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양장)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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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알고 싶지 않은 관계였다.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편지는 신기하면서도 아프기도 했고 위로가 되기도 했다. 로또 번호는 남기고 진실을 알았어야지라고 생각한 내가 너무 속물 같아서 부끄럽기도 했다. 어떤 세상이든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었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어쩌면 그 미래에 자신을 가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은유는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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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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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떤 극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심장박동 수가 올라가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서 그 상황에 함께 있던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 쉬워진다고 한다. 영화 <스피드>가 그러했고, 수많은 007 시리즈들이 그러했다. 물론 각각의 상황이 심박수나 호르몬 때문만은 아닐테지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평범한 장소에서 만난 남녀보다 흔들다리 위에서 만난 남녀가 서로에게 느끼는 호감이 더 크다는 실험 결과가 말해주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아주 특이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심장박동 수와 아드레날린이 필요했던 것일까. 날씨도 좋고 연인과 행복한 소풍을 나왔던 그 순간, 하늘을 나는 기구가 안에 소년을 태우고 긴 끈들을 드리운 채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위험을 느낀 사람들이 각 방향에서 뛰어 와 그 끈들을 잡았고, 바람이 불었고, 누군가가 그 끈 중 하나를 놓았고,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끈을 놓았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매단 채 기구는 두둥실 하늘을 날았고, 들판에 그 한 사람을 떨구었다.


도움을 주기 위해 뛰어왔던 사람들에게, 그들과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그 기구에 있던 소년과 할아버지에게 이 사건은 끔찍했고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이 이야기 어디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는걸까. 뜬금없이 '사랑'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서나 꽃 피울 수 있고, 어떤 역경 속에서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걸까. 어쩌면 죄책감이 변질되어 '사랑'이라 불리게 된 것일까?


'드 클레랑보 증후군'이란 것이 있다. 자신보다 높은 경제적 위치 혹은 정치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것이 주 증상이며, 그 대상이랑 접점도 없고 아는 사이가 아님에도 그 대상이 자신에게 몰래 신호를 보낸다고 믿는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나를 알지 못한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주위를 맴돌며 상황을 왜곡하고 망상에 빠지는데, 그러면서 스스로와 그 대상을 비극적 상황으로 내몰기도 한다.


사실 이 스토커 같은 드 클레랑보 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심장박동 수나 아드레날린은 필요한 요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조의 지위가 높아보였던 것일까. 그 곳에 있던 수많은 사람 중에 하필 '조'여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긴 이유가 있을까. 우리의 삶은 알 수 없는 이유들투성이가 아닌가.


패리는 조를 따라다니고, 조는 목숨의 위협까지 느낀다. 하지만 이 패리의 망상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책을 읽는 나조차 조의 망상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석연찮은 부분들이 드러나고,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미세한 금이 가고,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보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각자의 사연을 들었다. 그들 중 로건의 아내인 진이 가장 안타까웠다. 빌어먹을 사랑 같으니라고. 사실 견딜 수 없는 사랑이니 빌어먹을 사랑이니 죽일 놈의 사랑이니 하는 말 따윈 다 소용없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이다.


책을 덮은 후에도 여전히 난 그 이유에 죄책감과 합리화가 어느 정도 자리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패리는 조의 눈에서 본 것이다. 자신이 먼저 손을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과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놓았을 것이고 떨어진 이가 내가 됐을 것이라는 합리화. 그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인간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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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6-07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책 첫부분 읽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야기 일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사랑(?) 이야기가 진행되고 또 스릴러가 되고 추리소설이 되서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어서 약간 아쉬운 면도 있었습니다 ㅋ

저도 리뷰써야하는데 ㅜㅜ

꼬마요정 2023-06-08 17:05   좋아요 1 | URL
저도 죄책감에 시달릴 거라 생각했는데 이야기가 점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가더라구요. 그래서 뭐지? 하면서 쭉 읽었네요. 읽고 나니 뭔가 찜찜하고… ㅎㅎㅎ 여튼 무서운 사랑입니다. 새파랑 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얼마나 잘 쓰실까 완전 기대용^^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배명훈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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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아닌 우주의 다른 곳의 물리학은 따라가기 어렵다. 자전 속도도 흐르는 시간도. 총을 쏘면 탄도가 내 상상을 넘어선다. 마치 영화 <원티드> 같다고나 할까. 총알이 여러 번 휘어서 돌아들어간다. 우주섬 사비는 백제를 떠올리지만 백제와는 상관없고, 젊은이들이 어른이 되는 과정을 <마탄의 사수>의 악마를 빌어 나타내기도. 젊을 땐 이리저리 휩쓸리며 꿈을 찾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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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란 무엇일까?



얼마 전에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면서 끝이 이렇게 끝나서 좋긴 한데, 원래 복수극이란 끝끝내 행복해지기 전에 끝나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복수극을 하나 하나 떠올려 봤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복수극이다. 에드몽 당테스가 나폴레옹의 편지 때문에 여럿의 음모로 억울하게 감옥 생활을 하다가 보물이 숨겨진 곳을 아는 신부님을 만나 탈옥을 하고,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신분 세탁을 하면서 복수를 해 나가는 과정이 정말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복수라는 게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니 말이다. 에드몽 당테스는 결국 에두아르의 죽음 앞에서 복수의 이면을 깨닫고 만다. 자신이 지옥에서 고통 받아 복수를 다짐했는데, 그 고통을 아무 죄 없는 이에게 선사했으니 말이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죄 없는 피를 보기 마련이다. 그래도 당테스는 나름 행복을 찾아 떠났다. 메르세데스보다 어리고 더 순종적인 여자인 하이데랑... 아, 짜증나... 사실 마지막이 로맨스로 끝나기엔 좀 멜로가 부족하긴 하다. 당테스가 행복하면 싶기도 하지만 하이데 입장에서는 안 되기도 했다. 당테스는 단명할텐데... 


작가가, 그 시대의 서양이 가진 동양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복수하면 사실 <햄릿>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다. 유약하다면 유약하게 보이고, 교활하다면 교활해 보이는 우유부단한 햄릿 말이다.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복수를 해 달라고 하는데, 숙부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가로챈 게 사실일까? 숙부가 기도할 때 죽이지 않은 건 그가 천국으로 갈까봐인데, 햄릿이 머뭇거린 까닭에 애꿎은 오필리어가 죽었다. 레어티스도, 자기 자신도.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역시 복수는 죄 없는 피를 부른다.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와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이아>는 같은 인물의 이야기이지만 완전 다른 이야기이다. 복수에 걸맞는 인물은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인데, 이아손을 그리 나쁜 놈으로 그리지 않아서 짜증이 난다고나 할까. 앞서 단테스나 햄릿에게는 나름 복수하려는 이유가 있는데, 메데이아는 단순히 질투에 미친 여자가 된 것 같아서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이아>를 함께 놓았다. 복수는 정말 자신의 살을 태우고 영혼을 갈아버리는 것 같다. 너무 참혹하다. 자식을 복수의 제물로 삼는 건 뒤에 나오는 탄탈로스부터 시작하는 일파들의 이야기도 그렇지만, 프로크네와 필로멜라 이야기도 그러하다. 어떻게 보면 모성애는 근대로 오면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두 이야기는 이아손과 테레우스의 파렴치한 짓이 불러온 참상이다. 역시 죄 없는 이들의 피가 철철 흘러내린다...










생각해보면 신화가 복수극의 원형이 아닐까 싶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탄탈로스 가문 이야기가 아닐까. 신들의 분노를 산 탄탈로스부터 이피게네이아, 엘렉트라, 오레스테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막장 중에서도 막장으로 인정받을 것 같다. 배신은 기본이고 살인을 하고 자식을 먹고 딸을 강간하고... 세익스피어의 희곡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가 여기서 나왔나 싶을 정도다. 고트족 여왕 타모라가 자신의 부족과 가족을 도륙한 로마 장군 타이터스에게 복수하는 내용인데, 정말 잔인하고 참혹하다. 인간은 때론 허상에 집착하여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또 끔찍하게 대가를 치른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말이 있다. 춘추 시절, 오나라 왕 합려는 월나라를 쳤다가 월나라 왕 구천에게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 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에게 복수를 유언으로 남겼다. 부차는 결국 유언을 지켰으나,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은 탓에 구천을 살려주었다. 구천은 합려의 무덤을 지키고, 부차의 대변을 핥고, 장작 위에서 자고,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했다. 구천은 결국 부차에게 복수를 하지만, 그 와중에 또 수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개인의 복수가 아닌 나라 간 전쟁으로 치달은 이 복수는 어쩌면 위의 이야기들보다 더 참혹할 것이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복수극 드라마는 <개와 늑대의 시간> 과 <상어>다. 사람의 인연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하게 얽혀 있는지, 탐욕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복수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얼마나 철저하게 버려야 하는지, 사랑이 과연 어디까지 감싸안을 수 있는지 볼 수 있다. 그리고 권력 기관이나 거대 자본이 돕지 않으면 결코 개인은 복수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피해자는 당연히 힘들지만, 가해자의 선한 자녀들 역시 괴롭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가해자는 많은 이들에게 끔찍한 피해를 입혔는데 정작 자신의 자식 혹은 손녀에게는 선한 사람으로 남고 싶었나 보다. 타인의 피와 고통 위에 세워진 부(富)과 권력을 누리며 자손은 올바르게 자라길 바라는 건 지독한 이기심이고 탐욕이지 않은가.


피해자들은 결국 모든 것을 내던져야 했다. 자신의 기억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얼굴마저도. 그러면서 겪는 내면의 고통 역시 가혹했다. 게다가 이들은 가해자 곁에서 정체를 숨기고 있으며 가해자를 알아가고, 어느 순간 인간적으로 반하기도 하고(개늑시), 손녀 때문에 복수를 망설이기도 한다(상어). 


가해자는 죄의식이 없고, 피해자는 피해자이기 때문에 도덕에서 우위를 차지하며 자신의 복수를 정당화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자신 안에 있는 불의나 부도덕을 감당하기 힘들다. 그것이 복수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복수는 필연적으로 무고한 이에게 고통을 가하고, 그로 인해 복수의 정당성은 힘을 잃고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오게 된다.


사적 복수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김은숙 작가의 말처럼, 돈이 많으면 피해자가 되어도 어떻게든 해 볼 수 있겠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도 권력도 없기 마련이고, 가해자는 돈도 권력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리하여 공적인 제도 안에서 가해자가 합당한 벌을 받지 않을 때,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일들이 누적되어 우리 사회 안에 화(火)가 많아지고 분노조절이 안 되고 약자를 괴롭히게 된 것은 아닐까. 정말로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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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보다 Vol. 1 얼음 SF 보다 1
곽재식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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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서늘한 바람이 부는 밤이 되면, 넷째 고양이 카프가 배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는다. 골골거리면서 눈을 꿈벅꿈벅하면 얼마나 귀여운지 나도 모르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제법 오랜 시간 배 위에서 편안하게 자리 잡고 졸다가 다른 냥이들이 오거나 배가 고프면 내 어깨에 팔을 뻗어 꾹꾹이를 조금 하다가 가 버린다. 이 녀석이 6키로가 넘는데 그 무게감이 좋다. 세상에서 이만큼이나 자리를 차지하고 예쁨을 뽐내고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이 다 뒤집어져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기후위기 등으로 이미 세상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을만큼 이상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SF 속 세상이 마냥 낯설지만은 않다. 정말로 이렇게 올 것만 같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짙어져서일까. 그래서 과학이 판타지마냥 작동하던 세상이 이제는 그럴싸한 미래가 되어 우리 앞에 던져진다. 그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기도 하다.


첫 번째 이야기인 <얼어붙은 이야기>는 곽재식 작가의 이야기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미래의 세상이나 먼 우주의 어느 별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의 이야기이지만 또 아니기도 하다. '생사귀'도 '제 6조사실'도 왠지 있을 것만 같다. 이야기의 전개 및 내용이 모두 정해져 있다는 것을 '얼어붙은 이야기' 라고 표현한 것도 재미있다. 게다가 정부 부처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도 현실이랑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여 웃기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나'란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내 몸을 이루는 세포 수만큼의 별들이 사라져야 한다는 말은 그럴싸하다. 우리 개개인이 하나의 우주라면 우리를 이루는 세포들은 그 우주를 구성하는 별들일테니. 그렇기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의 말을 믿어야 할 지 , 우스개소리로 치부해야 할 지 고민이다. 이 모순 속에서 해피엔딩만 믿으면 안 될까....


두 번째 이야기는 구병모 작가의 <채빙>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을 냉동시켜 보존할 수 있게 된 사회부터 모든 것이 무너지고 얼어버리고 불타버린 더 먼 미래의 어느 날까지의 이야기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멸망해버린 지구의 인간들이 다시 원시시대부터 거쳐 '나'가 어째서 거기 있는지 알아내는 단계까지 발전한 시대까지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말을 알아듣고 눈높이의 시야까지는 볼 수 있는 '나'는 열기 가득한 세상에 남아있는 얼음산에서, 어떤 부족에게는 '사한'이고 어떤 부족에게는 '현명'이다. 그들은 '신'에게 불가능한 것을 바라지만, 그 중에도 어떤 이는 그저 '얼음새꽃'을 두고 '나'는 그런 그를 '다르게' 본다. 본디 신이 아니기에, 신이 된 적도 없었기에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나'는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죽음마저 얼려버린 그 과학 기술이라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어쩌면 죽음은 안식보다 더 소중한 무엇일지도 모른다. '전멸과 폐허의 터전'에서도 생명이 태어나고 이어져가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남유하 작가의 <얼음을 씹다> 이다. 세상은 온통 얼어붙었고, 암울하다. 영하 50도가 일상인 세계. 그 곳에는 먹을 것도 따뜻한 기운도 부족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가족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빈부 격차를 감수하며 살아간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어디서 시작하든 무리를 짓고, 규범을 만들고, 누군가는 군림하게 되는가보다. 이 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가족들은 그 죽은 이의 살과 내장을 먹는다. 그것이 법이고 어길 시에는 처참한 벌을 받게 된다. 


"인간은 다른 이의 살을 영양분으로 섭취하며 생존해야 할 만큼 고귀한 존재가 아니다."(p.81)란 말이 어설프게 들리지 않는 건, 굶주림과 목마름이 너무 고통스러워 사랑하는 이의 살점마저 달콤하게 느껴지는 게 무섭기 때문이다. 아이의 시체만큼은 훼손당하기 싫었으나, 결국 시어머니는 유리아를 신고한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한들 손녀를 먹을 수 없을텐데... 


네 번째 이야기는 박문영 작가의 <귓 속의 세입자>이다. 앞 이야기가 영하 50도의 세상 이야기였다면, 이 이야기는 지나치게 열정적인 세상의 이야기이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월드컵이 열렸고, 한국은 4강에 진출했다. 말만 들어도 그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이 열기는 고통스러운 열기가 아니다. 하지만 주인공인 해빈에게는 고통이었다.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이 없다는 건 지극히 피곤한 일이니까. 모두가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 열기에 휩싸이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 '세입자'는 해빈을 선택했을 것이다. 사람과 거리를 두고 싶어하기에. 그 세입자는 지나치게 친밀한 이들 때문에 파멸한 세상의 우주에서 왔으니까. 무리 짓지 않고 완벽히 홀로 지내는 존재는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세입자마저 무엇이든 누군가이든 함께 지내야 하는데 말이다. 어쩌면 생존하기 위해 거리를 두지만, 외롭기에 어느 정도의 '온기'를 자기도 모르게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해빈이 사람과의 거리를 좁히려 하자, 그 '온기'에 휩싸일까 가 버린 것일지도. 다시 한 번 따뜻함을 느끼면 금세 뜨거워지길 바랄테니.


인간은 지성체가 아니고, 사람과 가까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말과 혼자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모두 사실이다. 사람마다 그 거리와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섯 번째 이야기는 연여름 작가의 <차가운 파수꾼>이다. 이 이야기까지 오면, 앞 이야기의 '세입자'가 왜 온기(情)를 거부했는지 알 것도 같다. 이 세상은 얼음이 사라진 세상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얼어 대지를 이루었던 곳에 있는 건물들은, 얼음이 녹아버리자 하나 둘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노이는 그런 건물이 무너져 이모를 잃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아파트 지하에 사는 '선샤인'을 돌보는 일을 물려 받았다. '선샤인'은 한기를 뿜어내고 한기 속에 살아가는 생명체이다. 그런 존재가 이 아파트에 있으니 아파트는 한동안은 무너지지 않고 버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샤인'도 힘이 약해져 가고 있었다. 열기 가득한 곳에서 혼자 살아가기 버거워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노이는 이제트를 만났다. 둘은 다르면서도 같았다. 이런 가혹한 세상에서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고 서로가 살아남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제트는 그런 선택을 한 것이겠지. 햇빛 속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노이를 위해. 아파트가 무너지면 노이는 움직일 수 없을테니. 


온기가 한기로 완성되다니...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내놓는 건 숭고한 희생일까, 무모한 열정일까. 이렇게 둘은 고통스럽지만 함께 할 수 있으니 행복할까... 


여섯 번째 이야기는 천선란 작가의 <운조를 위한>이다. 죽이지 않아도, 얼리지 않아도 되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음처럼 차가운 세상에서 운조는 기계처럼 살아간다. 오직 인간의 필요를 위해 불임인 소, 무지는 한 살이 갓 지나서 죽임을 당하고, 17년을 산 고양이 메리는 마지막 숨을 남겨두고 순전히 주인이 함께 죽길 원해서 얼려진다. 어느 새 생명은 물건처럼 취급당하고, 운조 역시 수의사지만 동물병원의 부품 취급을 받는다. 선택할 수 없는 선택 속에서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던 운조는 마거릿의 연구소에 갔다가 알 수 없는 시간대에 떨어진다. 


그리고 모습은 인간과 다르지만 다정한 '로타'를 만난다. 빨간 눈을 가진, 운조의 첫 반려동물이었던 토끼를 닮은 로타. 운조는 그 세상에서 아무도 죽이지 않고, 아무도 얼리지 않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며 위안을 얻는다. 말이 통하던 세계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가 더 말이 되는 것 같은 세상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 세상은 운조의 세상이 아닌 것을... 얼음이 아무리 꽁꽁 얼어도, 약간의 온기로도 균열을 가져올 수 있듯이 운조를 이 시간대로 데려온 무언가는 운조를 다시 다른 시간대로 데려간다. 운조는 과연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여섯 가지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는 문지혁 작가의 <하이퍼-링크>와 심완선 평론가의 <크리틱>이 함께 한다. '얼음'을 클릭하면 각각의 여섯 가지 이야기로 날아갈 수 있을 것이고, SF 소설의 전반을 아우르는 글을 볼 수 있다. 


이상기후 등으로 지구는 결국 '디스토피아'라고 불리는 그런 미래에 도달하게 되는 것일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단절된 것만 같은 그 세계는 더 이상 내가 모르는 세계가 아니다. 올 것만 같은 그럴싸한 세계... 메타 버스니 가상 현실이니 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잡힐 것만 같은 세계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사람 목숨이 중요한가요? 그 많은 별과 은하계가 생기는 데도 몇십억 년의 세월이 필요한데요. 그것들을 모조리 다 없애도 기분이 언짢지 않으세요?" - P20

미래를 불쏘시개 삼아 오늘을 눈부시게 밝히는 날들로 일관하던 어느 날, 세상에 존재하던 대부분의 얼움이 녹았다 한다. - P49

누군가는 이런 유서를 남겼다. "인간은 다른 이의 살을 영양분으로 섭취하며 생존해야 할 만큼 고귀한 존재가 아니다." - P81

"인간은 지성체가 아니에요. 사람은 사람을 가까이에서 보고 만져야 살아갈 수 있어요.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아요."(p.127, p.130) - P127

"네가 오늘 하루를 무사히 지냈다면, 노이. 너는 벌써 그걸로 나를 도운거야." - P155

운조는 그날 낮에 소를 죽이고 밤에 고양이를 얼렸다. 어떤 것은 기묘하게 빨리 죽여버렸고, 어떤 것은 불필요하게 오래 살렸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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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5-24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정 님^^
저 얼마 전에 <환혼> 시즌2까지 다 봤어요.ㅋㅋ
리뷰 읽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환혼>이 떠올라서 알려드립니다^^
재밌더군요.
울 막내가 한동안 자꾸 ~해유. 그러더군요.
그냥 그런가보다. 생각했었는데 그게 전소민 말투를 흉내낸 거였두만유?
<환혼>을 안봤음 모르고 지나갈 뻔했었네요.ㅋㅋㅋ
감사해유~^^

꼬마요정 2023-05-24 22:58   좋아요 1 | URL
보셨군요 ㅎㅎ 전 시즌1에서 무덕이랑 도련님이랑 세자저하랑 셋이 나오는 장면이 참 좋았어요. 너무 좋았는데 무덕이를 그렇게 해서, 세자가 그런 선택을 해서, 장욱이 그런 대가를 치르게 해서 아팠답니다. 흑흑
이제 다음 드라마는 뭐 보시나유~~?

책읽는나무 2023-05-24 23:12   좋아요 1 | URL
시즌 1에서 갑자기 무덕이를 그리 만들어 버리고 시즌 2에서 살수가 나오니까 고윤정이 참 이쁘긴한데 무덕이에게 미련이 남았던지 3화까지 보는데도 적응이 안되는 거에요ㅜㅜ
무덕이 캐릭터가 참 예뻤던 것 같아요.^^
<환혼>을 마스터하고 <낭만닥터 김사부> 시즌 1,2 를 보고 <나쁜 엄마>를 보고 있거든요.
제가 이 두 드라마를 보고 빵 터졌다 아닙니까!
환혼의 대사님? 스승님? 있잖습니까? 그 분은 <낭만닥터 김사부>시즌 2에서 깡패로 나오구요. 순이 역을 맡은 배우는 간호사로 나오구요.
환혼의 세자는 <나쁜 엄마>에서 구청 축산과 직원으로 나오더군요?
그리고 박당구 걔는 주인공 강호 친구로 나오는데 좀도둑으로 감옥갔다 온 친구로 나와요ㅋㅋㅋ
<환혼>이 꽤 유명했었나 봅니다.
환혼에 이어 두 드라마를 보는데 아는 얼굴들이 쏙쏙!!^^
지금은 <닥터 차정숙> 보고 있어요.
요정님은 뭘 보시나요?^^

꼬마요정 2023-05-24 23:45   좋아요 1 | URL
아, 전 <구미호뎐1938> 보고 있어요 ㅎㅎ 바빠서 요거 하나만 챙겨 봅니다 5월만 지나면 <닥터 차정숙> 시작하려구요.
저 작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신승호 배우 봤어요. 세자요!! 어찌나 반갑던지요 ㅋㅋㅋ 전 환혼 때문에 황민현이나 아린도 좋아졌답니다. 서율이랑 진초연이요. 아이돌인데 호감이었어요. 근데 당구가 <나쁜 엄마>에 나오나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감은빛 2023-05-27 06:03   좋아요 2 | URL
저도 얼마전에 뒤늦게 환혼 시즌1을 보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시즌2에서 여 주인공이 바뀐다는 걸 알아버렸어요. 그래서 조금 맥이 빠져버려서 이상하게 그 다음 이야기에 집중이 안 되어 잠시 멈춘 상황입니다.

전소민의 말투가 정말 그대로 생각나네요. 일부러 신분을 속이려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모습이요.

책읽는나무 2023-05-27 20:11   좋아요 1 | URL
감은빛 님도 <환혼> 드라마를 보셨나요?
조금 신기합니다^^
전소민 배우의 연기에 쏙 빠져 익숙하다 보니 시즌 2에서는 한동안 적응키 어렵긴 합니다.
저는 전소민 배우가 확 잡아끄는 역을 연기를 했었던 기억이 없어서인지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인지 잘 못느꼈었는데 이번에 <환혼> 시즌제를 보면서 전소민 배우의 존재를 확 깨닫게 되었습니다.
능청스럽고 귀여운 이미지인데도 표정 연기 하나로 두 사람의 역할을 미세하게 잘 표현해서 조금 놀랐네요. 그래서 전소민 배우를 이번에 다시 보았습니다.^^
시즌 2는 아마도 시간이 좀더 지난 후 보신다면 또 나름대로 재미가 있으실 거에요. 살수와 진부연의 철학적 세계관이 조금 펼쳐지거든요. 그리고 전 박진의 유준상 배우와 김도주의 오나라 배우의 애정씬들도 재밌었어요.^^

꼬마요정 2023-05-27 22:30   좋아요 1 | URL
감은빛 님도 <환혼> 보시는군요 ㅎㅎ 전소민 배우 정말 맛깔나지 않나요? 똥무더기랑 낙수랑 진부연이랑 오가는 것이 참으로 매력적이더라구요. 장욱이랑 케미도, 세자랑 케미도 너무 좋구요. 시즌 2도 보시면 왜 진부연이 낙수를 찜했는지 알 수 있게 되구요, 나름 떡밥 회수 거의 다 해서 재미있으실 듯요.^^

꼬마요정 2023-05-27 22:31   좋아요 1 | URL
책나무 님!! 찌찌뽕이요!! 저도 유준상 배우랑 오나라 배우 잘 되길 얼마나 바랐다구요 ㅋㅋㅋ 마지막에 진짜, 작가 욕 한바가지 할 뻔... ㅋㅋ 앗, 너무 스포일라나요? ㅋㅋ 오랜만에 <환혼> 이야기 하니까 좋아요.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ㅎㅎㅎ

희선 2023-05-25 02: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갈수록 지구는 안 좋아지겠네요 이번 여름엔 비가 많이 온다는 말이 있던데, 그것부터 걱정이 되는군요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건 없을지... 없겠습니다 남극 북극 빠르게 빙하와 얼음이 녹으니... 얼음과 빙하가 녹은 세상은 뜨겁겠네요 그때 살아 남을 사람이 있을지...


희선

꼬마요정 2023-05-27 22:37   좋아요 1 | URL
그렇죠ㅠㅠ 지구가 좋아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더 나빠지지만 않아도 다행일테지만, 사실 이미 늦은 것 같아요ㅠㅠ 남극이나 북극의 빙하가 녹는다는 게 생각보다 더 심각한 일이더라구요. 모르던 나쁜 일들을 하나씩 더 알아가는 기분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런 황페한 세상에서도 살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고, 자손을 남기는 것을 보니 좀 무섭더라구요.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요...?

감은빛 2023-05-27 0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을 제가 놓치고 있었군요. 바로 담아갑니다. 한국 SF 작가들도 최근에 정말 양적, 질적 발전을 이루고 있다고 느껴요.

넷째 고양이가 6킬로그램이 넘는군요. 고양이가 많네요. 우리 애들이 키우는 고양이가 둘인데, 제가 보기엔 둘 만으로도 많다고 느꼈거든요. 사료 그릇과 물 그릇과 화장실 통을 각각 2개씩 놓아야해서 집이 정신이 없다고 해야할까? 캣타워와 잠자리 등도 각각 있어야하고 말이죠. 근데 더 많으면 더 귀여운 고양이가 많아지는 거니까 더 정신이 없더라도 괜찮을 것 같네요. ㅎㅎㅎㅎ

꼬마요정 2023-05-27 22:47   좋아요 0 | URL
이 책 재밌게 읽었어요. 얇은데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나라 작가들 정말 대단해요!!!

고양이는 한 마리 더하기 한 마리가 두 마리가 아니지요? ㅋㅋㅋ 그리고 두 마리부터는 마릿수가 줄지 않는다고 하네요. 저는 그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분명 처음엔 한 마리였는데 어느 순간 두 마리가 되고 어느 순간 네 마리가 되고 어느 순간 여섯이 되었어요 ㅋㅋㅋㅋㅋ 점점 집사의 물건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고양이 물건이 떡 하니 있더라구요. 정신 없어도 사랑하니까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