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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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떤 극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심장박동 수가 올라가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서 그 상황에 함께 있던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 쉬워진다고 한다. 영화 <스피드>가 그러했고, 수많은 007 시리즈들이 그러했다. 물론 각각의 상황이 심박수나 호르몬 때문만은 아닐테지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평범한 장소에서 만난 남녀보다 흔들다리 위에서 만난 남녀가 서로에게 느끼는 호감이 더 크다는 실험 결과가 말해주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아주 특이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심장박동 수와 아드레날린이 필요했던 것일까. 날씨도 좋고 연인과 행복한 소풍을 나왔던 그 순간, 하늘을 나는 기구가 안에 소년을 태우고 긴 끈들을 드리운 채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위험을 느낀 사람들이 각 방향에서 뛰어 와 그 끈들을 잡았고, 바람이 불었고, 누군가가 그 끈 중 하나를 놓았고,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끈을 놓았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매단 채 기구는 두둥실 하늘을 날았고, 들판에 그 한 사람을 떨구었다.


도움을 주기 위해 뛰어왔던 사람들에게, 그들과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그 기구에 있던 소년과 할아버지에게 이 사건은 끔찍했고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이 이야기 어디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는걸까. 뜬금없이 '사랑'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서나 꽃 피울 수 있고, 어떤 역경 속에서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걸까. 어쩌면 죄책감이 변질되어 '사랑'이라 불리게 된 것일까?


'드 클레랑보 증후군'이란 것이 있다. 자신보다 높은 경제적 위치 혹은 정치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것이 주 증상이며, 그 대상이랑 접점도 없고 아는 사이가 아님에도 그 대상이 자신에게 몰래 신호를 보낸다고 믿는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나를 알지 못한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주위를 맴돌며 상황을 왜곡하고 망상에 빠지는데, 그러면서 스스로와 그 대상을 비극적 상황으로 내몰기도 한다.


사실 이 스토커 같은 드 클레랑보 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심장박동 수나 아드레날린은 필요한 요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조의 지위가 높아보였던 것일까. 그 곳에 있던 수많은 사람 중에 하필 '조'여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긴 이유가 있을까. 우리의 삶은 알 수 없는 이유들투성이가 아닌가.


패리는 조를 따라다니고, 조는 목숨의 위협까지 느낀다. 하지만 이 패리의 망상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책을 읽는 나조차 조의 망상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석연찮은 부분들이 드러나고,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미세한 금이 가고,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보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각자의 사연을 들었다. 그들 중 로건의 아내인 진이 가장 안타까웠다. 빌어먹을 사랑 같으니라고. 사실 견딜 수 없는 사랑이니 빌어먹을 사랑이니 죽일 놈의 사랑이니 하는 말 따윈 다 소용없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이다.


책을 덮은 후에도 여전히 난 그 이유에 죄책감과 합리화가 어느 정도 자리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패리는 조의 눈에서 본 것이다. 자신이 먼저 손을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과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놓았을 것이고 떨어진 이가 내가 됐을 것이라는 합리화. 그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인간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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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6-07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책 첫부분 읽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야기 일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사랑(?) 이야기가 진행되고 또 스릴러가 되고 추리소설이 되서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어서 약간 아쉬운 면도 있었습니다 ㅋ

저도 리뷰써야하는데 ㅜㅜ

꼬마요정 2023-06-08 17:05   좋아요 1 | URL
저도 죄책감에 시달릴 거라 생각했는데 이야기가 점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가더라구요. 그래서 뭐지? 하면서 쭉 읽었네요. 읽고 나니 뭔가 찜찜하고… ㅎㅎㅎ 여튼 무서운 사랑입니다. 새파랑 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얼마나 잘 쓰실까 완전 기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