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 필요한 세 가지 요소는 무기, 식량, 신뢰다. 통치자가 이 세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무기를 먼저 포기하고 그다음으로 식량을포기해야 한다. 신뢰는 끝까지 지켜야 한다. 신뢰가 없다면 버틸 수가 없다.
-공자

민주적 제도, 글로벌 시장경제, 정치 및 경제 엘리트에 대한 신뢰는 최근 수십 년 동안 특히 기존 고소득 국가에서 약화됐다. 이는 보호무역주의, 이민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무엇보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은 약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입헌 민주주의의 핵심 구성원으로 지목한 중산층의 공동화 현상이다. - P127

‘지위 불안status anxiety‘은 포퓰리즘, 특히 민족주의적인 정치인(예: 트럼프)과 목표(예: 브렉시트)에 대한 지지가 증가하는 근본 원인을 파악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사고의 틀이다. 누가 이런 불안에 가장 취약할까? 정답은 이것이다. "불안에가장 취약한 사람들은 계층 구조상 밑바닥에서 몇 단계 위쪽에 있 - P128

는 사람들, 즉 사회적 지위가 우려를 불러일으킬 만큼 낮지만 방어해야 할 지위가 그래도 상당한 수준에 있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이런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경계선을 지키는 데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특히 꼴찌혐오, 즉 위계질서에서 최하위로 떨어질까 봐 걱정하는 경향이 있다." 서구 국가에서는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은 ‘백인‘이 소수인종과 이민자에게 위협을 느끼고, 백인이든 소수 인종이든 남성이 여성의 지위 상승에 위협을 느낀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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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11-24 0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는 신뢰를 가장 먼저 포기한 것 같네요.

꼬마요정 2024-11-25 09:20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생각을 했네요. 지금의 위정자들이 공자님의 저 말씀 좀 새기면 좋겠습니다.
 

배종훈

사실 그런 것들이 가르칠 수 있는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애니메이션 <라따뚜이>라는 큰 성과를 낸 픽사 스튜디오를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픽사 스튜디오의 사장 에드 캐트멀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서 인터뷰한 기사가 기억납니다. "픽사 스튜디오에서 재미난 것을 많이 만드는 비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외로운 천재성으로 회사를 운영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공동체 중심으로 회사를 운영한다."라고 답했습니다. 공동체 중심이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목적 혹은 산출물을 위해 차이를 극복하고 협업을 이루어 내게 하는 시스템의운용을 의미하고, 바로 이것이 경영자의 역할이라고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픽사를 굉장히 혁신적인 기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이 혁신적인 기업이 실제로 운영되는 방식은 핵심인재 경영 혹은탁월한 몇몇 인재의 채용과 활용에 있다기보다는, 집단 구성원 간의 상이한 의견을 조정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습니다. 즉,
개인 수준의 창의성 제고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오히려 차이를 유지하고 협업하는 능력, 다른 사람과 의견을 달리하면 - P306

서도 함께 어우러져 일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엘리트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한국의 기업문화와는 크게 대조된다고 봅니다.

김지현

여러 교수님 의견을 들어 보니 창의성을 함양하는 데 타인과의 상호작용과 공동체가 굉장히 중요할 것 같습니다. 실험실 랩의 경우처럼요. 그렇다면 창의성을 함양하기 위해 서로 협력해서 창의적 성과를 만들어 내는 원리도 파악하고 그것을 학생들이 배워나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홍성욱

학생들이 졸업한 뒤 혼자서 일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조직에 속해서 일하게 됩니다. 그런데 교육은 대개 혼자서일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룹 창의성을 경험하게 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일 것 같습니다. -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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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본 인터넷 짤이 하나 있다. 인간의 뇌 사진에 "이봐, 당신 주머니에서 방금 휴대전화 진동이 울린 것 같은데"라는 말이 적혀 있고, 아래쪽에는 "농담이야. 당신 휴대전화는 주머니에 있지도 않아, 멍청아"라고 적혀 있는 것이었다.
휴대전화가 진동하는 듯한 느낌은 21세기만의 독특한 위협이다.
다리의 순간적인 경련이나 떨림, 또는 무엇이 닿는 감각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인데, 이 떨림의 주파수와 지속 시간이 휴대전화의 진동과조금이라도 비슷할 때면 뇌는 누가 전화를 걸어온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려버린다. 만약 30년 전이라면 다리가 움찔거리는 것을 파리가 내려앉은 탓이거나, 옷의 천이 움직인 탓이거나, 누가 자기도 모르게 가까이 스치고 지나간 탓이라고 해석했을 것이다.
세대가 바뀌면서 해석도 달라진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은 다양한 움찔거림을 설명할 수 있는 최적의 도구가 바로 휴대전화이기 때문이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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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물리치기 위해 비가시적 우주 존재를 숭배하는 행위는 온갖 제의와 의식을 통해 틀을 갖춘다. 제의 형식이 서고, 제물이 마련되며, 제물로 바쳐질 희생양이 선택되는 일련의 절차가 확립된다.
이와 더불어 제의를 주관하는 공동체의 우월한 지도자와 제의 집행의임무를 띤 샤먼과 사제의 무리 같은 특권 집단이 생겨난다. 공동체의 안녕과 기복을 비는 제물로 바쳐질 희생양의 역할은 내부의 우두머리나 부족 간의 전쟁에서 획득한 포로들에게 할당된다. 개별존재가 아니라 불멸성을 향한 공동의 제의와 형식을 갖춘 인간 집단은 더 이상 자연과 운명의 힘에 취약하지 않고 비가시적 존재의힘과 호응하는 지상의 통제력을 누리게 된다. 제의를 위한 경제활동과 희생양 만들기의 형식은 모두 인간이 타고난 동물성을 일종의죄로 간주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기나긴 속죄의 과정으로 인식된다. 악은 이 속죄 과정의 불가피한 부산물일 따름이다.
악의 첫 번째 모습은 ‘인간 불평등‘이고, 두 번째는 ‘자연의 대상화‘이다. 원시의 평등주의적 공동체에서 널리 시행된 포틀래치 전통은 가시적 신을 욕망하는 집단적 욕구와 제의의 중앙집중화를 통해 특권적 집단이 권력을 누리고 대중들은 거기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로 진화한다. 베커의 이 밑그림은 인간불평등이 권력과 압제를 행하는 계급과 국가의 성립에서 비롯한다고 보는 루소 및 그를 추종한 마르크스주의의 입장과 다르다. 베커가 보기에 루소는 인간의 노예화가 주체의 의지와 무관한 구조적 - P319

권력에 있다고 명시하며,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표방해 온 정치적해방의 서사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불평등의 기원인 사적소유와 특권계급, 그리고 국가의 폐지가 곧 인간해방의 기치로 정립된다.
베커는 이러한 명확한 정치적 의제가 현실에서 왜 실현 불가능할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미 실패한 프로젝트인지 비판하고자 한다. 베커에겐 인간의 예속성과 불평등 자체가 아니라 ‘자발성‘이 문제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간 충동의 ‘내달림 drivenness‘
이다. 그가 마르크스주의 사상 및 당시의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표방한 의제들에 깊은 의구심을 표한 바탕에는 자기소외를 욕망하는 인간의 자발성에 대한 천착이 깃들어 있다.
이제 우리는 "자연 상태"의 인간이 자유롭다가 나중에야 자유롭지않게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공상적인지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유로웠던 적이 없으며, 자신의 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지속적인 삶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속박을 지니고 있다.
랑크가 잘 알려주듯, 루소는 단지 인간 본성의 모든 측면을 이해할수 없었을 따름이다. 즉 루소는 "모든 인간 존재가 또한 똑같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권위를 필요로 하며 심지어 자유로부터 감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을 알수 없었다."(본문 84~85쪽)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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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뭘 위해서 그러는 건데?"
……
나는 계속 그 질문을 떠올리고 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이 사건에 ‘주고받음‘이라는 개념을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시나리오가 딱 한 가지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시나리오는 남편에게 털어놓기에는 너무 난해하다. 게다가 지금 그를 깨울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러니 대신 당신에게 말해 주겠다. 어쩌면 맨처음 내가 차에서 뛰어나간 건 나 자신을 던져 버리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길 쪽으로 향하던 그때, 사방은 어두웠고, 강물처럼 어두웠고, 내안에 있던 어떤 오래된 감각을 충분히 휘저어 놓을 만큼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모르는 사람이 몸을 일으키게 돕고 있던 나는 어쩌면 어떤 영혼의 쌍둥이였는지도 모른다. 오래전의 어느 날 밤, 어느 강변의 난간에 앉은 채 술에 취해 울고 있던 내 몸을 뒤로 끌어당겨 주었던 모르는 사람의 쌍둥이. 오늘 그 여자의 몸을 흔들면서, 어쩌면 나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던 예전의 내 몸을 흔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순간 속에는 어떤 등가성이,
어딘가 기이한 상호 관계가 새겨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람을 향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속삭이면서, 나는 어쩌면 슬픔과 고통에 잠긴 우리 모두를 향해, 그 여자의 고통을 향해, 그 남자의 고통을 향해, 그리고 나자 - P219

신의 고통을 향해, 마법을 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 마법은 드디어 제대로 작동해서, 이번에는 정말로 다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괜찮아졌을 수도 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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