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락경 도트 시리즈 20
최지혜 지음 / 아작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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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천국과 흥미진진한 지옥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사실 힘이 있다면 흥미진진한 지옥을 선택할지도 모르겠다. '지옥'이 주는 이미지가 있으니까.  기독교 세계관 지옥이라면, 영원히 못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옥에서 빠져나올 힘이 있어야, 혹은 지옥을 평정할 수 있을만한 힘이 있어야 그곳을 선택하겠지. 단순히 흥미진진하다고 선택했다가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수가 있을테니. 하지만 애초에 천국이 지루하다니... 모순이긴 하다.


이 이야기는 어느 이야기의 끝과 다른 이야기의 시작 사이에 존재한다. 처음 이 '환락경'이 생기게 된 엄청나게 긴 세월의 이야기가 있고, 유리와 미하일의 다음 여정이 있다. 이 이야기는 그 사이에 유리가 어떻게 미하일과 함께 하게 되는지를 그린 것이다.


과학으로 설명 가능하지만 마법같은 힘을 가진 이들이 있다. 흔히 뱀파이어라고 불리는 존재이지만 우리가 아는 뱀파이어와는 다르다. 먼 우주에서 온 외계인을 위한 존재. 그리고 그들은 각자 구역이 있고, 자신들이 가진 고유의 힘을 자신의 영역 안에서 발산할 수 있다.


그리고 유리. '천사'라고 불리는 존재는 도대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것일까. 이렇게 이야기는 앞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의문을 던지며 기억을 잃은 유리와 함께 궁금증을 풀어나가게 한다. 


네 명의 매력적인 뱀파이어와 아직 각성하지 못한 천사의 이야기. 기억인지 환상인지 모르는 꿈을 안고 유리는 흥미진진한 지옥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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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12-22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디도 고르고 싶지 않네요 천국도 지옥도... 다 귀찮아서... 여기에서는 죽어서 가는 곳을 고르는 건지 어떤 건지... 죽는다면 아주 사라지는 게 나을 듯합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도 않아요

이야기는 그러면 안 되겠지요


희선
 
스파이 코스트
테스 게리첸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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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요원들은 어떤 삶을 살까. 물론 은퇴할 때까지 살아있어야 가능하겠지만. 


모든 임무를 끝마치고 살아남은 전직 CIA 요원 매기 버드는 메인주의 작은 해안 마을 퓨리티에 정착했다. 그녀는 닭을 키우며 뒷조사를 끝내고 안전하다 싶은 사람들을 이웃으로 두고, 한 때 동료였던 이들과 어우러져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요원이 찾아와 도와달라는 말을 한 뒤 매기의 집 앞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퓨리티에는 뛰어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매기와 같은 회사를 다녔고, 지금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마티니 클럽'의 일원이었다. 이제 매기는 마티니 클럽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연관된 사건인 '시라노 작전'의 뒷수습을 하며 자신의 삶을 구해야 했다. 경찰 서장 대행인 조 티보듀는 능력은 있지만 그 능력을 아직은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관광객들이 취해서 벌이는 사건이 대부분인 그곳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모두를 놀라게 했고, 조는 이 사건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매기와 무언가를 꾸미는 듯한 마티니 클럽을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임무를 수행하면서 가장 아팠고 슬펐던 사건을 다시금 마주해야 하는 그녀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나이가 들어 무릎은 시리고 앉았다 일어나기도 힘들지만 그들은 멋졌다. 사격 솜씨는 여전했고, 상황판단 역시 빨랐다. 의리가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매기는 망령들을 떨쳐 버리고 마티니 클럽과 남은 삶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을까. 마티니 클럽의 다음 활약상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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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랜드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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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일에 화형식이 열렸다는 표현에 깜짝 놀랐다. 처음 몇 장을 읽으면서 <1984>가 떠올랐다. 빅 브라더든 무엇이든 시민들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판단하는 권력자가 있다는 사실은 무서웠다. 트럼프 때문에 갈라진 미국은 실제 분단된 채 살아가는 우리와 같으면서도 완전히 달랐다. 결국 모두가 원한 것은 자신의 자유와 재산이었을텐데. 


분단된 미국을 배다른 자매의 비극으로 보여주는 것은 비웃음이 났다. 꼭 그랬어야 했나. 엄마도 바람 나고 아빠도 바람 나고 조국은 둘로 갈라졌다. 샘 스텐글은 갈라진 조국 중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연방공화국의 정보요원이다. 배다른 자매인 케이틀린은 예수의 12사도를 앞세운 정교일치의 공화국연맹의 정보요원이다.


연방공화국은 뛰어난 기술력으로 사람들에게 생체 칩을 이식해 통제하고, 공화국연맹은 구식이지만 cctv 및 주변인들의 감시로 사람들을 통제한다. 연방공화국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 세계의 디스토피아라면 공화국연맹은 과거에 생각했던 미래 세계의 디스토피아인 셈이다.


공화국연맹에서는 종교가 매우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에 임신중절이나 신성모독 등은 중대 범죄가 될 수 있었다. 샘의 정보원이었던 막심이 신을 모독한 죄로 화형에 처해졌다. 화형이라니,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이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인간을 불태워 죽였다.


상급자로부터 공화국연맹의 케이틀린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샘은 영화평론가 에드나가 되어 케이틀린을 제거하기 위해 중립지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로레인은 샘의 마음을 끌었다. 


신을 믿지 않을 권리도, 자매를 죽이지 않아도 될 권리도 없는 곳에서 그들은 살아간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마음껏 사랑하지도 못하고 믿고 싶은 사람을 믿지도 못하고 말이다. 한순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죽음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곳에서 그들은 인간인가, 체제와 권력자를 위한 소모품인가. 


이제껏 읽었던 디스토피아 소설 중 가장 가볍게 읽었으나 마음이 무거웠다. 미국이라는 민주주의 사회가 이렇게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체제나 모두를 만족시키는 나라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어떻게든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데 민주주의만한 체제는 없는 것 같다. 모자란 점은 채우고, 잘못된 점은 고쳐가면서 그렇게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면 좋겠다. 


예전에 <사기>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인간은 권력을 가지면 남이 가진 작은 권력마저 탐내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이 혹세무민하여 사람들을 선동하면 독재자가 되고 자신만이 과업을 이룰 수 있다 과신한다. 그리하여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피 흘리며 죽던지 그 생각을 접고 조용히 살던지 선택해야 한다. 어떤 생각은 독재자와 같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생각이 독재자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 동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단 하나의 생각이라도 다르면 피를 보게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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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상하이의 식인자들
김유정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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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물과 바람, 구름을 다스리는 상서로운 존재다, 동양에서는. 그리고 이무기가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오르면 마침내 용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용이 대학원에 다닌다면? 그것도 100년 동안이나 말이다. 미래창조인공지능융합과학 파트에서 공부하는 7년 차 방장인 은진은 어느 날 교수님으로부터 날벼락 아니 용을 맞았다. 100년 전부터 이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으며, 인간과는 시간 개념이 다르다는 그 존재는 문학부나 법학부, 생물학부 등을 다녔더랬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름도 어려운 미래창조인공지능융합과학부로 들어왔다. 


우리가 생각하는 용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존재, 자연현상 중 물과 관련된 것들을 부릴 수 있는 존재였다. 용의 기원 중 하나가 토네이도, 용오름이라는 설이 있는 걸 보면 더 더욱 그렇게 느낄 수 있는데, 이런 자연현상이 이제 과학적으로 밝혀진 지금 세상에서 용은 어떤 존재일까. 


김유정 작가는 <용의 만화경>에서 용이란 존재를 또 다시 상서롭고 초현실적인 존재로 그려놓았다. 인간은 태고적부터 자연현상이든 그 무엇이든 이해하고자 했고, 그 이해를 돕기 위해 이야기들을 만들어 왔다. 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명이 안 되면 그것은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만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3차원을 넘어선 존재인 용은 여전히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용이 있으니 이무기도 있었다. 물론 옛 이야기에서 나오는 그런 이무기는 아니었지만. 욕심이 많아 여의주를 두 개 물고 있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아니라 애초에 용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게 좀 마음이 아프다고나 할까. 그런 존재들과 함께 대학원 생활을 하게 된 은진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인간의 무한한 호기심이 충족될 날이 올까 싶지만, 그래도 이런 다정한 존재들이 함께라면 좀 더 따뜻한 미래를 꿈꿔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두 번째 이야기는 김이삭 작가의 <라오상하이의 식인자들>이다. 1849년, 프랑스는 청나라로부터 상하이에 있는 땅을 빌렸다. 임대료는 없었다. 이 조계지는 1943년 일본 괴뢰정부 왕징웨이 정권에게 넘어가면서 사라졌다. 영화 <무명>이 왕징웨이 정권 시기의 이야기인데,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남의 나라 분열이나 내 나라 분열이나 열불 터지는 건 비슷했다. 하지만 <라오상하이의 식인자들>은 뭔가 좀 더 상큼했다. 요즘은 좀비가 대세인데, 여기는 '강시'가 나온다. 명나라가 망하자 남쪽으로 도망쳤던 리쯔는 300년이나 지나 되살아났다. 그리고 '양놈'을 먹으며 살아간다. 옛 상해(라오상하이)에서 식인자(아니, 리쯔는 강시니까 식시자인가)는 강시인 리쯔만이 아니었다. 저 먼 나라 영국의 뒷골목에서 살인을 일삼던 잭 더 리퍼 같은 이도 있었고, 나쁜 짓을 하는 이들을 잡아 샤오롱빠오로 만드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탐욕이 부패한 위정자들에게 고통받던 이들을 또 다른 방식으로 짓밟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갔다.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복수를 하며. 약자들의 연대는 생각보다 단단했고, 따뜻했다. 그 연대가 곧 바스라진다 하더라도 연대했다는 사실 자체가 희망으로 남을만큼.


세 번째 이야기는 한켠 작가의 <어느 날, 잔멸치>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겪은, 겪고 있는, 겪을 끔찍한 무기력증을 겪는 (소)진의 이야기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서울에 살 수 있을만큼 여유를 가지지 못한 그녀는 경기도에서 출퇴근을 해야 했다. 왕복 4시간은 사람을 지치고 지치게 했다. 다니는 회사에서 자신이 속해 있던 사업부가 해체되면서 자신의 설자리가 막막해진 진은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안주로 나온 잔멸치와 눈이 마주쳤다. 그 처절한 눈빛이 자신과 닮아서였을까, 주머니에 넣어 온 잔멸치는 다음 날 인어가 되었다.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불안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아무것도 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딱 한 달만 병원 신세 질 정도로만 다쳤으면 하고 바라고 차라리 죽으면 출근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건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었다. 작고 무능하고 초라해서 아무도 자신을 바라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은 한없이 진을 갉아먹었다. 누군가는 승진하고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누군가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은 느낌. 하다 못해 일도 잘 못한다는 생각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잔멸치들이 떼를 지어 있는 모습은 멋진 벨루가보다 빛나고 아름다웠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잔멸치 인어는 진과 같은 높이에서 머리를 빗겨 주었다. 화려함이나 소박함이 멋짐의 기준이 아니듯, 진이 자신만의 모습을 찾고 삶의 의지를 회복하였으면 좋겠다. 삶은 계속되니까.


네 번째 이야기는 이필원 작가의 <남극노인>이다. 처음엔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를 비튼 것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병약한 소년이 신기한 소녀를 만나고 죽어서 소녀를 순장해 달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보다 더 따뜻한 존재와의 조우를 다뤘다고나 할까. 


밤하늘을 올려다 봤을 때 남극성을 찾을 수 있을까. 옛 이야기에 남극노인이 나타나면 그 시대는 태평성대하다고 했다. 또 남극성의 화신으로 사람의 수명을 다룬다고도 했다. 옥순이 할멈네 손자인 '나'는 곧 죽는다고 했다. 병약하여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했고, 맞벌이하는 부모는 '나'를 계속 볼 수 없어 잠시 할머니에게 가 있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곧 죽는다는 생각으로 삐뚤어진 아이였다. 할머니는 모든 병은 신이 준 것이라며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어린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나에게 다가온 건 오래된 홍살문 아래에 있던 이상한 누나였다. 그 누나가 만져주자 메스껍던 속이 나아지고 열이 내렸다. 그리고 할머니가 귀한 손님이라고 반겨주었다. 가을, 겨울을 그 누나와 함께 보냈고 또래가 없던 '나'는 아마 많은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내내 태평하거라.... 마법 같은 주문은 따뜻했다. 세상이 모질어도 어딘가에서 동앗줄이 내려오는가 보다. 그러니 부디 남은 생은 행복하기를. 지금 이 세상에도 남극노인이 모습을 드러내주면 좋겠다.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는 남극성처럼.


다섯 번째 이야기는 박부용 작가의 <유령 열차>이다. 우리는 3차원에서 산다. 차원이 하나씩 더해지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고 더 많은 것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4차원만 해도 우리는 이해하지도 구현하지도 못한다. 흔히들 4차원의 축은 '시간'이라고 한다. 그래서 4차원에서는 시간이동이 자유롭다고. 우리는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이지만 말이다. 


이 이야기는 어느 한 남자의 지식추구라기보다는 탐욕에 가까운 욕망이 불러 온 참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클락스빌'에 사는 아서는 자신의 실험을 위해 '나'를 불렀다. 부유한 저택에서 아서는 아내인 오렌시아와 살고 있었고, 나는 그 곳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며 아서의 이야기들을 들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서는 시장 선거에 출마했고, 네 번째 차원에 대한 연구가 지지부진함을 드러냈다. 나는 아서에게 4차원은 보통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던졌다. 아서는 흥미를 가졌고, 어쩌면 그 말에서부터 비극이 시작됐는지도 몰랐다. 시간은 어디서 왔고, 어디서 태어났는가.


오렌시아가 육교에서 사라진 날 이후, 아서는 자신의 연구가 성공했다고 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원하는 물품을 적어내라고 했다. 사람들이 적어 낸 물품은 그 사람들의 거실에 정확하게 '나타났고', 처음에 사람들은 불안해했다. 자신의 집이 침입당했다 생각했기에. 하지만 점점 사람들은 이 '유령열차'가 배송해 주는 시스템에 적응했고,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필요한 물품을 얻을 수 있어 편리하다 생각하게 되었다. 세금 역시 유령열차가 걷었고, 공장 역시 유령열차가 운영했다. 이제 마을에서 사람은 일을 하지 않았고,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나'는 불안감에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어느 날 신문에서 '클락스빌'을 연상시키는 글을 읽고 말았다. 다시 돌아간 그곳은 처참했다. 보이지 않는 기차에 '치인' 사람들, 보이지 않는 기차가 '치고' 간 건물들... 시간축의 기원은 어디였을까. 그 처참함의 시작은 아서의 탐욕이었을지 몰라도, 끝은 살고자 몸부림치는 생명력이었을지도.


여섯 번째 이야기는 전견 작가의 <잠자는 종이 여왕의 궁전 아래에서>이다. <천일야화>에서 셰헤라자드는 죽지 않기 위해, 술탄을 정신차리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한다. 장장 천 일하고도 하루 동안 이야기를 한 끝에 술탄은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고,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쉴 새 없이 말하는 통에 아르바이트에서 잘린 '나'는 걷다가 우연히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들어갔다가 그 곳이 헌책방임을 알게 된다. 헌책방 주인은 '나'에게 헌책방에서의 규칙을 알려주고 사라졌다.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바로 잠들어 있는 소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소녀는 자신이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꿈에서 깨어나게 되고 그러면 세상이 멸망한다 했다. '나'는 계속 이야기를 했고, 소녀는 잠꼬대로 이야기를 평가했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대개 재미없고 형편없는 이야기로 귀결되었고, 그런 평가를 들은 '나'는 내 이야기를 멈추고 책방에 있는 책을 집어들고 읽어주었다. 또 다른 일은 어떤 책무리에 물을 주는 일이었는데, 이틀에 한 번씩 주지 않으면 내 손목만 나뒹굴게 될 거란 말을 들었던 터라 '나'는 잊지않고 꼬박꼬박 물을 주었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 손님이 와서 책을 사 갔다. 물론 남편한테 줄 거라고 했다. 당연히 물을 줘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했다. 그 뒤에 남자 손님이 와서 아내한테 줄 거라고 책을 사 갔다. 남자도 당연히 물을 줘야한다는 말은 필요없다 했다. '나'는 두 손님 모두 다시는 보지 못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막내 동생이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진짜 말이 많았던 녀석인데, 같은 이야기를 엄마한테 한 번, 아빠한테 한 번, 나한테 한 번, 작은 누나한테 한 번 하고 난 뒤 벽에도 하고 곰인형에게도 했다. 어찌나 말이 많은지 진짜 이렇게 말이 많아서 어쩌나 했는데, 지금 내 남편도 참 말이 많고, 여전히 내 동생도 말이 많다. 둘은 서로를 보고 저렇게 말이 많은 사람은 처음이라고 했다. 


혀가 잘리지 않는 이상 말을 그칠 수 없는 광대처럼 '나'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고, 점점 지쳐갔다. 그동안 누구도 듣지 않아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었는데, 누군가가 계속 들으니 이야기가 고갈된 것이다. 정말로 소녀가 잠이 깨면 세상이 망할까봐 '나'는 열심이었다. 


헌책방에서의 알바는 꿈이었을까. 모두들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세상에서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그 세상이 꿈이 아니고서 무엇이겠는가.  


일곱 번째 이야기는 김선민 작가의 <장갑들>이다. 환경미화원들로 이루어진 비밀단체가 구두들로부터 세상을 구한다는 이야기이다. '청소'가 제대로 된 직업으로 인정받은 건 언제부터일까. 옛날에는 집안 청소는 평민들은 스스로 했고, 양반들은 노비들을 부렸다. 현대에 와서도 집안일은 엄마가 했고, 작은 회사에서는 막내들이 했다. 좀 더 큰 회사에서는 청소용역을 고용하기도 했고. 점점 청소용역업체를 고용하는 일이 어색하지 않게 된 건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순자 씨는 건실한 남편을 무너진 백화점에서 잃고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청소일을 시작했다. 성실한 그녀는 남자 화장실을 청소할 때 자신을 지우는 법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밀대 걸레 등 청소용구와 일체화 된 그녀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순자 씨는 마침내 '어머님'의 선택을 받았다.


두 번째 이야기였던 <라오상하이의 식인자들>의 연대가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망한 나라의 평범한 백성이 '강시'가 되어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공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한 '신녀(창녀)'들과 음식점 주인이 연대하여 살인마나 착취하는 양놈들에게 대항하는 모습이 장갑들의 저항과 겹쳐졌다. 청소할 때 사용하는 장갑들이 사용자의 한과 억울함, 화를 빨아들였고, 선택받은 순자 씨는 그 장갑들을 정화했다. 구두들의 대장인 데스크는 시스템 속에 자리잡은 부조리와 착취를 강요했고, 장갑들은 저항했다. 부패와 분열은 어느 집단에서나 일어난다. 하지만 어디에나 희망은 있었다. 큰 일을 위해 작은 일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는 옳지 않았다. 부디 그들의 저항이 순탄하기를.


여덟 번째 이야기는 이나경 작가의 <다수파>이다. 확률은 얼마나 정확할까. 나의 선호도가 모두의 선호도를 대변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다수파는 옳을까. 수도 그룹이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모든 항목에서 다수파를 선택한 아빠 오상식은 신기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아버지를 담당한 사람은 최한기. 한기 아저씨와 아빠는 이 프로젝트의 대장인 그룹의 삼남이 후계 구도에서 탈락하면서 이 일을 잃게 되었다. 


아빠는 언제나 다수파였다. 아빠가 선택한 것이 곧 다수가 되었다. 아빠는 수학여행을 떠난 나에게 시킨대로 가만히 있어라고 했다. 결국 나는 돌아가지 못했다. 아빠는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반성 없는 참사는 비슷한 참사를 거듭해서 부른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참사들을 맞이할까. 정말 다수파가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이 다수파인 척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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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12-02 0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늘 말해야 하다니 힘든 일이네요 본래 말이 많았다고 해도 그걸 일로 하면 힘들 것 같습니다 꼬마요정 님 동생분도 말이 많고 남편분도 말이 많군요 그래도 재미있다면 괜찮을 듯합니다


희선

꼬마요정 2024-12-12 17:26   좋아요 1 | URL
늘 말해야 하는 일이면 정말 힘들겠죠? 옆에 있는 남자 둘이 말이 많으니 좀 웃깁니다. 서로 말 많다고 하는 것도 웃기구요. 근데 뭐 소란스러운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니까요. ㅎㅎㅎ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었다 - 고단한 속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부처의 인생 수업
그랜트 린즐리 지음, 백지선 옮김 / 프런트페이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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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지만 얻고자 노력하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 훌륭한 스승님과 훌륭한 가르침과 나 자신의 의지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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