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을 나열해 보는 일은 재미있다. 목록이 얼마나 다양한 성질을 지니는가에 대해서는 움베르토 에코가 쓴 『궁극의 리스트』를 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다. 사물의 목록, 장소의 목록, 신기한 것들의 목록, 현기증 나는 목록, 실용적 목록, 시적 목록은 물론 심지어 정상적이지 않은 목록까지, 그가 고찰해 보지 않은 목록을 찾기가 도리어 힘들 정도다.

 

이 가운데 '책의 목록'이 빠질 리는 없다.

 

책 목록에 대한 취향은 세르반테스부터 위스망스, 칼비노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을 매혹시켜 왔다. 더욱이 애서가들이 고서점의 카탈로그(확실히 실용적 목록으로 만들어진)를 무릉도원이나 욕망의 땅에 대한 황홀한 묘사처럼 읽는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쥘 베른의 독자들이 고요한 심해 탐험이나 무시무시한 바다 괴물과의 조우에서 즐거움을 얻듯이, 그들은 책 목록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고서 애호가인 마리오 프라츠는 1931년 문학 박람회 서적 시장의 카탈로그 15를 위해 쓴 텍스트에서, 애서가들이 고서점의 카탈로그를 읽을 때 느끼는 즐거움은 보통 사람들이 스릴러물을 읽으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똑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 어떤 독서도 흥미로운 카탈로그의 그것만큼 신속하고 감동적인 효과를 자아내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장 뒤에 바로, 심지어 재미없는 카탈로그들도 똑같이 흥미롭게 읽힐 수 있음을 우리에게 깨우쳐 준다.(377쪽)

 

 - 움베르토 에코, 『궁극의 리스트』

 

 

딱 맞는 말이다. 내가 오늘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경험한 일은 '쓸데 없는 책들을 골라내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추려낸 '내다버릴 책들의 목록'을 보니 문득 그것조차 몹시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려질 책의 '가련한 신세'에 비춰 보나, 그 책을 내다버릴 내가 품게 되는 '온갖 어리석음과 회한의 감정'에 비춰 보나, 버려질 책들의 제목이 여간 웃기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여기서 '개'는 결국 '나'인 셈이다. 내가 뭘 보았기에 이런 책을 사게 되었나?

『빌 게이츠의 미래로 가는 길』---> 빌 게이츠가 '미래'를 제시하던 시대는 벌써 까마득한 옛날 아닌가?

『iCON 스티브잡스』---> 스티브 잡스는 이미 '아이콘'이 아니라 '아이해브곤'이 된 사람이다.

『마음의 녹슨 갑옷』---> '너'야말로 '내 마음의 책장에서 녹슨 책'이 되었다.

『마이클 포터의 경쟁론』---> '너'야말로 '책장 경쟁'에서 밀려난 책인데?

『이건희 개혁 10년』---> 이건희 '병상' 10년?

『사다리 걷어차기』---> 결국 책장 사다리에서 걷어차인 책?

『스타벅스, 커피 한 잔에 담긴 성공신화』---> 커피 한 잔과 함께 쫒겨난 책.

『MARKETING is ... WAR』---> 책장 자리다툼 또한 전쟁이야. 살아 남거나 쫒겨나거나 결국 둘 중에 하나야.

『무엇이 내 아들을 그토록 힘들게 하는가』---> 무엇이 '내 책장'을 그토록 복잡하게 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천년을 산다』---> 우리는 여기서 10년도 못 살고 쫒겨나고 만다.

『1494년 베니스 회계』---> 2017년 여름 회계. 이미 계산은 끝났어.

『앤드류 그로브, 승자의 법칙』---> 10년도 못 견디고 책장에서 쫒겨나게 된, '패자가 된 책들의 법칙'은?

『보랏빝 소가 온다』---> 보랏빛 '수레'가 온다. 헌 책을 내다버릴 때 끌고 갈 수레가.

 

 

오른쪽 구석에 누워 있는 책들 가운데 땅바닥에 쌓인 책들은 곧 '쫒겨날 책들'이고, 그나마 조그만 장롱 같은 '받침대' 위에 누워 있는 책들은 언젠가 '책장 속으로 들어갈 책들'이다. 이 사진으로는 구분이 쉽지 않다.

 

 

곧 내쫒길 운명에 처한 책들은 '앞줄'에 쪼로록 모여 앉은 67권이다. 저자로부터 선물받은 책도 몇 권 있어서 눈에 밟히지만, 이런 저런 사정을 다 헤아리자면 '작별'이 어렵다. 내칠 땐 과감하게 내쳐야 한다. 책값이 아깝지만 그동한 '허투루 쓴 돈'이 어디 책값 뿐이랴.

 

 

이 각도에서 보면 '책장 속으로 들어갈 책들'이 확연히 구분된다. 책탑이 무려 '일곱 기둥'을 이룬 덕분에, 뜻하지 않게 '받침대'로 쓰여 왔던 '조그만 장롱'이 마침내 열리지 않게 되었노라고 (아내한테서) 타박을 받았다. '참을 수 없는 책들의 무거움'으로부터 장롱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쫒겨나야 할 책들을 골라내는 수밖에.

 

 

고작 67권을 골라냈을 뿐인데, 책장이 한결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저렇게 비워진 공간 덕분에 책탑을 세 개나 없앴고, 오랫동안 '책들의 압박'을 온몸으로 견디며 누워 지내다 마침내 벌떡 일어나 몸을 꽂꽂이 세운 책들은 한 눈에 봐도 입이 귀에 걸렸다. 가령,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책장'을 찾아서.

『마담 보바리』---> 책장 밖에서 사는 동안 내가 얼마나 '멋진 책장'을 열망했는지 니들은 모를 꺼야.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나는 죽어 누워 가더라도 '꼭 가야 할 책장'이 있단다.

『말괄량이 길들이기』---> 거친 들판에서 오랜 시간 길들여진 덕분에 마침내 '책장'이라는 평화를 얻었어.

『한여름 밤의 꿈』---> 이게 꿈이냐? 생시냐?

『셰익스피어 전집_햄릿』---> 이대로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그게 늘 문제였어.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 내게도 책장이 찾아왔다.

『전쟁과 평화』---> 책장과 평화.

『로빈슨 크루소』---> 그런데 프라이데이는?

『걸리버 여행기』---> 내가 지금 어디로 날아온 거지? 천공의 섬 라퓨타? 기분이 붕붕~

『고도를 기다리며』--->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여기가 확실하냐?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먼바다에 섬들이 있소. …… 새들은 그곳에서 살다가 이곳에 와서 죽소."

『자기 앞의 생』---> "나는 이제 열 살이 되었다. 로자 아줌마는 내게도 생일이란 게 필요하다면서 한 날을 내 생일로 정해주었는데, 그게 오늘이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이런 글을 쓰고 나니 문득 로맹 가리의 소설들이 그립다. http://blog.aladin.co.kr/oren/7383466

갑자기 밀어닥친 파도에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휩쓸려 떠내려간 '불쌍한 책들'도 어느새 그립고...

 

"몇 미터만 더 갔으면 물결에 휩쓸려갔을 거요. 이곳 파도는 몹시 사납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 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린아이를 연상시켰다. 사랑의 슬픔이군, 하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언제나 문제는 실연의 아픔이지.

 

"이 새들은 모두 어디서 오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먼바다에 섬들이 있소. 조분석 섬들이오. 새들은 그곳에서 살다가 이곳에 와서 죽소."

 

"왜요?"

 

"모르겠소. 갖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왜 여기로 왔죠?"

 

 -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펼친 부분 접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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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17-08-03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갈하게 꼽혀 있는 책들. 보는것만으로도 즐겁네요.^^

oren 2017-08-03 11:36   좋아요 0 | URL
책은 아무리 봐도 누워 있는 모습보다 책장 속에 빽빽히 세워져 있는 모습이 좋은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 2017-08-03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정된 공간에 어떤 책을 남기는가는 누구에게나 고민이 되는 문제닌 듯 합니다. 마치 얼마 전 본 영화 「덩케르크」에서처럼 영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승선할 병사를 골라야하는 것과 같은 선택의 문제가 느껴집니다^^: 영화에서는 환자를 먼저 이송했습니다만, 책을 고를 때 그래서는 안되겠지만요.

oren 2017-08-03 11:40   좋아요 1 | URL
책이나 사람이나 어느날 갑자기 버림받는 존재로 전락할 때처럼 슬픈 순간은 없겠죠.
겨울호랑이 님 말씀처럼 ‘다 태울 수 없을 땐‘ 결국 누군가는 남아야겠죠. 책이든, 사람이든요.

qualia 2017-08-03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많은 책들을 모두 전자책으로 만들어 아이패드나 서피스 프로 같은 전자책 단말기에 저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종이책들을 보관하기 위한 물리적 현실 공간이 없어도 되니까요. 손바닥보다 작은 SSD에 수천~수만 권을 저장할 수 있고, 필요할 때마다 화면에 띄워서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종이책과 전자책의 장단점,각각의 고유성 등등은 모두들 잘 알고 있는 사항이니까 재론할 필요는 없지요.

그런데 전자책 단말기의 기술 수준이 아직도 너무나 불완전하다는 생각입니다. 전자잉크(e-ink)에 기반한 전자종이(e-paper) 디스플레이를 채택한 단말기는 종이의 고유 질감(시각적 질감)을 어느 정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에 장시간 들여다봐도 눈에 거의 부담을 주지 않는다고들 하죠. 하지만 응답 속도가 너무 느려 잔상이 끌리고, 고해상도 구현이 비교적 어렵고, 컬러 화면 구현도 우수하지 않은 편인 데다 이쪽 방면 기술 개발도 지지부진한 형편이고, 동영상 구현은 아주 어려운 편이죠. 반면에 LCD나 OLED 디스플레이는 전자종이 디스플레이의 종이 질감을 거의 구현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장시간 들여다볼 경우 눈에 상당한 부담을 주죠. 하지만 전자종이 디스플레이의 단점들은 거의 모두 극복한 현존하는 가장 우수한 형태의 디스플레이라고 할 수 있죠. 해서 전자종이 디스플레이의 종이 질감과 LCD/OLED 디스플레이의 빠른 응답 속도, 초고해상도, 완벽한 색재현율, 완벽한 동영상 재생 능력 등등, 양쪽의 장점들을 모두 지닌 최강의 전자책 디스플레이가 개발돼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헌데 지구인들의 과학기술 발전 속도가 의외로 느리다는 게 문제입니다. 지금 21세기 하고도 17년이 지난 시점인데요. 언론이나 대중서에서는 1970년대, 1980년대 미래학자들의 예측이 거의 맞아떨어졌다고 인간의 능력에 대해 자화자찬하고 지구인들의 놀라운 과학기술적 성과에 대해 호들갑을 떨어대고 있는데요. 제 판단엔 그건 지구인들의 자뻑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미래학자들의 과장으로 가득찬 환상적 혹은 공상적 미래 예측 대부분이 21세기 초에 실현은커녕 과연 원미래에라도 실현 가능이나 할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지경이니까요. 즉 그 시대 미래학자들이 21세기 초에 실현돼 일상화되리라 예측한 달 정복, 인간형 로봇과의 공존, 암 정복, 핵융합 상용화, 진정한 의미의 양자컴퓨터 상용화, 사이보그, 초인공지능, 홀로그램(예컨대 홀로그램 스마트폰), 우주 태양열 발전 전력 전송, 나노봇 수술 등등 수많은 환상적 혹은 SF 영화적 과학기술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전혀 실현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솔까 어느 원미래에 실현될 수 있을지 감을 잡기조차 어렵다고 보는 게 냉정하고도 정확한 실태 파악이라고 봅니다. 21세기 초의 지구인들은 할리우드가 양산하는 SF 영화 세례를 너무 많이 받은 나머지 과학기술적 착시에 빠져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2016년 03월 AlphaGo의 화려한(?) 등장 뒤로 나타난 인공지능에 대한 지구인, 특히 한국인들의 일종의 신격화(신비화 혹은 우상화) 현상이라고 봅니다. 인공지능 관련 기사가 뜨면 터미네이터, 스카이넷, 특이점, 인류에 대한 반란, 인류 멸종, AI의 지구 접수 운운하는 SF 영화적 공상들이 댓글란 최상위 자리를 점령해버립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무작정스러운 공포, 다른 말로 신격화·신비화·우상화는 거의 맹신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댓글을 쓰다 보니까 제가 좀 멀리 와버린 느낌이 들긴 하는데요. 요컨대 21세기 초 지구인들의 과학기술적 역량과 성과가 지나치게 부풀려진 측면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유발 하라리 · 레이 커즈와일 · 닉 보스트롬(?) · 일론 머스크와 같은 유명 학자 · 미래학자 · 저술가 · 기업가들까지도 직간접/음양 여러 형태로 그런 부풀리기, 공포 조장, 선정적 발언에 가세하고 있다는 것이죠. 아이러니하게도 혹은 역설적으로 모두들 지구인의 역량을 과대 평가하는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아직도 지구인들은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쓸 만한 전자책 단말기 하나 제대로 만들지도 못하는 수준인데 말이죠.

저는 oren 님께서 저렇게 소중한 책들을 대거 내다버리기로 결단하신 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솔까 저는 제가 입을 대로 입어서 해진 헌옷조차 버리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최근 저는 제가 작성해온 소중한 문서들을 대거 상실하는 아픔을 맛보았습니다. 그 사건은 저한테 한 개인의 정체성과 동일성은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며, 어떻게 유지되고, 심지어 어떻게 복제되고 전송될(mind-uploading)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사유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런데 oren 님께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책들의 목록」이란 글을 올리셨지 뭡니까. 바로 oren 님의 이 글을 읽어보니 제 기록 상실의 아픔(슬픔)과 딱 겹치는 부분이 너무 많지 뭡니까. 하아~ 게다가 최근 어떤 일을 나갔다가 경험한 느낌과 너무나도 흡사했습니다. 자세히 밝히고 싶진 않지만 한 대학 도서관에서 폐기하기로 한 산더미 같은 외국어 원서들(Cambridge University Press, Oxford University Press 출간 책들이 대부분이었음)을 목격하고 경악했던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곳 도서관 한 서가에서 아마도 노년에 접어든 교육자나 학자였을 법한 분이 기증한 두어 책장 분량의 귀가 헐고 고색창연한(?) 책들을 보고 일종의 어떤 허무감을 느꼈던 일이었습니다. 이 많은 책을 기증하신 분은 어떤 분이실까? 자신의 기억과 추억이 이곳 도서관으로 옮겨와 다른 수많은 학생 · 독자들의 기억과 추억 속으로 다시 들어가 살기를 원하셨던 것일까? 그분이 기증한 책들은 희귀한 고가의 외국어 원서들까지 폐기되는 슬픈 운명을 과연 피해갈 수 있을까? 그날 도서관에서 느꼈던 허무감이 다시 느껴집니다. 해서 oren 님의 윗글은 다시금 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저 처분할 책들도 지금 이 순간까지 oren 님의 뇌신경망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oren 님의 기억과 추억을 형성했을 것이고, 그 기억과 추억은 oren 님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을 것이고 동일성(identity) 또한 구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도 어떤 방식으로든 처분해야 할 책들이 있습니다. 처분하기 전에 스캔해서 전자책으로 만들어 단말기 속에 저장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기억과 추억들은 더욱 더 온전하고 영구적인(?) 형태로 유지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해킹을 당하거나 파괴돼 상실할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그에 대한 대책을 함께 강구해야겠지요. 옛날처럼 연필로 (볼)펜으로 공책에 직접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써가며 기록하던 때가 그리울 정도입니다. 컴퓨터 자판으로 치고 기록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간편하고 많이 저장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펜과 공책은 거의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기록 상실을 경험하고 나니까 다시 펜과 공책을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기록 보존에 더 안전하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하고요. (깊지도 못하지만) 뭔가 더 쓸 내용이 있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동어반복 그만하고 컴퓨터가 불시에 다운되는 불상사를 피해 얼른 입력해야겠네요. 아무튼 여러 가지 깊은 생각거리를 주는 윗글을 써주신 oren 님께 감사드립니다.

oren 2017-08-03 12:35   좋아요 0 | URL
제가 쓴 보잘것 없는 글 하나에 qualia 님께서 아주 진지한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여러모로 생각해 볼 바가 많아서 아주 유익한 참고가 되었습니다. 정성스런 댓글에 우선 감사드리고요.

qualia 님께서 말씀해 주신 여러 내용들에 일일이 제 생각을 다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제가 이런 글을 쓴 취지나 배경을 살짝 덧붙여 말씀드려볼까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저는 ‘잡다한 책들‘을 좀 싫어하는 편입니다. 물론 어떤 책이든 없는 것보다야 내 주위에 가까이 있는 게 좋을 지 모르겠지만, 가만 보면 ‘쓰레기 같은 책들‘도 많은 게 사실이거든요. 제가 이런저런 책들을 내다버릴 생각으로 고르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들이 저마다 처음 나왔을 때에는 저자와 출판사와 서점과 독자들이 다들 ‘한때나마 뜨겁게 열광했을지 모르겠지만‘ 이젠 (제 기준으로 봐서는) 수명을 다한 책이 되고 말았구나, 싶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답니다. 낡고, 녹슬고, 쓸모가 없어지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책들을 도대체 내가 왜 ‘책장 속에 반듯하게 모셔 놓아야 한단 말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그 자리에 대신 들어앉을 자격이 충분한 책들도 ‘책장 밖에서‘ 저토록 오래 짓눌려 신음하고 있는데 말이지요.(심지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조차도 책장 속에 들어가지 못했답니다. 이번에도요.)

물론 책장을 거실 공간으로까지 확대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겠으나 굳이 그러고 싶지 않더군요. 제 기준으로는 이미 ‘폐기 처분‘ 받아도 충분한 책들이 꽤나 많이 있고, 굳이 그 책들을 끌어안으면서까지 다른 책들을 계속 수용하기 위해 ‘책장만 자꾸 늘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고 싶지 않더군요. 최인호의 소설 『상도』에 나오는 계영배(戒盈杯) 생각도 했답니다. 비울 줄 알아야 채울 수 있겠지요.『부의 미래』라는 책에서 엘빈 토플러가 말했던 대로 미래에는 ‘쓰레기 정보‘를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가 무척 중요해질 거라는 지적도 떠올렸답니다. ‘잡다한 책들‘을 자주 내다버릴 수 있어야 보다 더 가치있고 훌륭한 책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저는 늘 믿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 책장엔 아직도 내다버릴 책들이 수두룩하답니다. 인생은 어쨌든 ‘여행‘이나 마찬가지인데, 떠메고 다닐 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여행은 번잡하고 힘이 들 수밖에 없겠지요.

보다 더 간소하게! 보다 더 단순하게! 아무튼 꾸준히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 게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것이 책이 되었든, 인간관계가 되었든, 여행이 되었든 말이지요. 그러니 ‘독서‘에서도 책은 늘 덜어내고, 다시 채워야 할 우물이나 샘물 같은 것이 되어야지 계속 쌓아놓기만 하는 웅덩이 같은 식으로 관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책에서 길어올린 맑은 샘물 같은 청량한 느낌들은 ‘기억‘ 속에 가득 채우는 것으로도 이미 충분할테고요. 그 ‘기억‘ 마저도 언젠가는 다 반납할 날이 결국 찾아 오겠지만, 죽는 순간까지라도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들‘을 끊임없이 계속 채워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서 보람을 찾고 싶습니다. 제게 잡다하게만 느껴지는 책들을 이만큼 내다버리는 일은 그런 ‘시원한 물‘을 찾는 데 조금도 지장을 주지 않으리라 믿고요. 저도 쓰다보니 댓글이 엄청 길어졌군요. 아무튼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이 댓글을 쓰는 지금도 ‘오늘 저녁에라도‘ 내다버릴 다른 책들을 좀 더 골라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무튼 저는 언제나 누워서 낑낑대는 저 책들을 하루라도 더 빨리 일으켜 주고 세워 주고 싶답니다.^^

라로 2017-08-03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3주 전에 200여권을 내다 팔고(알라딘), 밑줄이 많아서 매입 불가라고 한 책들은 알라딘 중고서점에 오신 분들에게 가져가라고 했어요. 님처럼 사진이라도 찍어둘 것을,,,그때는 알라딘을 안하던때라,,,막 아쉽네요. 처리하시는 책은 주로 자기 계발서이고 간직하시는 책은 역시 고전이군요!!

oren 2017-08-03 13:45   좋아요 0 | URL
200여 권을 한꺼번에 정리하셨다니 대단하시네요... 그 많은 책들을 나르느라 힘드셨겠어요. 저도 이번에 정리할 책들을 ‘알라딘 중고서점‘에라도 팔아볼까 싶어서 ‘검색‘해 봤더니 사주겠다는 책이 겨우 열 권 남짓이더군요. 그래도 몇 권은 ‘매입 단가‘가 제법 되던데, ‘1,000원짜리‘ 책으로 전락한 경우도 많아서 적잖이 놀랐답니다.

라로 2017-08-03 14:43   좋아요 0 | URL
큰 박스로 7박스정도 되었어요. 그 얘기는 언제 시간이 되면 하려고 했는데 오렌님께 먼저 하네요. ㅎㅎㅎㅎ 남편과 큰아들이 번갈아가며 날라왔는데 알라딘 직원이 한 명이었고 저는 문닫기 1시간 정도 전에 가서 그 직원이 고생하며 해준 기억이 나요. 그런데 거기에는 10권의 매입을 도와주는데 걸리는 시간이 5분이라고 적혀있더군요. 하지만 그 직원은 다른 손님들의 계산을 도와주랴 제 책을 매입하랴 정말 미안했어요. 영업시간이 끝나고도 계속 해야 했거든요. 제가 판매한 책도 대부분 $1.00에 책정된 책이 많더군요. 속상했지만 알라딘에서 매입을 안해주면 도서관에라도 기부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헐값에 팔았지요. 근데 그 책들 팔아서 아들 녀석 캠프 가는데 사용했어요. 허무하더군요.

oren 2017-08-03 19:49   좋아요 0 | URL
큰 박스로 7박스면 굉장한 부피와 무게였군요. 책이 또 오죽이나 무거운가요. 그런데도 대부분 1달러 아니면 빵달러였다니 그쪽 사정도 별로 좋진 않군요. 저도 ‘알라딘 매입 예상가‘ 조회를 해봤더니, 25,000원이나 28,000원씩 주고 샀던 비싼 책들도 단돈 1,000원밖에 안 쳐주겠다고 하니 시쳇말로 빡치겠더군요. 주위에 널려 있는 동네 도서관에 가져가서 기부하자니 거기서 과연 받아줄까 싶기도 하고 또 이런 책을 찾는 이들로 별로 없을 듯해서 그냥 식사동에 있는 ‘집현전‘이라는 중고서점에 갖다줄까 싶어요. 거기에선 어쩐지 ‘임자‘를 만날 책도 혹시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cyrus 2017-08-0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탑의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군요. 저도 꽂지 못한 책들을 탑처럼 만들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제 방에 있는 책탑은 피사의 사탑처럼 약간 기울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책을 더 올렸다간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무너져버릴 겁니다. ^^

oren 2017-08-03 13:49   좋아요 0 | URL
사진으로 보시는 대로입니다. 새로운 탑을 만들면서 약간 낮아진 측면도 있고요. 책탑이 딱 한 번 무너진 적이 있었는데 엄청난 굉음이 나더라고요. 그때 얼마나 놀랐던지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카스피 2017-08-0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속에 가지런히 놓여진 책을 보니 넘 부럽습니당.제 책은 둘곳이 없아 모두 박스에 있으니 말이죠.서울에서 책 나눌 공간 1평을 눌리는데 천만원이 필요하다고하니 돈 없는 사람은 책을 보관하기도 힘든 세상인것 같습니다ㅜ.ㅜ

oren 2017-08-04 18:42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께서는 책을 ‘박스‘에 보관하시는군요. 말씀을 듣고 보니 박스 안에 갇힌 책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박스에 보관하시면 읽고 싶은 책들을 찾는데도 엄청 불편할 듯싶고요. 어서 빨리 책장을 마련하셔서 갇혀 지내는 책들이 빛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본유 관념(innate idea)과 빈 서판(tabula rasa)

 

겨울호랑이 님께서 여러 책들에서 인용해 주신 문장들 때문에 '본유 관념'과 '빈 서판' 이론뿐만 아니라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까지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베르그송은 그의 주저인 『창조적 진화』에서 과학의 역할과 철학의 역할을 아주 흥미롭고도 명쾌하게 비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들 가운데 이번에 겨울호랑이 님의 글 때문에 다시금 펼쳐 읽고 거듭 음미해 볼 만한 대목들을 '먼댓글 형식'으로 덧붙여 봅니다.

 

한가지 덧붙일 점은,『창조적 진화』의 제4장에서 겨울호랑이 님께서 인용해 주신 철학자들인 플라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이 아주 흥미롭게 다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4장은 '창조적 진화'의 본문 내용과는 사뭇 동떨어진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마치 부록과도 같은 장인데, 제목이 <사유의 영화적 기작과 기계론적 환상 - 철학 체계들의 역사 훑어보기 / 실재적 생성과 잘못된 진화론>입니다. 각 소절(小節)의 제목들은 <존재와 무>, <생성과 형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근대 과학>, <데카르트> ,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평행론과 일원론>, <칸트의 비판>, <스펜서의 진화론>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분량은 대략 140쪽 정도 됩니다. 아카넷에서 나온 『창조적 진화』는 전체 분량이 598쪽으로 조금 두껍지만 '문장이 워낙 아름다워서'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습니다. 1907년에 출간된 이 작품으로 그는 1928년에 '과학을 담은 철학책'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노벨문학상'까지 받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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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에 철학의 역할이 있는 것

 

…… 그러나 새로운 종의 생성에 대해 참인 것은 또한 새로운 개체의 생성에 대해서도 참이고, 일반적으로 생명체의 어떤 형태, 어떤 순간에 대해서도 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변이가 새로운 종을 생성하기 위해서 일정한 크기와 일반성에 도달해야 한다면, 그것은 각 생명체에서 매순간 연속적으로 보이지 않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돌연변이들 자체도 부화(孵化)의 작업 또는 차라리 숙성(熟成)의 작업이, 겉보기에는 불변적인 일련의 세대를 거쳐 이루어졌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생명에 대해 의식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매순간 무언가를 창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36)

 

생명의 진화가 빚어낸 우리의 지성은 행동을 조명하고, 우리가 사물에 대해 작용하도록 준비하며, 주어진 상황에 잇따르는 사건들의 유리함이나 불리함을 예측하는 것을 본질적 기능으로 한다. 따라서 지성은 한 상황에서 기지(旣知)의 것과 유사한 것을 본능적으로 분리해 낸다. 그것은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을 낳는다>라는 자신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도록 동일한 것을 찾는다. 상식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바로 이런 과정 속에 존재한다. 과학은 이 작업을 가능한 한 최고도의 정확성과 엄밀성에 이르게 하지만 그것의 본질적 특성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일상적 지식과 마찬가지로 과학은 사물로부터 반복의 측면만을 취한다. 모든 것이 독창적이라 해도 과학은 과거를 거의 유사하게 재생시키는 요소들과 국면들로 그것을 분석할 준비가 되어 있다. 과학은 반복된다고 간주되는 것, 즉 가정상 지속의 작용을 벗어나는 것 위에서만 작용할 수 있다. 한 역사의 잇따르는 순간들에서 환원불가능하고 비가역적인 것은 과학에 의해 포착될 수 없다. 이러한 환원불가능하고 비가역성을 표상하기 위해서는 사유의 근본적인 요구들에 부응하는 과학적 습관들과 결별해야 하며, 정신을 위반하고 지성의 자연적 경향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철학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생명이 우리의 목전에서 예측불가능한 형태의 연속적 창조처럼 진화한다고 해도 [지성에게는] 소용이 없다. 형태,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연속성은 그만큼의 무지가 반영된 순수한 외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언제나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상식에서 연속적인 역사로 나타나는 것은 잇따르는 상태들로 분해될 것이다. 당신에게 독창적 상태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분석하면 요소적 사실들로 분해되는데, 그것들 각각은 기지의 사실을 반복한 것이다. 당신이 예측불가능한 형태라고 부르는 것은 이전의 요소들을 새로이 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요소적 원인들의 전체가 이러한 배열을 결정하였으나, 그것들 자체는 이전의 원인이 새로운 순서로 반복되는 것이다. 그 요소들과 요소적 원인들을 알면 그것들의 총합이자 결과인 생명적 형태들의 윤곽을 미리 그려볼 수 있다. 현상의 생물학적 국면을 물리화학적 요소들로 분해한 후에 우리는 필요하다면 물리학과 화학 그 자체도 뛰어넘을 것이다. 우리는 물질 덩어리에서 분자들로, 분자들에서 원자들로, 원자들에서 미립자들로 갈 것이고, 결국 우리는 일종의 태양계처럼 천문학적으로 취급될 수 있는 어떤 것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39) 만약 그것을 부정한다면 당신은 과학적 기계론의 원리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고, 생명적 물질이 다른 것과 동일한 요소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독단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무기물과 유기물의 근본적인 동일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아야 할 유일한 문제는 생명체라 불리는 자연적 체계를 과학이 무기물질에서 절단해 내는 인공적 체계와 동일시해야 하는가, 아니면 차라리 그것을 우주 전체인 이 자연적 체계와 비교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생명이 일종의 기계장치라는 데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주 전체 또는 실재 전체에서 인공적으로 고립될 수 있는 기계장치인가? 실제 전체는 하나의 불가분적 연속성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말한 바 있다. 그 때 우리가 거기서 절단해 내는 체계들은 엄밀히 말해 그것의 부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전체 위에서 취해진 부분적 외관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부분적 외관들의 끝과 끝을 이어 맞추어 보아도 전체를 재구성하는 실마리조차 얻을 수 없다는 것은 한 대상의 사진들을 수천의 측면에서 겹쳐 찍어 보아야 본래서 물질성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생명을 물리화학적 현상들로 분해한다고 주장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분석해 보면 아마도 유기적 창조의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물리화학적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은 바로 거기서 멈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물리학과 화학이 우리에게 생명의 열쇠를 반드시 준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61∼66쪽)

 

36) 세아이유는 자신의 저서 『예술에서의 천재』에서 예술은 자연의 연장이며 생명은 창조라는 이중의 주장을 전개한다. 우리는 두 번째 정식(定式)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저작 말하듯이 창조는 요소들의 종합이라고 이해햐야 하는 것일까? 요소들이 이미 존재하는 곳에서 그것들로부터 이루어질 종합은 잠재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가능한 배열 중 하니일 뿐이다. 초인간적 지성이라면, 이 배열을 그것을 둘러싸는 가능한 모든 것들 사이에서 미리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생명의 영역에서 요소들은 실재적이고 분리된 존재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샐재적이고 분리된 요소들의 존재]은 불가분적 과정에 대한 정신의 다양한 관점들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전진의] 과정 속에 극단적 우연성이 있고, 선행하는 것과 잇따르는 것 사이에 통약불가능성이 존재하며, 결국 지속이 있다.

 

39)(역주) 소립자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당시는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돌 듯 전자들이 원자핵 주위를 돈다는 양자 역학의 원자 모형이 나오기 이전이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거대한 틈

 

…… 마지막으로 적충의 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아메바의 운동에 대한 물리화학적 설명은, 이 초보적 유기체를 자세히 관할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생명의 가장 미미한 형태들에서까지도 그들은 효과적인 심리적 활동성의 흔적을 파악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훈적인 것은, 조직한적 현상들에 대한 연구가 심화될수록 모든 것을 물리화학적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강화되는 대신 얼마나 자주 좌절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박물학자 윌슨이 세포의 발달에 바친 경탄할 만한 저서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요컨대 세포의 연구는, 생명의 가장 낮은 형태들조차도 무기계와 분리하는 거대한 틈을 좁히기보다는 넓히는 듯하다.>(71∼72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충분히 독립적이지 않으며 충분히 고립되어 있지도 않다

 

…… 그러나 사실상 생기론의 입장이 매우 곤란해지는 것은 자연 속에는 순수하게 내적인 목적성도 없고 절대적으로 구분된 개체성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개체를 구성하는 데 참여하는 유기적 요소들은 그 자체로 일정한 개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만약 개체가 자신의 생명 원리를 갖는다면, 그 요소들 역시 각각 자신의 생명 원리를 요구할 것이가. 그러나 다른 한편, 개체 그 자체는 우리가 그것에 고유한 <생명 원리>를 부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독립적이지 않으며 [생명체의] 나머지로부터 충분히 고립되어 있지도 않다. 고등 척추동물과 같은 유기체는 모든 유기체들 가운데 가장 개체화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체의 일부였던 난자와 부체(父體)의 일부였던 정자가 발달한 것에 불과하며, 알(즉 수정란)은 [부모 유기체의] 성분에 공통적이므로 부모 유기체 사이의 진정한 연결부라는 것을 주목한다면, 비록 인간의 경우리 하더라도 모든 개별적 유기체는 부모 유기체의 성분이 조합된 신체 위에서 자라난 단순한 싹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개체의 생명 원리는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가? 점점 가까이 다가가 보면 우리는 가장 먼 조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고, 개체는 가장 먼 조상들 각자와 유대를 맺고 있으며, 어떠면 생명의 계통수의 근원에 있는 젤리 모양의 이 작은 원형질 덩어리와도 유대를 맺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개체는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의 원시 조상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동시에 거기서부터 분산되어 내려오면서 분리된 모든 후손들과도 마찬가지로 유대를 맺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생명체 전체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목적성을 생명체의 개체성으로 좁혀 보아야 헛된 일이다. 생명계 안에 목적성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 전체를 유일하고도 불가분적으로 한 아름에 포옹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들에 공통적인 이 생명은 의심의 여지없이 많은 불일치와 많은 틈을 보여주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그렇게 하나인 것도 아니어서 각 생명체를 어느 정도까지는 개체화되도록 내버려 둔다. 그래도 역시 그것은 유일한 전체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목적성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아니면 한 유기체의 부분들을 유기체 자체와 조화를 이루도록 할 뿐만 아니라 각 생명체를 다른 것들 전체와 조화를 이루게 한다는 가설을 택하는 것이다.((82∼83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응축된 것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전체, 즉 유동체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여전히 시간을 백지화하는 데서 일치하고 있다. 실재적 지속은 사물들을 갉아먹고 거기에 자신의 잇자국을 남기는 어떤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이 시간 속에 있다면 모든 것은 내적으로 변화하며, 동일한 구체적 실재는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따라서 반복은 추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반복되는 것은 우리 감관, 특히 우리의 지성이 실재로부터 떼어낸 이러저러한 국면들이다. 우리 지성이 모든 노력을 집중하고 있는 행동은 반복들 속에서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지성은 반복되는 것 위에 집중하고 같은 것을 같은 것에 접합시키는 데만 몰두해서 시간의 시야vision에 등을 돌린다. 지성은 흐르는 것을 혐오하고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것을 고체화한다. 우리는 실재적 시간을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체험한다. 생명은 지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화 그리고 순수 지속 속에 있는 모든 사물의 진화로부터 우리가 갖는 감정이 거기에 있어서, 이른바 지적 표상의 주위에, 밤 속으로 사라져 가는 불분명한 가장자리를 그린다. 기계론과 목적론은 중심에서 빛나는 핵만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것들은 이 핵이 그 나머지[가장자리]가 응축에 의해 희생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생명의 내적 운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응축된 것[핵]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전체, 즉 유동체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86∼87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지점

 

사실상 단순한 크기의 변화와 형태 변화는 다른 것이다. 한 기관이 훈련에 의해 강해지거나 커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연체동물의 눈과 척추동물의 눈과 같은 기관의 점진적 발달에 이르기에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은 빛의 영향의 연장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방금 비판한 바 있는 주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반대로 [여기서]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 진정한 내적 활동성이라면, 그 때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노력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노력이 기관의 최소한의 복잡화도 산출하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적충의 색소 얼룩에서 척추동물의 눈에 이르기까지는 서로 간에 놀랄 만큼 잘 조화된 막대한 양의 복잡화가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 과정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동물에 대해서는 인정해 보자. 그것을 식물의 세계로 어떻게 확장시킬 것인가? 여기서 변이의 원인은 심리적 질서에 속한다면 그 말의 의미를 매우 확장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여전히 노력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사실인즉 노력 자체를 파고들어가 더 심층적인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 생각으로 이러한 태도가 특히 요구되는 경우는 규칙적으로 유전되는 변이들의 원인에 도달하고자 할 때이다. 우리는 여기서 획득형질의 유전 가능성에 관한 세부 논쟁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역량에 속하지 않는 문제에서 명백한 입장을 취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는 없다. 이 문제만큼 오늘날 철학자들이 애매한 일반성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과학자들의 뒤를 따라 세부 실험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결과를 논의해야 할 의무를 느끼는 것도 없다. 스펜서가 획득형질의 유전 문제를 먼저 제기하였다면 그의 진화론은 아마도 매우 다른 형태를 띠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개체가 들인 습관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후손에게 전달된다면(우리에게는 이것이 그럴 듯한 일로 보이는데), 스펜서의 심리학 전체가 수정되어야 하며 그의 철학은 상당 부분 붕괴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를 어떻게 제기해야 하며 어떤 방향으로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지 말해보자.(130∼132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획득형질의 유전

주지하다시피 라마르크는 생명체에게 기관의 용불용(用不用)에 의해 변화하는 능력과 이렇게 획득된 변이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부여한 바 있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학설에 오늘날에도 일정수의 생물학자들이 합류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신종을 산출하기에 이르는 변이는 배 자체에 내재하는 우연변이가 아닐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유용성에 대해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고 일정한 방향으로 결정된 특성들을 전개시키는 고유한 결정론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 조건에 적응하려는 생명체의 노력 자체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러한 노력은 외적 환경의 압력에 의해 기계적으로 야기된, 특정한 기관의 기계적 훈련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의식과 의지를 내포할 수도 있는데, 이 학설의 가장 탁월한 대표자의 한 사람인 미국의 자연학자 코프Cope는 노력을 바로 그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신라마르크주의는 비록 거기에 필연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화론의 현재적 형태들 전체에서 유일하게 진화과정의 내적이고 심리학적인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서로 독립적인 발달선상에서 동일한 복잡한 기관들의 형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진화론이기도 하다.(130쪽)

사람들이 말하는 획득형질은 종종 습관이거나 습관의 결과이다. 그리고 길들여진 습관의 기초에 자연적 성향이 없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유전된 것이 개체의 soma이 획득한 습관인지 아니면 차라리 길들여진 습관에 앞서 있는 자연적 성향은 아닌지 항상 자문할 수가 있다. 이 성향은 개체가 자신 안에 보유하고 있는 germen에 내재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그것이 개체에, 즉 배에 이미 내재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두더지가 앞을 못 보게 된 것은 그것이 땅 밑에서 사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증명되지 않는다. 아마도 두더지가 지하 생활을 할 운명에 처한 것은 그것의 눈이 쇠약해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 시력을 잃는 경향은 두더지 자체의 신체의 의해 획득된 것도 잃은 것도 없이 배에서 배로 전달될 것이다. 검술 사범의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더 빨리 탁월한 검술사가 되었다고 해서 부모의 습관이 아이에게 전달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증가하는 도상에 있는 어떤 자연적 성향들이 아버지를 낳은 배에서 아들을 낳은 배로 넘어가 원초적 약동의 결과로 도중에서 커지고 아버지가 했던 것과는 상관없이 아들에게 아버지의 것보다 더 큰 유연성을 확보해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의 점진적 길들이기에서 나오는 많은 예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되는 것이 길들여진 습관인지 아니면 오히려 어떤 자연적 성향이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이러한 성향이야말로 길들이기 위해 이러저러한 특수한 종이나 그것의 어떤 대표자들을 선택하게끔 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132∼134쪽)

* (역주) 획득형질의 유전이 완전히 부정된 것은 20세기 중반 무렵이다. 여기서 베르그손은 아직 논쟁 중인 당대의 모든 실험과 가설을 검토함으로써 획득형질의 유전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에 서고 있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일탈의 유전과 형질의 유전

그러므로 우리는 일탈(逸脫
)의 유전과 형질의 유전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새로운 형질을 획득하는 개체는 이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형태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보유한 배들 또는 종종 반쪽의 배들이 발달하면서 재생하였을 혀애로부터 일탈한다. 이 변형[일탈]으로부터 배를 변형시킬 수 있는 물질이 산출되지 않거나 영양의 공급이 전반적으로 변질되어 배의 요소들중 어떤 것들이 결핍되지 않는다면, 그 변형은 개체의 후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와 같은 일이 가장 자주 일어날 것이다. 반대로 변형이 어떤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아마 생식질에서 야기되는 화학적 변화를 매개로 해서일 것이다. 이 화학적 변화는 배가 발달시킬 유기체 안에 예외적으로 본래의 변형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것과 다른 것을 만들어 낼 기회가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많다. 이 후자의 경우 자식 유기체는 부모 유기체만큼이나 정상적 유형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겠지만, 그 일탈은 [부모 유기체와는] 상이하게 일어날 것이다. 자식 유기체에게 유전되는 것은 일탈이지 형질이 아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한 개체가 들인 습관들은 자기 자손에게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반향이 있을 때는 자손들에게 생겨난 변형은 본래의 변형과 아무 유사성도 갖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그럴 듯하게 보이는 가설이다. 어쨌든 반증이 있기까지는 그리고 뛰어난 한 생물학자가 요구하는 결정적 실험이 확립되지 않는 한 우리는 현재까지의 관찰 결과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138∼139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생명의 도약

 

우리는 이리하여 먼 우회를 통해 우리가 출발했던 생각으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배와 배 사이에서 연결부를 형성하는 성체를 매개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경과하는 생명의 근원적 약동élan originel이라는 생각이다. 이 약동은 진화의 여러 노선들로 나뉘어 그 위에서 보존되면서 적어도 규칙적으로 유전되고 서로 참가되어 신종을 창조하는 변이들의 심층적 원인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들이 공통의 뿌리에서 분기하기 시작하면, 그러한 분기는 진화를 향해 전지하면서 가속화된다. 그러나 공통적 약동의 가설을 받아들이면 그것들은 일정한 지점 위에서 동일하게 진화할 수 있고 심지어는 그럴 수밖에 없다. 이를 우리가 선택한 예, 즉 연체동물과 ㅓㄱ추동물의 눈의 형성이라는 예를 바탕으로 더 정확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원초적 약동>이라는 생각은 또한 그렇게 해서 더욱 명확하게 될 것이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생명의 도약 Elan vital> 

 

(나의 생각)

이 대목은 앙리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엘랑 비탈'이다. 이 절(節)은 약 14쪽에 걸쳐 설명되고 있다.

욕심 같아서는 전재(全載)하고 싶지만 이미 다른 부분들을 인용한 것만으로 너무 길고 충분하다 싶어 생략한다.

 

 

 

 

과학의 관점과 철학의 관점 

 

제작된 작품은 제작이라는 작업의 형태를 그린다. 내 말은 제작자가 작업에 투입한 것을 자기의 작품에서 재발견한다는 의미이다. 그가 기계를 만들려고 한다면 부품들을 하나하나 잘라 내고 나서 그것들을 조립할 것이다. 만들어진 기계는 부품들과 그것들의 조립을 다 보여준다. 결과의 전체는 여기서 작업의 전체이며 작업의 각 부분에 결과의 한 부분이 상응한다.

 

이제 나는 실증과학은 유기화 작업을 마치 [제작의] 작업과 같은 종류인 것처럼 진행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러한 조건에서만 그것은 유기체들에 효력을 가질 것이다. 실제로 과학의 목적은 우리에게 사물의 근본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작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리학과 화학은 이미 진보된 과학들이며, 생명체는 우리가 그것을 물리학과 화학의 과정으로 취급할 때에만 우리의 작용에 부응한다. 따라서 유기화 작업은 유기체가 우선 기계와 동일시되었을 때만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 세포들은 기계의 부품들이며 유기체는 그것들의 집합이다. 그리고 부분들을 유기화한 요소적 작업들은 전체를 유기화한 작업의 실제적 요소들로 관주될 것이다. 과학의 관점은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로는 철학의 관점은 아주 다르다.

 

우리 생각에 유기화된 기계 전체는 유기화하는 작업의 전체를 엄밀하게 재현한다(비록 그것은 근사적으로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러나 [여기서] 기계의 부분들은 그 작업의 부분들에 상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기계의 물질성은 더 이상 사용된 수단들의 전체가 아니라 극복된 장애물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극적인 실재라기보다는 부정이다. 그러무로 우리가 이전의 연구에서 제시한 바 있듯이 시각은 권리적으로는en droit 우리의 시선이 접근할 수 없는 무한한 것들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잠재력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은 행동으로 연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생명체가 아니라 유령에 적합할 것이다. 생명체의 시각은 작용할 수 있는 대상들에 한정된, 유효한 시각이다. 그것은 <운하로 집중된> 시각이고, 시각기관은 단지 운하 파기 작업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시각기관의 창조는 그 해부학적 요소들의 집합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흙의 퇴적이 운하의 둑을 만들지도 모르지만 운하를 파는 것은 그것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계론적 주장은 흙이 한 수레씩 운반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구성될 것이다. 목적론은 흙이 아무렇게나 쌓이지는 않았으며 수레꾼이 하나의 계획을 따랐다고 덧붙일 것이다. 그러나 기계론과 목적론은 둘 다 잘못 알고 있다. 운하는 이와 다르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자연이 눈을 만드는 절차를 우리가 손을 드는 단순한 행위에 비교했다. 그러나 우리는 손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내 손이 공기 속에서 움직이는 대신에 내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압축되고 저항하는 쇳가루더미를 관통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어떤 순간에 내 손은 그 노력을 고갈하게 될 것이고 바로 이 순간에 쇳가루의 낟알들은 일정한 형태로 병렬되고 조정될 것이다. 이 형태는 멈추어 버린 손과 팔의 일부 형태 자체일 것이다. 이제 손과 팔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아 있다고 가정해 보자. 구경꾼들은 그것들의 배열의 근거를 쇳가루들 자체에서 그리고 그 더미 안에 있는 힘들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각 쇳가루의 위치를 그 옆의 것들이 그것에 행사하는 작용에 관련시킬 것이다. 그들은 기계론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전체의 계획이 이 개체의 작용들의 세부까지 지배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들은 목적론자들이다. 그러나 진실은 단지 쇳가루더미를 관통하는 손의 불가분적 행위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쇳가루들의 운동의 끝없는 세부 및 그것들이 최종적으로 배열된 질서는 이 불가분적 운동을 말하자면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저항의 가시적 형태이지 적극적인 개개의 작용들의 종합이 아니다. 그 때문에 쇳가루들의 배열에 <결과>라는 이름을 주고 손의 운동에 <원인>이라는 이름을 준다면, 엄밀히 말해 결과의 전체가 원인의 전체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지 결과의 부분들이 원인의 부분들에 대응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계론도 목적론도 여기서 자신들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고유한 설명 방식에 호소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제안하는 가설에서 시각과 시각기관의 관계는 거의 손과 쇳가루더미의 관계와 같은데, 쇳가루 더미는 손의 운동을 그려내고 운하를 트고 한정하는 것이다.

 

손의 노력이 현저할수록 그것은 쇳가루더미의 내부로 더욱 멀리 간다. 그러나 그것이 멈추는 곳이 어디든 간에 순간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쇳가루들은 평형을 이루고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룰 것이다. 시각과 그 기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시각을 구성하는 불가분의 행위가 다소간 멀리 전진함에 따라 기관의 물질성도 상호 조정된 다소간의 상당한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질서는 반드시 완전무결하다. 그것은 부분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을 낳은 실재적 과정은 부분들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기계론도 목적론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눈과 같은 기관의 경이로운 구조에 놀라워할 때 거기에 주의하지 않는다. 우리의 놀라움의 근저에는 언제나 이 질서의 한 부분만이 실현될 수 있었을지 모르고 그것의 완벽한 실현은 일종의 은총이라는 생각이 있다. 목적론자들은 이러한 은총을 목적인에 의해 단번에 스스로에게 면제해 준다. 기계론자들은 그것을 자연선택에 의해 조금씩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쪽 다 이러한 질서에서 무언가 적극적인 것을 보고 따라서 그 원인에서는 완성 가능한 모든 정도를 포함하는 분할 가능한 어떤 것을 본다. 사실상 그 원인은 다소간 강도를 갖지만 단번에 그리고 완성된 방식으로만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 그 원인이 시각의 방향으로 다소간 멀리 나아갈수록 그것은 하등 유기체의 단순한 색소 덩어리나 세르폴라(환형동물의 일종 ㅡ 옮긴이)의 이미 분화된 눈이나 조류의 놀랄 만큼 완성된 눈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매우 불균등한 복잡성을 가진 이 모든 기관은 반드시 동등한 조화를 나타낸다. 그 때문에 두 동물종이 서로 간에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 각각에서 시각을 향한 진행이 똑같이 멀리 가면 양측에는 동일한 시각기관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관의 형태는 기능의 행사가 획득된 정도를 표현할 뿐이기 때문이다.(151∼155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생명의 도약 Elan vital> 

 

 

 

 

덧붙임)

 

『창조적 진화』를 읽으면서 제가 몹시 흥미를 느낀 부분은 특히 '획득 형질의 유전'을 다룬 부분이었답니다. 소위 '라마르크의 용불용설'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이 책이 출간된 1907년 까지만 하더라도 '라마르크 학설'이 타당한지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분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점은 베르그송보다 훨씬 이전의 철학자였던 쇼펜하우어가 이미 그 학설의 잘못된 점을 아주 예리하고도 명쾌하게 밝혀 놓았다는 점입니다. http://blog.aladin.co.kr/oren/606769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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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8-01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 소개해주신 글 속의 베르그송은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다루는 ‘물리‘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인 ‘화학‘을 시간과 공간의 장 속에서 철학을 통해 ‘사고실험‘을 한 철학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를 앞서간 베르그송과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철학은 과학에게 길을 제시하는 과업을 부여받았다는 oren님 말씀이 더 와닿습니다. oren 님 글을 읽다보니 베르그송의 사상이 쉽지 않겠지만, 하루빨리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되네요. oren님 훌륭한 철학자의 사상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 2017-08-02 00:20   좋아요 1 | URL
베르그송은 ‘철학‘을 전공한 철학자였지만,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포함한 어학과 문학에도 소질이 많았고, 수학, 물리학, 생물학 등 여러 분야의 과학에서도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죠. 철학 중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정통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철학 중에서도 특히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 자신만의 탁월한 경지를 개척할 수 있었던 듯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8-02 07:12   좋아요 0 | URL
서양철학자 중 많은 이들이 그리스 철학에 정통함을 알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화이트헤드가 ‘서양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라고 말한 것이 무리가 아님을 생각하게 되네요^^:

oren 2017-08-02 12:04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그렇게나 많은 철학자들이 아무리 기를 쓰고 ‘철학‘을 연구해도 결국 플라톤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 플라톤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셈이죠. 그리스는 위대한 철학자만 배출한 게 아니라 문학이나 역사, 건축과 조각 등 조형예술 분야에서까지도 두루 빛나는 금자탑들을 쌓아 놓았으니 생각할수록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 까마득한 옛날에 말이지요.
 
그림과 함께 읽는 돈키호테
한가로운 독자분들께~
책의 날, 10개의 질문과 대답

 

 

넘어지는 것은 물론 똑같다. 하지만 한눈을 팔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과, 별만 바라보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은 다르다. 돈키호테가 열심히 보았던 것은 바로 별이다. 이 공상과 망상의 정신이 추구한 웃음의 깊이는 얼마나 심오한가.
- 앙리 베르그송, 『웃음』중에서

 

 * * *

 

읽는 즉시 마법 같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수 있고, 그 이야기가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다. 그렇지만 어느새 등장 인물의 말과 행동 속으로 빠져 들면서 모든 게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재미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웃음을 끊임없이 터트리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이 있다. 게다가 주인공들의 이야기 속에 온갖 인생의 희로애락과 거대한 도전과 실패, 교훈과 더불어 슬픔까지도 간직한 소설이 있다. 하나의 이야기 속에 수많은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고, 작가가 어느새 소설 속으로 슬며시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가는가 싶으면, 독자가 다시 작가를 찾아 나서야 할 때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놀라운 이야기의 마법'이 숨어 있으면서도, 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요소들을 거의 다 담고 있는 소설이 있다. 아주 오래 전에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세계 최고의 소설로 널리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그런 소설이 바로 『돈키호테』다.

 

이 소설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전체를 다 읽기에는 시간이 제법 많이 걸린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단점일까? 소설을 왜 읽을까? 멋진 주인공들과 함께 '멋진 여행'을 떠나보기 위해서?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 속으로 흠뻑 빠져들고 싶어서? 어쨌든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모험 속으로 빠져들기 위해서? 인생의 심오한 의미를 맛보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실컷 한번 웃어나 보려고? 이런 독자들의 온갖 까다로운 희망사항을 두루 다 만족시켜 주는 데도 그 소설이 누구나 다 가볍게 읽을 수 있을 만큼 '얇은 책'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정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독자들의 온갖 까다로운 취향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제공하는 온갖 재미와 보람을 두루 만족시켜 주는 책이 있다면 그런 책은 도리어 분량이 두툼하고 이야기가 길수록 독자들에게 이득이지 않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가장 훌륭한 소설이 아직도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기다려 주고 있다는 사실은 어찌보면 묘한 아이러니다. 소설을 읽는 데도 '마감 시한'이라는 게 있다면 이 소설만큼 '마감' 전에 서로 읽으려고 앞을 다투어 쇄도할 독자가 많은 경우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바깥은 여름'이니 무슨 단장 죽이기에 훨씬 더 몰두한다. 이 또한 아이러니다.

 

최근에 스페인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 사람들에게 『돈키호테』는 읽어 봤냐는 질문을 던져보면 대답이 한결같다는 이유 때문에 도리어 놀란다. 그 유명하지만 몹시도 두꺼운 소설을 어떻게 감히 읽었겠느냐고 도리어 질문하는 사람을 우스개로 만든다. 그게 그저 남의 얘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내년 1월에 보름이 넘는 일정으로 스페인을 다녀 오겠다는 두 모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게 긴 일정을 단 둘이서 자유 일정으로 다녀올 꺼라면 '스페인'을 좀 더 잘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럴려면 최소한 소설『돈키호테』라도 꼭 읽어 보고 떠나라, 그 속엔 스페인의 온갖 지리(톨레도, 안달루시아,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등)와 역사(오랫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가 갑자기 벗어났던 역사에 얽힌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는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스페인의 퇴락한 이달고(향사士) 신분의 돈키호테와 그의 종자(從子)로 함께 따라 나선 산초의 모험 이야기가 너무나 재미있다, 소설 읽는 재미와 보람을 보장한다, 그렇게나 설득해도 소용이 없다. 더군다나 대학 3학년에 다니는 딸아이는 전공이 '국문학'이다. 학교 수업에 필요한 소설은 열심히 읽고 과제도 제출하더니, 정작 학교 수업보다 훨씬 더 생생할 '여행 수업'에 필요한 책은 읽지 않는다. 이 또한 묘한 아이러니다. 그런데 나는? 정작 『돈키호테』를 몹시 좋아하고, 이 책을 읽은 이후로 줄곧 스페인을 가고 싶은 열망을 버리지 못한 나는 이번 여행에서 싹둑 짤렸다.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도 없다.

 

다른 책에서 가끔씩 마주쳤던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유명한 책인『돈키호테 성찰』이라는 작품이 마침 오늘 <을유세계문학전집> 아흔 번째 책으로 출간된 걸 발견했다. 신간에 별로 관심이 없지만 이런 '신간'은 너무 반갑다. 스페인은 강렬한 태양으로도 유명한 나라다. 10년 전쯤이었을까. 여름 휴가때 스페인을 다녀온 어느 20대 여직원 한테서 들은 얘기가 생각난다. 여름엔 절대 스페인을 가면 안 된다는 거였다. 얼마나 더위와 뜨거운 태양에 시달렸으면 그런 넉두리부터 나올까 싶었다. 그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는 기사 복장과 투구까지 뒤집어 쓰고 모험을 떠났다.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서. 우리도 그런 모험에 동참할 수 있다. 비록 바깥은 한여름이고, 돼지 같이 생긴 녀석은 지난 밤에도 또다시 미사일을 발사했다지만, 어디 한 모퉁이, 시원한 바람이 조금은 불어 오는,『돈키호테』정도는 넉넉히 펼쳐 읽을 수 있는 그런 공간쯤은 쉽게 찾을 수 있는 땅에서 살고 있으니.

 

 

 

접힌 부분 펼치기 ▼

 

소설『돈키호테』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한 인물 가운데 헤럴드 블룸을 빼놓긴 어렵다. 그가 쓴 『교양인의 책읽기』를 읽은 후에 베껴 놓은 대목을 다시 덧붙여 본다.

 

 * * *

 

미구엘 드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1547∼1616)

모든 소설의 선두요 최고를 차지하는 이 책은 소설 그 이상

 

소설을 읽는 방법과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할 때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모든 소설의 선두요 최고를 차지하는 이 책은 소설 그 이상이다. 바스크 혈통 작가이자 세르반테스 비평가 미구엘 드 우나무노에게 『돈 키호테』는 스페인어로 쓰여진 바이블이자, 하나님 그 자체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나는 지난 4세기 동안 상상력으로 흘러넘친 문학계에서 세르반테스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돈 키호테는 햄릿의 대적자요 산초 판자는 폴스타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나는 그 이상의 찬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두 사람이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같은 날 세상을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셰익스피어는 분명히 『돈 키호테』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얘기를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세르반테스도 남의 말을 듣는데 역시 뒤지지 않는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걸핏하면 다투지만 늘 화해한다. 사랑과 충성심, 돈 키호테의 무지, 경탄할 만한 산초의 지혜들 속에서 둘은 관계를 유지한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인물들은 서로의 말을 잘 귀담아 듣지 않는다. 리어 왕도 상대방의 말에 관심을 기울인 법이 거의 없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때로는 아주 즐거운 듯 보이지만 아예 서로의 말을 들을 수조차 없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 본인의 경우는 벤 존슨과 함께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청자로서의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다. 세르반테스도 남의 말을 듣는데 역시 뒤지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산초와 돈 키호테 간에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화

 

돈 키호테』에서는 끊이지 않고 사건이 일어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산초와 돈 키호테 간에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손길이 닿는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 봐도 두 사람이 대화의 늪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밑바탕에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변덕을 부리기는 해도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남의 얘기를 들음으로써 그들은 변화한다


금방이라도 파탄 날 정도로 싸워 대다가 곧 예의바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상대가 하는 말에서 뭔가 배우려는 자세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의 얘기를 들음으로써 그들은 변화한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변화, 다시 말해 자아를 심화시키고 내재화하는 작업이 서로간에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세르반테스에 대한 괴테의 경외심과 프로이트의 찬사


허클베리 핀은 짐에게서 자신의 산초를 발견했기 때문에 고독으로 시들어가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허무주의적인 스비드로가일로프의 이아고적 속성 안에서 반反 산초 판자와 마주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미시킨 왕자와 돈 키호테의 고상한 "광증"은 비슷하다. 세르반테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만은 세르반테스에 대한 괴테의 경외심과 프로이트의 찬사를 자주 인용하고 있다.


"내게 생명을 달라!"


우나무노는 『돈 키호테』가 삶의 비극적 의미를 구현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광증"은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그것은 각각 다른 시대에 죽음을 예찬한 스페인적 기질에 대한 항거였다. 그는 터키와의 레판토 해전에서 왼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데, 비록 이런 상처뿐인 전사라도 세르반테스 내부에서는 언제나 폴스타프와 함께 이렇게 외친다. "내게 생명을 달라!" 나는 우나무노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작품의 즐거움은 전적으로 산초 판자의 위대성에 있으며, 산초는 폴스타프나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에 등장하는 파누지와 함께 우리 속의 죽지 않는 무엇에 대한 또 다른 예라고 볼 수 있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이 소설의 2부에서 거꾸로 독자들의 지식에 파고 든다.

 

독자들은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셰익스피어처럼 세르반테스도 독자들을 즐겁게 해 주며, 활동적인 독자들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 갇힌 사자와 마주친 돈 키호테는 사자들이 공격할지 어떨지 알고 있다.

 

그리고 돈 키호테, 산초와 함께 여행을 해 온 활기 넘치는 독자들은 등장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들의 지식을 공유한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이 소설의 2부에서 거꾸로 독자들의 지식에 파고 든다. 이는 그들이 비평가가 되어서 자신의 모험을 감상하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

 

이 소설의 제2부에서 세르반테스의 이토록 비상한 이야기 솜씨가 숨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셰익스피어는 여러 가지 계획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 생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셰익스피어는 20여 편이 넘는 위대한 희곡 작품들에서 자기 자신을 숨기는 놀라운 기법을 사용했다. 독자와 관객은 셰익스피어가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셰익스피어는 여러 가지 계획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 생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2부에서 이와 정반대되는 기법을 창안해 냈다. 그리고 작품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을 창안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환상으로 들어가는 틈새를 잘라 버렸는데, 이는 돈 키호테와 산초가 1부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2부를 통해 다시 언급했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와 돈 키호테는 바로크적이고 지적이여서 마술사들에게 불만을 지니고 있다. 세르반테스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표절자요 사기꾼들로 자신을 대신해 소설을 끝내려는 존재들이다.

 

 

세르반테스는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꾼

 

토마스 만은 돈 키호테에 관해 말하면서 "자기 칭송에 대한 영광으로 사는" 독특한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산초는 너무나 영민한 나머지 거기까지 나갈 수는 없었다.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세르반테스라는 작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세르반테스는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꾼으로서 권위를 가졌다. 그 권위의 궁극적인 상속자인 마르셀 프루스트는 세르반테스의 소설을 더욱 진전시켰다.

또 다른 계승자로 『율리시즈』의 제임스 조이스를 들 수 있으며, 그와 프루스트의 사도며 『몰리』,『말론 죽다』, <무명> 3부작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있다.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모든 소설 중 으뜸이며 최상

 

돈 키호테』를 읽는 일은 즐겁다. 나는 독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몇 가지 측면을 언급했다. 세르반테스는 우리 중 대다수의 사람에게 돈 키호테적인 모습과 산초척인 측면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왜 『돈 키호테』를 읽는가? 모든 극작가들 가운데 셰익스피어가 최고라면,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모든 소설 중 으뜸이며 최상이다. 따라서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를 알기 전에는 우리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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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7-29 1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돈키호테」를 읽을 때 저만 그런지 몰라도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더군요 ^^: 다른 분들은 재밌다고 하던데 각 장면 중간중간 시를 읽다보면 흐름을 놓치기도 하고... 참 어렵습니다^^:

oren 2017-07-29 16:16   좋아요 1 | URL
어려운 책들을 굉장히 많이 읽으시는 겨울호랑이 님께서 《돈키호테》를 어렵게 읽으셨다니 너무나 뜻밖이네요.. 사실 텍스트에서 주석이 필요한 부분은 ‘언어유희‘ 부분과 스페인의 역사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 말고는 별로 없었던 듯해요. 다만 ‘심오한 철학적 깊이‘를 내포한 문장들도 적지는 않았던 기억도 납니다. 의외로 고대 그리스 로마 고전들에서 길어 올린 듯한 문장들이 꽤나 많았던 기억도 나고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일단은 엄청나게 재미있는 소설임엔 틀림없지요.. 제가 한때 이 소설을 필사하고픈 욕망에 시달렸던 이유도 주로 ‘산초 어록‘ 때문이었죠. 아직도 그걸 따로 베껴놓지 못한 게 가끔씩 후회될 정도니까요...

겨울호랑이 2017-07-29 16:20   좋아요 1 | URL
^^: 그렇군요. 제가 너무 무겁게 접근해서인지도 모르겠네요..oren님 말씀처럼 우선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여러 번 읽다 보면 의미가 절로 밝아질 수 있을 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로 2017-07-2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유명하지만 몹시도 두꺼운 소설을 어떻게 감히 읽었겠느냐 - 여기 한사람 더 추가해주세요~~.ㅠㅠ
저도 요약본으로 읽은 게 다,,,입니다.
하지만 저는 <돈키호테>와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꼭 스페인어로 읽는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입니다. 가능할까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백년 동안의 고독, 백년의 고독,,아무튼 그건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정말 재밌더군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게 기억나네요.
그런데 왜 스페인 못가게 되셨어요???? 모녀만의 다정한 여행을 방해하지 말라는 압박???? 표현을 재밌게 하셔서 궁금한 마음에 질문~~ㅋ

oren 2017-07-29 20:46   좋아요 0 | URL
《돈키호테》와 《백년의 고독》을 무려 스페인어로 읽으시겠다니 정말 대단한 도전이 될 듯싶어요. 특히 《돈키호테》는 옛날에나 쓰이던 스페인 고어는 물론이고 온갖 언어유희가 난무해서 번역자들도 무지 고생한다던데 말이지요. 《백년의 고독》은 읽은지 하도 오래 돼서 언젠가는 다시 읽어야 될 소설이 되고 말았어요. 그걸 1983년에 읽었으니 어느새 백년의 1/3이 훌쩍 지났더군요... 이번에 제가 스페인에 못 가게 된 건 일종의 벌당이랍니다.. 가족을 떼놓고 저 혼자 돌아다닌 지난 숱한 여행들에 대한... ㅠㅠ

라로 2017-07-31 12:4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럼 번역본을 먼저 읽어봐야 겠어요. 오렌님 덕분에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아도 되었네요~~~^^;;
백년의 고독은 한국어로 읽었는데 저는 재밌지만 어려웠어요. 그것도 번역본을 다시 읽어야 될 것 같아요. 백년동안의 고독으로 번역된 것을 읽었는데 사실 원제목 대로라면 백년의 고독이 제목부터 원작에 충실한 것 같아요. 그것으로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어쨌든 스페인어로 도전하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니~~~.
벌당,,,ㅎㅎㅎ이라고 하시니 웃음이~~~ㅎㅎㅎ
어떻게 잘 하셔서 같이 가시면 좋겠네요 ~~~^^

oren 2017-07-31 14:24   좋아요 0 | URL
저는 스페인에 갈 기회가 되면 그곳(톨레도? 마드리드?) 서점에 들러서 ‘스페인어판‘ 『돈키호테』를 꼭 구경하고 싶어요. 저는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니 사 올 생각은 차마 못하겠고요. 『돈키호테』를 구경하고 나면 아마도 그 다음으론 스페인어판『백년의 고독』도 찾아보지 않을까 싶어요. 보르헤스의 작품은 아직 읽어본 게 없으니 ‘그냥 재미삼아 구경이라도 해 볼까‘ 싶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문제는 스페인을 언제 가 볼 수 있을지 그걸 도통 모른다는 점이에요. 내년 1월에 가는 건 이미 너무 늦었어요. 산초 식으로 말하자면 「삐악삐악 우는 게 늦었소.」라고나 할까요.

산초가 말힌 이 유명한(?) 말에 대한 자세한 뜻은 ☞ http://blog.aladin.co.kr/oren/7688133
 
유럽 투어 로드맵
내일이면 동유럽으로...

 

 

내게는 여행이 유익한 수양으로 보인다. 심령은 여행을 하는 동안 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사물들을 주목하느라고 계속적으로 훈련 받는다. 그리고 내가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사람에게 끊임없이 다른 나라의 색다른 생활과 사상과 습관 등을 제시해 주며, 우리들의 천성인 끊임없이 변해 가는 형태를 음미시키는 것보다 인생을 형성하는 데 더 효과적인 학문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 몽테뉴

 

 * * *

 

뒤늦게(?) 토마스 만의 소설『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 작품은 꽤나 긴 소설이지만 독일 사람들은 이 소설을 여전히(?) 아주 즐겨 읽는다고 한다. 토마스 만은 1897년 10월 말부터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900년 7월 18일에 끝냈다고 하는데, 그가 태어난 해가 1875년이었으니 불과 스물 다섯에 이 거대한 장편을 완성한 셈이다. 그의 생각의 깊이가 놀랍다. 하긴 그는 이 소설을 쓰기 전부터 이미 니체의 철학을 접했고 1899년에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도 바짝 다가섰다. 그런 철학을 소설로 구현한 작품이 바로『마의 산』인데, 나는 아직 그 작품은 구경조차 못 했다. 그는 단편 『토니오 크뢰거』, 『베니스에서의 죽음』, 장편『파우스트 박사』등 여러 유명한 작품들을 많이 썼지만 어쨌든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은 초년의 작품인『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을 3분의 1쯤 읽는 동안에 끊임없이 나를 괴롭하는 '한 가지 절박한 아쉬움'이 잦아들 줄을 모르고 있다. 그건 바로 소설의 주된 배경인 '뤼벡'을 가 볼 기회가 분명히 있었는데도 그 도시를 그만 쏙 빼먹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3년 전 이맘때 작심하고 날짜를 넉넉히 잡고 '독일 여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분명 '뤼벡'은 여행 예정지에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뤼벡이 토마스 만의 고향이자 소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주요 배경이라는 사실은 새까맣게 몰랐지만 말이다. 어쨌든 뤼벡은 한자동맹으로도 이미 '오랫동안' 세계사에서 너무 유명한 도시였다! 그 땐 마침 직접 차를 몰고 우리가 내키는 대로 여행을 다녔으므로 조금만 더 부지런을 떨었더라면 함부르크에 도착하기 전에 분명히 뤼벡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빼먹은 '뤼벡'이 이렇게 뒤늦게 안타까울 줄이야.

 

 

■ 알록달록한 유럽 지도

 

 

 

■ 구글 지도로 살펴본 '여행 예정 경로'(3년 전 여행 출발 전에 만들어본 지도)
  

 

 

뒤늦게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뤼벡'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가 너무나 궁금하여 자꾸만 인터넷을 뒤지게 된다. 그러다가 오늘 마침내 이 소설과도 직접 관계 있는 좋은 글을 발견했다. 마침 글쓴이가『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읽고 난 뒤에 직접 뤼벡을 찾아 찍은 사진과 글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가운데 극히 일부만 여기에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글쓴이의 허락을 구하지 못하고, 이렇게 그저 출처만 밝히고 인용해도 좋은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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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바로 <토마스만>이 태어나서 자란 집.

이 집은 <현실>과 <소설>이 구분되지 않는 

노벨문학상의 장소...*)(*

 

토마스만은 어린 시절,

이 창문밖으로 <문학 세계>를 내다봤다...**

 

 

<부덴브로크>의 집안은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만...

 

이것이 부덴브로크가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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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무대인 '뤼벡'을 이런 식으로 뒤늦게나마 인터넷으로라도 실컷 구경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흡족하다. 사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속에는 뤼벡 뿐만 아니라 인근 도시인 함부르크나 암스테르담도 자주 나오고 심지어 벨기에 북부 도시인 안트베르펜도 등장한다. 비록 뤼벡은 못 가 봤지만 이들 나머지 도시들은 가 봤으니 그나마 얼마나 다행이냐 싶기도 하다.

 

그런데 마침 오늘은 '뤼벡' 말고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여러 도시들을 적잖이 가 봤다는 사실을 새삼 알고 나서 적잖이 놀랐다.(뒤늦게 소설을 읽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뜻밖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3년 전에 그토록 무리해서 장기간에 걸쳐 독일을 여행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이 멋진 도시들을 그저 막연하게만 머리 속에 그리고 있을 게 틀림없다. 몽테뉴가 말한 '여행은 오로지 비용 때문에만 힘이 든다'는 말은 정말 정곡을 찌른 말이다. 비용 걱정만 없다면 '여행'은 아무리 힘이 들더라고 일단 많이 다녀볼 일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여행지 근처에 또다른 '중요한 도시'가 있다면 거기도 꼭 빼놓지 말 일이다.

 

 

그들은 오버잘츠브룬이나 엠스나 바덴바덴이나 키싱엔으로 갔다. 그들은 쉴 목적에서뿐만 아니라 교양을 얻기 위해, 거기서 뉘른베르크를 거쳐 뮌헨으로, 잘츠부르크를 통과하고 이슐을 거쳐 으로,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317쪽)

 

(나의 생각)

오버잘츠브룬, 엠스, 바덴바덴, 키싱엔은 가 볼 생각조차 못 했던 도시들이다. 그라나 바로 그 다음 줄에 나오는 도시들은 운 좋게도 모조리 다 가 봤던 도시들이다. 유럽을 꼴랑 세 번 여행 간 셈치고는 내가 가 봤던 도시들이 이 소설 속에 이렇게 한꺼번에 좌르륵 나열되어 나온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 2년 전에 다녀온 동유럽 여행 코스(뮌헨 in, 프랑크푸르트 out)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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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17-07-28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 덕분에 도시하나를 추가했네요.~^^오늘 함부르크에 가요. 기대됩니다!

oren 2017-07-28 13:55   좋아요 0 | URL
함부르크 좋지요. 항구도시라 다소 지저분할 줄 알았는데, 너무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그곳엔 해산물 요리가 아주 유명하죠. 바닷가에 자리 잡은 좋은 식당 찾아서 꼭 드시길요. 아는 정보가 별로 없으면 ‘택시‘ 타고 ‘기사님‘한테 물어봐도 되고요. 우린 그렇게 찾아갔는데 아주 만족스럽더군요.

gemahh 2017-09-30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 글을 인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고세 올림

oren 2017-11-18 18:32   좋아요 0 | URL
고고세 님 안녕하세요?
주인 님의 사전 허락도 없이 제 글에 인용했는데, 너그럽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뒷방은 어디에......

 

 

알라딘 마을에 오래 터를 잡고 지내다 보면 '여기'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느낌을 글로 한참이나 끄적거리다가 관 둔 적도 있다. 이제 와서 그 글을 다시 끄집어 내어 마무리지을 생각은 별로 없다. 글을 쓰는 것도 '때'가 맞아야 계속 이어서 쓸 수 있는데, 그 글은 어느새 '철'이 너무 지나면서 시들해져 버렸다.

 

그 글을 쓰면서 내가 그 속에 담고 싶었던 주된 감정은 '옛날 옛적에 알라딘 마을은 이래서 좋았었지' 하는 느낌이었다. '고향 마을' 같은 안온함이 넘치는 그런 곳이 아직도 사이버 공간 어느 한 켠에 여전히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언제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누구든지 '옛날'을 그리워 하며 '그때가 좋았지' 하는 탄식 밖에 내놓지 못한다. 그게 세상 이치이기도 하고.

 

오래 전부터 가깝게 지내던 '알라딘 마을 사람들'이 어느새 홀연히 자취를 감춘 채 좀처럼 다시 나타나지 않거나, 어쩌다 한 번씩 '희미한 발자국'만 남긴 채 알라딘 마을을 다녀간 흔적만 겨우 알아볼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오래 전에 떠난 분들 가운데는 아마 '알라딘 마을'보다 훨씬 더 새롭고 즐거운 '새 동네'에 가서 잘 살고 계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그 분들이 새로운 동네로 가서 잘 살고 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하다. 혹은 '알라딘 마을'보다 훨씬 더 한적한 곳으로 떠나 여기보다 훨씬 더 조용한 삶을 살고 있는 분들도 계시리라. 그 또한 좋은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알라딘 마을'에서 여러 모로 신망을 받으며 꽤 열심히 '마을'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면서도 '알라딘 마을 생활'을 즐기시던 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어떤 말 못할 사정 때문에 다시는 '고향 마을'을 찾지 않는 경우다. 설사 그런 분들이 다른 마을에 가서 살더라도 '알라딘 마을'을 잠깐씩이나마 '고향에 다녀 오듯이' 들를 수도 있을 텐데, 그러기조차 마땅찮은 사정에 처해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또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

 

그런데 가끔씩은 전혀 뜻밖에 '환향'하시는 분들도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런 분들의 건강한 모습을 '알라딘 마을'에서 어느날 갑자기 다시 발견하는 일은 몹시 즐겁다. 정든 고향도 이러저러한 사정 때문에 한 번 떠나면 영영 되돌아가기가 힘든 경우가 참 많다. 언짢은 일 때문에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야 더 말해 뭐하랴. 그래도 고향의 안온함은 늘 그리운 법이다. 옛날의 불편한 기억들을 잊고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오는 분들을 보면 가끔 늘그막에 안간힘을 다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암튼 어렵사리 마음 먹은 '귀향'은 늘 따뜻하게 받아줄 일이다. 사는 게 참 별 게 아닌 것 같아도, 늘 마음 같지가 않으니 말이다.

 

 * * *

 

 

삶의 온기

 

이처럼 내용 없는 '우리라는 느낌(we-feeling)'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것이 바람직한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상태에 있기를 원한다. 수단의 소설가 타옙 살리(Tayeb Salih)는 7년 만에 고향 마을로 돌아와 그러한 감정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치 내 안에서 한 덩이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기분, 마치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 있는 꽁꽁 언 물체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되찾은 것은 "부족이 주는 삶의 온기"라고 남자는 말한다.

 

삶의 온기, 우리라는 느낌은 음식이나 거리의 소음, 어린 시절 창 밖으로 보이던 불빛들이 주는 친숙함과 쉽게 결부된다. 그러나 냄새와 광경은 느낌의 '표현'일 뿐,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라는 느낌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지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느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것이 적절하며, 따라서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고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며 당신의 행동이 그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우리 부류 속에 있다는 느낌이며, 버지니아 울프의 묘사에 따르면 "남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고, 함께한다는 편안한 느낌이며, 친밀함과 온전함과 신속한 상호협력을 지향하는 공통 가치를 느끼는 것"이다.

 

 - 데이비드 베레비,『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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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한 달쯤 전에 끄적거렸던 '미완성 글'을 기어이 덧붙여 본다. 다시 이어 쓸 힘도 딸리니 마침 잘 됐다 싶다.

오래 살다 보니 내가 내 자신의 글을 인용할 날도 다 있구나 싶다.

 

아, 옛날이여~

 

 

까마득한 옛날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을까. 그들에겐 라디오도 TV도 없었고, 그 흔한 컴퓨터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었는데 말이다. 까페니 블로그니 카톡방이니 밴드니 하는 온갖 SNS 서비스도 하나 없었는데 말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런 '순수의 시대'를 잠깐이나마 살았다. 아니 적잖이 살았던 듯하다.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시골에선 '전기'가 중학교 2학년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들어왔다. 그 전까지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라고 해봐야 라디오가 유일했다. 숱하게 뜯어 보기도 하고 쥐어박기도 했던 그 라디오는 늘 등어리에 큼지막한 건전지를 동여매고 있었다. 그래도 그 라디오는 무려 '휴대용'이었다.

 

그 라디오는 사람들 손에 이리 저리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끌려 다니면서도 온갖 세상일을 시시콜콜 다 들려줬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으로 시작되는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와 함께 스포츠 선수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은 '눈부신' 활약상을 생생하게 전해 줄 때도 있었고, 독서만담보다 백 배는 더 재미있는 '장소팔과 고춘자의 만담'도 들려줬다. 당대 최고의 여가수라 불리웠지만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가수 문주란이 불렀던 '백치 아다다' '동숙의 노래' '공항의 이별' 같은 노래들을 오로지 라디오로만 들으며 즐거워 했다. 생전 '공항' 한 번 구경도 못했고, '동숙'이 무슨 뜻인지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전기가 들어오니 TV도 잽싸게 따라 들어왔다. 백여 호 남짓한 조용한 시골 마을에 테레비가 들어 오니 세상이 너무 빠른 속도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긴긴 여름 낮을 달구던 뜨거운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나면 전봇대조차 없는 으슥한 골목길이 무서워 고작 방에서 호롱불이나 켜 놓고 하릴없이 먹이나 갈아 대며 신문지에 붓글씨나 써내리던 낭만적인 '초여름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라시찬 주연의 '전우'도 봐야 했고, 최불암 주연의 '수사반장'도 꼭 봐야 했다. 몇 대 밖에 없는 TV 앞자리는 조금만 늦어도 완전한 사각지대까지 밀려나기 일쑤여서 방영시간이 가까워 오면 늘 마음이 조급했다. 이따금씩 열리는 WBA나 WBC 타이틀전 권투 시합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지상 최고의 스포츠 중계방송이었다. 주말마다 밤늦게나 볼 수 있는 '주말의 명화'와 '명화 극장'은 촌동네 중학생에겐 멋진 별천지로 들어갈 수 있는 마술같은 '연결통로'였다. 그토록 멋진 배우들이 주말마다 나와서 씽긋 웃으며 멋지게 총을 한 방에 명중시켜 악당을 쓰러뜨리거나, 평생에 구경조차 하기 힘들 것 같은 절세의 미녀 여배우와 키스씬을 보여 주면 어느새 촌동네 중딩의 가슴도 덩달아 벌렁거렸다.

 

내가 어렸을 땐 <전국노래자랑>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 대신에 일 년에 한 번씩 분교에 다들 모여서 거창한 '음악 콩쿠르'가 열렸다. 거기서 입상하면 부상으로 커다란 '양은솥'이나 '양은남비'를 받았다. 멋진 유행가를 뽐낸 끝에 수상자로 호명된 동네의 젊은 처녀 총각들은 그 솥이나 남비가 진심으로 살림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으로 기뻐했다. 솥이나 남비를 머리에 뒤집어쓰며 앵콜송을 부르던 그 때 그 감격에 겨운 모습이 아직도 눈 앞에 선하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던 마을 분교에 어쩌다 총각 선생님이라도 새로 부임할라치면 동네에서 힘깨나 쓰는 어른들은 남보다 서로 먼저 선생님을 농가로 초대해서 '시골 밥상' 앞에 모시기 위해 야단 법석을 떨었다. 마침내 선생님께서 '저녁 식사'를 위해 홀로 조심스럽게 돌담장을 돌아 우리 집 안마당으로 들어서던 순간의 그 짜릿한 흥분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차려낼 것도 별로 없는 변변찮은 시골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온갖 재료들로 갖은 반찬들을 기가 막힌 솜씨로 만들어 내셨던 어머니의 요리 솜씨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다. 어디서 그런 레시피를 얻었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종가집 할매한테 몇 차례나 걸음을 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런 원시적이고 사뭇 낭만적이기까지 했던 생활을 지극히 당연시했던 까마득한 옛 시절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된 것 같지도 않지만 그래도 족히 몇십 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니 옛날이 맞긴 맞다. 


돌이켜 보면 알라딘 마을도 한 때는 그런 '시골 마을 풍경'을 닮은 때가 있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알라딘이라는 마을 밖에선 어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조차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듯한 분위기마저 느껴졌었다. 누군가 바깥 세상의 일들을 뉴미디어로 소개하는 일조차 드물었다. 알라딘 마을 사람들은 오로지 책만 일고 글만 쓰는 사람들로만 보였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글과 함께 올리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저 해가 뜨나 해가 저무나 '책 이야기'만 가득했다. 알라딘에 글을 쓰는 건 곧바로 리뷰를 쓰는 일과 거의 동일시될 정도였다. 페이퍼에 신변잡기를 올리는 일 자체가 이단시될 정도였으니까. 

 
조용하던 알라딘 마을에 거센 변화가 밀어닥친 때는 아마도 블로그와 카페가 활성화된 이후였던 듯하다. 마치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구석구석 빠르게 연결해 주는 동시에 밤낮없이 여기저기를 환하게 밝히는 '전기'가 들어온 셈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빠르게 전파하는 일에 정신을 팔기 시작했다. 온갖 신기한 뉴스들을 빠르게 퍼나르는 일로 바쁜 사람들조차 적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사진과 동영상이 '글' 사이로 빠르게 파고 들기 시작했다. 놀랄만큼 새로운 이야기 전달 방식이 등장했는데 어느 누가 케케묵은 옛날 방식만 고집하겠는가.

그와 동시에 알라딘 마을을 오랫동안 지켜왔던 느티나무와 같은 존재들도 말라 죽기 시작했다. 동네 터줏대감 같은 분도, 학식이 늘 남달랐던 마을 훈장어른 같은 분도 차츰 시야에서 멀어졌다. 새로 부임하신 총각 선생님을 차마 마주칠까 두려워 몰래 사립문 뒤에 몸을 숨긴 채 앙가슴을 떨던 짜릿한 흥분들도 차츰 사라졌다. 동네 콩쿠르에서 온 마을 사람들을 감동의 도가니에 빠트렸던 나이찬 처녀총각들의 기막힌 노래솜씨도 더이상 보기 어렵게 되었다. 온갖 궂은 일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두루 다 찾아다니며 언제나 정다운 말을 건네고 등을 토닥여 주던 정다운 고모님 같은 분들도 더는 찾기 힘들어졌다. 언제나 쭈삣거리기만 하던 수줍은 떠꺼머리 총각도, 걸핏하면 뺨부터 붉히던 곱디 고운 새악시 같던 분들도 어느새 다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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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동안에 문득 니체가 말한 '잊을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글이 떠올랐다. 물론 여기서 '잊어야 할 대상'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 가운데 우리의 행복을 여전히 방해하는 나쁜 기억들'이다. 알라딘 마을에서 과거에 있었던 언짢았던 일들도 가급적이면 빨리 잊는 게 좋겠다 싶다. 니체의 말대로, '망각 없이 산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행복을 방해할 뿐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무덤을 파지 않으려면

 

가장 작은 행복이라도 항상 거기 있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면, 그것은 불쾌함과 욕망과 결핍이 가득한 가운데에서 변덕스러운 기분이나 기발한 착상처럼 단지 에피소드로 잠깐 등장하는 가장 큰 행복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행복이다. 가장 작은 행복에서도, 또 가장 큰 행복에서도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다. 잊을 수 있다는 것, 또는 학문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신이 지속되는 동안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순간의 문턱에서 모든 과거를 잊으면서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은, 또 승리의 여신처럼 현기증이나 두려움 없이 한 지점에 서 있을 수 없는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더 나쁜 것은, 그가 결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한번 생각해보라. 망각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인간이 어디에서나 생성만을 봐야 할 형벌을 받았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할 것이고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할 것이며, 모든 것이 움직이는 점으로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만을 볼 것이며 이 생성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진정한 제자처럼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도 없을 것이다. 모든 행위에는 망각이 내재한다. 모든 유기체의 생명에는 빛뿐만 아니라 어두움도 속하듯이. 철저하게 역사적으로 느끼려는 사람은 잠을 자지 못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이나 되새김질로만, 반복되는 되새김질로만 살아가야 하는 동물과 비슷할 것이다. 다시 말해, 동물이 보여주듯이 기억 없이 살아가는 것,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또는 좀더 단순하게 내 주제를 설명한다면, 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무덤을 파지 않으려면, 과거의 것이 잊혀야 할 한도와 한계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인간, 한 민족과 한 문화의 조형력이 얼마나 큰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조형력이란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 힘을 거의 소유하고 있지 않아 단 한 번의 체험으로도, 단 하나의 고통으로도, 종종 단 하나의 연약한 불의로도, 단 하나의 조그만 상처로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다. (중략)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단지 지평 안에서만 건강하고 강하고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 법칙이다. 하나의 지평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능력이 없거나, 낯선 지평 안에 자신의 관점을 포함시키기에는 너무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지치거나 급격한 몰락으로 시들어갈 것이다. 명랑함, 양심, 즐거운 행위, 다가올 것에 대한 신뢰 ㅡ 이 모든 것은, 개인이나 민족에게서, 한눈에 개괄할 수 있는 것과 밝은 것을 밝힐 수 없는 것과 어두운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하나의 선이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또한 우리가 제때에 기억하는 것처럼 제때에 잊을 줄 아느냐, 우리가 힘찬 본능을 가지고 언제 역사적으로 느껴야 하고 언제 비역사적으로 느껴야 할지 감지해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바로 이것이 독자들에게 한번 고찰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명제다. 즉 비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은 한 개인이나 한 민족 그리고 한 문화의 건강에 똑같이 필요하다.(292∼294쪽)

 

 - 니체, 『비극의 탄생 · 반시대적 고찰』, <반시대적 고찰 Ⅱ_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 강조한 부분은 원문 그대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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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17-07-25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때 네이버 블로그 할때 그런 느낌 받았었는데요, 가끔 그들과 덧글 우정 쌓을때가 그리울때도 있더라구요.

oren 2017-07-25 14:08   좋아요 1 | URL
사이버 공간에서 ‘마을‘ 같은 분위기를 느끼기란 이제는 쉽지 않은 듯해요. 알라딘 마을도 예전에 비해서는 정말 많이 변했고요. 예전엔 시골 마을 같았는데 요즘은 도시에서 아파트 생활 하는 기분이랄까요?

오후즈음 2017-07-25 14: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네이버 베타블로그부터 했는데 점점 상업적으로 변하는 블로거들 보면서 네이버를 떠나게 되더라구요. 진짜 소통했던 글들은 없어지고 체험담 리뷰 뿐이니 ㅠㅠ. 대신 저는 알라딘에 온지 얼마 안되서 아직은 마을같은 기분입니다.
oren님같은 이웃도 만나구요~^^

oren 2017-07-25 17:57   좋아요 1 | URL
알라딘이 아직은 마을 같은 분위기는 맞습니다, 맞고요. 다만, 분위기가 옛날 옛적의 그 마을 보단 많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지요. 뭐, 앞으로도 또 지금보다 훨씬 더 변할 테니, 변하는 걸 너무 탓할 이유는 없겠지만요.

겨울호랑이 2017-07-25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예전 알라딘은 그랬군요..
저도 이사온지 얼마 안되어 oren님 말씀으로만 예전을 느끼게 됩니다^^: 나름 지금 아파트 생활도 즐겁게 하는 요즘 입니다^^:

oren 2017-07-25 18:01   좋아요 2 | URL
알라딘 마을 자체가 변한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마을에 사는 이웃들의 모습이 가장 많이 변했다고 봐야겠죠. 많이 떠나가기도 했고, 이사는 가지 않았지만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든 분들도 많고요. 변화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아무래도 새로 이사온 좋은 이웃분들이겠지요. 겨울호랑이 님처럼요^^

얄라알라 2017-07-27 0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사실 댓글을 거의 안 다는 부류여서 예전 알라딘이 어땠을까 고양이의 호기심만 올라오는 군요. 이렇게 찬찬히 서재순례하며 글 읽고 댓글다는 즐거움이 큰데, 알라딘 마을의 정겨움이 이런데서 오는 걸까요?

oren 2017-07-27 11:14   좋아요 1 | URL
옛날엔 댓글이 달렸다는 사실을 ‘이메일‘로 확인었었죠. 스마트폰도 나오기 전이었으니까요.

댓글이 수십 개씩 달리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죠. 서재 이웃들의 소소한 일상을 ‘확인‘하는 일에 너도나도 뜨거운 관심들을 보이기도 했고요.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웃집에 새로운 책이 몇 권 더 늘어났는지도 훤히 알 정도였다고 할까요? 책 이야기 뿐만 아니라 기족들의 소소한 일상에 대해서도 거리낌없이 소식을 주고 받는 풍경도 흔했고요. 인생의 중대사들을 두고도 서로 다함께 기쁨과 아픔을 나누기도 했고, 서재 이웃들과의 오프라인 모임들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고요. 암튼 그때는 ‘시골 마을‘ 같은 분위기였었답니다. 요즘은 어쨌든 이웃이 뭘 하고 지내든 별로 신경 안 쓰고 지내는 ‘아파트 생활‘ 같은 분위기로 많이 바뀐 듯해요.

cyrus 2017-07-31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플에 접속하면 항상 하는 일이 다른 분이 쓴 글을 보는 것입니다. 뉴스피드에 열다섯편 넘는 글이 뜹니다. 다 못 읽습니다. ‘좋아요‘만 누르는 글도 있어요. 정독하지 않더라도 글쓴이의 노력이 보이는 글에는 무조건 ‘좋아요‘를 누릅니다.

요즘 친구 수가 많은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다가가서 친해지려고 노력했지만,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리고 뉴스피드 목록이 포화 상태라서 좋은 글을 못 읽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도 며칠 전에 남긴 이웃들의 글을 보고 있는데요, 이웃들이 남긴 ‘읽었습니다‘, ‘읽고 있습니다‘ 도 같이 보게 되니까 불편했어요. 그래서 교류가 뜸한 분들이 있으면 친구 관계를 끊어요. 이런 분들을 끝까지 안고 갈 자신감이 없어요.

아무튼 북플 이용에 익숙해지면서 알라딘 서재 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찾아볼 수 없는 점은 사실입니다.

oren 2017-07-31 14:34   좋아요 1 | URL
저는 북플이 너무 불편해서 ‘PC‘에서 벗어났을 때만 주로 이용하는 편이고, 알라디너 분들의 글을 읽기 위해 북플을 이용하는 경우는 드문 편입니다. 그리고 ‘친구 신청‘은 저도 꾸준히(?) 받는 편입니디만, 제가 거기에 일일이 맞장구(‘친구 수락‘)를 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답니다. 굳이 그럴 필요를 별로 못 느끼겠더라구요.(그래서 뉴스피드 때문에 애를 먹는 경우는 드물고요.) 혹여 제게 친구 신청하신 분들은 서운해 하실 지 몰라도,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친구 신청 버튼을 누르는 경우가 워낙 많은 듯하여, 저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패쓰~ 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