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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드
힐러리 맨틀 지음, 이경아 옮김 / 민음사 / 2024년 8월
평점 :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의 그림인 <나사로의 부활>에서 그리스도는 한 손으로는 부활한 자를 가리키고 다른 손은 손가락을 활짝 편 채 위로 들고 있다. 힐러리 맨틀은 이렇게 말한다. "많은 라운드를 버텨 냈고 이제 5라운드가 남았다는 뜻이리라."라고.
1956년 영국 북부의 작은 마을인 페더호턴에 주교가 찾아온다.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미신을 믿는 마을 사람들이 사는 페더호턴의 신부인 앵윈 신부에게 종교가 '현대적'으로 변모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앵윈 신부는 성당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성상들을 치우고 라틴어로 집전하던 미사를 현지어로 바꿔야 했다. 주교는 이 일들을 돕기 위해 보조신부를 보낸다고 했다.
무신론자이지만 종교 교리를 지키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를 가리고 있던 앵윈 신부는 이제 무엇으로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지 고민하게 되고, 그러는 와중에 필로메나 수녀와 함께 성상들을 땅에 묻는다. 그리고 보조신부 플러드가 마을로 왔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 사제관 문을 두드리는 플러드를 맞이한 애그니스는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을 깨닫는다. 앵윈 신부는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고백하고, 페르페투아 원장 수녀는 굳게 잠겨 있던 상자를 열어젖힌다. 필로메나 수녀는 자신의 내부에 감도는 어떤 열정을 느끼게 되고, 마을 사람들은 어느새 플러드 주위에 몰려들게 된다.
플러드는 오자마자부터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앵윈 신부는 물론이고 애그니스나 필로메나 수녀, 마을 아이들까지 말이다. 애그니스는 설거지거리를 두고 잠들기도 하고 필로메나 수녀는 그와 밀회를 하기도 했다. 안토니오 수녀도 덩달아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플러드는 성상들을 파내기 시작했다. 앵윈 신부와 필로메나 수녀, 애그니스는 함께 성상을 파냈고, 지나가던 매커보이까지 가세하는데....
앵윈 신부가 악마라고 부르는 매커보이는 또한 어떤 존재일까.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고 섣불리 말을 옮기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 않는, 눈빛이 서늘한 그는 어쩌면 르네상스인 혹은 플러드가 생각하는 인간은 아닐까.
종교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현대적으로 변모한다 해도 종교에 몸담은 이들 스스로가 신을 믿지 않고 그 길을 의심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삶의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이제 신이 아니라 스스로의 생각과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했다. 플러드는 그것을 알려주려 이 마을에 온 것은 아니었을까.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고 진정한 신의 뜻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거나 혹은 신이 아닌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알려 주려고 말이다. 어느 쪽이든 스스로가 선택할 일이지만 말이다.
플러드(1574-1637)는 16세기에 실존했던 연금술사다. 우주 만물의 이치를 알고자 치열하게 연구했던 이들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앞서 5라운드의 삶이 시작된다 했는데, 1라운드가 한 세기를 나타내는 건 아닐까 했다. 5세기를 거닐며 플러드는 금속이 아닌 인간의 본성을 작업했다. 그리고 그는 삶을 발견한다.
마지막은 베르고뇨의 성모자 그림에서 성모가 슬픔 속에 내비치는 히죽거림과 만족감이다. 그것이 삶인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