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러 나  누 가  '알고'  있 었 다 는  게  왜  중 요 했 을 까 ? 

 



            

                                      달걀은 幻이다1)



 



달걀이 손가락과 바꿀 만큼 가치가 있나 ?
없소 !  하지만 기분은 좋소. 이게 내 본래의 모습이오(但我覺得痛快 這個才是我自己).  안 다쳐야 했겠지만, 검(劍)이 옛날처럼 빠르지 못했소. 옛날에 검이 빨랐던 것은 옳다고 믿고 했기 때문이오. 대가를 바란 적이 없었소. 난 평생 안 변할 줄 알았는데……


〈동사서독〉(왕자웨이,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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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비정전, 1991 >> 을 40번 넘게 보았다. 만우절이 되면 변두리 극장 어디선가 왕자웨이 영화제가 상영되고 있었고 << 아비정전 >> 은 단골 상영작이었다. 길거리 극장이 아니더라도 이날이 되면 티븨 변두리 채널 어디선가 아비정전은 상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상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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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왕자웨이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왕자웨이 영화 중 최걸 : 최고 걸작)은 << 화양연화, 2000 >> 이다.  완벽한 영화이다.  한뼘의 간격이 주는 미학을 이토록 집요하게 다룬 영화가 있었던가. 하지만 이 영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다,  최걸 영화를 선정하는 것과 최애 영화를 선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니까.   내가 " 최애 " 하는 왕자웨이 영화는 << 동사서독,1994 >> 이다. 그렇다면 왕자웨이 영화 중 실패한 영화는 무엇일까 ?   그것 또한 << 동사서독 >> 이다.  서사의 불균질성, 점프 컷의 지랄같은 오용, 필터의 남용, 통일성의 결여,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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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얼룩들, 이 오류들, 이 헛점투성이로 오염된 << 동사서독 >> 은 오히려 영화의 주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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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물론자이다. 그렇기에 유심론자와 대립하게 된다.  유심론자(관념론자)는 움직이는 것은 깃발도 아니요, 그대의 마음이라고 말하지만 유물론자는 그대의 마음은 움직이는 깃발이요, 바람이라고 말한다. 이 차이에 대해 나는 대립하지만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사소한 문제여서 우리는 서로 다른 오솔길을 걷고 있는 산책자일뿐이다. 하지만 나를 " 빡 " 치게 만드는 것은 혜민 같은 사이비 유심론자'이다. 삼라만상, 모든 번뇌가 다 마음먹기에 달렸지요. 허허허허허허허허 _ 라고 산신령 놀음을 할 때마다 엿죽방망이로 빰따구 한 대 치고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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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의 유심론은 독일 관념론(유심론)에 대한 모독이며 쌍팔년도 흥남부두 격정 신파의 신흥 종교 사업 버전에 불과하다. 당신을 불행하게 만든 것(중 하나가 마음일 수는 있으나 전부일 수는 없듯이)은 팔 할이 마음이 아니라 구조'이다.영화 << 동사서독 >> 에서 홍칠공은 유물론자 캐릭터'다. 그는 물질을 사람의 마음 표현으로 이해한다. 다음은 네이버 영화에 소개된 줄거리다.



① 장국영(구양봉) : 백타산의 원주민인 구양봉(장국영 분)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이 그를 키웠다. 구양봉의 꿈은 유명한 검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술 연마를 위해 고향을 떠날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여인(장만옥 분)과 고향에 남을 것인가의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사랑하는 여인 대신 무사로서의 길을 택한다. 결국 그녀는 그의 형과 결혼한다. 10년 후, 냉소적이고 돈만 알게 된 구양봉은 사막으로 가서 그곳에 여관을 개업한다.


② 양가휘(황약사) : 구양봉은 황약사(양가휘 분)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사랑에 관한 슬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는 한때 가장 친했던 친구의 부인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도화림을 떠나게 된다. 매년 복사꽃이 피는 시절이면 구양봉에게 찾아와 같이 술을 마시고는 백타산으로 구양봉이 사랑했던 여인을 방문하러 떠난다. 10살난 아들을 가진 그녀는 아직도 구양봉을 사랑하고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일 년 전 황약사는 고소성 밖에서 자칭 모룡연(임청하 분)이라는 남자와 친구가 된다. 그의 여동생과 결혼할 것을 언약한다. 그녀와 만날 약속을 했지만 황은 떠나가 버린다. 모룡연은 황약사가 약속을 어긴 것에 분노하며 구양봉을 찾아와 동생을 대신해 복수를 하고 싶다며 황약사를 죽여달라고 한다. 그가 떠난 뒤 그의 여동생인 모룡연이 나타나 그녀의 오빠를 죽여주면 오빠가 제시한 돈의 2배를 주겠다고 한다. 구양봉은 모룡연이 여동생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지만 대화를 지속하는 동안 모룡연과 모룡언이 내면에 두개의 인격체를 지닌 동일인임을 확인하게 된다.


③ 장학우(홍칠공) : 어떤 젊은 처녀(양채니 분)가 구양봉을 찾아와 그의 동생의 복수를 간청한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것은 달걀 한 바구니와 당나귀 한 마리뿐이었다. 구양봉은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만 그녀는 도와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고집한다.   가진 것 없는 검객 홍찰(장학우 분)은 구양봉의 눈에 띄어 그의 휘하에 들어가 이제는 유능한 청부 검객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구양봉의 뜻을 어기고 돈도 없는 어린 소녀의 복수를 대신해준다. 그가 받은 대가는 오직 달걀 한 개뿐이었다. 마적단과의 싸움에서 손가락 하나를 잃은 그는 그를 찾아온 아내와 함께 떠난다.



④ 양조위(맹무살수) : 도화림에서 온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영락한 검객(맹무살수, 양조위)이 어느 날 구양봉을 찾아와 살인청부 일을 하겠다고 자청한다. 그는 눈이 완전히 멀기 전에 복사꽃이 피는 것을 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갈 돈이 필요했다. 그는 아내(유가령 분)가 절친한 친구와 부정을 저지르자 집을 떠나는데 그 친구는 다름 아닌 황약사였다. 이렇게 가슴에 나름의 상처를 지닌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세월은 흘러가고 마침내 구양봉은 형수(옛 애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자신의 여관에 불을 지르고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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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눈에 보이는 현상(現像) 으로 드러내는 것은 물성(物性)이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물잔을 건네는 것, 그러니까 목이 마른 사람이 받은 잔(盞)은 물을 건네준 사람의 마음이다. 선의가 물잔이라는 물성으로 교환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은 물성을 띤 현상으로 나타난다. 주고받는 것이 인지상정이어서 인간 관계란 결국 물성을 띤 물적 관계의 교환인 셈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장학우(홍칠)가 자기 손가락 한 개를 기꺼이 양채니의 달걀 한 개와 교환한 심리 기제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잘린 손가락과 달걀 한 개)은 타자와 타자에 대한 서로의 선의가 물성을 띤 물질성으로 변한 상태인 것2)이다.


반면에 홍칠공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유심론자들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마음으로 얽혀 있으며 정념의 교환, 혹은 마음 교환의 실패로 맺어진 관계들이고 그것 때문에 고통 받는다. 장국영(구양봉)을 사랑한 장만옥(자애인)과 그녀를 사랑한 양조휘(황약사)가 나누는 대사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한다.


- 날 사랑한다는 말을 안 했어요(자애인)

-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도 있소(황약사)

- 난 그 말을 듣고 싶었는데 그는 말해주지 않았아요(자애인)


철학자 김영민은 << 집중과 영혼 >> 에서 이 에피소드를 거론하며 " 그러나 누가 '알고' 있었다는 게 왜 중요했을까 ? " 라고 묻는다. 중요하다, 중요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그들은 마음을 물성을 띤 물질성의 교환 형태로 뜻을 전하는 관계가 아니라 오로지 원시적인 정념의 교환 형태로서만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정인들이기 때문이다. 메시지가 없으니 메신져도 사라진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마음과 마음의 교환 거래로 맺어진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황약사는, 구양봉은, 맹무살수, 자애인은 마음을 얻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유심론자들이다.


달걀은 환(幻 : 헛보이다, 미혹하다, 변(화)하다, 바뀌다)이다. 선의를 드러내기 위한 성의는 중요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성의 표시의 가치가 아니라 선의의 가치'다. 홍칠은 기꺼기 그 작은 선의를 받아들인 사람이다.



                                

 

1)      집중과 영혼, 32 달걀은 환이다

2)      영화 << 올드보이 >> 에서 최민식은 군만두를 통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이우진)의 마음을 읽는다  군만두는 이우진(유지태)의 악의를 띤 마음으로 물성으로 환幻 한 것이다  김영민 스타일로 표현하자면 " 군만두는 幻이다 " 군만두는 메신저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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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8-01-19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양연화와 동사서독은 여러번 봤습니다. 화양연화는 화양연화대로(이 영화 보고나서 앙코르왓으로 날라갔다 왔습니다), 동사서독은 또 그 자체로 느낌이 많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선가 또 방영한다면 아마도 또 보고 있을 그런 영화입니다. 저에겐...^^

곰곰생각하는발 2018-01-19 15:27   좋아요 1 | URL
후후....

저에게 아비정전은 가장 많이 본 영화이고
저에게 화양연화는 가장 좋은 영화이고
저에게 동사서독은 가장 애정하는 영화입니다..ㅎㅎ


저도 아마 어디선가 방영하면 채널 돌리지 않고 볼 영화들입니다..

2018-01-21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1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패션의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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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 집중과 영혼 >> 에서 < 챕터 3 - 식탁의 인류학 > 에 대한 글에서 " 예절은 속물의 도구다 " 라는 문장에 필을 받아서 그에 따른 리뷰를 작성하려다가 엉뚱한 샛길로 빠지는 바람에 영화 << 넘버 3 >> 의 조필로 끝났다. 여러분의 깊은 이해와 양해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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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류(층)은 유행을 선도한다. 있어 보이기 위해 루비이통 A를 들고 다닌다. 나,  루이비통 들고 다니는 인간이야 ~     인간이란 대부분 < 있어 보이려고 > 하지, 애써 < 없어 보이려고 > 하는 인간은 별로 없는 탓에 상류 진입을 꾀하는 중류(층)는 상류의 유행에 동참하기 위해 루이비통A를 장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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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야기이지만 과시욕은 하류도 마찬가지여서 유행이 끝물일 즈음에 루이비통 A를 장만한다. 나도 루이비통 들고 다니는 인간이야 ~  하지만 하류가 루이비통 A를 장만할 때 상류는 루이비통 B를 들고 다닌다. 새로운 유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상류는 유행을 선도하는 것에는 반색하지만 유행의 평준화에는 질색하는 부류이다. 하찮은 것들이 자신과 똑같은 상품을 구매해서 있어 보이려고 하는 연기를 참을 수 없는 까닭이다. 상류가 루이비통 B를 선택하면 중류도 재빠르게 루이비통 B를 장만한다. 즉, 유행이란 차별성(상류층)과 동일성(중류/하류층)의 욕망​이 반복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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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층은 중류층/하류층과의 차이를 통해서 계급을 인식하는 반면에 중류층/하류층은 상류층의 생활 패턴과 소비 습관을 모방함으로써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려 한다. 노스페이스 인기가 쇠락한 주요 원인은 " 노스페이스의 교복化 현상 " 이다. 개나 소나 노스페이스를 입고 다는 것은 차별성 전략이 실패하고 동일성이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패션 유행을 선도하는 부류는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해 롱패딩으로 승부를 건다. 양복 단추가 몇 년을 주기로 바뀌는 원인은 상류의 계급 차별 욕망과 하류의 계급 동일시 욕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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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 2개가 달린 양복이 대중적 인기를 끌 때 상류는 양복 단추 세 개가 달린 수트로 승부를 건다. 그것이 바로 자본과 속물의 욕망이다. 품격을 갖춘 패션 리더가 단추 세 개가 달린 수트를 입는 순간, 단추 두 개가 달린 양복은 이제 촌닭들이나 입고 다니는 품위 없는 low quality 한 컨츄리 로컬리티 패션이 된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품격을 자지우지 좌지우지하는 것은 가마우지. (혼잣말) 도대체 좌지우지를 가마우지로 대체하는 이런 말장난은 대체뭐지 ?! 됐고.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품격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인성(人性)이 아니라 인품(人品)이며,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품위(品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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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해야 될 점은 한자 품(品)이다. 口(입 구)가 세 개 모인 형태(品 : 물건 품)인데 물건을 앞에 두고 좋고 나쁨을 판정한다는 의미와 함께 일설에는 물건 상자를 쌓아둔 꼴로 많은 물건을 의미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따라서 인간의 품위와 품격을 이야기할 때 그가 소유한 물건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다. 인품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유물론적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또한 인간이 아름다운 고가 명품에 집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보면 다리가 찢어지는 법이다.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한 당신이 노스페이스를 사서 입자마자 반 아이들에게 자랑할 때 누군가는 이미 롱패딩으로 유행을 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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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신이 적금을 해제하며 어렵게 루비이통C를 장만할 때 홍라희 여사는 루비비통 D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색색이인 아킬레스인 당신은 당신보다 먼저 출발한 느림보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것이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계급 사회인 것이다. 당신이 항상 촌닭일 수밖에 없다. 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품위와 품격의 세계로부터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는 영화 << 넘버 3 >> 에 나오는 조필(송강호 분)의 무대뽀 정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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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에 말이야. 파란 눈의 코쟁이가 있었지. 맨손으로 소뿔도 뽑으신 분이셨다. 그 양반 스타일이 그뤠. 딱, 응?  응 ??!  루이 앞에 서면 말이야. 유, 유유유유  너... 루이비통?  나 조조조, 조다쉬야. 그리고는 존나게 내려치는 거야. 내, 내내내내내가 응... 조, 조다쉬라고 하면 루, 루루루이비똥도 조다쉬야. 알아 ? 내 말에 토, 토토토토토토다는 새끼는 배반형, 배신 응?.. TO부정사야. 우리에게는 그런 정신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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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6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1-16 14:53   좋아요 1 | URL
라이카 가진 사람 알고 있는데 본체 자체가 비싸다 보니 액서사리도 상상을 초월해서 그분은 장비가 1억이 되더군요.. ㅎㅎㅎㅎ 솔직히 부럽긴 했씁니다만.. 과연 그렇게까지 가성비가 훌륭한 것인가는 의문이더군요. 전 사진은 사진기가 좋을 수록 좋은 사진이 나온다에 한 표를 던지지만 분명한 것은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이죠.
같은 실력이라면 라이카로 찍은 사진이 더 좋을 수는 있지만 결국은 그 사진을 찍는 사람의 기술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라이카보다 훌륭한 기계는 카메라의 눈이 아니라 사진을 찍는 사람의 눈이란 생각이 듭니다..ㅋㅋ
 


 

 

 

 

 

 

 

 

 

 

 

 

 

 

                                     

 

熱         과          集        :

 

 

 

 

 

 


 


집중과 영혼  :  80 페이지 OF 1011페이지






- 이 글은 1011페이지 중에서 80페이지까지 읽고 쓰는 리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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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민철학 에세이 << 집중과 영혼 >> 이 도착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주마간산으로 책을 훑다 보니 80페이지 정도 읽었다. 읽기가 만만치 않다는 소리를 들었던 터라 잔뜩 졸았는데, 옴마 !  의외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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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은 열중과 집중을 분리한다. 그는 동물이 한 가지 일에 정신을 쏟는 것은 가능하지만 차분하게 집중하지는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열중은 짐승의 몰입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몰입일 수는 있으나 집중은 동물에게는 없는 " 극히 인간적인 태도의 형성 " 이라고 말한다. 열중과 집중이 모두 사전적 의미로 몰두, 골몰, 몰입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두 단어 사이에 큰 차이는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김영민은 열중과 집중을 굳이 분리한 것일까. 라임을 살리기 위해서 ??! 오케이,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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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생각했다    :   열중은 한자로 熱中이다.  여기서 한자 熱은 더울 열'이다.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한 가지 일에 정신을 쏟다 보면 몸에 열이 오르는 경험은 모두 다 경험했으리라.  열중한다는 것은 몸에서 열을 발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열중은 순간적으로 에너지를 과도하게 태우는 몰입이다.   표범이 얼룩말을 잡기 위해서 엄청난 힘을 발산하듯이 말이다.  순간의 힘은 인간보다는 동물이 우수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김영민은 열중과는 상반된 개념으로 집중을 선택한다.  집중은 한자로 集中이다.  여기서 한자 集은 나무 위에 새들이 모여있는 형상을 본 뜬 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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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할 때 발생하는 몰입은 열중할 때 발생하는 몰입과는 성격이 다르다.    후자(熱中)가 위로 치솟는 " 뜨거운 몰입 " 이라면 전자(集中)는 내려서서 달라붙는 おちつく  " 차가운 몰입 " 이다.   COOL하다.   가성비와 열효율'을 놓고 보자면 쿨한 몰입이 오래간다.   한자 < 熱 > 을 集과 비교하면서 세세하게 분석하면 뜻은 더욱 분명해진다.  음을 나타내는 글자 埶 : 예,열'은 나무가 무럭무럭 자란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글자 아래 灬 : 타는 불 이 붙으니 불에 활활 타는 나무의 형상이 된다.  열은 위로 상승하지만 쇠락하고 몰락하는 이미지다.

​

반면에 < 集 > 은 무성한 나뭇가지 위에 새들이 모여있는 형국을 나타낸다.  새들이 많이 모이는 나무일수록 건강한 나무이다. 왜냐하면 새똥은 거름이 될 뿐만 아니라 새들이 나무에게 해로운 해충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영민은 지속 가능한 몰입을 위해서는 열중보다는 집중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영민은 인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하나 마나 한 소리이지만 동물들은 차분하게 집중하지 못한다. 굳이 집중과 비견할 만한 것을 끄집어내자면 열중이 있을 따름이다(67쪽) " 고 말한 후 " 인간들은 장구한 진화의 세월 동안 어느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분해졌다. 차분함의 강도, 지속성, 그리고 그 차분함과 결부되는 지향의 일관성 등에서 유례가 없는 동물이다(72쪽) " 라고 지적한다.

​

그래서 그는 책에서 소심하고 과묵했던 비행기 조종사 설리의 차분하고 균형 잡힌 태도를 소개하며 그를 모범적인 " 캡틴 COOL " 이라고 평가한다. 쉽게 말해서 김영민의 공부법은 가늘고 길게 살자는 주의'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10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달랑 80페이지만 읽고 나서 이해한 대목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 집중과 영혼 >> 은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생경한 단어가 많고, 내용을 보완하기 위해서 저자가 새롭게 한자를 조합했기에 일일이 사전을 찾아가며 읽어야 한다. 하지만 읽고 나면 배움은 큰 편이어서 불만은 없다. 재미있다. 이번 달은 이 책과 함께 보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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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ㅣ 김영민은 서언에서 " 인간만이 절망 " 이라고 고백한다. 이 말은 박노해가 " 사람만이 희망 " 이라고 말했던, 쌍팔년도 흥남부두 격정 신파에 대한 김영민식 쿨한 대응이다. 이것이 힙합 정신이다. 나는 박노해가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총기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매우 슬퍼했다. 이제 더 이상 새벽은 오지 않겠구나.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가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진짜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인생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인간에 대한 절망을 이야기할 때 비로소 인간에 대한 희망의 빛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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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랫동안 아름다운 문장을 탐했다




 



                                                                                                     소리-성애자 입장에서 보자면 소리내어 풀네임을 부를 때 음성학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다. 나는 이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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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에는 음악적 요소와 함께 회화적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어서 파울 클란이나 칸딘스키 그림을 감상했을 때 느끼게 되는 공감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워낙 시인다운 이름이어서 그에게 시인이라는 직업은 마치 숙명처럼 보인다. 그는 << 두이노의 비가 1 >> 에서 " 우리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미함은 파멸하리만큼 /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천사는 무서운 존재 " 라고 말한다. 릴케는 비가 연작 장시(비가 10으로 끝난다) 내내 천사는 무섭다고 말한다. 그래서 << 두이노의 비가 >> 를 처음 접하다 보면 천사가 무섭다는 말에 당황하게 된다.

​

내가 이 자리를 빌려 릴케를 분석한다는 것은 같잖은 일이다. 하이데거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 두이노의 비가 >> 와 <<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 를 해석할 준비가 돼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하고 싶은 것 하나는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천사에 대한 시인의 심상은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라는 데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대상을 동경하는 마음은 이중적이다. 그것을 찬미하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 그렇기에 천사로 대표되는 아름다움은 양가적이다. 나는 오랫동안 아름다운 문장을 탐했다. 하지만 < 美 > 가 아름다울 때는 자신이 " 넘버 3 " 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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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서 송충이는 자기 분수에 맞게 솔잎을 먹어야 하는데 자기 분수에 어울리지 않게 땅에 내려와 떨어진 갈잎을 먹으면 죽게 된다는 소리이다. 진선미라는 거역할 수 없는 서열의 세계를 무시하고 美가 상위 개념인 眞과 善의 영역을 넘볼 때 美는 추해진다. 아름다운 문장도 마찬가지다. 眞과 善이 없는 미문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추하며 폭력적이다. 그렇기에 아름답고 따스한 말로 타인을 위로하는 문장(예를 들면 이기주의 << 언어의 온도 >> 같은)은 추하다. 가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진짜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은 글이다. 다음은 김영민이 <<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감복하면 지배당한다 >> 라는 제목으로 한겨레 신문 토요판에 올린 에세이다. 깊은 내공이 느껴지는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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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은 널리 읽혀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무례하지만 전문을 올린다. 미안한 마음에 그의 << 집중과 영혼 >> 이라는 책을 구매했다.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감복하면 지배당한다



 

 

 


김영민


일본정치사상사 연구의 권위자 와타나베 히로시 교수에 따르면, 일본 에도시대 도쿠가와 정권은 초월자에 대한 믿음을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간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자를 인정하게 되면, 그 초월자에 의지해서 자신의 권위를 넘보려는 사람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래서 도쿠가와 정권은 초월적 존재에 호소해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대신, 그저 무력으로 자신들의 지배를 관철해 나갔다. 그런데 전쟁에 이겨 정작 평화시대가 도래하자, 도쿠가와 정권은 싸움을 통해서 자신의 우월한 무력을 증명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마치 군사정권이 몰락하고 민주화가 되자, 문민정부가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증명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 것처럼. 실제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도쿠가와 정권 지배자들은 대신 단지 강하게 보이려고 하는 데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이제 이미지가 관건이다. 그들은 점점 더 격식에 의존한 화려한 이미지를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강하고 우월한 지배자인지 강조하고 확인했다. 어위광(御威光)이라고 불리는 이런 연극적인 이미지 창출 말고는 별다른 권력 정당화 작업에 신경 쓰지 않던 도쿠가와 정권은, 서양 제국주의라는 다른 강한 힘이 일본에 도래하자 정당화의 공백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도쿠가와 정권이 사용한 이미지는 단지 무력의 표시였을까? 피지배층이 감복한 것은 무력 혹은 무력의 이미지라기보다, 그 이미지가 동반한 아름다움은 혹시 아니었을까? 때로 아름다움은 초월자의 존재나 논리적인 언술만큼이나 강력한 정당화 기제이다. 평소에 진정한 미인을 만나볼 기회가 없던 젊은이를 상상해보자. 그런 사람이 갑자기 대단한 미인을 마주치게 되면, 거의 정신줄을 놓게 되지 않을까? 아름다운 배우 강동원을 복도에서 마주치자, 느닷없이 자기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는 체험담을 나는 들은 적이 있다. 울음까지는 터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미인이 하는 행동은 다 정당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저 아름다운 이목구비의, 너무 가늘지도 굵지도 않으면서 영덕대게처럼 길게 뻗은 저 사지(四肢)의 스펙터클을 보라. 저 정도의 아름다움이라면 느닷없이 지나가는 행인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흡혈을 해도 정당해 보일 거야. 느닷없이 내 따귀를 때리고 침을 뱉어도 정당할 거 같아….

 

 

단조로움과 화려함의 대조가 빚는 간극

 

이 땅에도 이러한 심미적 스펙터클의 연원이 깊다. 실로 이 땅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미(美)의 장관을 구경하고 누리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조선 후기의 문인 윤기(尹?, 1741~1826)의 ‘간완욕’(看玩欲)이라는 글을 보자. 그 글에서 윤기는 조선 사람들의 “보고 즐기려는 욕망”(看玩之欲)이 엄청난 수준에 달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모든 흥미롭고 아름다운 것은 다 보고 즐길 대상이다. 그러나 그 욕망을 가장 활활 불타오르게 한 것은 바로 임금의 “거동”(제사를 지내러 가는 행렬)이었다. 그 아름다운 장관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거동을 구경하러 나왔다가 길에서 애를 낳는 사람이나 누각에서 실족해서 떨어지는 사람까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至或有在途解娩者, 有從樓跌墜者) 임금의 거동을 구경하러 나왔던 이들은 자신들이 지배층의 권력 정당화 과정에 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19세기 말 고종 때 한국을 방문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방문기에 따르면, 거동의 구경꾼들은 스펙터클에 담긴 권력의 동학을 몰랐던 것 같다. 비숍이 화려하고 극적인 과시라고 평한 임금의 “거동”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자. “거동의 행로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경건한 정적 속에서 자발적으로 모여든다. 그들의 태도는 이 훌륭한 연중행사가 최대한 빛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 같았다. 이 같은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하려면 서울의 단조로움을 말해야 할 것 같다. (…) 이 모든 단조로움과 특색 없음에 대조되어 거동은 태양처럼 빛을 발한다.” 적어도 비숍이 보기에, 모여든 사람들은 이 연중행사의 성공을 진심으로 빌었다. 그리고 거동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거동 이외의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데 있다. 마치 모든 사람이 흑백티브이를 볼 때야 비로소 컬러티브이의 색상이 태양처럼 빛나는 것처럼, 보통 사람들이 단조로운 외관을 하고 있어야 비로소 거동의 스펙터클이 가진 화려함이 빛났던 것이다.

 

단조로움과 화려함의 대조가 빚는 간극이야말로 피지배층과 지배층의 간격이다. 지배층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이 두드러지도록, 피지배층은 초라하고 단조로운 상태에 머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피지배층이 지배층의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순간, 그 피지배층은 지배층의 지배와 사회의 위계질서를 감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아름다운 사람이 뱉는 침과 그가 때리는 따귀라면 감수할 용의가 있는 것처럼. 부러우면 지는 거다. 아니, 부러우면 지배당하는 거다.

 

 

조선시대 ‘처벌의 스펙터클’ 군주제를 벗어난 오늘날 한국에서도 조선 임금 거동의 위력은 계속된다. 임금의 거동이나 그 밖의 행렬의 화려한 모습은 조선왕조의 의궤(儀軌)에 남아서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그리고 이른바 민족문화의 정화로서 종종 칭송된다. 프랑스군에 약탈되어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된 외규장각 의궤를 돌려받기 위한 각계의 떠들썩한 노력과 언론의 보도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데 미인이 사용하는 고운 화장품과 화려한 의상이 비싼 것처럼, 모든 스펙터클에는 돈이 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거동과 같은 전례 행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얼마나 되었을까? 비숍의 추정에 따르면, “이 성대한 행사를 위해 왕국의 작은 재원에 2만5천 실링의 무거운 부담이 지워지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을 의식해 급격히 군비를 증강했던 고종 시대에서조차도, 황실 전례에 관계된 비용은 군비에 버금갈 정도로 막대했다. 그런데 지배를 위한 스펙터클은 임금의 거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형벌의 집행조차도 예전에는 스펙터클이었다. 이를테면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루이 15세를 시해하고자 한 죄인의 처형이 얼마나 거창한 스펙터클의 예식이었는지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예식은 “권력의 과도하면서도 규칙적인 과시를 만들어내는 일”이자, “호사스러운 세력 과시였으며, 권력이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과장되면서도 동시에 규범화한 ‘소비행위’였다.” 푸코가 보기에, 유럽에 본격적인 근대가 도래하기 이전 권력이 자신을 행사하고 재확인하는 방식의 특징은 과잉과 과시로 가득 찬 ‘소비행위’였던 것이다. 조선에서도 처벌의 스펙터클이 존재했다.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의 시신이 강화도 양화진에서 공개적으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모반(謀反)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 옥균(玉均) 당일 양화진두(楊花津頭) 능지처참”이라고 쓰인 천을 걸고 저잣거리에 효시되었을 때, 그것은 처벌의 스펙터클이었다. 그뿐 아니다. 다른 중죄인들도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추국청(推鞫廳)에서 물고를 당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용히 진행되는 고문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 나름의 스펙터클이기도 했다. 지방관청도 마찬가지다. 비숍은 부산 관청에서의 상황을 “포졸들은 거기서 야수적인 채찍질로 범인을 때려죽이며, 그 고통에 찬 울부짖음은 인접한 영국 선교소의 방까지 마구 파고든다”고 묘사한 적이 있다. 채찍질은 바라보는 사람들을 전율케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리를 통해 보다 넓은 곳까지 스펙터클의 효과를 전한다.

 

 

예의 의미가 확장되고 변천하는 과정 윤기의 문학적 묘사에 따르면, 이런 조선 땅에서 임금의 거동을 보러 나온 어떤 만삭의 여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출산이 임박했지만 화려한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 기어이 거리로 나왔다고 한다. 거리에서 해산을 하게 된 지경에 이른 것을 보면, 아마 양반가의 여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고고(呱呱)의 성(聲)을 지를 아기의 관점에서 조선 사회를 바라보기로 하자. 마치 귄터 그라스가 <양철북>에서 난쟁이 오스카의 관점에서 혼란에 찬 독일 사회를 바라보았듯이.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은 <양철북>을 영화화하면서, 태어나기 직전의 오스카가 엄마의 뱃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장면을 실제로 삽입한 적이 있다. 양수가 터진 엄마의 체모 너머로 보이는 너덜너덜한 당시 독일 사회. 이제 우리도 임금의 거동 구경꾼들 한가운데서 태어난 신생아의 관점에서 조선시대를 그린 영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 <양철북>에서 오스카가 생일 선물로 받은 양철북을 두드리고 고성을 지르며 독일 사회의 모순을 고발했다면, 이 조선의 반영웅(anti-hero)은 계룡산의 요다에게 수련을 받은 뒤, 검은 갓을 턱 밑까지 푹 눌러쓴 다스베이더가 되어 조선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것이다. 빈자(貧者)들의 신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의 스펙터클에 골몰하고 있는 양반들을 광선검으로 베면서 조선의 다스베이더는 말하는 거다, “나는 너의 (아비가 아니라) 노비다.”(I am your nobi.) 쓰러지는 조선 양반들이 받들어 모셨던 공자 역시 지배의 스펙터클에 대해 고민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공자가 깊은 관심을 둔 예라는 것은 그 기원을 적어도 상(商)나라 시대에 성행한 제사로 소급할 수 있다. 중국 고대에 이루어진 신에 대한 제사에 스펙터클의 요소가 강했다는 것은, 그 당시 쓰인 청동 제기들의 크기와 무게로부터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상나라 때 청동 제기 중 무거운 것은 875킬로그램에 달한다. 그리고 그 정도로 큰 규모의 청동기 생산은, 그만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 정치권력이 집중화돼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 크고 화려한 청동기들은 집중화된 정치권력의 정당화를 위해 사용됐다. 요컨대, 상나라의 예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신과의 교통을 자임한 스펙터클이었다. 그런데 <논어> ‘안연’(顔淵) 편에 나오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와 같은 구절은, 예가 더 이상 신에게 제사지내는 스펙터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논어>에 나오는 예에 관련된 여러 구절은, 예의 의미가 인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몸짓까지 미시적으로 규율하게끔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즉 신에게 바치는 제사에서 인간관계를 규율하는 행동거지로 예의 의미가 확장되고 변천하는 과정에서, 예의 “규모”에 관한 한, 거시에서 미시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과거의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야말로 공자의 창의적인 공헌이라고 종종 주장해왔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전환이 공자의 창의적인 발상이었을까?

- 출처, 한겨레 토요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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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27621.html#csidxdd344acbbf5c9b78b23ffa0e44ad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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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가 고급 요리는 아니지 : 

 


 


 




신경숙 소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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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는 갈비뼈가 13개이다.  갈비뼈는 순서에 따라 번호가 매겨지는데 1-5번 갈비뼈는 본갈비,  6-8번 갈비뼈는 꽃갈비,  9-13번 갈비뼈는 참갈비라는 이름이 붙는다. 이중에서 최상급 갈비 부위는 꽃갈비(6, 7, 8번 갈비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예뻐보인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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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실비실한 갈비씨 중에서도 원빈처럼 멋진 꽃갈비 씨는 있는 모양이다. 외식 프랜차이즈 기업 " 강호동 육칠팔 " 도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이 부위가 가장 맛이 좋다 보니 꽃갈비는 100% 구이용으로 쓰인다.  반면에 꽃갈비보다는 품질이 떨어지는 본갈비는 찜 요리(or구이용)에 사용되고, 본갈비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참갈비는 탕 요리로 쓰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맛이 뛰어난 부위의 활용이다. 비싼 꽃갈비를 찜이나 탕으로 요리하는 요리사는 없다. 왜냐하면 맛이 뛰어난 부위는 양념의 도움 없이도 육미 자체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비싼 부위는 대부분 구이용으로 소비되고 싼 부위는 찜이나 탕으로 소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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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도 마찬가지다. 기본 문장이 뼈대라면 수식은 양념인 셈이다.  갈비뼈에 붙은 고기가 맛이 좋으면 굳이 자극적인 양념이 필요 없듯이,  뼈대가 튼튼한 문장(정곡을 찌르는 문장)은 그 자체로 훌륭해서 화려한 수식이 필요 없다. 김수영 산문이 좋은 경우다.  김수영은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뼈대에 붙은 기본 문장의 맛이 좋으니 현란한 조사와 과장된 부사 같은 양념을 과하게 사용할 필요가 없다. 읽고 나면 개운하다.  반면에 신경숙 문장은 알맹이 없는 쭉정이 같다. 그는 결핍을 숨기기 위해서 양념을 많이 친다. 신경숙 문장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 머뭇거리는 문체 " 다.  중심을 꿰뚫지 못한 채 변방을 서성거리거나 쭈뼛쭈뼛 망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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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자신있게 문장을 끝맺지 못하고 마침표 대신 쉼표를 사용해서 문장을 미완성으로 남긴다. 그가 지나치게 남발하는 문장 부호들, 예를 들면 말줄임표(......)나 쉼표(,)의 사용은 육미가 나쁜 식재료를 보완하기 위해서 강한 양념으로 맛을 내려는 요리사의 술책처럼 보인다. 문장 하나 자신있게 완성하지 못해서 쩔쩔매는 작가의 작문 실력을 두고 신경숙 고유의 문체라고 포장하기에는 지나치게 민망한 구석이 있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맛은  청승이라는 이름의 양념 범벅 요리'이다. 달고, 짜고, 맵다. 청승맞고 궁상스러운 신파 떡볶이라고나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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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워, 떡볶이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떡볶이는 맛있다 !  다만, 대중적인 음식을 고급 음식으로 포장하는 짓은 하지 말자. 나는 당신이 떡볶이가 맛있다고 말하는 것에는 동의하나 떡볶이가 고급 요리라고 말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신경숙 문학은 순문학이 아니라 싸구려 펄프픽션일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신형철이 엄지손가락 세 개를 추켜세우며 신경숙을 순문학의 여왕으로 찬양할 때마다 졸라 의구심이 든다. 신경숙은 한국 문학에서 지나치게 과대 평가된 대표적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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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1-13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켜세운 엄지손가락 세 개라.. 혹시 나머지 한 개는 밑에 달린 ‘그것‘인가요..? 저는 섹드립으로 이해했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8-01-13 12:34   좋아요 0 | URL
섹드립, 훌륭한데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