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김기덕
김기덕 사태가 발생했을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김기덕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침묵이 길어지면 공범자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에 대한 짧은 불평을 쏟아내긴 했으나 그것이 나의 죄책감을 씻어주지는 못했다.
그동안 가해자의 서사에 열광했다는 사실에 매우 부끄러웠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틀렸다 _ 라며 자기합리화를 시도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겁한 변명. 곱씹고, 곱씹고, 곱씹은 끝에 내가 다다른 곳은 " 내 안의 김기덕 " 이라는 종착역이었다. 김기덕 영화에서 소비되는 여성 캐릭터의 공통점은 성녀이자 창녀'라는 양면성'이다. 그런데 낮에는 성녀이자 밤에는 창녀가 되는 여성 캐릭터는 남성의 섹스 판타지를 절정에 다다르게 만드는 상상 속 역할 놀이 상대역'에 불과했다. 포르노에서 중요한 것은 벌거벗은 몸이 아니라 입고 있는 옷의 종류이다.
새빨간 가터벨트를 입은 여성을 벗기는 것보다 자극적인 것은 검은 수녀복을(입은 여성) 벗기는 것이다. 우리는 김기덕 영화가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다룬다고 믿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한낱 포르노적 상상력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만든 범죄적 역할 놀이'에 놀아난 것이다. 시발, 인정 ! 어떤 대상에 대한 숭배는 종종 그 대상에 대한 경멸과 착취를 숨기기 위해 문화적으로 과잉 대표되는 성격을 띤다. 좋은 예가 바로 < 모성애 > 다. 한국 사회만큼 모성애를 강조하고 숭배하는 문화도 없다. 티븨 속에는 엄마라는 단어만 나와도 출연자는 모두 다 울 준비를 하고 있다. " 에브리바디, 크라잉 !!! "
그런데 모성애를 숭배하는 문화의 뒷배를 들여다보면 남성 문화가 여성의 노동력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모성애에서 우리가 직시해야 되는 것은 엄마의 모성이 아니라 그 엄마의 노동 환경과 그에 따른 노동 강도'다. 사실, 모성애는 육아 노동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는 모성애가 매우 높은 강도의 노동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노동 분야를 모성애라는 인간 본성 프레임으로 전환하여 그 색을 완벽하게 탈색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육아 노동과 모성애는 같은 말이 아니라 다른 말이 된다.
이 문화적 강요 속에서 엄마는 모성애가 부족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더 많은, 혹은 더 고된 육아 노동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노동 과부하로 인해 번아웃된, 완벽한 육아 노동에 실패하게 되면 엄마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자본주의는 엄마가 죄책감에 빠질수록 그 죄책감을 응원하고 위로하며 칭찬한다. 불안의 한 종류인 죄책감은 소비를 촉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노동 과부하로 지친 엄마의 어깨를 토탁이며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_ 라고 따스한 위로의 말을 전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너의 잘못이야 _ 라는 지적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한국 남성은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이 얼마나 뻔뻔한 수작인가. 이 수작의 결정타는 땡추 혜민이다. 노동 과부하에 걸린 워킹맘에게 아침에 1시간 일찍 일어나서 아이와 놀라는 주문은 그가 얼마나 여성의 노동 환경에 무지한 인간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집밥과 손맛을 찬양하는 문화도 마찬가지다. 그 찬양의 뒷면은 부엌 노동의 강요일 뿐이다. 한국 남성은 어머니의 손맛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지만 정작 어머니의 손을 볼 생각은 없다. 다음 사진은 그들이 그토록 찬양하는 손맛의 본질이다.
이 사진을 보고도 여전이 입에 침이 고인다면 당신은 파블로프의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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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찬양은 착취의 다른 이름으로 작동한다. 성녀가 남성의 섹스 판타지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모성애와 손맛 예찬이 여성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듯이 말이다. 우리,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말자. 모성애의 본질은 노동이고 사랑의 본질도 결국은 노동이다. 사랑은 노동을 나누는 행위이다. 그리고 속지 말자. 남자는 여성에게 언제나 잠재적 가해자'라는 사실을. 아니 가해자라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