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때는 얼리어댑터가 되는 걸 좋아했고 무슨 '새로운 서비스'가 나타날 때마다 거기에 몰두할 때가 있었다. 개인 홈페이지가 등장했을 때 네띠앙에 내 홈페이지를 만들고 얼마나 뿌듯했던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매일처럼 내 집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위해-그게 결국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인 줄도 모르고- 그 '집'을 한동안 열심히 가꾸었다. 아침마다 쓰레기도 줍고, 마당도 쓸고, 마루도 닦았다. 낯선 미지의 세계로부터 기적처럼 찾아올 귀한 손님을 위해 배경음악도 부지런히 갈아 끼우고, 장식장과도 같은 게시판에는 이런 저런 읽을 거리들을 차곡 차곡 쟁여 놓는 걸 잊지 않았다.
블로그 서비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그랬다. 한국 최초의 블로그 서비스 회사가 졸지에 망하고, 네이버에서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얼른 그리로 옮겼고, 한동안 네이버 카페도 열심히 운영해 보았다. 엄청난 열정으로 카페 회원을 받아들이고 내보내고, 카페 회원들과 오프라인 모임도 여러 차례 가졌었지만 그게 어느새 다 옛 일이 되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그 카페를 대여섯 해가 지나고 나서 '문득' 방문했을 때 들었던 강렬한 느낌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카페는 바로 칼 세이건이 '지구'를 두고 말했던 '창백한 푸른 점'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 있다. 저것이 우리의 고향이다. 저것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봤을 모든 사람들,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삶을 영위했다. 우리의 기쁨과 고통이 총합,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적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의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의 지도자들, 인간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저기 -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 활동도 접고 나니 페이스북이 등장했고 나는 당연히 거기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런데 페이스북에서 범람하는 글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금세 질린 나는 거기서도 재빨리 빠져나오고 말았다. 그 뒤로 네이버 밴드와 카톡, 카카오 스토리가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갈 때 나는 또다시 그 급류에 잠시 올라타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물살도 내가 즐기기엔 너무 빠르거나 변덕스러웠고, 그런 물살에서 적당히 벗어나 지내는 게 훨씬 더 마음이 편했다.
내가 사이버 공간에서 글을 쓰고 소소한 일상들을 미주알 고주알 주고 받는 곳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면 그곳이 바로 여기 알라딘이다. 일이 그렇게 된 건 아마도 내가 알라딘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함'이 바로 내 성미와 잘 들어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알라딘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건 순전히 '책을 편리하게 고르고 사들이기 위해서' 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남들이 쓴 훌륭한 리뷰들을 열심히 찾아 읽게 되면서 나도 한번 열심히 '리뷰'를 써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중엔 결국 오랫동안 뛰어들기를 주저했던 '페이퍼 활동'에도 발을 들여놓고야 말았다.
책을 고르고, 책을 사들이고, 리뷰를 쓰는 일은 그 누구와의 '교류'도 없이 누구나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어서 나 자신에게나 남들에게나 거의 아무런 부담이 없었지만, 페이퍼 활동은 성격이 약간 달랐다. 흔히 '댓글'이나 '추천 혹은 공감'으로 표출되는 남들의 '시선'이나 '관심'에 신경을 쓰지 않을 도리가 도무지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큰 부담이었다. 페이퍼를 쓰게 되면 어차피 맞닥뜨리게 될 여러 예상치 못할 스트레스나 성가심 등은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는 심정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는 늘 댓가를 요구하게 마련이지만, 그런 걱정 때문에 미리부터 소소한 일상들을 주고 받는 기쁨을 송두리째 포기하기는 싫었던 셈이다. 아담 스미스도 오래 전에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이다.
모든 소소한 사건들에 대하여
인간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이유에서 생기는 비교적 작은 기쁜 일들에는 더욱 쉽게 동감한다. 크게 번영하고 있는 중에도 겸손할 수 있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모든 소소한 일들에 대해, 지난밤을 함께 보낸 친구들에 대해, 우리가 함께 즐겼던 여흥(餘興)에 대해, 우리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해, 현재 대화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모든 소소한 사건들에 대해, 인간의 삶의 빈틈을 채워주는 소소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리 큰 만족을 표현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성격적으로 쾌활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러한 성격은 일상적인 소소한 사건들이 제공하는 모든 작은 즐거움으로부터 특별한 흥미를 느낄 줄 아는 것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러한 성격에 쉽게 동감하며,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기쁨을 느끼게 하며,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행복한 성격을 타고난 사람들이 보는 것과 동일한 모든 사소한 일들의 유쾌한 측면을 보게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청춘(靑春), 즉 모든 것에 즐거움을 느끼던 시절이 그처럼 쉽게 우리의 마음에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소한 것을 보고도 즐거워하는 이러한 성향은 심지어 꽃까지 피어나게 하고, 젊고 아름다운 눈들을 반짝거리도록 만든다. 이러한 성향은 같은 동성(同性)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이든 사람까지, 평상시 이상으로 기쁨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들은 잠시 동안 자신의 노쇠함을 잊어버리고 그들에겐 오래 전에 이미 낯 설어버린 유쾌한 생각과 정서에 자신들을 내맡긴다. 이처럼 많은 행복감을 느낌으로써 유쾌한 생각과 정서가 그들의 마음속에 다시 떠오르게 되면, 그들은 마치 오랫동안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만나서는 그 동안의 오랜 이별 때문에 더욱 진심으로 껴안을 수 있는 친구처럼, 이러한 생각과 정서는 그들의 가슴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
그렇게 해서 그럭저럭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이번에 알라딘이 제법 커다란 '변신'을 시도했다. 북플 서비스가 등장한 것이다. 뉴스를 읽어 보니 이 서비스의 등장을 굳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책(book)과 사람(people), 덧글(reply)의 합성어인 북플은 독서 행위를 기록하고 책 읽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응용 프로그램)이다. ······ 독서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친구를 맺고 이들의 소식을 받아보는 기능도 이용 가능하다. 특히 '마니아' 기능을 통해 관심있는 책이나 저자, 분야, 시리즈의 '준 전문가'들도 찾아볼 수 있다. 김영란 알라딘 차장은 "최근 도서정가제 강화 이후 책의 판매가가 동일해졌으므로 서점으로서의 서비스와 콘텐츠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갖고 있을 만한 독서 앱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알라딘은 스마트폰 앱으로만 이용 가능한 이 서비스의 모바일웹, PC 버전 서비스도 선보일 계획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북플 서비스가 과연 내게 얼마나 유용한 서비스일지 알기가 어렵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카톡이나 네이버 밴드가 계속 성행하는 걸 보면 이 새로운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도 나의 취향과는 아무런 관계 없이 오래도록 장수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벌써 이틀째 스마트폰에서 연신 울려대는 '친구 신청' 알림을 보면서 문득 몽테뉴가 말했던 '고요한 뒷방' 생각이 벌써부터 간절하게 떠올랐다.
뒷방
할 수만 있다면 아내·아이·재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강을 가져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 행복이 거기에 매여 있게까지 집착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에게 남이 침범하지 않는 아주 자기 고유의 것인 뒷방을 가지고, 그 속에 진실한 자유와 은둔처를 마련해 둘 일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과의 일상의 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사사로워서, 외부와의 어떠한 관련이나 교섭도 그 곳에는 미치지 못하게 할 일이다.
아내도 어린애도, 재산도, 다른 사람도, 하인도 없는 듯 그곳에서 혼자 생각하며 웃고 지내며, 그런 것들을 잃는 경우에 부딪혀도 그런 것들 없이 살더라도 아무런 별다름이 없게 할 일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들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 그것은 자기를 동무삼을 수 있다. 마음은 공격할 거리, 방어할 거리, 줄 거리와 받을 거리를 가졌다. 이러한 고독함 속에서 할 일 없이 괴롭다고 오그라들까 두려워 말자.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날카롭게 간파했듯이 '현존재에는 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이 놓여 있다.'
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
거리를 없앰은 거리를,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의 멂을 사라지게 함을, 가까워지게 함을 말한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거리를 없애며 존재한다. 그는 그가 무엇인 그 존재로서 그때마다 존재자를 가까이에서 만나도록 해준다. 거리를 없앰은 멂을 발견한다. 이 멂은 거리와 마찬가지로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자에 대한 범주적 규정이다. 그에 반해서 거리를 없앰은 실존범주로서 확고하게 견지되어야 한다. 도대체 존재자가 현존재에게 그것의 멂이 발견되는 한에서만 세계내부적인 존재자 자체에서 다른 것과 관련되어서 "거리"와 간격이 접근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존재자들 가운데 어떤 것도 그것의 존재양식상 거리를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단지 거리를 없앰에서 발견되는 측정 가능한 간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현존재에는 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이 놓여 있다. 우리가 오늘날 다소 강요되듯이 함께 행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속도상승은 멂을 극복하도록 몰아세운다. 예를 들면 "라디오 방송"과 함께 현존재는 오늘날 일상적 주위세계의 확장과 파괴라는 방법으로써 그것의 현존재의 의미를 아직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세계'의 거리를 없애고 있다.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그렇지만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남들로부터 아무런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온 세상을 마음대로 떠돌아 다닐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듯이, 책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에 있어서도 '남이 침범하지 않는' 자기 고유의 '뒷방'을 갈구하는 정반대의 묘한 심정 또한 새록 새록 솟아나는 걸 나는 참기가 어렵다. 참 묘한 느낌이다. '너무나 사사로워서, 외부와의 어떠한 관련이나 교섭도 그 곳에는 미치지 못하게 할' 그런 뒷방이 나는 여전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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