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우울해...' 

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부러워지는 날이다. 나는 오늘 우울했고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번호표를 받아드니 28명의 대기자가 있었다. 내 순서가 오기까지 의자에 앉아서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보았다. 가나다 순으로 잘 정리된 이름들 속에서 '나 오늘 우울하다'라는 문자를 보낼만한 사람을 찾아 보았다. 가족과 절친한 친구, 아는 사람, 일 때문에 필요한 사람, 심지어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이름까지 빼곡하게 저장되어 있었지만 28명의 대기자들이 제 볼일을 다 볼 때까지 나는  아무한테도 문자를 보내지 못하고 일어섰다.  


한 가지 일을 해결하고 또 다시 번호표를 뽑아 들고 기다려야 했다. 나는 빈 자리에 앉아서 또다시 휴대폰을 주물럭거렸다. 이번에는 문자함을 열어 보았다. 내가 발송한 문자와 받은 문자가 따로 저장되어 있다. 남이 나에게 보낸 문자보다 내가 남한테 보낸 문자들이 더 낯설었다. 내가 언제 저런 말들을 보냈을까? 나는 스팸문자와 업무적인 문자를 깨끗이 지웠다. 문자함에는 이제 마음을 주고받던 말들만 남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지나간 시간 속 기억의 창고에서 쓸쓸해 보였다. 마치 초겨울 바스라질 듯 바짝 마른 낙엽에 따순 볕이 내리쬐는 것을 바라볼 때같은 그런 쓸쓸함이었다. 201100328ㅇ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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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9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雪이(가명)는 네 살짜리 어여쁜 어린이다. 네 살이라도 올박이라서 여간 영악한 게 아니다. 그런데 처음 말 배울 땐 안 돌아가는 혀로 존댓말을 곧잘 하더니 요즘은 반말을 찍찍 해댄다. 우리 중에 보다 못한 누군가가 애를 끌어 당겨 앉혀 놓고 점잖게 타이르기 시작했다.  


"雪이야, 어른한텐 그렇게 말하는 게 아냐." 

라고 시작해서 3분 4분, 아니면 5분 또는 6분? 3분이든 6분이든 상관없다. 집중력이 얼마 안 되는 설이한테는 지루하고 힘들기는 매한가지였을 테니까. 雪이는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에서 보아왔던 훈육하던 방법 그대로 두 팔과 두 다리를 힘으로 완전 제압 당하여 옴짝달짝 못하면서 어른한테 높임말을 해야 하는 이유 같은 걸 들어야 했다. 나는 목도 마르지 않으면서 물을 뜨러 일부러 雪이 등 뒤의 정수기에 소리없이 갔다.


"결론은 넌 어리니까 어른한테 '다나까'까지는
못 하더라도 반드시 '~요'체로 말을 해야 이쁘지~
말 놓으면 안 돼~알겠지?" 


식으로 이제 훈계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雪이가 "네~~"하고 대답하면 상황은 종료.
나는 속으로 외쳤다. 雪이야 예 대답해야지, 얼른 대답해, 얼른! 그런데 雪이는, 네 살 짜리 어린이면서 영악하기로 짝이 없는 雪이는 요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도 지금 놓잖아?"  


어이쿠 이런!
'아, 그야..나..나는 어른이구, 넌 애니까, 난 어른이니까 말 놓는거구...
어른은 애한테 말을 놓아도 되는거구....아, 이것 참, 새로 해야 하나?' 


훈육을 망쳐버린 어른은 부랴부랴 변명 하느라 雪이를 붙잡았던 팔에 힘이 풀렸다. 雪이의 모습을 보니까 오늘의 훈육이 왜 망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너도 지금 놓잖아?"를 문자로 옮겨 적은 것만 보면 영악을 넘어 시건방지게 보이지만, 雪이는, 누구는 반말을 누구는 높임말 써야 하는지에 대해 아직 정리가 안 되어 있었다. 만약 저 분이 다시 훈육을 시작한다면 '어른'의 범주부터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저 애는 그토록 영악해 보이지만 실상은 할아버지,할머니,아저씨,아주머니..등등이 '어른'이란 걸 모를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아직 똥오줌도 구분 못하는 어린애인 것이다. 세 돌 지난 아이한테 더 첩첩산중인 것은 집에선 할아버지든 할머니든 죄다 말 놓고 사는 데 새삼 왜 높혀야 하는지? 아니면 집 식구들은 그대로 놓고, 남한테는 높여야 한다고...'악 복잡해~' 이것도 세계에서 유래가 드물게 '높임말'이 특히 발달한 국어의 특징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애 한테 그럼 '국어의 특질'에 대해 한 학기 강의를 해?  


그럴 필요 없다. 아기가 자라면 언어예절이라든가 여러가지를 가르쳐야 하는 게 옳지만 자연스럽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방법은 雪이가 이미 알고 있다. '너도 지금 놓잖아' 속에 답이 있다. "雪이 이리 오세요~"하면 雪이는 대번에 "녜에~~~"하며 달려 온다. 


20110324. 




 

*사진은 雪이가 아니예요. 제 휴대폰에 雪이 사진이 있긴 한데 컴에 올리기가 번거로워서..가 아니라 아직 배우지 않아서 할 줄 몰라요^^;;; 그래서 다음의 tv팟에 올려진 푸른바람(강정선)님의 동영상(http://tvpot.daum.net/my/ClipView.do?ownerid=NJqmfhQfrpA0&clipid=30684328&lu=v_title) 사진을 빌려 왔습니다. 설이는 저 아기보다 좀 더 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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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11-03-28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학교 들어가기 전 꼬맹이들에게는 꼭 존칭을 써야한다고 배웠어요. 어디서 배웠더라? 아무튼 주위의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배운거예요. 그래서 어린 꼬마 친구들에게는 꼭 존댓말로 말을 걸어요. 길에서 마주친 아이에게도 말이죠 ^^
그런데 그러는 저도... 말안듣는 고등학생 녀석들에게는 가끔 막 욕도해요. 야, 이 자식아! 막 그러면서... ^^;;;;;;;;;

진주 2011-03-28 21:20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학교들어가기 전의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해야하는건가요?
아아..저도 조금 늙었나봐요.예전엔 영악한 애들 싫어했는데 이젠 애들이라면 다 사랑스러워요. 말 안 듣는 고딩이들도 귀여운 거 있죠ㅋㅋ 귀여워서 저도 욕(?)스러운 발음들을 제법 한답니다ㅋ

chika 2011-03-29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학교들어가기 전 아이들,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따라 배우는 연령대의 아이들을 말하는 것 같아요. 설이가 반말을 하는것도 주위 어른들이 모두 반말을 하니까 따라한 것 뿐인거고요. ^^

저는 슬금슬금 피하는 녀석들까지 대인배처럼 막 먼저 아는척하고 인사할만큼만(?) 사랑스러워요. ㅎㅎㅎ
 

우뇌의 80%이상이 망가졌던 우리 아버지,
그래서 방금 종종 썬 찐빵을 우유에 적셔 친히 맛있게 드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빈 그릇을 보며, 이게 뭐냐,고 물으시던,

우리 아버지. 

"아부지, 어느 부분이 제일 마음에 와닿으세요?" 한 달만에 주기도문 풀이를 끝내고 그렇게 묻자, 아버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참을 생각하시다가, ....그럼 다시 천천히 읽어줘보래이~, 하셨다. 그래서 나는 또박또박 낭송하였고 아멘- 소리 끝나기 무섭게 아버지는, 거기!,를 외치셨다. 

거기! 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 부분이데이~사람이마, 양심이 있어야 하닝기래이~
아무리 신이 사람 죄를 다 용서해준다꼬는 하지마능
지는 남을 쪼맨치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용서 운운 케쌓는 것은 낯짝도 없는 짓이제이.... 

하셨다. 그때 나는 대단한 걸 아는냥 학자이셨던 아버지 앞에서 까불었지만 아버지는 나한테 유언을 하신 것이다. 믿는다고 성경책보만 끼고 교회 마당만 밟지 말고 신자가 되라고. 하나님 말씀을 아는 것으로만 끝내지 말고 진심으로 깨닫고 진정으로 실천하라고. 나는 진정 신자가 되었는가? 말씀을 배운지 수십년이 지나가는데 아직도 나는 내게 고까운 말 한 마디에 가슴 아프다고 누군가를 용서치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20110326ㅌ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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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7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라딘에 책만 사러 다니다가 '서재'라는 기능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서재를 열고 뭔가 끄적거리며 쓰기 시작한지가 한 10년 세월이 흘렀을까..
지금 내 서재의 페이퍼들은 대부분 자물쇠로 채워져 있는데
세어보니 9개의 방이 비공개로 잠궈져 있다.
그 중에서 일기처럼 일상을 쓴 '쉴만한 물가'란
페이퍼에는 약 420개의 글이 숨어 있다. 


요즘처럼 이렇게 마음이 바특거릴 땐,
다른 책 읽는 것보다 예전의 나의 흔적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래는 2005년 어느 날의 내 마음의 풍경이다.  

 

 평화로운 풍경(2)

 

골목을 지나다가 꼬마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노는 모습이 평화롭게 보인다. 해묵은 시멘트 바닥이 여기저기 갈라지고 뜯겨나가 누덕누덕한 그 위에서 아이들은 곰실거리며 조고만 손으로 장난을 치거나 깔깔 웃는다. 배냇머리칼이 햇살에 노랗게 나폴거리고 귀여운 곰이 그려진 옷을 입고, 인형같이 조그만 신발을 신은 아이들이 바닥에 앉아서 곰살맞게 노는 모습은 내 마음을 편안하게 진정시켜준다.

해맑은 웃음을 웃는 아이들을 보노라면, 그 애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저 아이들을 위해 좀 더 좋은 세상이 되어야 겠고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2005.ㅊㅁ 

 

 

그 전날 '평화로운 풍경'이란 제목으로 글을 올렸고 이 날도 연이어 평화로운 풍경을 옛날의 나는 읊고 있다. 기억을 들추어 보면 그 당시 내 삶이란 것도 지금과 다를 바 없이 퍽퍽하기 이루 말할 데 없었다. 그 즈음의 다른 페이퍼에서 보듯이-3시간밖에 못 잤다거나, 저녁밥 먹을 시간도 없이 하루에 10간도 넘는 강의를 소화해내느라 목은 쉬어 빠지고 기력이 탈진했다는 이야기, 어렴풋이 기억나기론 아마 저 날도 종종거리며 수업 다니는 도중에 본 골목 풍경이었을 것이다- 내 육신과 마음은 조악한 현실에 무참히 뭉개지고 있었는데 평화의 단상을 읊조리는 내가 새삼 기특하다.  매의 눈을 가졌다면 저 걱정없어 뵈는 단상의 배경엔 평화롭고 아늑한 삶에 기갈들린 나의 안쓰러운 욕구가 배어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다시 보니까 그 시절의 아픔까지도 평화로워 보인다.  평화를 노래해서 평화롭다기 보다 지금에서 저 글을 보는 나는 세월이 지나니 진심으로 평화롭게 보인다는 것이다. 



얼마 지나면 '오늘'도 보이지 않는 방으로 숨겨질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어느 미래에 나이가 더 든 나는
마흔 다섯의 나를 되돌아보고 있을 것이다.
큰 일을 겪었군. 그때 내 맘이 많이 아팠지, 라든가 
흠  공연한 일에 화를 내었군...하면서 
어쨌거나 지나고보니 그마저도 평화롭군.
할지도 모른다.20110310ㅁ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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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0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1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1-03-12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지도 모를 저 아이들을 위해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애쓰시는 님의 마음씀이 참 예뻐요.
저도 그런 맘으로 살아야 겠습니다. 땡큐^*^

진주 2011-03-15 10:58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그런 얘기 아닌데^^;;
 

 시간에 쫒길 일 없는 토요일 아침, 게으른 아침밥을 먹고 컴퓨터를 켜다가 하마터면 뜨거운 커피에 입을 다 데일 뻔 했다. 메인창에 '박완서 별세'라고 떠있었다.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났다. 관련기사들을 클릭해보니 변동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박완서 선생님은 오늘 2011년 1월 22일 아침 6시경 향년 80세로 담낭암으로 돌아가셨단다. 
 
===============선생님 약력을 다른 데서 빌려오는 것보다는 낫지 싶어서 알라딘에서 퍼옴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생.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작품으로는 소설집 『엄마의 말뚝』『꽃을 찾아서』『저문 날의 삽화』『한 말씀만 하소서』『너무도 쓸쓸한 당신』『친절한 복희씨』 등이 있고,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서 있는 여자』『그해 겨울은 따뜻했네』『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미망』『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아주 오래된 농담』『그 남자네 집』 등이 있다.
또한 동화집 『나 어릴 적에』『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부숭이의 땅힘』『보시니 참 좋았다』 등과 수필집 『세 가지 소원』『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살아 있는 날의 소망』『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어른노릇 사람노릇』 『두부』 『호미』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대한민국문학상(1990), 이산문학상(1991),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 등을 수상하였다.  

박경리 선생님 작고하신지 얼마 안 되서 또 문단에 큰 별이 지니 황량한 겨울들판처럼 마음이 허허롭다. 박경리 선생님 문인장 때 맏상주(문단의 맏상주, 장례위원장)로 서셨던 선생님을 뵈었을 때, '생각보다 많이 늙으셨구나'내심 걱정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연이어 가실 줄은 몰랐다. 문단에서는 어떻게 인정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겐 박경리 선생님이 아버지라면 박완서님은 어머니와 같이 느껴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놀란 마음도 어머니가 함께 계셔 저으기 안심도 되었는데 이제 그 어머니도 가시니 가슴 한군데 뚫린 것같다. 이렇게 말하니까 마치 내가 그 분의 문하생이라도 된 것 같다. 특별한 친분이라곤 눈곱만치도 없고 그저 그분의 책을 읽으며 그분의 글에 알게모르게 영향력을 받은 대한민국의 갑남을녀일 뿐이다.  

내가 스무 살 무렵,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시내 찻집과 음악감상실 같은 데를 죄다 쑤시고 다녔는데 그 가운데서도 대구백화점 근처 '나목'이라는 커피숍은 잊지 못한다. 박완서님의 처녀작 『나목』에서 이름을 따왔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인테리어와 분위기에서 문학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 곳에서 나는 박완서님의 약력이나 책 목록들을 꿰차고 아는 체 했고 겉멋에 취해 라이너 마리아 릴케책을 끼고 다니며 詩를 외우고 유안진의 지란지교 따위를 베꼈다. 그리고 그때 얼핏 풋내나는 첫사랑이란 것도 했었지. 

그 후로도 잠못 드는 밤 서성이다가 선생님의 책을 끼고 읽다보면 어느덧 평온해졌고 두 아이를 낳아 키우는 중에도 선생님 작품은 내 삶에 힘이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껏 가장 꾸준히 읽힌 작가가 바로 박완서 선생님이시다. 내 속에 그분의 작품이 녹아 그 자양분으로 자란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선생님 작품 전부는 못 읽었더라도 얼추 읽었으라는 것은 순전히 어리석은 내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등단 후 40여년 세월동안 선생님은 치열한 글쓰기로 수많은 책들을 세상에 낳으셨건만 이 불성실한 독자는 따라 읽어내는 것도 벅찼나 보다. 검색해보니 못 본 책이 너무 많다. 제목이 낯익어서 읽은 책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책도 있다. 앞으로 남은 책들을 차곡차곡 읽어가며 얼마나 그 분을 그리워하게 될까... 

 박완서 선생님과 내가 양띠 띠동갑이라고 자랑한 적도 있다. 친해지고 싶으나 뾰족한 연결고리가 없으니 하다못해 그것이라도 자랑하는 천진한 독자가 있었다는 걸 선생님은 영원히 모르시리라. 닮고 싶은 유일한 글, 현란하지 않으며 유려하고 혹독한 현실을 고발하지만 담담하고 푸근한 선생님의 문체, 글맛을 내 맘대로 '싱아'맛이라고 상상했었다. 싱아 맛은 모르지만『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으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고, 손 뻗으면 닿이는 곳에 있어서 언제든지 맛볼 수 있으며, 추억에 젖게 하는 그런 맛이라고 알게 된다. 읽는 이로 하여금 수필과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선생님의 자전적 소설같은 그런 소설을 언젠가 나도 써보고 싶다. 

이번 문인장에서는 누가 맏상주로 설까를 궁금해 하는 것을 보니 나는 이제 오늘의 현실로 돌아온 것 같다. 작년 여름 2010년에 현대문학에서 발간 된 선생님의 마지막 산문집『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주문하면서 이제 작별해야겠다. 선생님은 가셨어도 작품세계는 영원하리. 선생님,박완서 선생님, 그동안 고맙습니다. 편히 쉬세요.20110122ㅌㅂㅊㅁ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젊은시절의 박완서 선생님 사진, 참 고우시다. 
          친정 낡은 사진첩 속의 우리엄마 머리 모양과 비슷. 그 시절 유행했던 모양일까? 
                   사진 무단으로 실었는데 이번만 용서해주세요(작게 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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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11-01-22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 흑백 사진 속의 어머니들은 어쩜 그렇게 하나 같이 예쁠까요?
어린 날엔 우리 엄마니까 예쁜 줄 알았는데,
아이 저만할 때, 젊었을 때 예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도 세월이 가르쳐준 비밀 중의 하나인 것 같아요.
흑백 사진이 주는 친근함도 한 몫을 하겠지요.
가난한 문인들에게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하셨다는 말씀에서
어머니 마음을 느낍니다.
평온하게 가셨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_()_

진주 2011-01-22 20:43   좋아요 0 | URL
사진 줄이니까 더 이쁘게 보이네요^^*
저도 이 나이 되고 보니까 젊음이 예쁘다는 걸 아네요...
혜덕화님, 우리가 팔순까지 산다면 그때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박완서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 최근 모습을 봐도 아름다운 할머니이셨잖아요.

울보 2011-01-22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고우셨네요,,,,

진주 2011-01-23 13:0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프레이야 2011-01-23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늘 저녁에야 소식 보고 깜짝 놀랐어요.
담낭암과 싸우고 계신 줄도 몰랐어요.
맨 아래 저 흑백사진 속 모습이 참 어여쁘지요.
최근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명복을 비는 제마음으로 살까합니다.

진주 2011-01-23 13:16   좋아요 0 | URL
저도 투병 소식은 몰랐어요.
몸 불편한 중에서도 쉼없이 글 쓰시다
마지막까지 책을 내시니 부끄럽습니다.
아직 발표 안 한 작품이 있다면 자손들이 유고집도 낼지 모르겠네요..

잉크냄새 2011-01-23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독자 한분 기억하시며 흙으로 돌아가셨을겁니다.

진주 2011-01-24 11:58   좋아요 0 | URL
박완서님만큼 독자층이 두둑한 분도 없으시겠다 싶어요.
글쓴이는 일일이 다 모르고 가셔도 읽는 이들 가슴에 오래토록 남겠지요.

라로 2011-01-26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투병중이셨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그날 아침 소식을 듣는데 날벼락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정말 제가 좋아하는 작가시고,,,언제나 우리곁에 계셔 주실 줄 알았는데,,
연세가 그렇게 많으셨다는 것도 새삼스러웠고...글 감사합니다.

진주 2011-01-28 13:53   좋아요 0 | URL
우리집엔 딸이 많아서 번갈아 가면서 부모님 생일 케이크를 사는데요, 제 차례될 때마다 놀라요. 연세만큼 초를 챙기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죠. 엄마가 나이 드시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박완서 선생님도 오랫동안 우리 곁에서 글 써주시길 바라는 맘은 누구나 한결 같을 거예요. 그래서 우린 그 분 나이를 우리 맘대로 깎아버린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