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 전쟁










옛날에는 프레임을 언론사 데스크나 여의도 정치판 쪽에서 만들었다. 말이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어서 프레임을 < 아 > 로 설정하느냐 아니면 < 어 > 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주장과 입장이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면  :  미국이 이라크 사태에 개입하자 보수주의자는 " 이라크 전쟁 " 이라는 프레임을 내세워서 끝까지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진보주의자는 " 이라크 점령 " 이라는 프레임을 내세워서 미련 없이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에 이 프레임 맞짱 배틀'에서 전쟁이라는 키워드가 우위를 점하면 사내새끼들이 가오가 있지,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 _ 라는 여론이 형성되겠지만,

반대로 점령이라는 단어가 우위를 점하면 전쟁터에서 발을 빼는 것은 비겁한 짓이 아니라 정의로운 행동이 된다. 정치의 본질이란 결국 " 말싸움 " 이다. 양아치들이 편을 나눠 서로 칼싸움을 하는 집단이라면 정치인은 편을 나눠 말싸움을 하는 집단이다. 그렇기에 정치인에게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주문은 정치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말싸움에서 이기면 행동은 행정부가 하면 된다. 정치 영역에서 중요한 것은 행동 실천이 아니라 말의 우위이다. 유감스럽게도 수구 보수 언론과 흘레붙은 한국 보수는 밥만 먹고 하는 짓이 이 짓이라 이 짓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잘하짓. 아따, 징허게 잘한다잉. 씹새들.

설령 여의도배 프레임 맞짱 배틀에서 졌다고 해도 이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특정 이슈를 덮는 방법은 그 이슈보다 더 강력한 이슈로 뉴스를 뉴스로 덮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조직에게 불리한 뉴스A가 발생하면 그 뉴스를 덮을 수 있는 보다 더 강력한 뉴스 B로 덮는다. 여기서 B는 본질을 왜곡하기 위해 사용되는 팩트이다. 이것을 모멘텀(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뀌거나 바꾸는 장면)이라고 한다. 이 기술도 수구 보수 언론과 흘레붙은 한국 보수가 특허를 내놓은 상태이다. 그런데 이상한 조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저잣거리에 프레임을 찍어내는 공장(언론사)에서 만든 상품이 아닌

짝퉁이 유통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 기레기 " 라는 프레임 상품이다. " 기자는 쓰레기다 " 라는 말을 줄여서 만든 상품명이니 수구 주류 언론사에서 만든 상품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 기레기 > 라는 상품은 이명박근혜 9년 동안 길거리에서 만들어졌다. 누군가 기레기라고 외쳤고, 어느새 누구나 기레기라고 소리쳤다. 그 절정은 세월호 보도였고 기레기라는 프레임은 힘이 커졌다. 문재인 중국 외교 방문 중에 발생한 한국 기자 폭행 사건을 두고 문재인 지지자들이 차가운 시선으로 돌아선 데에는 기레기라는 프레임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수구 보수 주류 언론이 만든 홀대론 프레임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중국 외교 방문 언론 보도가 공정했는가 _ 라는 질문에 대해 불공정했다는 응답이 67.9%(매우불공정 42.4%,대체로 25.5%)이었고 공정했다는 응답은 20.9%(매우공정 6.4%, 대체로 14.5%)에 불과했다. 조중동은 물론이고 종편이 홀대론 프레임을 융단 폭격하듯 쏟아냈는데도 불구하고 시민은 응답하지 않은 것이다. 프레임 생산 공장 프레스 공장장 입장에서 보면 공포를 느낄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여론 조사 내용을 세세히 살펴보면 더더욱 공포를 느낄 것이다. 민주당 지지층은 물론이고 자유한국당 지지층,

국민의당 지지층, 바른정당 지지층에서도 공정했다는 응답보다는 불공정하다는 응답에 높았다(자유한국당지지층 불공정 67.3% 공정 23% / 국민의당지지층 불공정 55.5% 공정 32.9% / 바른정당지지층 불공정 51.2% 공정 26%). 놀라운 점은 자유한국당 지지층이자 보수층이자 TK이자 PK이자 60대 이상에서도 문재인 홀대론 프레임 보도가 불공정했다고 응답한 것이다. 프레임 생산 공장 프레스 공장장이 만든 프레임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명징한 증후이다. 그 변화의 힘은 1인 미디어 시대(sns, 트위터, 페이스북, 유투브, 팟캐스트)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중국 경호원에게 맞은 한국 기자를 동정하지 않고

문재인 홀대론 프레임에도 등을 돌린 원인은 무엇일까 ? 간단하다. 정부에 대한 신뢰는 높은 편인데 언론에 대해서는 신뢰는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레기 프레임이 강력하게 발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한국 기자가 중국인 경호원에게 폭행당한 사건을 두고 사람들이 맞아도 싸다라는 반응을 보인 데에는 문재인을 향한 열혈 지지자의 묻지마 " 맹신" 때문이 아니라 한국 언론에 대한 묻지마 " 불신 "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민 교수의 문빠 진단은 틀렸다. 핵심은 문빠의 문재인을 향한 맹신이 아니라 시민의 언론 불신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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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4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4 11:21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 시절 기자들이야 말로 기자 하면 떠오르는 모범적 답안인데
지금은 뭐... 거의 뭉가졌다고나 할까요. 기레기 프레임 꽤 오래 갈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자들에게는 생명과 다름없는 노트북을 박근혜가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니깐 놓고 오는 것 보십시오... 그래서 기레기라는 소릴 듣
 


 

                                          


서 민 의   문 빠 는   미 쳤 다   :



 

 

 

덤벼라, 문빠 2

  

 

 

                                                                                                       한때 때묻지 않은 시골 여자를 대표하는 이름이 " 순이 " 였다.  순이는 시골에 거주하면서 남성보다 학력이 낮고 세상물정 모르는, 하지만 마음 착한 시골 처녀를 상징했다. 도시 노동자(男)에게 있어서 순이는...... 코리안 뮤즈'였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의 여인이라기보다는 다루기 쉬운 여자에 대한 불알후드의 잠자리 상상에 가까웠다.

순이라는 고유명사가 보통명사化를 초월하여 접미사(-순이)로 쓰이기 시작한 때는 시골에 살던 순이가 도시로 진출하는 때와 맞물린다.  < 공순이 > 와 < 빠순이 > 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 신조어'였다.  공순이가 " 공장 + 순이 " 가 합성한 단어로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면,  빠순이는 " BAR + 순이 " 를 합친 단어로 호스테스 직종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열 일 제쳐 두고 할 일 없이 운동선수나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여성을 낮잡아 부르는 용어'로 변질되었다. < - 빠 > 가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노무현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노빠의 탄생이다. 


조중동은 물론이고 한경오마저 노빠라는 경멸의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국 언론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사실은 노무현을 지지하면 " 빠BAR순이 " 가 되지만 박근혜를 지지하면 " 사모님 " 이 된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박사모는 있지만 박빠는 없다. 왜 ??!          그루피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측면이 있다.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냐에 따라서 누구는 호스테스나 호스트가 되고 누구는 사모(님)가 되는 것이다. 이거 왜 이래 ! 나, 김치 먹고 귀하게 자란 ●씨 가문 18대손 불광동 휘발유야 !         기계적 중립을 그토록 강조하던 언론은 왜 박빠 대신 박사모를 고집했을까 ? 

형평성을 고려한다면 노빠 대신 노사모라고 써야 하는 것 아닐까(돌이켜보면 이명박을 지지한다고 해서 이빠라는 프레임을 사용하는 곳도 없다. 이씨가 오씨였다고 상상하면 닭살이 돋는다)며칠 전, 서민 교수가 << 문빠는 미쳤다 >> 라는 글을 올리자 논란이 이빠만빠 퍼졌다. 친애하는 이웃이자 그에게 책 선물도 잔뜩 받은 나로서는 유감이다. 그는 문빠라는 프레임을 사용해서 문빠와 박빠를 동일선상에서 취급하지만 문빠와 박빠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은 박근혜를 숭배해야 되는 대상으로 인식하지만, 문재인을 지지하는 사람은 문재인을 수평적 관계로 인식한다.

전자는 노예의 복종이고 후자는 친구의 우정에 가깝다. 그렇기에 문빠와 박빠를 동일한 서정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는 중국 경호원에게 맞은 한국인 기자 폭행 사건을 < 고슴도치 내 새끼 - 프레임 > 을 앞세워서 문빠를 비난하지만 그가 한국인이라고 무조건 내리 사랑을 강요하는 것은 포데기 신파요, 눈보라가 휘날리는 흥남부두 구닥다리 서사'다. 나는 가족주의보다는 아나키즘에 가까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 기자가 내 새끼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이 사건에 대하여 열불을 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무엇보다도 이명박근혜 9년 동안 언론이 보여줬던 냉정한 태도를 생각하면 오히려 천불이 난다. 설령, 한국 기자가 중국인에게 맞았다고 해서 열불이 난다고 해도 천불 앞에서는 꺼진 불에 불과하다. 이번 사태에 대해 많은 이가 냉소적인 이유이다. 서민 교수는 글에서 : " 내가 놀란 것은 조교수 말에 동조하는 문빠들이 무지하게 많았다는 점이다. " 가이드라인은 왜 넘었대요 ? " " 기자가 어떤 행동을 했기에 뚜까 맞았을까 ? " 같은 댓글처럼 " 이라며 문빠를 비난하지만 정작 내가 놀란 것은 그가 정신병의 증세로 인용한 댓글이 내 눈에는 매우 합리적인 의문 제기처럼 보였다는 데 있다. 네 가지 질문을 던져 보자.

① 어떤 결과에 대해서 그 이유와 원인을 묻는 것이 과연 정신병적 증후일까 ?    ② 오히려 결과만을 내놓고 이유와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 기사'가 이상한 것이 아닐까 ?    ③ 이명박근혜 정권 시절 청와대 기자간담회 때 정부 쪽에서 주는 시나리오 외에는 그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한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질문 없는 뉴스 생산자와 이것저것 많은 질문을 던지는 뉴스 소비자 중에서 누가 더 병적일까 ? ④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와 질문을 많이 하는 사회 중 어느 쪽이 더 건강할까 ?

서민 교수가 열거한 두 개의 댓글(러)은 지금 기자에게 WHY와 HOW를 묻고 있는 것이다. 기사 작성에 있어서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기본 조건(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을 묻는 것은 뉴스 소비자로서 합리적 의문 제기이다.  이제 뉴스 소비자는 기자들이 글을 쓰면 무조건 믿고 따르던 순둥이들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헤게모니를 장악한 부류가 뉴스 소비자가 아니라 뉴스 생산자'였지만 이제는 이 권력이 시민으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정보 접근성, 팩트 파인딩과 체크 따위는 언론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지만 이제는 뉴스 소비자인 시민 사회에서도 그것을 쉽게 검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중국 : 문재인과 유타오

 베트남 : 오바마와 쌀국수 

 

오바마가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서민 식당에 들어가 쌀국수와 함께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뉴스로 내보내며 대국의 소탈한 쌀국수 외교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한국 언론은 동일한 배경과 목적을 가진 문재인의 유타오 외교에 대해서는 혼밥 프레임으로 광탈하는 이중 잣대는 한국 언론의 운동장이 얼마나 많이 기울어졌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식의 팩트 체크는 나 같은 무지랭이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수작이 되었다. 


 

 

최근 리얼미터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문 대통령 중국방문을 다룬 언론보도가 공정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70%에 가까운 응답자가 불공정했다고 답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렇다면 서민 교수는 한국 기자 폭행 사건에 대한 네티즌의 신경질적 반응을 단순히 돼먹지 못한 문빠 탓으로 돌리지 말고 불공정한 언론 환경에 따른 대중의 불신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명박근혜 9년을 지내면서 시민들은 언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팩트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으니 언론에 대해 냉소적인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두고 당신은 왜 맞고 쓰러진 기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기괴한 강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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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3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3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4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4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7-12-23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곰발님 2017년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이제는 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프레임에 갖혀 있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는 모습속에서 희망을 보게 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3 22:48   좋아요 1 | URL
프레임이라는 게 사실 전적으로 여의도 정치꾼들과 언론이 만드는 무기잖습니까.
그런데 기레기라는 프레임은 그들이 아닌 시민 사회가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권력의 이동 현상이죠. 기레기 프레임이...
기레기라는 것은 사실 기득권 편집실이나 여의도 전략본부실 따위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길거리 집회에서 만들어진 프레임이기에
이게 매우 강고하도고 느껴집니다.시대가 전환되어
이제는 1인 미디어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단발머리 2017-12-24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줍은 문빠입니다. 이 글 바로 전에 올리셨던 글의.... 몇몇 문단 몇몇 구절에 깊이 동감합니다.
저 역시 서민 교수님 좋아하는데, 형국이 계속 이렇게 험난해지고 있어 참 안타깝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3 22:49   좋아요 0 | URL
저도 서민 교수님 팬입니다. 그가 이명박근혜 정권 때 용기 있게 쏟아냈던 지식인은 그가 유일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번은 좀 과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뭐, 저는 여전히 서민 님 지지합니다만..
 

 

 

 

 

 

 

 

 

 



나는 문빠다.


 

 

 

 

 

 


                                                                                         나는 문빠다. 내가 문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는 문재인 대통령 사진만 보면 방그레 웃게 된다는 점이었다. 일단, 웃게 된다. 뿌듯하기도 하고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울컥하기도 한다. 내 한몸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가끔 그를 지켜줘야 한다는 사명감도 가지고 있으니 이 감정..... 참 묘하다.

 

하여튼, 잘은 모르겠으나 이러한 지지는 전적으로 이명박 때문에 생긴 반작용임은 틀림없다. 이명박이라면 뼛속까지 증오해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 적이 있다. 이토록 다크하고 바이올런스한 감정의 골은 깊이가 아득하여 오죽했으면 입고 다니던 청바지에 쥐가 불에 타 죽는 그림을 그려서 입고 다니고 이명박은 XXX라는 문장을 썼을까. 나중에는 들고 다니는 가방에도 이명박 XXX 라는 문장을 새겨서 탑골공원 가스통 할배 무리로부터 다구리를 당할 뻔도 했다. 집회 때문에 경찰서에 끌려간 적이 있었는데 형사가 나를 보더니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 혹시..... 뭐하시는 분이세요 ? "

 

서민 교수가 문빠는 미쳤다라는 글을 썼을 때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우르르ㅡ 몰려다니며 문재인을 비판하는 기사나 그 무리를 적폐라며 적개심을 드러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저 마음 속으로만 문재인을 지지할 뿐이니 유령 문빠인 셈이다. 무조건 옹호하지도 않는다. 비판할 거리가 있으면 비판해야 하니까. 하지만 맞은 놈보다 때린 놈을 옹호하는 극렬 문빠에 대한 서민의 지적은 조금 어설프다. 그는 “ 미운 내 새끼라 해도 남에게 맞으면 화가 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문빠들은 도대체 왜 우리나라 기자의 폭행에 즐거워하는 것일까 ”라고 썼지만 맞은 기자를 동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문빠가 기자의 폭행을 즐거워한다는 논리는 지나친 비약이다.

 

때린 놈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맞은 놈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는다. 맞을 짓을 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평소 언론이 행했던 짓을 생각하면 동정은 들지 않는다. 서민은 중국에서 맞은 기자를 내 새끼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아나키스트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남의 새끼처럼 보였다. 한국 기자 폭행 사건을 다루는 언론의 폭발적인 울분을 보면서 자기 연민에 함몰된 기득권 논리를 보게 된다. 기자의 고슴도치 외사랑을 보면서 정작 세월호 때에는 왜 그토록 침착했을까 _ 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 이중적 태도가 경멸스러웠다.

김훈의 말투를 흉내 내자면  :  광분하는 기자라는 직종을 가진 부류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 통곡을 금한다. 자기 연민이 지나치구나 ! " 하여튼 서민 교수가 문빠를 미쳤다고 하고 정신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내가 문빠라는 사실이 하나도 부끄럽지가 않아서 이렇게 커밍아웃을 한다. 나는 문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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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7-12-22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가지로 의아한 요소가 많으나. 세월호 사건당시 서민 교수의 박근혜 옹호 쉴드발언에서 소름이 돋았는데, 이분 요새 왜 이렇죠?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2 15:24   좋아요 0 | URL
그분이 반어법을 즐겨 사용하다 보니 오해가 생길 겁니다. 박근혜를 옹호한다기보다는 일종의 반어법일 거예요. 즐겨 쓰시는 문법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2-22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어법을 즐겨쓰는 것을 아는데, 문제는 그것이 대다수 사람에게 안먹히는 것을 두고, 너는 왜 그것도 모르느냐 라는 식의 은근한 엘리트의식이 역으로 오해를 사게 되니 글을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2 15:44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 저는 서민의 반어법을 이해하는 편이어서 알쏭달송하지는 않더군요. 저도 사실... 반어법으로 디스하는 글이 많잖습니까.. ㅎㅎㅎㅎ

sslmo 2017-12-22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제 리뷰에도 반어법이라고 댓글을 다셨었죠. 그책은 서민 독서였고 안철수 관련 꼭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2 15:45   좋아요 1 | URL
저도 전혀 몰랐는데 만애비 님 비판을 들으니 반어법은 정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sslmo 2017-12-22 15:51   좋아요 0 | URL
네, 반어법이라고 정확하고 일관성이 있어야죠~^^

http://blog.aladin.co.kr/745144177/9683409
리뷰 링크 합니다.
묘하게 제 리뷰를 읽어주십사 하는 꼴이 됐는데,
제 리뷰의 서민 님 ‘댓글‘이 일품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3 05:18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역시 의도는 반어였는데
사람들이 직유로 받아들여서 난처했겠씁니다.. 허허..

잠자냥 2017-12-22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민의 그 글을 읽다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기자 편을 안들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건 문빠라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 기자들이 ‘기레기들‘이라고 불릴 짓들을 너무나도 많이 해왔기에 국민 정서가 싸늘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 같더군요. 그걸 문빠들의 정신 이상으로 몰아간 걸 보니..... 이 사람, 참 국민 정서 모르는구나 싶더라고요. 심지어 ‘미운 내 새끼‘라고 표현했던데, 그 구절 읽는 순간 저부터도 웬 내 새끼? 하면서 코웃음쳤습니다. (참고로 전 문빠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서민 눈에는 기자편 안든 국민은 다 문빠로 보이겠죠? ㅋㅋㅋ)

더더군다나 그 일과 관련해서 기자들이 또 얼마나 악질 기사 써댔습니까? 그 꼬라지 보니 더 에라이 기레기들아, 욕만 나오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3 05:17   좋아요 0 | URL
리얼미터에서 이번 중국방문 언론 편향 조사를 했는데
공정했느냐는 질문에
70%는 공정한 언론이 아니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기사로는 잘 안 내보네죠...
이게 지금의 언론 환경이 아닌가 싶습니다..

포스트잇 2017-12-22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분이 이 글과 댓글들을 보면 시름이 더 깊어지시겠네요.
문빠들의 정신상태가 진짜로 심각하다고 생각하실 게 틀림없습니다. 멘탈 강하시다니 전의를 더 불태우시는 쪽으로 나가실테죠. 앞으로 문빠와의 더욱 가열찬 전쟁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어허,,,,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3 05:15   좋아요 0 | URL
댓글이 길어질 것 같아서 아예 포스팅을 했습니디ㅏ.
저는 진짜 이명박근 9년 동안 언론의 민낯을 봐서
애정이라고는 거의 없고... 일단 무조건 믿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레삭매냐 2017-12-22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민 교수의 발언도 좀 그렇긴 하지만,
서민 교수의 비판을 가지고 이것 봐라 하고
부화뇌동해서 소설 써대는 조중동 하는 짓
거리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또 어떻게 보면 지선을 앞두고 위기를 정확
하게 보고 있구나 싶구나 하는 마음에 측은
하기도 하구요.

그런 건 또 언론이라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정치한다는 한량들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
이 들기도 하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3 05:14   좋아요 0 | URL
신난거죠. 서민 교수님에게는
악감정은 없습니다(그가 이명박근혜 때 실명으로 그들 졸라 깐 것도 그분이었으니)

조중동이 써먹기에 좋은 재료를 선물했다는 점에서는 안타깝습니다.

시이소오 2017-12-22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청바지는 아트입니다. 아. 쥐새끼 설칠때 왜 저는 저런생각을 못했는지 한스럽네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3 05:12   좋아요 0 | URL
지금 다시 보니.. 그때 남대문 경찰서 형사가 진심을 다해서 저에게 뭐하시는 분이냐고 걱정하던 그 눈빛이 이해가 가네요. 그때 제가 약간 돌았나 봅니다..ㅎㅎ

2017-12-22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3 05:12   좋아요 0 | URL
제 말이요. 제말이 그 말입니다. 이 시부랄 놈들... 기자들 보면 진짜 특권 의식에 쩔어가지고..
그 시절에 쏟아낸 기사를 보십시오. 뭐, 패션 외교 ? 지랄한다 생각했죠...
이런 거야 말로 용비어천가 아닌가요. 니미 무슨 외교를 옷가지고 한답니까..

이게 한국 언론의 현주소에요. 그런데 지금 와서... 는 마치 용맹하고 정의로운 것처럼 행동하는 게 졸라 역겨울 뿐입니다..

syo 2017-12-23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선후보 토론때가 생각이 납니다.
심이 문을 좀 깠더니 정의당 홈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지지 철회니, 기껏 비례만들어 줘놨더니 깝친다고 다음 총선에서는 국물도 없을 줄 알라느니 그런 댓글이 폭주했었지요..... 그럴 때 보면 좀 심한 구석도 전혀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건 비판이라기보단 비난이니까요. 심이 기레기들마냥 문 지지자들에게 욕 먹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는데. 그때 좀 울컥했던 기억이.....

그래도 서민교수님의 글은 여러모로 의외네요. 지지자들이 화낼만 합니다. 조씨 이야기는 정말 아무 의미도 재미도 없는 헛발질이구요. 과욕일지요. 저도 개그 욕심을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3 05:10   좋아요 1 | URL
어느 조직이나 극성은 있죠. 저도 심상정 욕하는 그들 보며 학을 뗐습니다.하지만 그들의 문빠의 핵심은 아니잖습니까. 소수의 극렬주의자가 있을 뿐인데도 문재인을 지지하면 문빠다 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서민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명박근혜 때 이름 걸고 신랄하게 까신 분도 그였으니 말ㄹ입니다. 그래서 저는 서민의 저 글은 비판하지만 비난은 하지 않겠다고 이자리에서 선언합니다아.. ㅎㅎㅎ
 






위험사회, 스타일, 시인





▷ 위험사회 :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지어다

초가집에서 큰불이 나는 경우는 없다. 초가삼간 다 타봐야 빈대 몇 마리 죽을 뿐이다. 큰불은 대궐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킬 때 발생한다. 층이 쌓일수록, 그리고 높이가 높을수록 그 건물의 리스크도 그것과 비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광고는 청개구리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결핍을 숨기기 위해 되레 선빵을 먼저 날린다. 새우깡이라는 과자 이름은 새우깡이 없다(결핍)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광고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붕어빵이라는 이름도 붕어가 없다는 결핍을 숨기기 위한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마천루 광고는 하나같이 편리와 안전을 강조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광고가 청개구리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천루가 불편과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라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 그러니까 하이테크 방제 시설과 보안 시설을 갖췄다고 광고하는 건물은 정반대로 가장 위험한 공간인 셈이다.  /  주제 사마라구 소설 << 눈먼 자들의 도시 >> 는 도시가 마비되면 살기에 가장 불편한 곳이 마천루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곳은 전기만 끊겨도 지옥이요, 변기에 물이 공급되지 않아도 지옥이 되는 곳이다.  변기가 막힌 채 타워팰리스에서 열흘만 견뎌 보시라. 하여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지어다. 또한 영화 << 다이 하드 >> 는 최첨단 방제 시설과 보안 시설을 갖춘 초고층 빌딩에 인간 " 버그 " 가 침입하면 속수무책으로 위험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 결과적으로 외부 침입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나카토미 빌딩이 자랑하는 하이테크 방제 시스템은 경찰의 빌딩 내 진입을 차단함으로써 테러범을 보호하고 인질을 더욱 곤경에 빠지게 한다. 안전하다는 것은 위험하다는 증거다.






 

 

 

 


 



▷ 박근혜의 침대 : 자세가 태도를 결정한다

총은 위험한 무기이고 칼은 조심스러운 도구다(불도 마찬가지이다). 총과 칼을 다루는 사람은 운전면허를 갓 딴 초보운전자와 비슷해서 처음에는 이 위험한 도구를 섬세하게 다루기 때문에 사고가 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익숙하게 숙련되었다고 방심하는 순간에 안전사고가 자주 발생하게 된다. 그렇기에 칼(총, 불)을 손에 익힐수록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스타일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끝이 뾰족한 촉이나 칼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감안한다면 스타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무기가 되기도 하고 도구가 되기도 한다. 좋은 스타일, 좋은 디자인, 좋은 문장은 여러 구성 요소를 조심스럽게 다룰 때 발생하는 아우라'다 / 스타일이란 까다로운 녀석이다. 과잉을 강조하게 되면 키치가 되고 결핍을 강조하면 컬트가 된다. 한껏 멋을 내겠다고 온갖 악세서리를 몸에 걸치고 천안 삼거리를 워킹하는 사람은 << 세상에 이런 일이 >> 에 나오기 딱이다. 스타일 결핍보다 촌스러운 것은 스타일 과잉이 아닐까 ?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스타일이란 녀석은 꽤나 까다로운 녀석. 결핍을 보완하되 과잉으로 빠지지 않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과잉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결핍을 꺼내들면 촌스러워진다(스타일이란 기본적으로 과시적 욕망인 과잉에 기초한다). 그러니까 과잉을 기초로 하되 과잉처럼 보이지 않는 방식이 세련된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좋은 예가 애플사에서 출시된 아이폰이다. 얼핏 보기에 아이폰은 디자인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밋밋한 디자인이다. 그냥 납작한 직사각형 모양이다. 하지만 바로 아이폰의 디자인 결핍이야말로 가장 세련된 스타일 과잉의 예이다. 왜냐하면 복잡한 디자인보다 훌륭한 디자인은 심플한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좋은 예가 루이비통 가방이다. 남대문 짝풍 루이비통과 진품의 차이를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짝퉁 루이비통은 누가 봐도 루이비통 가방이라는 정보를 외부인에게 제공한다. 가방에 대문짝만 하게 루, 이, 비, 통이라는 로고가 박혀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도 비교적 화려하다. 반면, 진품은 상품 로고의 크기가 작을 뿐만 아니라 디자인도 비교적 심플하다. 루이비통 가방 중에서도 가장 비싼 제품은 무인상품 디자인을 닮았다. 로고는 가방을 열어야 비로소 보인다. 가방 안에 로고가 박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방을 열어 명함을 주고받는 이들만이 그 가방이 루이비통이라는 사실을 안다. 홍라희 여사가 굳이 자신이 들고 다니는 가방이 루이비통이라는 사실을 서민들에게 과시할 필요는 없으니깐 말이다. 쉽게 말해서 끼리끼리 놀겠다는 심산이 반영된 디자인이다  /  좋은 문장도 과잉을 기초로 하지만 결핍처럼 보이게 만드는 문장이 좋은 문장이다. 멋진 문장을 완성하겠다고 부사, 조사, 접속사, 감탄사 따위를 남발하는 문장은 모자, 목걸이, 스카프, 팔찌, 카우보이 혁대, 체인 따위를 모두 두른 과잉 패션과 같다. 아따, 멋쪄부러 ~ 환장하게 멋쪄부려 ~ 페루애, 멋쪄부러잉~                 그러나 액세서리는 각자 훌륭한 패션 조미료 역할을 담당하지만 액세서리들의 총합이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50도인 물과 50도인 물이 합치면 물 온도가 100도가 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기는 한껏 멋을 낸다고 하지만 그가 걷는 길은 쁘레따뽀르떼가 아니라 세상에 이런 길 위를 걷는다  /  패션에서 결핍보다 촌스러운 것이 과잉이라는 사실은 멀리 볼 것 없다. 내 꼬락서니를 보면 답은 나온다. 좋은 패션은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다짐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미학적으로 뛰어난 의자가 사실은 불편한 의자인 것과 같다. 몸뻬가 촌스러운 옷의 상징인 이유는 몸뻬가 너무 편하다는 데 있듯이 컴퓨터 의자가 싼 의자의 상징인 이유 또한 그 의자가 너무 편하다는 데 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불편한 의자에 앉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불편은 지속적으로 뇌에 자극을 주기 때문에 태도와 자세를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시시각각 교정이 가능하다.  내가 인간 관계에서 불편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이유이다. 자세를 잊는 순간, 우리는 세상에 이런 길을 걷게 된다  /  가구 중에서 가장 편한 것은 침대요, 가장 편한 장소는 화장실이다. 21세기 성인 중에 " 우선 눕고 볼 일 " 과 " 우선 누고 볼 일 " 에 집착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침대의 여왕, 박근혜'다.  침대는 자세를 허물어뜨린다는 점에서 나쁜 자세를 유도한다. 좋은 자세가 좋은 태도를 유지한다. 그런 점에서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좋을 리가 없다.

 




 

 

 

 

 

▷ 시 : 무학의 힘

시인이 많은 사회일수록 좋은 사회 같지만 사실은 시인이 없는 곳이 낭만적인 사회다. 대한민국 출판 시장에서 해마다 새 시집이 쏟아지고 있지만 그것은 문학이 부흥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반대로 문학이 쇠락하고 있다는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명징한 증거다. 십자가가 많을수록 부흥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구원이 불가능한 사회라는 것을 암시하듯이 말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부족은 인디언이었다. 언어는 있으나 문자는 없는 인디언 부족은 < 친구 > 라는 말을 " 내 슬픔을 함께 지고 가는 자 " 라고 부른다. 여기에 수우 족은 < 12월 > 을 " 나무껍질이 갈라지는 달 " 이라고 부르고 < 1월 > 을 " 해에게 눈을 녹일 힘이 없는 달 "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람 이름은 " 오줌을 눌 때 휘파람 소리가 나는 자 " 라고 부르는 식이다(참고로 내 인디언식 이름은 어쩌다 낳은 한숨이다). 이 정도면 박목월도 울고 갈 서정이다. 이들이 나누는 일상 대화를 상상하면 아찔하다. " 내 슬픔을 함께 지고 가는 자여, 눈 녹일 힘이 없는 달이 차면 오줌을 누면 휘파람 소리가 나는 자와 함께 술이나 한 잔 하세 " 인디언 사회에서는 만득이도, 삼식이도, 영구도 모두 시인이다. 시는 언어는 있으나 문자는 없는 세계에서 빛이 난다. 그렇기에 문자를 배우기 전의 아이들이 말할 때 시적 아우라가 발생하는 이유이다. 시의 본질은 무학이다. 하여 나는 이토록 가방끈이 긴 세대가 이토록 많은 시인을 배출하고 있다는 점이 영 못마땅하다. 인디언의 시적 언어에 감탄한 여행객이 그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인디언 시인은 누구인가요 ? "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 시인이 뭐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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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맥클레인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죽도록 고생하는 사나이.  실벳탸 스텔론이 용병이 되어서 베트남에서 싸울 때 브루스 윌리스는 형사가 되어서 뉴욕에서 흰 쫄티와 맨발로 악당과 싸운다. 전자는 해외 용병이고 후자는 자치 경찰'이다. " 아사리판 나와바리. 오오,  오호츠크 시밤바들아 "  이 두 마초가 닮은 점은  타자의 사유지   에서 폼 나게 총싸움(질)을 한다는 점이다한 방 쏘면 해결될 걸 열 방 쏜다. 어차피 그들은 돌아갈 고향이 있으니 싸움터가 심해 밑바닥 뻘보다 더 참혹한 폐허가 되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쏘가리도 아니면서......  닥치는 대로 쏜다.

미국이 내세우는 전쟁 전략은 언제나 동일했다. " 남의 나라에서 폼 나게 싸우기 " 미국 본토가 < 적 > 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경우는 일본 가미가제 공격과 알카에다 공격이 유일했다.  가미가제가 모더니즘적 증후라면 9.11테러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증후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카토미 전투는 미국이 아시아에서 펼치는 대리전 이다. 영화 속에서 브루스 윌리스는 고개 숙인 남자'가 될 판이.  < 그 > 는 직장에서는   ① 골치 아픈 동료였고, 아내에게는 ② 무능한 남편이었으며,  딸에게는 ③ 유령'이나 다름없는 아저씨에 불과하다. 가정은 위기일발 상황에 놓여 있다. 나카토미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아내는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처녀적 이름으로 직장 생활을 한다.   

그러니깐 아내는 < 홀리 맥클레인 > 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결혼 전 이름인 < 홀리 제네로 > ​로 처녀 행세를 하는 것이다.   맥클레인 형사는 나카토미 빌딩 로비에 있는 방문자 명단에서 아내가 처녀적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린다.  맥클레인 가문을 부끄러워하는 아내.  설상가상, 참기름처럼 생긴 회사 동료가 아내인 홀리를 " 홀리 " 는 더러운 꼴도 본다.  맥클레인'이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아내로부터 제거(거세)된 상태'다.  지금 그의 페니스는 발기와 거세 사이에 있는 것이다잘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꼴린 것도 아닌 상태.  마치 휴대폰 표시창에 방전을 알리는, 깜박거리는 아이콘처럼 말이다.  그는 자신의 남근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존 맥클레인 형사, 추락한 자존심을 세울 수 있습니꺄 ?

이 영화에는 재미있는 역설이 돋보인다. 전쟁터의 주요 무대인 < 나카토미 빌딩 > 은 하이테크 벙커로 최고의 방재와 보안 시설을 자랑하는 건물이다. 그런데 테러리스트는 오히려 디지털화된 보안 시스템 때문에 보호받는다. 경찰은 나카토미 하이테크 보안 시스템 때문에 건물 내부로 진입할 수 없다. 빌딩 철문은 먹이를 문 악어의 입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다시 말해서   :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철통 보안 시스템이 역설적으로 적을 보호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역설은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하이테크가 오히려 위험을 강화하는 역기능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기술 발전은 리스크의 파이'를 키운다.  초가집이 불타면 단순한 화재가 되지만  초고층 빌딩이 불타면 재앙이 되는 법이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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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영화평론집 세트 - 전2권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필사의 탐독
정성일 외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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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랑  하  는     딸  에  게   :



 




정성일과 임권택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임권택 영화 가운데 새롭게 눈을 뜬 계기를 마련한 영화로 << 족보, 1979 >> 를 뽑는다. 틈만 나면 하는 소리여서 평론가 정성일과 영화감독 임권택 사이에서 오고 가는 말풍선을 빼놓지 않고 귀담아들었던 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다.

두 사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젖은 땔감 같은 사이여서 마른 땔감보다 뜨겁게 숫불(" 떼래야 " 나 " 숯불 " 이라고 표기해야 맞는 표현이겠지만 나는 비문도 훌륭한 문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내 문장은 비문의 깊은 뜻을 이해해야 오모한 맛을 느낄 수 있다)처럼 빨갛게 타오르곤 했다. 이때 정성일은 임권택 영화라는 이름의 우물만 집중해서 파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정성일은 임권택 영화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날씨가 화창하구나. 정성일이 한국 영화 비평계의 텐트폴로 일필휘지를 날리며 롤모델로

㉠ 장 르느와르 영화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앙드레 바쟁을, ㉡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탐구에 일생을 바친 도널드 리치를, ㉢ 찰리 채플린을 연구한 데이빗 로빈슨을, ㉣ 모두 다 초기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를 비판할 때 나홀로 그를 지지했던 하스미 시게히코를, ㉤ 알프레드 히치콕에 대한 기념비적 집착을 보였던 프랑소와 트뤼포 평론가 흉내를 내며 비평계를 평정할 때,  강북 변방의 어두컴컴한 ●●동에서 비디오가게를 전전끙끙하며 웨스 크레이븐 감독이 연출한 << 왼쪽 마지막 집 >> 을, 샘 레이미의 << 이블데드 >> 를, 조 단테의 << 그렘린 >> 을, 피터 잭슨의 << 배드 테이스트 >> 를 

탐욕스럽게 먹어치웠던 나는 임권택 영화에 대한 까닭 모를 내 악의를 떨쳐낼 요량으로 << 족보 >> 라는 영화를 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때마침 시네마떼끄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길래 짬을 내서 << 족보 >> 를 감상했(었)다. 그런데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라고나 할까 ?   이 영화는 정성일이 말하는 것처럼 대단한 영화도 아니고 그저 그렇고 그런 시시껄렁한 문예영화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임권택 영화가 불편한 지점은 잰더 인식의 철저한 결여'에 있었다. << 서편제 >> 에서 남성 욕망을 완성하기 위해 딸에게 독약을 먹여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을, << 하류 인생 >> 에서 남편이 성관계를

거부하는 아내를 때린 후 강간하는 씬 다음에 나오는 장면(부부강간을 당한 아내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남편에게 안겨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과일쥬스를 만들고 있다)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서편제 >> 에서 아버지로 등장하는 소리꾼 유봉(김명곤)이나 << 하류인생 >> 에서 깡패인 최태웅(조승우)은 여성을 그저 남성 욕망을 해소하는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캐릭터에 불과했다. 뒷목이 뻣뻣하시다구요 ? 아내와의 잠자리가 두렵다구요 ? 자두 자두 자두 자두 잠이 오신다구요 ?  그런 남성에게는 자두 맛 남성 자양 강장 드링크. 원 ! 기 ! 옥 !   이름 또한 어찌나 남근적인지. 

< 봉 > 이 사전적 의미로 기다란 몽둥이나 봉알의 수컷을, 오타다. 봉황의 수컷을 뜻하니 유봉을 다른 식으로 창씨개명하면 태웅이 될 터이다. 太雄, 이 얼마나 테스토스테론적 이름인가 !  임권택 감독에게 여성이라는 계급은 " 호모사케르 " 에 불과하다. 옛날 영화이니 당대의 감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변명은 최근 영화라 할 수 있는 << 화장, 2015 >> 에서도 여실히 그 버릇이 드러나서  설득력을 잃는다. << 화장 >> 에서는 리얼리티'라는 이름으로 분변으로 더러워진 아내의 병들고 헐거워진 여성 성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나는 이 장면이 왜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폭로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헐겁고 더러워진 여성 성기가 육체적 쇠락을 상징하는 오브제라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왜냐하면 굳이 여성 성기를 보여주지 않아도 병실에 누운 아내의 몸 자체는 이미 쇠락한 육체를 설명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립선 비대증으로 인해 소변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인공 관을 성기에 꽂아야 하는 남편(안성기)은 리얼리티라는 이름으로 헐거워진 남성 성기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고개 숙인 남근이 폭로되기는커녕 기분 좋을 만큼 빳빳하고 새하얀 시트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시든 자지에 대한 배려인가 아니면 동변상련인가 ?  그런데 이 차별적인 시선 차이를 지적하는 남성 평론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김훈의 원작 소설 << 화장 >> 에서 병들어서 헐거워진 아내 성기와 전립선 비대증으로 고생하는 남편 성기는 매우 중요한 서사적 대비 장치였는데도 남성 평론가는 애써 이 사실을 외면했다.  내가 뒤늦게 << 족보 >> 라는 영화를 보고 느낀 것은 내 편견이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이었다.  영화 << 족보 >> 는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명문가 양반 설씨 노인이 주인공이다.  그는 성씨를 바꾸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노인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자 일본 관청은 온갖 수작을 꾸민다.  노인에게는 혼인을 앞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딸이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예비 사위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모든 것은 조선총독부가 꾸민 계략. 그들은 장차 사위가 될 남자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노인에게 인도인 자격으로 서명란에 서명을 해야 된다고 말한다.  단, 조건이 있다. 가석방 인도 서약서는 조선통독부 관공 문서이기에 반드시 창씨개명한 이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경우 딸과 약혼한 남자는 옥살이를 치러야 하기에 딸은 파혼에 처할 위기에 빠진다.  딜레마, 딜레마, 딜레마, 오 !  딜레마.  이 영화의 절정 부분이다. 과연 노인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때 노인은 내 눈을 동그랗게

뜨게 할 만한 기묘한 결정을 내린다. 설씨 노인은 옥순(딸)에게 히마리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 옥순아 ! 네가 결정할 수밖에 없구나. 아비하고 네 낭군 될 사람하고,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하거라. 난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하마. " 노인은 딸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지만 딸 입장에서 보면 선택권은 없다. 자신의 결혼식을 위해서 아버지에게 성을 바꾸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노인은 딸에게 어느 것이 더 합당한 윤리적 선택이냐고 묻지만 이 질문은 굉장히 폭력적이다. 왜냐하면 딸에게 선택권은 없다는 사실을 노인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답정너,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 질문은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 달콤한 인생 >> 에서 부하였던 이병헌이 총을 들고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두목에게 묻는 질문을 닮았다. " 왜 그랬어요. 네에 ?!  말해봐요. 왜 그랬어요 ? " 부하는 두목에게 대답을 강요하지만 두목은 그 어떤 대답을 해도 죽는다. YES라고 말해도 죽고, NO라고 말해도 죽고,  NO COMMENT라고 말해도 죽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죽는다.

부하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그저 예의 차원에서 묻는 질문일 뿐이다. 아니나 달라. 딸은 자신의 욕망 대신 아버지의 욕망을 선택한다. 설씨 노인은 자신의 욕망을 완성하기 위해 딸을 이용했던 소리꾼 유봉과 동일한 인물이다. 소리꾼 유봉과 설씨 노인 모두 딸을 거세시킴으로써 남성 욕망을 완성하는 / 유지하는 아비다. 이토록 완고했던 노인은 아들 손자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차별을 받는다고 하소연하자 결국에는 창씨개명에 동의하게 된다. 그러니까 딸의 욕망은 교모한 수법으로 거세할 수는 있었으나 차마 아들(의 손자)의 욕망을 거세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임권택 영화는 늘 이런 식이지만 놀랍게도 그의 영화를 수식하는 것은 휴머니즘이다.  이런 게 휴머니즘이라면 차라리 똥 묻은 개가 낫다. 아버지를 계승하려는 욕망은 재벌 2,3,4,5세가 갖춰야 할 품격이지 예술가가 갖춰야 할 덕목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예술은 아버지 세대를 죽여야 빛날 수 있는 후레자식이다. 착한 아들은 필요 없어 ! 한국 영화가 살기 위해서는 임권택이라는 견고한 성역을 부숴야 한다.  정성일 평론가가 습관적으로 내뱉은 상투어 중 하나가 " 윤리학 "  이다. 그런 그에게 나는 그 윤리학의 이름으로 임권택 영화를 진지하게 다시 분석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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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2-21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중권 팟캐스트에서 정성일이 임비어천가 부르는 거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영화를 즐기는 편도 아니고 임권택 감독 작품은 제대로 본 게 하나도 없는데, 저같은 무지렁이로 하여금, 와 임권택이란 사람 잘 모르지만 어쨌든 열라 위대한 사람인가봉가, 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지요.

과연 왜 훈민정음 만들고 처음 찍을 글로 용비어천가를 골랐는지 깨닫게 하는 대목이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1 13:34   좋아요 0 | URL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성일 키드인데
정성일이 워낙 막강한 힘을 발휘하다 보니 그 키드들은 무조건 임권택 영화를 극찬하더군요.
미학 어쩌구저쩌구 할 때에는... 정말 저는

천년학과 달빛 길어오르기가 좋은 영화인지 진짜 묻고 싶습니다..

수다맨 2017-12-22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솔직히 윤리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애용하는 평론가들(문학계에서는 신형철)을 딱히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큰 개념에 기대어 자기 글의 지적 우위와 도덕적 성격ㅡ나 똑똑한 인간이다, 나 윤리 의식 대단한 인간이다 등등ㅡ을 높이려는 평론가의 작의가 너무 빤하게 보여서입니다...
한 감독의 작품 세계를 지지하고 옹호하기 위해서 난해한 개념과 진부한 숙어를 호출하는 평론가들의 글쓰기는 이제 거부감이 드네요. 게다가 그 감독이 추구해온 성과란 사실 공장장의 오래된 짬밥과 대량 생산물에 불과해 보이는데, 여기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버라고 봅니다.

2017-12-22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2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