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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평점 :
나는 어릴 때부터 회나 멍게, 해삼 같은 해산물을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엄마 따라 친척 계모임이 열린 횟집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는데, 생선 머리가 달린 채 회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날 이후 한동안 회를 먹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회를 먹기 시작했지만 생선 머리가 달린 회는 먹기 힘들다. 안 보인다고 그 생선의 죽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안 보이면 마음이 좀 더 편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있는 것을 먹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을 잘 알기에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화장품이나 가방 등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게 아닌 것들은 비건이나 동물 실험 안 한 제품들을 사려고 한다. 그리고 나의 이런 마음은 어쩌면 비겁한 것도 같지만 또 나름의 행동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책에서 문어를 만나, 아니 외계 문어를 만나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말을 듣고, 대게를 만나 러시아 어로 '도와주시오'란 말을 듣고 사연을 알게 되면, 웃기면서도 허탈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생선 머리를 앞에 두고 눈을 감는다고 해서 생선의 죽음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문어가 말을 하고 대게가 술을 마신다 해서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 뒤에 수많은 문어와 대게의 눈물이 없어지지 않는다. 또한 그런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 뒤에 약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의 눈물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의 화자인 '나'가 해양정보과로 끌려가면서 지독한 비린내에 멀미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비린내가 검은 덩어리들, 문어 등 해양정보과와 관련된 이들 특유의 비린내 일수도 있지만, 비정규직 강사였다가 노조의 일원이었다가 가족 내에서는 돌봄 종사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상황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눈 감을 수 없어 행동하지만, 성공을 보장할 수 없어 허탈한 그런 상황 말이다.
<문어>는 <그리고 문어가 나타났다>에 실린 단편이다. 강사법 때문에 농성을 하던 위원장님이 난데없이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고 말하는 문어를 잡아 먹었다. 그러면서 해양정보과라는 곳을 알게 되고, 문어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게 되고, 더 나아가 위원장님과 '나'가 인연을 쌓고 연인이 되었다.
한 번 인연을 맺은 해산물(?)은 꾸준했다. 문어 문제가 해결되자 이번에는 대게가 나타났다. <대게>는 '나'가 수산 시장에 해산물을 사러 갔다가 러시아 어로 구해달라고 말하는 대게를 사 오면서, 그것도 손질하지 않은 채로 사 오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 대게의 이름은 '예브게니'. 푸시킨의 작품 <예브게니 오네긴>이 아니라 <청동기마상>에서 가져왔다고. 오네긴의 예브게니가 아니라 페테르부르크에서 절망한 예브게니라니, 비극적이지만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후회보다는 절망 속에서도 행동하는 모습이 닮았다고나 할까. 어쨌든 예브게니 대게는 먹성도 좋고, 술도 잘 마셔서 이제는 남편이 된 위원장님과 죽이 잘 맞았다. '아닐 비(非)'자로 뻗은 채 헤롱거리던 예브게니는 알고 보니 장기 집권 중인 러시아 대통령 모 씨의 감언이설에 속아 한국까지 잡혀온 것이다. 이 눈물겨운 이야기를 듣던 위원장님은 대게더러 조직을 만들어 원하는 바를 전달하라고 하지만, 인간인 그들이 말해도 들어주지 않는데 하물며 대게가 말을 하면 전부 잡아 삶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한창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던 때, 어찌 알고 왔는지 해양정보과의 검은 양복들이 나타났다. '나'와 남편은 또 그들에게 연행되었고, 지독한 비린내와 함께 풀려났다. 대게들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상어>는 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는 해양 생물을 만난 이야기이다. 남편의 암이 재발한데다 시어머니 역시 응급수술을 받았다. 정신없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가던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옆 침대 아저씨가 건넨 명함의 주소지를 찾았다. 무슨 바이오 기술을 이용하여 암도 고친다는 그 곳은 거대한 수조였고, 앞서 만난 예브게니와 닮은 대게와 상어 등 많은 해양 생물들을 만났다. 바이오는 개뿔, 그들은 그 곳에 갇힌 채 인간의 보양식을 위한 약재로 쓰일 것이었다. 역시 인간이란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들 때 또 다시 등장한 검은 양복들이 이처럼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 남편과 시어머니 역시 퇴원했다.
<개복치>는 화자인 '나'의 시조카 선우의 모험담이다. 순수한 아이는 자신과 다른 존재를 미끄덩한 느낌과 비린내를 불편해하면서도 받아들였다. 처음에 개복치를 알지 못할 때에는 그저 물컹하고 비린 존재였으나 함께 모험을 떠나 '예브게니'를 만난 뒤에 선우는 개복치의 물컹함이 싫지만은 않았다. 작은 어머니에게 개복치를 만나고 예브게니를 만난 이야기를 전해주면 좋으련만. 앞서 나온 예브게니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해파리>는 이제 드디어 우주 및 지구의 해양 생물들의 인정을 받은 '나'의 이야기이다. 바다도 없는 고속도로 쉼터에서 잠깐 잠들었던 '나'는 해파리와 접응했다. '나'와 남편은 구미에서 한국의 혜택은 다 받으면서 세금도 안 내던 국제 기업이 노동자들 마저 해고하려 하자 그것을 막기 위해 있었던 집회에 갔다. 이것은 마치 살해당했거나 위험에 처한 해양 생물들이 해파리를 통해 신호를 주고 받는 것 같은 절박함이었다. 우리, 아니 모두의 바다에 오염수를 방출해서 고통받는 생명들은 얼마일 것이며, 북한이 쏜 미사일이 '다행히' 바다에 빠졌다고 하지만 그 미사일로 인해 피해 입은 생명들은 얼마일 것이며, 우크라이나가 흑해에서 파괴한 러시아 미사일들이 만들어 낸 물기둥 뒤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죽었을 것이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침공하면서 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죽을 것인가. 각종 세제 혜택 등을 받은 국제 기업이 지켜야 할 것은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것인데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자 노동자들을 해고하면 그들은 어떻게 먹고 살 것이며, 그 땅을 기업에게 내주면서 그 곳 노동자들에게 먹을 거리 등을 팔던 자영업자는 어떻게 먹고 살 것이며, 암에 걸린 환자의 절박함을 이용하여 신기술이랍시고 돈을 뜯어가는 사기꾼들 때문에 병원비마저 날린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인간은 지구도, 지구상에 사는 다른 생명체들도, 같은 인간마저도 나락으로 끌고 가는 종인 것만 같아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마지막 단편인 <고래>가 마음에 남았다. 구룡포에 있는 귀여운 해치가 인간의 더러운 욕망을 정화시켜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은 희망이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이제 더 이상 지구에 살 수 없다 생각한 생물들이 지구를 탈출한다 하더라도, 지구를 망가뜨리는 데 일조한 권력자들이 먼저 탈출한다 하더라도 지킬 것이 있는 이들은 저항하고 싸울 것이다.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분명 나아지는 부분들은 있었으니, 희망을 잃지 않고 저항하면 다음 세대에게 조금은 덜 망쳐진 지구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쟈(남편을 뜻한다)는 교수가 될 줄 알았는데 빨갱이가 돼가지고 데모하는 게 뉴스에 나오더니 이제는 게한테까지 데모하는 걸 가르치고 남세스러워서 원..." 어머니가 이렇게 불평하셨고 대게가 러시아 출신이므로 아마도 원래 빨갱이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려드려야 하는지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너도 얼른 자라‘ 하시더니 안방으로 표표히 들어가 문을 닫으셨다. - P63
(권력기관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의 생명조차 존중하지 않아요. 인간이 아닌 생물도 똑같이 이 지구에서 살아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 P84
"이길 것 같아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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