니라 50~ 100만 평이 넘기 때문이다.
나는 또 나만의 정원을 가지고 있는데 내 방에서 10분을 걸어가야만 한다.
그곳은 다름 아닌 성균관, 즉 문묘인 명륜당 앞마당이다. 500년 묵은 은행나무 두 그루와
느티나무 한 그루, 마로니에와 단풍나무가 몇 그루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명륜당은
사계절 나의 벗이기도 하다.(본문 82쪽)
건축가 정기용은 다가구주택을 하나 얻어 살며 명륜당 문묘가 자신의 정원이라며
아침마다 저 나무 밑에서 신문을 읽는다.
한옥 골목에 살아보지 못한 이라면 절대 모를 ‘눈 오는 날 갑자기 눈에 띄게 그 실존적 모습을
드러내는 한옥’들. 마루에 쪼그리고 앉거나 문지방에 팔을 괴고 앉아 바라보는 한옥 마당의 하늘,
아파트보다 열 배쯤 큰 소리로 내리는 빗소리.....
그 풍경 속에 한 3년 남짓 살아본 것이 나는 지금도 그토록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그러니 이 책에 나오는 각양각색의 멋진 집들 중에서도 건축가들이 고쳐서 살고 있는 몇 채의
한옥에 온통 마음을 빼앗길밖에......
집은 아침마다 일어나 내가 눈곱을 닦는 곳이다.
내가 가장 방만한 자세로 드러누워 책을 읽고 놓친 영화를 보는 곳이다.
조물락조물락 내가 만든 음식들과 내 가족의 상긋하고 콤콤한 냄새가 벽지마다 서랍장 구석마다 배여 나의 집의 냄새를 완성한다.
열세 명의 건축가는 이 책에서 자기 사는 집을 보여주되 전망 좋은 곳, 깨끗하게 청소된 곳,
자신의 안목과 독특한 취미를 자랑하는 정도까지만 자신의 집들을 공개했다.
좀 인색한 듯하게 보여주는 전망과 인테리어를 흘깃대는 재미도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자기 사는
집을 통하여 13인의 건축가의 철학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 제일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