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F 보다 Vol. 1 얼음 ㅣ SF 보다 1
곽재식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평점 :
해가 지고 서늘한 바람이 부는 밤이 되면, 넷째 고양이 카프가 배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는다. 골골거리면서 눈을 꿈벅꿈벅하면 얼마나 귀여운지 나도 모르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제법 오랜 시간 배 위에서 편안하게 자리 잡고 졸다가 다른 냥이들이 오거나 배가 고프면 내 어깨에 팔을 뻗어 꾹꾹이를 조금 하다가 가 버린다. 이 녀석이 6키로가 넘는데 그 무게감이 좋다. 세상에서 이만큼이나 자리를 차지하고 예쁨을 뽐내고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이 다 뒤집어져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기후위기 등으로 이미 세상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을만큼 이상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SF 속 세상이 마냥 낯설지만은 않다. 정말로 이렇게 올 것만 같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짙어져서일까. 그래서 과학이 판타지마냥 작동하던 세상이 이제는 그럴싸한 미래가 되어 우리 앞에 던져진다. 그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기도 하다.
첫 번째 이야기인 <얼어붙은 이야기>는 곽재식 작가의 이야기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미래의 세상이나 먼 우주의 어느 별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의 이야기이지만 또 아니기도 하다. '생사귀'도 '제 6조사실'도 왠지 있을 것만 같다. 이야기의 전개 및 내용이 모두 정해져 있다는 것을 '얼어붙은 이야기' 라고 표현한 것도 재미있다. 게다가 정부 부처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도 현실이랑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여 웃기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나'란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내 몸을 이루는 세포 수만큼의 별들이 사라져야 한다는 말은 그럴싸하다. 우리 개개인이 하나의 우주라면 우리를 이루는 세포들은 그 우주를 구성하는 별들일테니. 그렇기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의 말을 믿어야 할 지 , 우스개소리로 치부해야 할 지 고민이다. 이 모순 속에서 해피엔딩만 믿으면 안 될까....
두 번째 이야기는 구병모 작가의 <채빙>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을 냉동시켜 보존할 수 있게 된 사회부터 모든 것이 무너지고 얼어버리고 불타버린 더 먼 미래의 어느 날까지의 이야기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멸망해버린 지구의 인간들이 다시 원시시대부터 거쳐 '나'가 어째서 거기 있는지 알아내는 단계까지 발전한 시대까지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말을 알아듣고 눈높이의 시야까지는 볼 수 있는 '나'는 열기 가득한 세상에 남아있는 얼음산에서, 어떤 부족에게는 '사한'이고 어떤 부족에게는 '현명'이다. 그들은 '신'에게 불가능한 것을 바라지만, 그 중에도 어떤 이는 그저 '얼음새꽃'을 두고 '나'는 그런 그를 '다르게' 본다. 본디 신이 아니기에, 신이 된 적도 없었기에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나'는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죽음마저 얼려버린 그 과학 기술이라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어쩌면 죽음은 안식보다 더 소중한 무엇일지도 모른다. '전멸과 폐허의 터전'에서도 생명이 태어나고 이어져가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남유하 작가의 <얼음을 씹다> 이다. 세상은 온통 얼어붙었고, 암울하다. 영하 50도가 일상인 세계. 그 곳에는 먹을 것도 따뜻한 기운도 부족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가족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빈부 격차를 감수하며 살아간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어디서 시작하든 무리를 짓고, 규범을 만들고, 누군가는 군림하게 되는가보다. 이 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가족들은 그 죽은 이의 살과 내장을 먹는다. 그것이 법이고 어길 시에는 처참한 벌을 받게 된다.
"인간은 다른 이의 살을 영양분으로 섭취하며 생존해야 할 만큼 고귀한 존재가 아니다."(p.81)란 말이 어설프게 들리지 않는 건, 굶주림과 목마름이 너무 고통스러워 사랑하는 이의 살점마저 달콤하게 느껴지는 게 무섭기 때문이다. 아이의 시체만큼은 훼손당하기 싫었으나, 결국 시어머니는 유리아를 신고한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한들 손녀를 먹을 수 없을텐데...
네 번째 이야기는 박문영 작가의 <귓 속의 세입자>이다. 앞 이야기가 영하 50도의 세상 이야기였다면, 이 이야기는 지나치게 열정적인 세상의 이야기이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월드컵이 열렸고, 한국은 4강에 진출했다. 말만 들어도 그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이 열기는 고통스러운 열기가 아니다. 하지만 주인공인 해빈에게는 고통이었다.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이 없다는 건 지극히 피곤한 일이니까. 모두가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 열기에 휩싸이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 '세입자'는 해빈을 선택했을 것이다. 사람과 거리를 두고 싶어하기에. 그 세입자는 지나치게 친밀한 이들 때문에 파멸한 세상의 우주에서 왔으니까. 무리 짓지 않고 완벽히 홀로 지내는 존재는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세입자마저 무엇이든 누군가이든 함께 지내야 하는데 말이다. 어쩌면 생존하기 위해 거리를 두지만, 외롭기에 어느 정도의 '온기'를 자기도 모르게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해빈이 사람과의 거리를 좁히려 하자, 그 '온기'에 휩싸일까 가 버린 것일지도. 다시 한 번 따뜻함을 느끼면 금세 뜨거워지길 바랄테니.
인간은 지성체가 아니고, 사람과 가까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말과 혼자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모두 사실이다. 사람마다 그 거리와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섯 번째 이야기는 연여름 작가의 <차가운 파수꾼>이다. 이 이야기까지 오면, 앞 이야기의 '세입자'가 왜 온기(情)를 거부했는지 알 것도 같다. 이 세상은 얼음이 사라진 세상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얼어 대지를 이루었던 곳에 있는 건물들은, 얼음이 녹아버리자 하나 둘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노이는 그런 건물이 무너져 이모를 잃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아파트 지하에 사는 '선샤인'을 돌보는 일을 물려 받았다. '선샤인'은 한기를 뿜어내고 한기 속에 살아가는 생명체이다. 그런 존재가 이 아파트에 있으니 아파트는 한동안은 무너지지 않고 버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샤인'도 힘이 약해져 가고 있었다. 열기 가득한 곳에서 혼자 살아가기 버거워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노이는 이제트를 만났다. 둘은 다르면서도 같았다. 이런 가혹한 세상에서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고 서로가 살아남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제트는 그런 선택을 한 것이겠지. 햇빛 속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노이를 위해. 아파트가 무너지면 노이는 움직일 수 없을테니.
온기가 한기로 완성되다니...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내놓는 건 숭고한 희생일까, 무모한 열정일까. 이렇게 둘은 고통스럽지만 함께 할 수 있으니 행복할까...
여섯 번째 이야기는 천선란 작가의 <운조를 위한>이다. 죽이지 않아도, 얼리지 않아도 되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음처럼 차가운 세상에서 운조는 기계처럼 살아간다. 오직 인간의 필요를 위해 불임인 소, 무지는 한 살이 갓 지나서 죽임을 당하고, 17년을 산 고양이 메리는 마지막 숨을 남겨두고 순전히 주인이 함께 죽길 원해서 얼려진다. 어느 새 생명은 물건처럼 취급당하고, 운조 역시 수의사지만 동물병원의 부품 취급을 받는다. 선택할 수 없는 선택 속에서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던 운조는 마거릿의 연구소에 갔다가 알 수 없는 시간대에 떨어진다.
그리고 모습은 인간과 다르지만 다정한 '로타'를 만난다. 빨간 눈을 가진, 운조의 첫 반려동물이었던 토끼를 닮은 로타. 운조는 그 세상에서 아무도 죽이지 않고, 아무도 얼리지 않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며 위안을 얻는다. 말이 통하던 세계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가 더 말이 되는 것 같은 세상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 세상은 운조의 세상이 아닌 것을... 얼음이 아무리 꽁꽁 얼어도, 약간의 온기로도 균열을 가져올 수 있듯이 운조를 이 시간대로 데려온 무언가는 운조를 다시 다른 시간대로 데려간다. 운조는 과연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여섯 가지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는 문지혁 작가의 <하이퍼-링크>와 심완선 평론가의 <크리틱>이 함께 한다. '얼음'을 클릭하면 각각의 여섯 가지 이야기로 날아갈 수 있을 것이고, SF 소설의 전반을 아우르는 글을 볼 수 있다.
이상기후 등으로 지구는 결국 '디스토피아'라고 불리는 그런 미래에 도달하게 되는 것일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단절된 것만 같은 그 세계는 더 이상 내가 모르는 세계가 아니다. 올 것만 같은 그럴싸한 세계... 메타 버스니 가상 현실이니 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잡힐 것만 같은 세계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사람 목숨이 중요한가요? 그 많은 별과 은하계가 생기는 데도 몇십억 년의 세월이 필요한데요. 그것들을 모조리 다 없애도 기분이 언짢지 않으세요?" - P20
미래를 불쏘시개 삼아 오늘을 눈부시게 밝히는 날들로 일관하던 어느 날, 세상에 존재하던 대부분의 얼움이 녹았다 한다. - P49
누군가는 이런 유서를 남겼다. "인간은 다른 이의 살을 영양분으로 섭취하며 생존해야 할 만큼 고귀한 존재가 아니다." - P81
"인간은 지성체가 아니에요. 사람은 사람을 가까이에서 보고 만져야 살아갈 수 있어요.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아요."(p.127, p.130) - P127
"네가 오늘 하루를 무사히 지냈다면, 노이. 너는 벌써 그걸로 나를 도운거야." - P155
운조는 그날 낮에 소를 죽이고 밤에 고양이를 얼렸다. 어떤 것은 기묘하게 빨리 죽여버렸고, 어떤 것은 불필요하게 오래 살렸다. - P1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