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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   생 은   망 했 어  :







담배란 문장의 마침표와 같은 것











"  마지막 장면이 좋아서 영화 전체가 좋아지는 경우'가 있어. 차이밍량 감독의 << 애정만세, 1994 >> 가 그렇다. 한 여자가 길을 걷다가 공원 벤치에 앉아,   운다.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소리 내어, 운다. 운다, 운다, 또 운다. 얼마나 울었을까 ?  여자는 눈물을 닦고 담배를 피워. 담배란 문장의 마침표와 같아서 이제는 어떤 결심에 다다랐다는 마음의 마침표. 이제 자리를 훌훌 털고 그 자리를 떠나리라. 굳은 결심으로 씩씩하게 걸으리라. 하지만 여자는 벤치를 떠나지 않고 다시 운다. 운다, 운다. 더 크게 운다, 운다. 영화는 거기서 끝나. 이 장면이 왜 그렇게 좋았을까 ?  사람들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지독한 고독을 읽었지만 내게는 희망으로 다가왔어. 시작은 엉망이어도 좋아.  과정은 형편없어도 좋아. 마지막 장면만 좋다면 모든 것은 용서가 되니까. 그런 마음. 내 인생의 시작은 엉망이었고 그 과정도 형편없었으니 이제는 화려한 피날레를 희망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지. 인생은 영화와 달라서 라스트 씬만 훌륭하다고 해서 인생 전체가 훌륭해지는 것은 아니지. 너무 소란한 장례식장이 그 사람이 살아온 성공의 증거라면 내 인생은 실패야.  인정한다. 이번 생은 망했어, 여기까지야. 물에 빠진 핸드폰 같다고나 할까. 새로 살 돈이 없어서 수리를 맡겼더니 새로 사는 것보다 더 많은 수리비가 청구된 견적서를 보는 느낌.  새로 살 수도, 그렇다고 고칠 수도 없는. 시발. 뭐랄까...... 그래, 이번 생은 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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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김기덕









김기덕 사태가 발생했을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김기덕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침묵이 길어지면 공범자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에 대한 짧은 불평을 쏟아내긴 했으나 그것이 나의 죄책감을 씻어주지는 못했다. 


그동안 가해자의 서사에 열광했다는 사실에 매우 부끄러웠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틀렸다 _ 라며 자기합리화를 시도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겁한 변명. 곱씹고, 곱씹고, 곱씹은 끝에 내가 다다른 곳은 " 내 안의 김기덕 " 이라는 종착역이었다. 김기덕 영화에서 소비되는 여성 캐릭터의 공통점은 성녀이자 창녀'라는 양면성'이다. 그런데 낮에는 성녀이자 밤에는 창녀가 되는 여성 캐릭터는 남성의 섹스 판타지를 절정에 다다르게 만드는 상상 속 역할 놀이 상대역'에 불과했다. 포르노에서 중요한 것은 벌거벗은 몸이 아니라 입고 있는 옷의 종류이다. 


새빨간 가터벨트를 입은 여성을 벗기는 것보다 자극적인 것은 검은 수녀복을(입은 여성) 벗기는 것이다. 우리는 김기덕 영화가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다룬다고 믿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한낱 포르노적 상상력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만든 범죄적 역할 놀이'에 놀아난 것이다. 시발, 인정 !  어떤 대상에 대한 숭배는 종종 그 대상에 대한 경멸과 착취를 숨기기 위해 문화적으로 과잉 대표되는 성격을 띤다. 좋은 예가 바로 < 모성애 > 다. 한국 사회만큼 모성애를 강조하고 숭배하는 문화도 없다. 티븨 속에는 엄마라는 단어만 나와도 출연자는 모두 다 울 준비를 하고 있다. " 에브리바디, 크라잉 !!! "


그런데 모성애를 숭배하는 문화의 뒷배를 들여다보면 남성 문화가 여성의 노동력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모성애에서 우리가 직시해야 되는 것은 엄마의 모성이 아니라 그 엄마의 노동 환경과 그에 따른 노동 강도'다. 사실, 모성애는 육아 노동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는 모성애가 매우 높은 강도의 노동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노동 분야를 모성애라는 인간 본성 프레임으로 전환하여 그 색을 완벽하게 탈색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육아 노동과 모성애는 같은 말이 아니라 다른 말이 된다. 


이 문화적 강요 속에서 엄마는 모성애가 부족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더 많은, 혹은 더 고된 육아 노동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노동 과부하로 인해 번아웃된, 완벽한 육아 노동에 실패하게 되면 엄마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자본주의는 엄마가 죄책감에 빠질수록 그 죄책감을 응원하고 위로하며 칭찬한다. 불안의 한 종류인 죄책감은 소비를 촉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노동 과부하로 지친 엄마의 어깨를 토탁이며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_ 라고 따스한 위로의 말을 전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너의 잘못이야 _ 라는 지적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한국 남성은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이 얼마나 뻔뻔한 수작인가. 이 수작의 결정타는 땡추 혜민이다. 노동 과부하에 걸린 워킹맘에게 아침에 1시간 일찍 일어나서 아이와 놀라는 주문은 그가 얼마나 여성의 노동 환경에 무지한 인간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집밥과 손맛을 찬양하는 문화도 마찬가지다. 그 찬양의 뒷면은 부엌 노동의 강요일 뿐이다. 한국 남성은 어머니의 손맛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지만 정작 어머니의 손을 볼 생각은 없다. 다음 사진은 그들이 그토록 찬양하는 손맛의 본질이다. 


이 사진을 보고도 여전이 입에 침이 고인다면 당신은 파블로프의 개다. 



이처럼 찬양은 착취의 다른 이름으로 작동한다. 성녀가 남성의 섹스 판타지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모성애와 손맛 예찬이 여성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듯이 말이다. 우리,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말자. 모성애의 본질은 노동이고 사랑의 본질도 결국은 노동이다. 사랑은 노동을 나누는 행위이다. 그리고 속지 말자. 남자는 여성에게 언제나 잠재적 가해자'라는 사실을. 아니 가해자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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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12-14 2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독서 모임 멤버 대부분은 영화를 좋아해요. 이분들은 정말 ‘시네필’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독립영화제가 열린 곳에 무조건 갑니다. ‘김기덕 사태’가 생겼을 때 예전에 김 감독의 영화를 보고 좋아했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에 실망했다면서 감독(의 영화)을 비판했어요. 다른 사람은 이런 반응을 ‘뒤늦은 성찰’이라고 비웃겠지만, 오히려 저는 긍정적으로 보고 싶어요. 아, 저는 영화에 대해선 잘 모르고요, 김 감독의 영화를 한 편이라도 본 적이 없어요. 제목만 들어봤어요. 영화든 책이든 그것들의 장점을 너무 좋아하면 단점을 보지 못하게 돼요. 불편하더라도 단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5 11:26   좋아요 0 | URL
김기덕 영화 자체는 매우 훌륭하죠.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전 김기덕 영화 개봉하면 꼭 영화관에서 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많은 여성들이 그런 끔직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아이고 시발... ㅎㅎㅎ

han22598 2020-12-15 0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속이 시원하네요. 모성애가 육아노동의 한 종류라는것....집밥 신화프레임안에서 갇혀 여성의 노동을 직시하지 못하는것. 이를 간파하지 못하면 가해자가 정확히 누군지도 모른체 (사실 알고 싶어하지 않을지도)...자신을 스스로 해하거나 또는 물귀신 작전으로 다른 여성들도 함께 우리 모두 피해자가 되는 것을 행복(?)해 합시다.로 포기해버리게 되는것.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5 11:25   좋아요 1 | URL
이 글을 쓴 계기가 어느 여성의 인터뷰에서 워킹맘이어서 아이 모유수유가 짧았다. 그런 고백을 하면서 아이를 향해 ˝ 엄마가 미안해 ˝ 라며 죄책감을 느낀다는 겁니다. 모유 수유를 하지 않으면 모성애가 없다 ??! 이 죄책감에 빠진 워킹맘은 아이에게 미안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은 다 사주더군요. ㅎㅎㅎ 전 이것이 자본의 속성이라 생각됩니다. 소비자의 불안이 곧 과잉 구매로 이어지거든요. 모성애를 강조해서 죄의식을 느끼게 하고, 그 죄의식이 소비 촉진으로 이어지도록...

han22598 2020-12-16 08:03   좋아요 2 | URL
여성성의 신화를 마케팅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여성주권 획득이 마치 상품을 선택하고 소비하는 행위를 통해서 이루지고 있다고 기업들이 이야기 하고 있죠. 완전 속아넘어고 있는 소비자들..특히 여성소비자들. ㅠ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6 13:01   좋아요 2 | URL
한국 영화에서 단골로 말하는 대사 ˝ 엄마가 미안해, 많이 미안해 ! ˝ 하면서 질질 짜는 장면... 참, 웃기죠. 뭐가 그렇게 미안하냐. 왜 학원 못 보내주고, 모유수유 못하고, 맞벌이 생활 하면 아이에게 미안해 하는 것일까 ? 이것은 아이에게 사과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자꾸 모성애란 이름으로 죄의식을 심어준다 말이죠..

han22598 2020-12-18 05:5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학원 못다니고, 모유 못 먹었은게. 엄마 잘못이라고 생각안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미안해하는 걸까요? 모성애의 허상에 질질 끌려다니지 말아야지.

푸른괭이 2020-12-16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영화를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못했지만) 저도 김기덕 영화, 상당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여주들보다 남주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요? 그 불쌍한 남주들을 구원(?)하고 보듬는 역할까지 여주들이 해야 하니까, 두 겹 세 겹의 여성 착취(?)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점에서는 도스-키 소설이랑 무척 비슷합니다, 역설적이죠. 창녀(막달라 마리아)로 학대당하고 성녀(성모마리아)로 학대당하고. 굉장히 기독교적이면서도 또 한편은 되게 불교적인 데도 있고(<봄여름~~~>, 아무튼 끝까지 보기도 힘든 영화인 데다가 보고 나면 머릿속, 마음속이 너무 복잡해지는 영화였습니다. 그러니까 어지간해서는 스틸컷이나 트레일러만 보고서도 (너무 감화되어 ㅠㅠ) 감히 다 볼 엄두를 못 냈는데, 표현 수위를 좀 많이, 대폭 낮추었다면(가령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처럼) 참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ㅠㅠ

모성애와 여성 노동 착취, 코로나에 더 공감됩니다 ㅠㅠ 진짜 애 엄마 아니고서는 이해 못 할 고통이, 아이에게 삼시세끼를 차려 먹이는 것이거든요 ㅠㅠ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6 12:57   좋아요 0 | URL
괭이 님 댓글 보다가 갑자기 생각났는데 영화 < 악마를 보았다 > 에서 제일 유명한 장면이 간호사 강간당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이 얼마나 포르노적 상상력을 자극하는지 악마보았다 검색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연관검색어 0순위. 최민식이 간호사 강간하려는 순간 국정원 이병헌이 나타나 최민식 아킬레스를 끊습니다. 그리고는 이벙헌이 강간당할 위기에서 벗어나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간호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지시합니다. ˝ 이 사람 응급 치료를 해주세요. ˝ 만약에 이 영화를 여성 감독이 만들었다면 강간당할 뻔한 여성에게 강간하는 남자의 수술을 도와달라고 하는 설정이 가능할까요 ? 이건 그 여성에게는 말도 안되는 폭력이죠.

기억의집 2020-12-16 16: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이 사람 영화 너무 싫어해서.. 파란대문인가 뭔가 보고 충격 받아서.. 안 보고 왜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가더라구요. 사이러스님 말대로 뒤늦은 성찰은 의미 있는거죠.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가... 그렇군요. 저런 대사 쓰면서 작가는 얼마나 기세 등등 했을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6 17:11   좋아요 1 | URL
악마를 보았다를 쓴 각본가가 박훈정입니다.
영화 < VIP > 만든 감독이죠. 이 영화 정말 쓰레기죠. 최악의 영화 중 한 편으로 뽑히는...

scott 2020-12-16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영화중에 딱 한편 꼽으라고 하면 봄-여름 -가을 -겨울

곰곰생각하는발 2020-12-22 16:20   좋아요 1 | URL
전 김기덕의 섬이었습니다. 참.. 이 감정 묘하게요.. 이 쓰레기 새끼...
 
























30평 아파트, 오백충 리스펙1), 2000CC 자동차, 통장 잔고 1억








한 독일 심리학자는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 갇힌 포로의 자살을 연구하다가 주목할 만한 특이점을 발견했다. A그룹은 산더미처럼 쌓인 무거운 돌을 한 지점으로 나르고 나서 다 옮기고 나면 다시 원위치로 돌을 옮기는 일을 반복했다. 반면, B그룹은 독일군의 군복을 세탁하고 손질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 심리학자는 이 두 그룹의 자살률을 조사했는데 A그룹은 다른 작업군에 비해 자살률이 높았고 B그룹은 자살률이 매우 낮았다. 심리학자는 A 그룹 포로의 심리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아무 의미 없이 반복되는 노동을 통해 포로들은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는 삶에 대한 목표와 의미를 잃어버리고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반면에 B그룹은 단순한 일이기는 하나 일에 대한 보람을 느꼈다). 이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노동이라는 것이 단순히 의식주를 해결하는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A그룹의 포로들은 자신들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시시포스의 노동 형벌은 조롱이자 무시이며 존재 부정을 뜻하는 형벌이었다 !  결국, 그들은 인생의 목적을 잃고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라고 믿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자살하는 유대인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쟁이 끝나고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유대인의 자살률은 매우 높았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는 강제수용소에 갇힌 유대인의 자살률이 낮았던 이유에 대해 " 수용자들은 죽는다는 것보다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 그 죽음의 과정에 관심을 뒀다. 죽음은 항상 가까이 있었고 그들은 죽음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에게 죽음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다름아닌 삶이었다. 인생에서 목적을 가지는 것은 죽음에 대한 최선의 방어다 " 라고 말했지만 그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수용소에서 존중받지 못했던 불안들이 그의 생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이 사례를 통해서 우리는 기아와 빈곤으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생존 불안보다는 사회로부터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발생하는 존중 불안이 영혼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한스 로슬링은 << 펙트풀니스 >> 에서 빈곤 문제를 단순히 소득의 문제로 바라보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경제 불평등이다.  과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에 접근하는 태도'에 있다. 돈은 생존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지만 그것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다음은 프랑스의 19대 대통령인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이 삶의 질에서 정한 중산층에 대한 정의이다. 


1. 외국어를 하나 정도 할 수 있을 것

2.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할 것

3. 악기를 하나 정도 연주할 수 있을 것

4. 남들과는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것

5. 공분에 의연히 참여할 것

6.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


다음은 미국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기준이다. <미국의 중산층의 기준>


1. 자신의 주장이 떳떳할 것

2. 사회적인 약자를 도울 것

3.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것

4.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 있을 것


그렇다면 한국인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은 무엇일까 ? NH투자증권에서 중산층의 기준을 조사한 대한민국 중산층 보고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의 중산층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부채 없는 30평 이상의 아파트 소유할 것

2. 월급이 500만 원 이상일 것

3. 자동차는 2000cc급 이상 중형차를 보유할 것

4. 예금액 잔고 1억 원 이상을 보유하고 있을 것

5. 해외여행을 1년에 1회 이상 다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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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20-12-13 1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대화의 진전 기준으로 따지자면 한국은 (미국/프랑스에 비하면) 후발 주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때문인지 금권이나, 물욕을 숭상하는 문화가 미/프보다도 더더욱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자본주의라는 구조 자체가 이윤의 증식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체제이긴 한데 한국 같은 경우는 ‘우리 모두는 돈에 미친 속물이며 속물이 아닌 자가 도리어 비정상이다‘라는 식의 풍조가 만연한 듯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4 10:53   좋아요 2 | URL
국가마다 근대화 기간이 다르지만 대한민국이야말로 근대화 기간이 짧습니다.
근대화의 핵심은 에티켓인데 한국 근대화는 에티켓을 배울 시간이 없었죠.
그 후유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방사능 태닝 받고 DDT 차 한 잔   :











세계가 좋아지고 있다는 착각









                                                                                               인간은 크게 두 가지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안전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인정 욕망이다. 안전 욕망은 외부의 공격이나 환경으로부터 내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조건 충족의 실현이다. 반면에 인정 욕망은 타인이나 사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욕망이다. 욕망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불안도 존재하는 법. 욕망의 다른 이름은 불안이다. 


안전 욕망이 불안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생존 불안이고, 인정 욕망은 존중 불안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생존 불안은 실직과 파산으로 인해 생계의 위협을 느낄 때 발생한다. 헐벗어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의),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식), 얼어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주) 따위다. 이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돈이다. 즉, 돈을 많이 벌면 생존 불안은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 반면에 존중 불안은 타인이나 사회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나 비난을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이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신뢰 회복이다. 


자,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재미있는 심리 실험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두 사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① 직장 동료들은 모두 월급을 600만 원을 받는데 내 월급은 300만 원'인 경우. ② 직장 동료들은 월급을 모두 100만 원을 받는데 내 월급은 200만 원인 경우. 이 심리 실험에 참가한 응답자의 7,80%는 ②번을 선택했다. 이유는 ①의 경우는 회사가 내 능력을 과소 평가할 뿐만 아니라 직장 동료들이 자신을 무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월급을 적게 받더라도 차라리 ②번을 선택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는 것이다. 


즉, 실험 대상자들은 생존 불안 해소(월급 200만 원 대신 300만 원을 선택하는 행위)를 선택하는 대신에 차라리 존중 불안 해소를 선택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육체적 죽음에 대한 공포(생존 불안)보다는 사회적 죽음에 대한 공포(존중 불안)를 더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사람이 인간 관계보다 단순하게 먹고 사는 짓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가난한 아프리카 나라의 자살률이 높아야 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자살률은 매우 낮다. 이 실험은 개인의 만족도는 절대값보다는 상대값을 통해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 개인 삶의 만족도를 평가할 때 주요 지표로 사용해야 될 방법론은 절대 평가가 아니라 상대 평가라는 것이다. 한스 로슬링은 << 펙트풀니스 >> 에서 극빈층의 소득이 옛날에 비해 소폭 상승했기에 더 좋은 삶의 만족도를 느끼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그는 인간의 안전 욕망과 생존 불안을 단순하게 절대값만으로 평가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하지만 극빈층이 매우 느린 속도로 소득이 올라가는 동안에 극부층의 부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급기야는 세계 상위 1% 부자가 2030년에는 전 세계 부의 64%를 차지할 것이란 소식도 전해진다. 


한스 로슬링은 왜곡된 부의 불평등은 외면하고 단순히 최하위 계층 소득 통계만으로 세계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극빈층의 소득 수준이 올랐다는 통계값은 생존 불안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존중 불안을 해소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의 불균형은 극빈층의 상대적 박탈감만 높일 뿐이다. << 펙트풀니스 >> 는 기득권의 논리를 철저하게 따른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극빈층의 많은 수가 중간 소득 계층으로 이동했으니 세계 상위 1% 부의 독점은 문제가 될 것이 없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능 피해자는 한 명도 없으니 방사능 공포에 신경 쓰지 말고, DDT 같은 화학제품은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발명품이니 화학 성분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 말라고 소개한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_ 라고 외쳤던 이명박의 그 유명한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은 매우 비즈니스 프랜들리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방사능으로 온몸을 태닝 하고 나서 시원한 DDT차 한 잔 원샷 때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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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악 새   슬 피   우 는   소 리  :










책을 읽을수록 멍청해지는 사람들









                                                                                            한스 로슬링은 << 펙트풀니스 >> 에서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방사능 피폭)로 죽은 사망자는 한 명도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일본 정부의 일방적인 발표를 그대로 믿고 자신의 책에서 그것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원전 사고 이후, 사고 발생 지역인 후쿠시마 주민 1368명이 사망(2107.10월 기준)했는데 그것은 대부분 대피소 생활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이지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사망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방사능이 총이나 칼처럼 눈에 보이는 살인 무기는 아니니 방사능에 맞아서 그날 당일에 즉사한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 _ 라고 정부는 주장하는 것이다. " 방사능 때문이 아니라 방사능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망했다 " 는 소리는 " 많기 먹기 때문에 비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는 생각 때문에 비만이 된다(자기계발서의 기린아, 린다 번이 < 시크릿 > 에서 실제로 주장한 개소리다) " 는 소리와 다를 것이 없다. 달콤한 초콜릿 cake보다 열량이 높은 것은 thinking 이다. 동의하시는 분ㅡ 손 ?  생각하는 로댕 선생님께서는 말년에 비만으로 고생 깨나 하셨을 것.


당시, 일본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믿는 일본인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한스 로슬링이 단순한 스트레스와 방사능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망했다고 주장한 사망자 1368명 가운데 사고가 발생한 후쿠시마 제1원전이 있는 후바타 동네 주민은 전체 사망자의 2/3인 856명이나 되었다. 이 수치는 후바타군 지역 주민이 총 6962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망률이 대략 12%나 된다. 그렇다면 사고가 발생한 제1원전과는 거리가 먼 곳에 살아서 피폭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동네에 살았던 다른 피난민의 사망률은 얼마나 될까 ? 후쿠시마 전체 피난민의 사망률은 3%가 채 되지 못했다. 


방사능 피폭이 의심되는 동네 주민 사망률 12% vs 방사능 피폭으로부터 안전한 동네 주민 사망률 3% . 이 수치의 간극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   후쿠시마 의과대학은 원전 사고 이후 소장암 환자는 2010년 13명에서 2012년 52명으로 4배가 늘었고, 전립선암은 2010년 77명에서 2012년 231명으로 3배가 늘었다고 발표했다. 이 수치들은 모두 네이버 검색창에 " 후쿠시마 원전 사고 사망자 " 라고 입력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이다. 한스 로슬링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면 양심이 없고 몰라서 몰랐다면 그 또한 양심이 없다. 모르면서 아는 척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다. 책을 읽다가 의심이 들면 팩트 체크를 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사실 확인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런 고백이나 하고 자빠졌다. " 으악, 내가 침팬지보다 정답률이 떨어지다니. 으아아아악, 내가 알고 있는 세계가 모두 가짜라니.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내가 알고보니 부자였다니.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아아아악,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구나. "  님아, 으악새예요 ?  으악새 슬피 우는 소리 하지 마라. 책을 읽으면 똑똑해진다는 소리는 개소리다.  책을 읽을수록 멍청해지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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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본능이라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인간의 본능 중에서 " 직선 본능 " 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한스 로슬링은 상승 그래프를 보면 계속 상승할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단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인간의 직선 본능. 이 정도면 저자는 인간을 하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듯. 한스 로슬링 씨, 진짜 인간에게 직선 본능이란 게 있는 거요 ? 자료를 아무리 뒤져봐도 인간의 본능 중에 직선 본능이 있다는 주장을 한 학자는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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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2-10 0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곰님, 정말 곰곰히, 꼼꼼히 잘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저는 [팩트풀니스] 머리말만 읽으려 했는데 책 값이 아까워서 슬슬 넘겨보면서 읽고 있는데, 어제 저녁에 마침 곰곰님이 언급하신 일본의 원자 방사능에 대한 부분을 읽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한스 로슬링의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우선 상관관계와 인과 관계의 차이를 이해해야 하는데요. 상관관계는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두개 (또는 그 이상의) 상황이 관련되어 발생되어지는 관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식물에게 칭찬을 해줬더니 더 잘 자란다 또는 까마귀가 날자 배 떨어진다 경우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 상관 관계는 선후 관계가 불명확합니다. 선후 관계가 따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중학교? 고등학교때 배운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추어야 합니다 (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처럼 방사능 노출이 암 발생률을 높인다 (이 자체로는 상관관계인지, 인과관계를 나타내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에 대한 한스 로슬링에 반대 의사는 그 관계가 인과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곰곰님이 제시한 자료를 근거로 주장할 수 있는 건 방사능 노출과 암 발생률 증가가 상관관계가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인과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어도 여러가지 논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므로, 쉽게 판단할 수도 없고 시간도 굉장히 오래 걸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한스 로슬링이 이 부분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자료를 찾아보고 싶은데,,,(시간이 좀 오래 걸릴것 같아서 포기 ㅠ) 아마 인과관계까지는 밝혀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로슬링은 인과관계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방사능때문에 죽은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0 15:53   좋아요 1 | URL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로 설명해 주시니 이해가 쏙쏙 ~
제가 이 책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삶의 만족도를 절대 평가로 평가한다는 점입니다. 만족도, 행복 따위는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많은 실험을 통해서 밝혀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 동료들은 모두 월급을 500만 원 받는데 나는 300만 원을 받는 경우(1번)와, 직장동료는 모두 월급 100만 원 받는데 나만 200만 원 받는 경우(2번). 어느 쪽을 선택할까요 ? 실험 결과 인간은 7,80%가 2번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300백 받느니 차라리 200백을 받는 쪽을 선택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개인의 삶의 만족도가 절대값보다는 상대값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극빈층의 소득 수준이 올라갔기에 삶의 만족도도 올라갔다고 주장하죠. 사실일까요 ? 의문입니다. ㅎㅎㅎ

han22598 2020-12-11 00:36   좋아요 1 | URL
제시한 예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2번을 선택했다니 참 흥미롭네요. 상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때문일까요? 저는 사람들이 1번을 더 선택할 거라 예상했는데..(이유는 생략 ㅎ). 한스 로슬링이 극빈층의 비율을 평가 척도로 사용한 것은 그럴 수 있죠 (연구자 선택의 몫, 연구자의 세계관 반영) 하지만 삶의 만족도는 과연 어떤 기준에 의해서 평가 되었는지도 이 책에서는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아요. 그래서 사실 더 실랄하게 비판을 못하겠어요 ㅋ 이러한 모호함이(의도된 모호함일 수 있어요ㅋ) 책 전반에 깔려 있어요. 그래서 한스랑 비슷한 느낌적인 느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쉽게 동의할 수 있는데, 반대편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설득하지 못하고 있어요. 저나 곰곰님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ㅋ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1 15:45   좋아요 1 | URL
유명한 사례 중 하나가 아우슈비츠 유대인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유대인의 자살률이 매우 낮았다고 하죠 ? 그런데 정작 해방되고 나서 자유의 몸이 된 유대인의 자살률은 매우 높았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을 사로잡았던 공포는 ˝ 생존에 대한 불안 ˝ 이었는데, 막상 ˝ 생존에 대한 불안 ˝ 에서 해방되었지만, ˝ 존중받지 못했던 수용소에서의 존중 불안 ˝ 이 그들을 사로잡았다고. 다시 말해서 생존 불안은 견딜 수 있지만 막상 존중 불안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psyche 2020-12-10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전사고로 죽은 사람이 없다는 일본 정부의 발표를 보니 코로나 걸리기 전에 기저질환이 있었기 때문에 코로나로 사망한 게 아니고 기저질환으로 사망한 거라고 주장하는 트럼피들이 떠오르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0 15:54   좋아요 0 | URL
맞아요. ㅎㅎㅎㅎㅎ

기억의집 2020-12-16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애들은 진짜 웃기네요. 아니 이차세계 대전때원폭 피하는 대대적으로 피해를 우려 먹으면서 후쿠시마는 방사능으로 죽은 사람이 없다고요??? 아 진짜.. 쟤네들은 자기네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죠. 거짓말 하는 책이 너무 많아져요...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6 17:09   좋아요 0 | URL
아, 그래네요.. ㅎㅎ
제가 후쿠시마 원전 고치려고 투입된 노동자 5명이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본 적 있습니다.
지원자가 없어서 대부분 가난한 노동자가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가서 결국은 죽은....
이 기사를 정확히 읽은 적이 있는데 저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