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 갔다가 돌아온 그녀는 잘 나가는 치과의사 아들 지갑을 털어 집안을 새단장했다. 나는 그녀가 꽃무늬 벽지도 고르고 장판도 고르는 델 따라다니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꽃이 너무 크고 화려하지 않아요? 정신없이 산만하게 뵈는데?' 따위의 내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는데도 그녀는 굳이 나를 데리고 다녔다. '보면 내가 뭘 알아요?'하며 머리 아픈 고민을 털고 팔짱 끼고 섰으면 코 밑에 바짝 들이대며 어떠냐고 거듭 묻곤 하였다. 그렇게 옥신각신과 수수방관 사이를 오가며 우리는 욕실 앞 깔개며 식탁 러너, 각티슈 커버 같은 천쪼가리들도 골랐다. 커튼을 바꾸지 않는 대신 햇빛이 반투명으로 스며드는 햇빛가리개와 딸기무늬가 상콤한 주방창 바란스를, 침구를 다 바꾸지 않는 대신 목화솜 차렵이불 한 채를 장만했다. 그렇게 꾸면 논 집을 아들 내외가 와보더니 잘 나가는 치과의사답게 제법 솔찮은 돈을 치르고 식탁을 바꿔 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식탁 닦느라 생고생하지 않았을 것을.
우리 둘이 조촐하게 집들이(비슷한 걸)하던 날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카라 대신 시크라멘 화분을 사들고 갔다.
밥을 먹고 국화차를 마셨다.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차만 마실 따름이었다. 밖은 삭풍이 매섭게 휘몰아쳐 나뭇가지가 잉잉거리며 울고 섰는데 따사로운 햇살이 전면 창 크기만큼 비끼고 있었다. 햇살은 우리가 고른, 아니 그녀가 고른, 아니..역시 '우리가 함께 고른' 크고 화려한 꽃무늬 벽지를 비추고, 식탁과 자질구레한 새간살이들을 지나 나뭇결이 살아있다는 원목 바닥재를 느리게 타고 흘렀다.
차를 세 번, 네 번 우려 마셨다.
국화차는 일곱 번 까지 우려도 그 향기가 은은하단다.
나는 그녀가 국화차 향기를 음미하는 모습을 보며 저으기 마음이 놓였다. 물 가에 내놓은 것 같은 방황하던 중년이여, 마음 단단이 부여잡고 그 집에서 오래토록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20101228ㅂㅊㅁ
...덧...
이런 슬픈 일이 있나. 우리집엔 국화차가 없다니. 어디가서 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