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문장이라도 가슴에 박혀버린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안빈낙도의 삶까지는 아니라도 안분지족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사리사욕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이득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마음의 수행이 된 사람은 지위가 없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둔 지 오래되었으나 지금 너에게서 그것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았다.
저자가 원하는 건 ‘중용’일까. 어찌보면 ‘논어’를 ‘논어’로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넘쳐나는 ‘논어’에 대한 것들 중 진짜 ‘논어’는 무엇일까. 그런 건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고전의 기적 역시 고전이 담고 있는 내용보다는 원래보다 어마어마하게 커진 텍스트의 존재감 그 자체가 아닐까.- P240
공감이라는 게 너무 못 해도 너무 잘 해도 본인에겐 상처인 것 같다. 힘겹게 혹은 평범하게 살다가 생일이라 웃었다고 칼에 찔려야 하다니... 분노를 일으킨 대상이 아니라 손쉬운 대상에게 화풀이하는 것도 나쁜 짓이지. 수없는 죄를 저지른 사람이 어떤 한 사건에서 누명을 썼다면 어떨까... 나는 과연 그를 손가락질 하지 않을까. 이럴 땐 감정 없이 객관화할 수 있는 윤재가 부럽기도 하다. 감정이란 건 삶을 풍부하게 해 주지만 아프게도 한다. 그래도 삶을 느끼는 게 좋은 듯. 친구도 생기고 사랑도 하고. 이 책에서 할멈이 그렇게 죽은 게 너무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