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그 비용 때문에만 힘이 든다
-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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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들 가운데 '우연'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요즘 들어 문득 그런 생각을 자주 해보게 된다. 어떨 땐 세상사 모든 일이 '필연' 혹은 '인연'이 아닌 게 없다 싶다가도, 또 어떨 땐 결국 많은 일들이 '우연'에 따라 순식간에 뒤바뀌게 된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울 때도 많다.
어느날 갑자기 예정에 전혀 없던 '장거리 여행'을 준비하느라. 일상적인 일들은 갑자기 대수롭지도 않게 자꾸만 뒷전으로 밀려나고, 생전 가보지도 못한 낯선 도시들과 풍경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느라 여념이 없게 된 요즘의 상황들도 결국은 나의 자발적인 의지보다는 '우연의 힘'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한 것처럼 느껴진다.
오랫동안 꿈꿔오던 여행일수록 그 '출발'이 막상 코앞에 현실로 닥쳐올 때만큼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분되는 일도 드물다. 그런데 '당분간' 별다른 뚜렷한 계획이 없었음에도 어느날 갑자기 '마냥 꿈같은 여행'이 문득 진짜로 눈앞의 현실로 자꾸만 다가오게 되는 경우라면 어떨까. 이 또한 몹시도 가슴 설레는 일임을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알았다.
그러니까 어느날 저녁에 세 사람이 '일상적으로'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불쑥 '여행' 이야기가 나왔고, 그 세 사람이 즉석에서 '의기투합'하여 7월 초순에 '동유럽 여러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면서, 나더러 함께 떠날 의향이 없느냐는 몹시도 어리둥절한 얘기를 선배와의 전화 통화에서 들었던 게 대략 보름쯤 전이었던 듯하다. 이제부터 '자유로운 일정'을 잡아서 우리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는 여행인 만큼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겠느냐면서, '이왕이면 넷'이서 함께 떠나면 정말 여러모로 좋을테니 꼭 함께 가자는 선배의 부탁이 자못 간절했다.
호텔방은 어차피 2인 1실로 써야 될텐데 네 명이 함께 가게 되면 1인당 숙박비 부담도 조금씩 덜게 되고, 자동차를 한 대 렌트해서 다닐 예정인데 교통비 부담 또한 'n이 늘어나는 만큼' 줄어들 뿐만 아니라, 운전기사도 한 명 더 늘어나는 셈이니 '운전 부담'도 조금씩 덜게 되고, '내 카메라'도 함께 가져 가면 좋은 풍경도 더 많이 찍지 않겠느냐는 등등... 실로 '넷이서 함께' 여행을 떠나야할 이유는 많고도 많았다.
놀기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이런 일이라면 늘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겠지만, 이럴 때마다 몹시도 풀기 어려운 '큰 난관' 하나가 늘 중차대한 문제로 남게 마련이다. 어느날 느닷없이 불쑥 꺼내는 바깥 양반의 그럴듯한 출타 계획을 듣고 보면 언제나 억울한 심정부터 슬며시 앞서게 마련인 불쌍한 안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늘 남정네들의 크나큰 고민거리가 아니던가. 어쨌든 그런 얘기를 꺼내는 일은 적당한 때를 찾기도 여려울 뿐만 아니라 입을 떼는 일 자체가 몹시도 힘이 들게 마련이다.
그나마 이제는 나이를 얼마쯤 먹고 연륜(?)마저 쌓이다 보니 어지간한 '난관'조차도 묘한 꾀를 내어 슬기롭게 빠져나갈 궁리를 그리 어렵지 않게 짜낼 수 있게 되었던지, 머지않은 미래에 적잖은 비용을 '당신을 위해' 별도로 지출하는 조건으로 '빅딜'을 타결하고 나니 곧바로 '여행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뒤늦게 합류한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은 20 년쯤 전인 1990년대 중반부터 같은 회사의 같은 부서에서 직장 선·후배 사이로 만난 사이인데, 여태껏 적잖은 세월을 자주 함께 어울려 쏘다녔던 터여서 다들 좋아라 반겼지만, 이번 여행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여행 계획에 필요한 모든 사소한 일들까지도 혼자서 도맡아 진행하시는 분은 안타깝게도 내가 전혀 모르는 분이었다.
그 분은 이미 오래 전부터 방학때만 되면 어김없이 장거리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소위 '여행 매니아'인 분이었다. 마침 올 여름엔 늘 함께 다니던 '여행 동료들'이 각자 저마다의 사정들이 생겨서 '홀로' 유럽 여행을 다녀올 궁리를 하고 있던 참이었단다. 그럴 때 마침 셋이서 '딴 일'로 만났다가 이번 여행이 우연히 성사된 셈이었다.
어쨌든 그 분은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여행을 자주 다니다 보니 어느새 '여행 전문가'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는데, 거기다 음악과 미술에도 남다른 애정을 기울인 덕분에 그쪽으로도 상당한 조예를 지니신 분이었다. 비록 직업은 무미건조하고 딱딱해 보이는 공대 교수였으나 취미는 전공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몹시도 말랑말랑한 편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직접 만나보니 실제 나이보다 대략 십 년은 더 젊어 보일 정도였다. 환갑을 넘긴 분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았고 얼핏 보면 그저 우리와 '같은 또래'쯤으로 보여서 서로 어울리기 좋은 느낌마저 들었다.
일반적인 팩키지 여행도 아니고, 대중교통에 의지해야 하는 적잖이 고생스러운 배낭여행도 아닌, 우리 마음대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여행이다 보니 두세 차례의 '여행 준비모임' 동안에도 벌써 '여행 계획'이 밀가루반죽이 주물럭거릴 때마다 모양을 이리저리 바꾸듯 자꾸만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동유럽 여러 나라'로 다닐 예정이던 여행이 어느새 '독일을 중심으로' 바뀌었고, 여행 일정도 당초 15일 정도로 잡았다가 '아무리 계산해도' 그 일정으로는 너무 빡빡하다 싶어 이틀을 불쑥 늘렸다. 엊그제 만나서 '대략적으로' 그려본 여행 일정 또한 아직까지도 '가변적'이라는 전제가 붙었다. 현지 사정에 따라 당초 일정을 슬쩍 비트는 재미 또한 자유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어 '곧이 곧대로' 직진하는 성향이 강한 나로서도 어쩐지 불만보다 기대가 훨씬 더 크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맨처음 유럽을 가본 지도 어느새 13년이나 훌쩍 지났다. 2001년 가을에 가족들과 함께 유럽에 처음 갈 때만 하더라도 아이들이 무척 어렸었다. 그 당시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들과 유치원생이던 딸을 데리고 여행지를 다닐 때마다 '아이들에게' 한 가지라도 더 보여주고 설명해 주느라 '뻔한 헛수고'를 조금도 아끼지 않았던 기억과, 아침 식사가 끝날 때마다 부리나케 아이들 방으로 올라가 흐트러진 옷가지들을 빠짐없이 챙겨 여행가방을 꾸리느라 애쓰고, 함께 움직이던 일행들의 '아침 출발 예정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매번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어느새 시간이 참 많이도 흘렀다. 이젠 아이들이 둘 다 대학에 다니는 나이가 되고 보니,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며 아웅다웅 다투던 그때가 오히려 그리울 지경이다. 이번 여행만 하더라도 벌써 가족들은 고스란히 '일상' 속에 남겨진 채로 나만 홀로 떠나는 여행이 아닌가. 누가 보더라도 '오십대 아저씨들'임에 분명한 남자 넷이서 자동차 한 대를 빌려 타고 발길 닿는대로 마음껏 돌아다니는 여행은 어쩌면 몹시도 특별한 경험이다. 그래서 이런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한편으로는 몹시도 기대되고 날아갈 듯한 기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한켠이 약간은 허전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가족에 대한 미안함은 다른 기회에 또 부지런히 벌충하면 되지 않겠나 싶고, 당장은 여행 준비에 좀 더 열중하고 싶다. 그리고 좋은 여행을 위해 필수적인 영양가 높은 책들도 열심히 골라 장바구니로 옮겨야겠다.
더구나 이번 여행의 리더를 자임한 분이 '음악'과 '미술'에 특별히 관심이 많은 분이어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얼마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한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게다가 이번에 찾아가게 될 여행지들이야말로 '음악'과 '미술' 분야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매우 특별한 도시들이 아닌가.
이번 여행의 리더를 맡으신 분이 그런 도시들을 들를 때마다 맨먼저 하는 일이 '음악회 티켓'부터 찾아보는 일이라고 하니, 우리의 여행 일정이 아무리 빡빡하더라도 음악 연주회에 할애하는 시간만큼은 결코 뒷전으로 밀려나는 일이 없을 듯하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유럽의 음악 도시에서 직접 현지의 관객들과 함께 어울려 음악 연주회를 감상할 기회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여태까지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그런 연주회를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이 너무나 흥분되고 기대된다.
또한 우리가 찾아갈 도시들은 꼭 음악으로만 유명한 곳들도 아니다. 오래된 궁전들은 물론 유서깊은 미술관과 박물관 등도 여기저기 수두룩한 것 같다. 그만큼 이번 여행을 위해서는 미리 다양한 책들을 세심하게 골라 미리 공부를 해둘 필요를 느낀다. 그런 책들을 사서 미리 읽거나 아니면 여행을 다닐 때마다 틈틈이 현장에서 직접 펼쳐 읽어도 좋을 듯싶다.
오랜 역사를 지닌 유럽의 구석 구석을 마음껏 두루 찾아다닐 수 있는 자유 여행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무엇보다도 '동화 속에서나 나올 듯한 그림같은 풍경' 속으로 풍덩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멋진 여행 안내서의 책갈피마다 가득 담긴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풍경들을 직접 마주하면서 그냥 넋놓고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풍경들을 제대로 카메라에 쏙쏙 담아내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몇몇 여행 사진책들까지도 함께 사들이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아직까지 한 권의 책도 주문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책들을 골라서 주문하게 될지 나조차도 궁금해진다.
여행을 정말 좋아했던 몽테뉴는 '여행하기 좋은 나이'를 두고 지금의 내 형편에 딱 맞는 말을 남겨 놓았다. 바로 '50이 지나고 60을 넘기기 전'이 '여행하기 딱 좋은 나이'라는 것이다. 그 재치있는 프랑스 사람의 말마따나 이런 나이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여행을 다닐 수 있게 만든 '어느날 문득 다가온 기막힌 우연'이 그래서 더욱 반갑고 기쁘다.
40이나 50세 전에
청춘이 정열을 추구하는 것은 용서하고, 노년이 쾌락을 찾는 일은 금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젊었을 때는 불타는 정열을 조심성으로 은폐했다. 이제 늙어서는 음산한 심정을 방종으로 풀어 준다. 그 때문에 플라톤의 법칙은 편력을 더 유익하고 교양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40이나 50세 전에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한다. 나는 바로 이 규칙의 제2항으로 60세가 넘어서는 편력을 금지하는 데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이에 길을 떠나다가는 그 먼 길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아니오?" 무슨 상관이 있나?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거나 여행을 완수하려고 떠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움직이는 것이 기분 좋은 동안은 움직여 보려고 하는 것이다. 바람을 쏘이기 위해서 나는 바람을 쐰다. 이득이나 토끼를 보고 달려가는 자는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1085쪽)
비록 지금으로부터 한참이나 지나서야 '겨우' 가능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아름다운 추억, 멋진 풍경들로 가득찬 사진들을 담아 '우연히 떠난 여행'의 뒷얘기까지 마저 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 구글 어스로 살펴본 유럽

■ 알록달록한 유럽 지도

■ 유럽 지도_'독일을 중심으로'

■ 구글 지도로 살펴본 '여행 예정 경로'

■ 여행 계획표(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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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일반
■ 독일

■ 오스트리아
■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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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그 비용 때문에만 힘이 든다
여행은 그 비용 때문에만 힘이 든다. 그것은 힘겨울 만큼 무거운 부담이다. 나는 돌아다니는 쾌락 때문에 휴식의 쾌락을 제쳐놓고 싶지는 않다. 그 반대로 이 두 가지가 서로 거들고 가꾸어 주도록 하고 싶다.(1051쪽)
여행을 즐기는 이유
나는 여행을 즐기는 이유를 물어 보는 사람들에게, 내가 버리고 떠나는 것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나, 이제부터 찾아보려는 것은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대답한다.(1078쪽)
여행은 유익한 수양
이런 이유들 외에도 내게는 여행이 유익한 수양으로 보인다. 심령은 여행을 하는 동안 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사물들을 주목하느라고 계속적으로 훈련 받는다. 그리고 내가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사람에게 끊임없이 다른 나라의 색다른 생활과 사상과 습관 등을 제시해 주며, 우리들의 천성인 끊임없이 변해 가는 형태를 음미시키는 것보다 인생을 형성하는 데 더 효과적인 학문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1080쪽)
같이 갈 친구가 없으면
어떠한 쾌락도 남에게 통해 주지 않으면 내게는 멋이 없다. 마음속에 아무리 좋은 생각이 난다고 해도, 그것을 나 혼자 지어냈고 아무에게도 말해 줄 사람이 없다면 화가 난다. "예지를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고 자기 혼자만 가진다는 조건으로 하기라면, 나는 그것을 거절하겠다."(세네카) 또 한 사람은 그것을 더 심한 어조로 말하였다. "만일 한 현자가 모든 필요한 사건들을 풍부하게 받아들이고, 그가 알아 둘 가치 있는 사항을 자유로이 관찰하며 한가롭고 여유있게 연구하는 생활을 가졌다면, 그리고도 외롭고 쓸쓸함이 어느 인간도 결코 만나 볼 수 없을 정도라면 그는 인생에서 물러날 일이다."(키케로) 아르키타스의 말에, 그가 하늘나라에 가서 저 광대하고 거룩한 천체들 속을 산택한다고 해도 같이 갈 친구가 없으면 불쾌할 것이라고 한 말은 내 성미에 맞는다. 그러나 어색하고 서투른 동행과 여행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혼자서 하는 편이 낫다.(10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