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란 무엇일까?
얼마 전에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면서 끝이 이렇게 끝나서 좋긴 한데, 원래 복수극이란 끝끝내 행복해지기 전에 끝나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복수극을 하나 하나 떠올려 봤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복수극이다. 에드몽 당테스가 나폴레옹의 편지 때문에 여럿의 음모로 억울하게 감옥 생활을 하다가 보물이 숨겨진 곳을 아는 신부님을 만나 탈옥을 하고,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신분 세탁을 하면서 복수를 해 나가는 과정이 정말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복수라는 게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니 말이다. 에드몽 당테스는 결국 에두아르의 죽음 앞에서 복수의 이면을 깨닫고 만다. 자신이 지옥에서 고통 받아 복수를 다짐했는데, 그 고통을 아무 죄 없는 이에게 선사했으니 말이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죄 없는 피를 보기 마련이다. 그래도 당테스는 나름 행복을 찾아 떠났다. 메르세데스보다 어리고 더 순종적인 여자인 하이데랑... 아, 짜증나... 사실 마지막이 로맨스로 끝나기엔 좀 멜로가 부족하긴 하다. 당테스가 행복하면 싶기도 하지만 하이데 입장에서는 안 되기도 했다. 당테스는 단명할텐데...
작가가, 그 시대의 서양이 가진 동양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복수하면 사실 <햄릿>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다. 유약하다면 유약하게 보이고, 교활하다면 교활해 보이는 우유부단한 햄릿 말이다.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복수를 해 달라고 하는데, 숙부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가로챈 게 사실일까? 숙부가 기도할 때 죽이지 않은 건 그가 천국으로 갈까봐인데, 햄릿이 머뭇거린 까닭에 애꿎은 오필리어가 죽었다. 레어티스도, 자기 자신도.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역시 복수는 죄 없는 피를 부른다.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와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이아>는 같은 인물의 이야기이지만 완전 다른 이야기이다. 복수에 걸맞는 인물은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인데, 이아손을 그리 나쁜 놈으로 그리지 않아서 짜증이 난다고나 할까. 앞서 단테스나 햄릿에게는 나름 복수하려는 이유가 있는데, 메데이아는 단순히 질투에 미친 여자가 된 것 같아서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이아>를 함께 놓았다. 복수는 정말 자신의 살을 태우고 영혼을 갈아버리는 것 같다. 너무 참혹하다. 자식을 복수의 제물로 삼는 건 뒤에 나오는 탄탈로스부터 시작하는 일파들의 이야기도 그렇지만, 프로크네와 필로멜라 이야기도 그러하다. 어떻게 보면 모성애는 근대로 오면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두 이야기는 이아손과 테레우스의 파렴치한 짓이 불러온 참상이다. 역시 죄 없는 이들의 피가 철철 흘러내린다...
생각해보면 신화가 복수극의 원형이 아닐까 싶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탄탈로스 가문 이야기가 아닐까. 신들의 분노를 산 탄탈로스부터 이피게네이아, 엘렉트라, 오레스테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막장 중에서도 막장으로 인정받을 것 같다. 배신은 기본이고 살인을 하고 자식을 먹고 딸을 강간하고... 세익스피어의 희곡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가 여기서 나왔나 싶을 정도다. 고트족 여왕 타모라가 자신의 부족과 가족을 도륙한 로마 장군 타이터스에게 복수하는 내용인데, 정말 잔인하고 참혹하다. 인간은 때론 허상에 집착하여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또 끔찍하게 대가를 치른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말이 있다. 춘추 시절, 오나라 왕 합려는 월나라를 쳤다가 월나라 왕 구천에게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 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에게 복수를 유언으로 남겼다. 부차는 결국 유언을 지켰으나,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은 탓에 구천을 살려주었다. 구천은 합려의 무덤을 지키고, 부차의 대변을 핥고, 장작 위에서 자고,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했다. 구천은 결국 부차에게 복수를 하지만, 그 와중에 또 수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개인의 복수가 아닌 나라 간 전쟁으로 치달은 이 복수는 어쩌면 위의 이야기들보다 더 참혹할 것이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복수극 드라마는 <개와 늑대의 시간> 과 <상어>다. 사람의 인연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하게 얽혀 있는지, 탐욕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복수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얼마나 철저하게 버려야 하는지, 사랑이 과연 어디까지 감싸안을 수 있는지 볼 수 있다. 그리고 권력 기관이나 거대 자본이 돕지 않으면 결코 개인은 복수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피해자는 당연히 힘들지만, 가해자의 선한 자녀들 역시 괴롭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가해자는 많은 이들에게 끔찍한 피해를 입혔는데 정작 자신의 자식 혹은 손녀에게는 선한 사람으로 남고 싶었나 보다. 타인의 피와 고통 위에 세워진 부(富)과 권력을 누리며 자손은 올바르게 자라길 바라는 건 지독한 이기심이고 탐욕이지 않은가.
피해자들은 결국 모든 것을 내던져야 했다. 자신의 기억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얼굴마저도. 그러면서 겪는 내면의 고통 역시 가혹했다. 게다가 이들은 가해자 곁에서 정체를 숨기고 있으며 가해자를 알아가고, 어느 순간 인간적으로 반하기도 하고(개늑시), 손녀 때문에 복수를 망설이기도 한다(상어).
가해자는 죄의식이 없고, 피해자는 피해자이기 때문에 도덕에서 우위를 차지하며 자신의 복수를 정당화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자신 안에 있는 불의나 부도덕을 감당하기 힘들다. 그것이 복수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복수는 필연적으로 무고한 이에게 고통을 가하고, 그로 인해 복수의 정당성은 힘을 잃고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오게 된다.
사적 복수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김은숙 작가의 말처럼, 돈이 많으면 피해자가 되어도 어떻게든 해 볼 수 있겠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도 권력도 없기 마련이고, 가해자는 돈도 권력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리하여 공적인 제도 안에서 가해자가 합당한 벌을 받지 않을 때,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일들이 누적되어 우리 사회 안에 화(火)가 많아지고 분노조절이 안 되고 약자를 괴롭히게 된 것은 아닐까. 정말로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