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의 지식인' 서경식 교수가 2년간의 고국생활을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한다(어느새 2년이 흘렀군). 경향신문에 실린 인터뷰기사(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code=960100&artid=200802261723535)의 전문을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02. 27) ‘도쿄경제대 복귀’ 서경식 성공회대 연구교수 인터뷰 전문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던 바로 그 시간, 그는 서울 창전동의 자택에서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무심히 커피를 따라주며 말했다. “‘시라케(しらけ)’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어요. ‘퇴색하다’ ‘빛이 바래다’는 뜻으로 일본에서 70년대에 유행한 말인데요. 정치에 냉소적인 70년대 학번 세대를 일컫는 말로 쓰였어요. 지금 한국사회을 보면 자꾸 그 말이 떠올라요." 그는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한국사회에 환기한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다. 그는 다음 달이면 2년 간의 고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난생 처음 고국 땅에서 ‘생활’해본 그는 지금 ‘솔직한 비관주의자’의 마음이다.
2년 전 그는 “절망스러울 정도로 답답한” 일본사회를 구원해 줄 희망을 발견하리라는 기대를 안고 한국에 왔다. 현해탄 넘어 바라본 조국은 적어도 민주화운동을 통해 군부독재를 종식시켰고, 사형수였던 이가 대통령이 되고, 민주투사였던 여성이 총리가 되는,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나라였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의’라는 말을 꺼내기가 왠지 모르게 좀 겸연쩍어지고, 마찬가지로 ‘지식인’이라는 말을 하기가 쑥스러워지는 분위기로 되어간다는 점에서 30여년 전 일본의 전철을 아주 빠른 속도로 밟고 있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 주류사회의 어느 누구도 거론하지 않는 지금 한국사회의 모습이 바로 ‘시라케 시대’라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희망을 주지 않아도 좋으니 부디 일본사회만은 닮아가지 않았으면 했는데, 한국사회는 그의 바람과 달리 어떤 경우는 일본보다 더 앞서서 신자유주의화를 향해 치닫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은 2월25일 오전 11시부터 2시간 30분동안 가진 서교수와의 인터뷰 전문.
손제민=오늘은 공교롭게도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날인데요. 한국 생활 2년을 마감하는 이 시점에서 소회가 있으시다면.
서경식= 일본사회에서 70년대에 유행했던 시라케(しらけ·빛이 바래다, 퇴색하다)라는 말이 자꾸 떠오릅니다. 한국사회가 일본의 재현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시라케는 원래 “색깔이 희게 되다”라는 뜻인데, “김 빠지다” “김 새다” 그런 뜻으로 의역됩니다. 정치에 대해 아주 시니컬하고 냉소적으로 된다는 뜻이지요. 60년대만 해도 일본에서는 큰 서사나 큰 꿈-민주나 인간해방이나, 평등사회-을 추구하고, 대다수 학생이나 시민들이 열기에 차서 지냈지요. 64년에 도쿄 올림픽 있었고, 일본의 고도성장기이기도 했어요. 사회 전체가 열기에 차있고, 뭔가 공유된 꿈이랄까 그런 게 막연하게나마 있었어요.
지금 와서 따져보면 그 속에는 모순된 두 가지가 다 있었지요. 진짜 인간해방으로 가려고 하는 방향과 또 사회적인 상승이랄까 조금 더 잘 먹고 잘 사는 생활에 대한 욕구 이런 게 다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런 사회변혁의 분위기가 무너지고, ‘시라케 세대’가 나왔어요. 60년대 세대는 자신들의 아랫 세대에게 “너희들은 시라케 세대다”라고 했어요. 아랫 세대는 윗 세대의 이중성, 자기기만성을 참을 수 없었지요.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말을 많이 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자기정당화를 잘 하는 그런 세대라는 거죠. 그런 걸 보고 시라케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 위로를 하며 그냥 조그마한 서사에 갇혀 있으면서 사생활적인 즐거움으로 살자는 분위기였죠. 이것은 훌륭하고 영웅적이며 아름다운 삶과는 다른 것이지요. 시라케 세대란 그런 것입니다.
여기도 그렇지 않습니까? 문민화가 돼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세 대통령을 거쳐 이명박 시대에 왔는데, 지금이 바로 한국판 시라케 시대가 왔다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70년대의 민주화, 노동해방 이런 꿈들, 민족통일이라는 큰 서사에 그래도 사회의 상당한 다수자들이 가치를 공유하고 우파·보수파와 맞서 싸워왔는데 지금은 그런 대립점이 좀 애매해졌고 모두가 ‘생활 보수파’가 됐다고 할까. 그런 시대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고, 또 그대로 인정하면 자신들의 지금 나날의 생활을 정당화할 수 없으니까 이중 기준적으로 살 수 밖에 없게 됐죠. 이중기준적으로 나날의 생활을 정당화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흔히 큰 얘기를 하지 않고, 때로는 자신을 비하하며 대화에서 슬쩍 빠집니다. 자신은 그런 고민을 못한다며 그냥 소시민적으로 편안함을 추구하며 살 수 밖에 없다고 하며 결국 그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며 살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들은 이미 어느 정도 기득권이기도 합니다. 그게 정말 기득권이라기보다 기득권이라는 환상이기도 한데, 그런 게 생기면서 다수 사람들이 현실 타협적으로 나아갑니다. 그런 점이 일본과의 공통점으로 보입니다.
이번 이명박 새 대통령에 대해서도 아무도, 아마도 보수파조차도 “빛나는 꿈이 실현됐다”고 기대하지 않고, 또 단 한 사람도 “그 사람이 인간적으로 성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요. 그래서 그런 시대가 왔다고 봐야 할 듯 합니다. 문제는 이런 시대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가인데요. 일본에서 좌파 진보가 많이 잘못된 대응을 해왔습니다. 90년대 이후만 해도 20년 가까이 일본사회가 우경화·반동화 일변도로 몰락해 왔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기서 교훈을 잘 배우고, 부디 같은 길을 안 가줬으면 했는데, 이게 너무 어려워 보입니다. 분위기가 너무 일본과 유사해지는 것 같아요.
손=민주화운동세력이 기득권화 됐다는 지적은 타당한 듯 합니다. 그것이 전부였을까요.
서=옛날에 같이 싸웠던 세대는 같은 세대끼리 “너희는 변절했다”는 얘기를 잘 합니다. 그리고 아랫 세대에게는 “우리는 이렇게 싸웠는데, 너희는 정치적인 의식이나 사회적인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우선 변절이라는 말은 아주 진지하게 봤을 때 진짜 변절이려면 원래 있던 소망, 이상, 주의, 이데올로기, 신념 이런 것들이 진짜였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다수는 막연했습니다. 당시 처한 현실보다는 조금 다른 생활을 꿈꾼 정도죠. 너무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만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었습니다. 한국에 와서도 386세대에 대한 비판을 많이 들었는데, 386세대 같은 경우도 원래가 그런 급진적인 사회변혁이라기보다 지금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쟁상태에 승자가 되고 사회적으로 상승하고 싶은 그런 의도,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고, 지금도 그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변절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어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위 미국식 자유라는 것이 기회의 자유를 말한다는 겁니다. 기회의 자유라는 말은 경쟁을 정당화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면 능력 있는 사람이 이기고, 능력 없는 사람은 지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집니다. 능력이 있음에도 기회가 없는 상황이 부당하다는 그런 문제제기였죠. 그런 평등주의와 결과의 평등이라고 할까, 사람이란 태어나면서 평등하다 이런 생각은 많이 다르죠. 능력이 있건 없건 피부 색이나 사회계층이나 민족이나 성별이나 그런 것에 관계 없이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살 권리가 있다는 이런 얘기와는 사뭇 다르지요. 그러나 중복되는 부분이 많으니까, 사람들이 그냥 같은 평등이라고 얘기했죠.
그런데 지금 보면 전자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친연성이 있어요. 군정 시절이나 과거 한국에서 자유가 없다, 평등이 없다고 했을 때 이런 부분들이 혼재된 채로 싸웠죠. 그 중에는 물론 사회적 약자도 있었지만,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지만 기회가 없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후자는 신자유주의 방향으로 가는 거지요. 그것을 변절로 보기보다는, 이 사회가 다음의 어려운 차원에 돌입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사람들의 변절을 비판하기 보다 이런 표면상 기회의 자유가 주어진 이 신자유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결과의 평등이랄까, 진짜 잘된 평등을 위해 누구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 지에 대한 어려운 사고를 고민해야 하는 때가 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 누구가 체제내화 되며 변절했다는 얘기를 윤리적으로 하더라도 별로 큰 소용이 없는 듯 합니다.
물론 윤리적인 수준의 논의도 당연히 필요합니다. “너는 옛날에 같이 싸웠을 때 우리와 약속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됐다”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지금은 투쟁·싸움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새로운 차원에 있어서 평등을 위한, 아니면 참된 자유를 위한 싸움이 얼마나 어떻게 필요하느냐는 문제는 이런 얘기이기도 합니다. 가령 일본에서 사회가 우경화되고 있을 때 평화헌법(헌법 9조)을 지키자든가, 국기·국가 강요를 막아야 한다든가 이런 걸 외치면서 싸웠죠. 저도 그렇게 했고요. “이렇게 되면 옛날의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 레토릭을 많이 썼어요.
그것이 반이 진실이긴 하지만, 전면적으로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과 똑같은 것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옛날하고 똑같은 게 아니다, 지금 일본은 민주사회다, 정당의 자유도 있고, 의회제도 있고, 신문도 매체도 있고 하는데, 그것을 너무 과장해서 옛날 군국주의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것이 항상 보수파, 중간파의 논리죠. 그것이 표면상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고요. 옛날과 똑같은 것이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파시즘이 여기서 벌써 시작돼 작동하는 새로운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면서 얘기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본에서는 일단 그런 경직화되고 단순화된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옛날 같지가 않다고 해서 안심해도 된다고 합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이명박이라 해도 군정시절로 돌아가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한나라당이라 해도, 이 나라가 15년 동안 민주화, 시민화 돼 왔고 옛날 같이 된다는 얘기는 너무 과장이다”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1년 전부터 대선 국면에서 계속 그런 얘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진보적인 사람들도 “진보파 중에 될 만한 후보자도 없고, 아마도 이명박이 당선될 거다” 그래요. 그러면서 “그래도 이명박이 된다 해도 옛날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옛날같이 되지는 않겠죠. 박정희 시대와 똑같은 시대가 오지는 않겠지요. 절대로 오지 않는다고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좀 의심스럽긴 합니다. 국가보안법이 아직 있으니까요. 온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논리가 아니겠지요.
옛날 같으면 개발독재적인 억압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신자유주의적 경쟁적인 파시즘에 가깝습니다. 이 파시즘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내국인과 외국인 그런 차별, 경계선을 갖고 있으며 조금이라도 그 중심에 다가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망, 강박의식에 기반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 중심에 다가가지 않으면 이 사회의 낙오자가 된다는 강박 말이지요. 일본말로는 마케구미라고 하는데요. 가치구미가 이긴 자이고, 마케구미가 진 자이죠. 그런 이분법으로 “나는 가치구미다, 너는 마케구미다” 규정하지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안하면 너는 마케구미가 된다” 사회적으로 그런 강박의식을 공유하면서, 사람들 스스로가 아까 얘기했던 시라케 세대처럼 별로 열의 없게 지금 상황을 승인하고 “아무래도 이명박으로 가지 않겠느냐” 하며 자주적으로 노예가 되는 그런 전체주의 말입니다. 신자유주의 전체주의라고나 할까 그런 상황이지요. 옛날과 똑같느냐 달라졌느냐 하면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그래도 사회가 좋아졌다, 앞으로 낙관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절대로 낙관할 수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좀 답답하네요.
손=일본에 있을 때에는 어땠습니까.
서=일본에 있으면서 더욱 답답했습니다. 제가 특별히 남들보다 여러 상황을 잘 보는 사람이라는 게 아닙니다. 아무래도 소수자니까 잘 보이지 않습니까. 더 잘 느껴지지요. 일본 사회에서 다수자들은 별로 그런 절박감이 없었습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여성들이 느끼고 있는 차별이나 이런 것을 우리 남자가 잘 못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일본에서 답답하게 지내면서 이 나라, 대한민국 사회를 쳐다 보았을 때는 뭐랄까 그래도 민주화 시민혁명을 스스로 이룬 사람들의 사회였습니다. 저와 비슷한 70년대 세대들이 아직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와서 2년을 지내다 보니까. (이 때 전화가 걸려옴. 마침 이날 경복궁 옆에 인문학 책방 ‘길담서원’을 연 박성준 교수의 안부 전화였음.)
박성준 선생님이십니다. 박선생님과 한명숙 여사가 일본에 계셨을 때가 90년대 중반이죠. 저는 그 전부터 교류가 있었습니다. 박선생님이 교도소에서 저의 형 둘(서승, 서준식)이와 감옥 친구였습니다. 서준식 형님이 88년에 출옥했으니 그 때 내가 여기 한국 와서 박선생님 알게 됐습니다. 박선생님이 출옥하신 뒤 90년대 들어와 일본에 유학을 오셨지요. 일본에서 해방신학 또는 민중신학을 연구하는 신부나 연구자들을 제가 소개해드리고 같이 연구하는 모임도 가졌지요.
다시 얘기로 돌아가서, 바로 그 때 제가 여러 일본 친구들, 소위 진보파들에게 경고 비슷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듣지 않더군요. 듣고는 있는데 다수자에게는 별로 절박함이 없는 거지요. 당장 낼모레 전쟁이나 터질 것 같으면 모르지만, 어제까지와 비슷한 일상생활이 계속 돼 간다고 느끼는 아주 강인한 관성이랄까 그런 게 있었어요. 심리적인 관성이죠. 그래서 조금씩조금씩 사회가 무너지고, 변화해 가고 있음에도 어느 시점에 무엇에 의거해서 저항해야 하는 지에 대한 그런 것이 전혀 갖추어질 수 없었지요. 쉽게 얘기하면 큰 회사의 사원으로 있으면 이 회사가 경영상태가 나빠져 파산 위기에 처하더라도 하급사원들은 일일이 이런 것을 걱정하지 않고, 맨날 일하고 월급 받고, 월급 조금 많아지면 좋아하고, 적어지면 실망하는 그런 식으로 살지요. 그러니까 주류라는 게 그런 겁니다. 그러나 비정규직은 그렇지 않죠. 불경기를 탈라치면 잘리게 되지요. 다수자와 소수자가 그런 차이가 있는 듯 합니다.
저는 90년대에 일본에서 한국을 보았을 때, 그래도 한국은 아주 활발한 시민운동도 있고 사회적인 활기가 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위안부 문제 등으로 한국 여성 운동계가 하던 역할은 아주 컸지요. 그걸 보면서 그래도 한국에는 희망이 있을 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사회 또는 일본인들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게 제 결론이었습니다. 자신들은 그대로 몰락해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이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다시 재기,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으면 그것이 이웃인 한국인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억압해온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그 사람들이 인간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그것도 못하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년 전 여기 올 때만 해도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노무현 정권의 전반기가 막 지났을 때였지요. 노무현이 이회창과의 경쟁에서 위태롭다 했을 때, 김대중 때 그나마 있었던 민주적 변혁들이 뒤집어질 수 있겠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래도 노무현이 당선도 되고, 나중에 탄핵 국면도 극복을 했지요. 일본에 있는 우리들에게 제일 크게 다가온 것은 노무현이 아무리 문제투성이라 하더라도, 일본 정부에 역사 인식 문제에 대해 할 얘기를 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정부가 이 때까지는 없었지요. 군정 때는 표면상 민족주의지만 사실은 일본과 동맹관계, 친일이었지요. 박정희도 전두환도, 노태우도 물론 그랬고요. 김영삼 같은 경우도 문민화 됐다 해도 구세대니까 아주 철저히 하지 못하고 타협적이었어요.
김대중 정권 들어서며 역사 문제에 대해 조금씩 할 만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죠. 노무현의 3·1절 대통령 연설 같은 경우는 재일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줬어요. 이제 이런 얘기를 솔직히 하는 대통령이 나왔다는. 그리고 그때는 국보법 폐지가 거론돼 있던 때이기도 했지요. 여성부가 생겼고 감옥 생활을 했던 여성이 사회적으로 지도적 위치를 잡을 수 있는 사회가 됐어요. 일본에서는 상상도 못합니다. 일본에도 민주당 당수, 사민당 당수가 여성이기는 하지만 너무 힘이 없습니다. 여당의 여성 정치인들은 한편으론 탤런트나 이런 사람들이고, 아니면 남성 정치인보다 훨씬 공격적인 우파들입니다. 여성일수록 자신을 더 부각시키기 위해 그렇게 되죠.
요즘은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와는 같은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일류대학을 나와 정치학이나 외교학으로 미국 유학을 갔던 여성 관료 같은 경우는 있긴 합니다. 그러나 한명숙씨처럼 민주화 운동을 했고, 또 여성계 대표로 일을 열심히 해왔고, 감옥생활까지 한 사람이 장관이 되고, 나중에 국무총리가 된 사회 그것은 꿈이 있지 않나요. 적어도 일본사회와 비교하면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꿈들이 아주 급속히, 제가 여기 있는 동안 눈 앞에서 사라져버린 느낌이 듭니다. 이 사회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제가 거리가 떨어진 일본에서 보았을 때 얼마나 이 사회의 리얼리티에 대해 피상적인 인식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봅니다. 뭐, 잘 배웠다고 할 수 있죠. 그런 어긋남이라고 할까요, 상상했던 것과는 좀 많이 다르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환상이 깨졌다고 볼 수 있는 듯 합니다.
손=실제로 한국사회에서 지난 2년 사이 일어난 변화도 많지 않았나요.
서=지금 이 나라에서 이라크 파병에 대해 주류 사회에서는 의논조차 하지 않지요. 물론 이 문제에 대해 계속 반대해온 운동 단체가 있긴 합니다만. 그것도 일본과 비슷해요. 이런 이중성, 자기기만성, 너무나 뻔뻔스러운 현실주의라고 할까요. 3년 전인가 부시가 한국에 왔죠. 그 때가 고이즈미 정권 때인데. 일본에 먼저 왔다가 한국에 왔죠. 고이즈미 정권은 부시의 충실한 푸들이었습니다. 블레어 정권과 함께 부시 정권의 맹우였죠. 부시가 왔을 때 대환영했죠. 부시도 그걸 좋아했고. 그 때가 이라크 침공 직후였습니다. 일본에도 이라크 침공, 자위대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회적으로는 빅뉴스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이즈미와 부시의 개인적인 친분관계 그런 얘기 밖에 안했죠.
일본에서 이라크 전쟁 파병에 대한 반대시위나 그런 운동이 별로 잘 동원되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거기 참가한 사람들에 대한 경찰의 통제도 너무 심했어요. 일본의 시민권 차원에 봤을 때에도 지나친 과잉경비였는데, 이걸 문제 삼은 매체도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부시가 한국에 왔을 때에는 대규모 시민들의 시위에 둘러싸이고 그랬습니다. 일본에서 그런 장면을 보면서도 “아, 그래도 한국의 시민권은 살아있구나. 한국에서는 양심이 그래도 살아 있다” 이렇게 느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불과 한 1~2년 후 여기 와서 뭐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도 않았죠. 오히려 이라크 침공의 명분이 없었다는 점이 더욱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아무도 얘기를 안하고 있어요. 안하는 것보다 ‘정의’ ‘진실’이라는 가치가 공허화, 허망이 된 그런 상황이라 할까요.
부시의 이라크 침공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개인적으로 물어보면 적극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정의롭다는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요. 그러면 한국이 군대를 파병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느냐고 물으면 "그것이 정의가 아닌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대답하죠. 그러니까 정의라는 수준으로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정의롭지 않지만, 그래도 어떤 목표를 위해서 또는 미국 일국 지배 하의 세계에 있어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식의 다른 차원의 대답을 하죠. 정의라는 척도가 이런 식으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보수파가 얘기할 때는 “어른이 됐다” “사회가 성숙했다” 이런 얘기도 하는데, 그런 상황이야말로 바로 시라케죠. 정의를 정의로서 얘기할 수 없는, 정의를 정의로 얘기하면 웃음거리가 되는 사회입니다.
바로 일본이 그랬어요. 정의를 정의로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사회, 정의를 들어 싸우는 사회가 한국이었기 때문에 한국에 희망을 걸었지요. 일본은 아무리 정의에 대해 얘기하더라도, 다수자들은 저에게 “서 선생님은 정의롭습니다” “선생님은 옳습니다”고 해요. 그러면서 “그런데 그것과는 달리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어요” 이런 식으로 항상 현실을 정당화 시키면서 결국 그 사람 자신도 주류가 되고, 주변화된 사람들을 억압하는 처지로 가요. 그건 자기정당화입니다. 그러니까 정의에 대해 호소하는 사람들은 다 주변화된 힘이 없는 사람들 밖에 안남게 되죠. 애초 질문항목과는 조금 어긋나는 데 계속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요? (어차피 다 통하는 얘기이므로 하고 싶은 말을 해주십시오)
다카하시 데쓰야라는 도쿄대 철학과 교수가 있습니다. 저와 대담집도 내고, 지난 10여년 간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막으려고 같이 노력해 왔습니다. 일본사회가 다카하시에게 붙인 별명이 ‘정의파’입니다. 이거 칭찬이 아니예요. 오히려 아이러니라 할까, 웃음거리로 만드는 거죠. “아, 너는 정의파다” 하는 식으로 고립화시킵니다. “너는 너무 정의니까 우리는 못따라간다” “사람이 이렇게 너무 정의로운 얘기만 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정의니,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는 식으로 항상 외면하려고 합니다.
손=지식인들도 그런가요.
서=대중들 뿐만 아니라 학계, 지식인도 그래요.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습니까? 있을 수가 없지요. 물론 아주 광신적인 기독교인들, 이슬람 사회가 악마라고 하는 사람들을 빼고는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한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당화 할 수 없는 그런 힘에 이렇게 이끌려 갈 수 밖에 없어요. 그 쪽으로 따라가면 이익이 되니까 따라가는 사람이 돼버리지요. 그런 시대입니다.
정의에 대해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이 사람들에게 불편하죠. 어떤 자리에 정의로운 사람이 끼어있으면 불편하니까 정의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을 고립화시키려고 해요. 고립화시키려 할 때에도 그들을 논파할 수는 없어요. 상대방이 정의이고, 자신은 정의가 아니니까. 그래서 시라케 수사로 “아, 저는 약간 힘이 없어요” “우리는 힘이 없어요” “너무 정의로운 얘기는 제가 못따라가요” “나는 맨날 먹고살기 힘들어서, 바빠서 그런 일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라는 식으로 회피하는 겁니다.
지식인들조차 그렇습니다. 먹고살기 바쁘다고 하는데, 그래도 지식인은 대학교에서 책을 보고, 글을 쓰면서도 월급을 받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과 똑같다고 할 수 없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월급 받으면서 책 보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책임 그런 게 있지 않느냐는 얘기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주 조그마한 반경 100밖에 못본다고 하면, 그래도 우리는 한 반경 500 정도는 볼 수 있고 또 그렇게 봐야 하는 존재라고 했을 때 우리에게는 이론상 이런 게 보인다,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는 게 지식인의 역할이 아닌가요.
‘정의’라는 말처럼 ‘지식인’이라는 말도 일본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됐습니다. “선생님, 저는 지식인이 아닙니다. 선생님처럼 훌륭한 분들이 지식인이지요. 저는 그냥 월급쟁이예요”라고 자신을 비하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권력의 중심에 가있어요. 우리는 권력의 중심에 없으니까 이런 얘기 밖에 할 수 밖에 없지요. 아주 흥미로운 일인데, 잘 관찰해보세요. 앞으로 몇 년 내에 한국에서 그런 어휘의 어감의 변화가 비슷하게 일어날 거예요. 정의라는 말을 하기가 좀 쑥스럽고, 정의라고 하면 자리가 좀 어색해지고. 그리고 대학에서도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좀 줄어들고, 그래도 지식인이다 하는 사람은 좀 웃음거리가 되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손=한국에서도 스스로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서=그래요? 언제부터 그런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상당히 흥미로운데요.
손=1997년 외환위기 이후인 듯 합니다.
서=그러면 자연스럽게 전문가-지식인 얘기로 넘어갑시다. 제가 영향과 격려를 많이 받은 책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 The Reith Lectures’입니다. 여기서는 어떻게 번역됐는지 모르겠는데요. 사이드가 영국 BBC 방송에 출연해 한 연속강연의 기록들을 묶은 책입니다.(한국에서는 ‘권력과 지성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미국 콜롬비아대학 교수로 있는 사이드가 영국 BBC의 지적인 프로그램에서 한 강연은 아주 지적인 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캠브리지, 옥스퍼드 등 지식인의 전통이 있는 사회에 아주 낯선 아랍인 출신의 사이드가 출연해 한 얘기입니다. 지식인의 역할은, 적어도 사이드 자신에게는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해 잘못된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프로페셔널이지만 프로페셔널리즘에 빠지지 않겠다는 얘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저 서경식은 소위 전문교육을 못 받고, 학위도 없고 대학원도 안다닌 사람인데, 일본에서 글 쓰고 대학 교수가 됐어요. 제 주변에는 박사 투성이고 전문가 투성이에요. 전문가 투성이인 일본의 대학이라는 직장에서 그러면, 서경식이라는 사람이 맡아야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고민했을 때 이런 얘기가 도움이 됐습니다. 그리고 사이드가 했던 또 한 가지 중요한 얘기는 ‘지배층의 서사(master-narrative)’에 대항한 ‘억압받은 자의 서사(counter-narrative)’를 대치시키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대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의 신조랄까 기준이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도 전문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된 것은 너무 상징적이고 위태로운 얘기라고 봅니다. 한국은 군정시대까지만 해도 지식인의 시대였습니다. 그래도 지식인이 살아있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우회해서 얘기하자면, 제가 쁘리모 레비라는 이탈리아인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작년이 그가 자살한 지 20주년이어서 이탈리아까지 갔다 왔습니다. 20주년 기념논문집이 피렌체대학에서 출간되고 저도 거기 하나 기고했습니다. 그때 논문집을 편집한 교수가 화학자였습니다. 피렌체 대학의 루이지 데이 교수라는 분이었습니다. 쁘리모 레비도 화학자였지요. 그러니까 화학하는 사람이 레지스탕스 운동도 했고, 아우슈비츠도 겪었고, 그 생활에 기반해 글도 쓰고 한 거죠. 지금 시대에 그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기념 논문집을 또 다른 화학자가 편집한 것이고요. 그걸 보면서 너무 저는 참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루이지 데이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거 뭐 신기한 일이냐, 그냥 보통 일인데…. 쁘리모 레비도 화학자였고, 학문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요” 그러더군요.
이것도 너무 미화하면 안되겠지만, 이탈리아는 르네상스기부터 볼로냐 대학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대학이죠. 여기서 후마니즘, 즉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종합적인 지(知)에 대해 가르치고, 그리고 종합적인 지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학자다, 지식인이다라고 했죠.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사람이 그렇죠. 또한 중요한 특성은 이탈리아가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라 지방분권적인 나라였습니다.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로마도 있었고, 서로가 싸우고 그런 상황에서 다빈치 같은 지식인은 토스카나 출신인데, 밀라노 대공에게 가서 일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도 일했고, 또 피렌체로 돌아왔죠.
영주나 왕들은 이들을 고용할 때 종합적인 지식을 보고 판단했습니다. 그것이 다 계약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운명적으로 하나의 국가, 하나의 정권, 한 사람의 왕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식인도 독립성이 있고, 그래서 상대방과 자신을 계약하는 존재이죠. 지오다노 브루노가 화형 당했고,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다 공공의 적이 되는 억압적인 시대였는데도, 지식인으로서의 독립성, 권력과의 거리, 복수의 교권, 국가의 권력과 거리를 가지며 계약하며 사는 지식인들의 상이 있었던 거죠. 그것이 어쩌면 독립된 지, 지식의 사회적 배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전통들이 오늘까지 살아남아 있고, 그래서 지금도, 물론 미화만 할 수는 없지만 화학자가 쁘리모 레비에 대해 관심 가지는 것이 왜 안되냐 할 정도인 거죠. 그것은 국가나 기업 때문에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능력을 가지고 자유롭게 상대방과 계약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종합적인 넓은 시야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넓은 시야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시야가 좁아지면 뭔가에 갇히고 구속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스페셜리스트’는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 대표적인 경우가 나치 전범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입니다. 스페셜리스트라는 영화가 한국에서 소개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전문가라고 소개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 말은 "저는 인간으로서의 자율성을 포기한 사람입니다"라는 말과 비슷한 어감을 갖고 있습니다. 제 주변, 친구들은 영화 스페셜리스트를 보고 나서 자신은 스페셜리스트라는 말을 안이하게 할 수는 없다고들 합니다.
영화 스페셜리스트에 대해 좀더 얘기하자면, 에이알 시반이라는 유태인 감독이 만든 영화입니다. 아이히만은 나치의 고급 관료인데 소위 ‘최종해결’ 즉, 유태인 대학살을 아주 효율적으로 실행한 능력있는 관리였습니다. 이 사람이 1966년에 예루살렘에서 전범재판을 받았을 때 촬영해둔 기록필름을 편집해 영화로 만든 것이 스페셜리스트입니다. 거기서 스페셜리스트라는 뜻이 인간으로서의 판단을 스스로 중단하고 그런 판단을 안하는 상태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관료, 바람직한 독일 국민,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걸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스페셜리스트입니다.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기계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스페셜리스트는 그런 식의 능력이 뛰어납니다. 너는 비행기 100대 만들라고 하면 100대 만들고, 유태인 1만명 죽이라고 하면 1만명을 죽일 수 있는, 요구받은 그대로 그 일을 처리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아유슈비츠 이후에도 “아, 저는 스페셜리스트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교양,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책에도 썼는데요. 일본의 와타나베 카즈오(渡邊和郞)라는 프랑스 사상 연구자가 있습니다. 일본의 천황제 군국주의 시대에 어렵게 정신의 자유를 지켜낸 사람인데요. 인간이란 스스로 야만화시키고 기계화시킬 수 있는 존재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서 지식인이라는 말을 안쓰게 되고, 오히려 자신을 “전문가입니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이 시대가 바로 스페셜리스트의 시대라는 뜻입니다. 국가나 기업이나, 대학교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권력에서 독립해 있으면서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판단을 포기하고 전문가로서의 특기, 기능을 팔아 먹고 사는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그게 가장 위태로운 세상입니다. 나치 시대나 군국주의 일본시대나 별로 다를 게 없는 시대입니다. 나치 시대나 군국주의 일본 시대처럼 폭력으로, 곤봉으로 때리고 학문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빼앗은 게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 시대의 교양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됩니다. 눈에 쉽게 보이는 폭력으로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인 통제 논리라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 지식인 사회에까지 침투하고, 지식인들이 스스로를 기계화시키고 스페셜리스트화시키는 그런 전체주의적 사회가 일본에서는 벌써 15~20년 전부터 진행됐습니다. 일본에 원래 만연해 있던 다수자, 또는 주류의 탈정치적인 사고 방식에다, 소위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이 더해지자 더욱 그렇게 됐죠.
아까 얘기했듯이, 한국에서도 “아, 저는 지식인이나 그런 것 아닙니다, 그냥 월급쟁이지요” 하는 식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많아질 거에요. 그것이 말하자면 사람들의 자기방어의 기제라고 할 수 있죠. 이 사람들이야 말로 아주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학위 얻고 교수가 되는 것만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그래도 즐거움이 있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다는 점을 보여줘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 얘기를 하기야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죠. 왜 저 같은 사람이 그런 얘기를 계속 하느냐 하면, 원래 그런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원래 재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일조선인은 원래부터 재야이지요. 그러니까 원래 있던 어떤 기득권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잃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다시 말해 주변화된 사람, 소수자였죠. 저는 학위도 없고, 영어로 강의도 못하지만, 그래도 대학교 교수가 된 것이 재일조선인 입장에서 글도 쓰고, 발언도 했고 해온 것이 아주 소수 부분이지만, 아, 이런 것도 재미있다 이런 것도 대학에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사람들, 그나마 조금 균형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런 사례가 아주 예외적이지요. 드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성공의 서사가 아니라, 재일조선인처럼 어차피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유롭게 사유하고, 발언도 하고, 거기서 공부만 하면 지식인이 될 수 있다는 거지요. 전문가가 될 수 없고 지식인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죠.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것은 사회주류가 되고 정규직이 되고, 사회적으로 상승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환상을 공유하고 있는데 사회 성원의 대다수가 그렇게 될 수 없어요. 그렇게 될 수 있으면 경쟁이 아니고, 자본주의가 아니지요.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한국에서 삼성의 사원이 되면 사회적인 성공자가 되고, 그렇게 되면 평생 안정이 된다고 생각하지요. 사실 삼성에 들어간다고 해서 평생 안정되는 것도 아니지요. 그리고 삼성 내부에 들어가도 아주 치열한 경쟁을 겪지 않습니까. 일도 많이 해야 하고. 게다가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삼성의 사원이 될 수도 없고요. 그러니 이렇게 경쟁이라는 논리가 힘이 있죠.
그렇다면 오히려 숫적으로는 배척당하고 주변화되고 낙오하는 사람들이 다수자입니다. 이 다수자는 권력 관계로 볼 때는 소수자이지만, 인구 숫자로 볼 때는 다수자입니다. 이런 다수자는 다수자끼리 힘을 모으는 논리, 논리가 아니더라도 그런 힘을 모아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느낌조차도 없어요. 그런 느낌조차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주류로 들어가 편입되고 싶고 그런 방향으로만 살 수 밖에 없죠. 정신적인 위계제도의 노예가 되는 거죠. 낙오한 사람들, 경계선상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손 잡고 힘을 모을 줄 몰라요.
한국 와서 가장 놀랐던 일이 하나 있는데요. 이 나라에서는 상식이라니까, 나는 상식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걸로 깨닫는데요. 연세대에 있는 어떤 교수가 알려줬습니다. 학생들 성적평가를 상대평가로 한다는군요. 그런데 이 사람이 가르치는 분야가 인문학입니다. 문학·역사·사상을 포괄하는. 학생이 20명 있다고 합시다. 그 중에 30% 정도가 A 학점이다. 어떻게 이렇게 점수를 붙일 수 있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주 비인간적이고 비인문적인 처사입니다. 인문학이란 게 모두가 A일 수도 있고, 모두가 낙방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30%를 넘으면 컴퓨터에 입력할 수도 없도록 소프트웨어가 돼 있다고 합니다. 손기자도 고개를 끄덕이시네요. 저는 그걸 듣고 경악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 게 여기서는 상식이에요? 이제는 이명박이 대통령 됐으니 국가 전체가 그런 방향으로 가겠네요?
다른 부분에서는 시차를 두고 한국이 일본의 길을 따라가고 있지만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한국은 일본보다 앞서 있어요. 부정적 의미에서의 ‘선진국’입니다. 지금 일본도 그런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데, 그래도 저항이 남아 있으니까 거기까지만이에요. 그래도 그런 걸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그런데 물론 인문학 같은 경우 상대평가로 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있지요. 저에게 그 얘길 해준 사람은, 31%에게 점수 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행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컴퓨터에 지배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컴퓨터에 소프트웨어를 부여하는 사람의 권력에 지배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과 비슷한 사례로, 일본에는 원호가 있습니다. 천황의 통치기간마다 소화, 대정, 평성 등 원호가 있어요. 1960년대만 해도 원호를 폐지하자는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지금처럼 그렇게 당연하게 쓰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일본에 지난 전쟁의 책임이 있다” “지금이 군주제 시대가 아니다” “민주제 국가면 원호를 안쓰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의견들이 많았죠. 국민주권, 인간평등의 관점에서 헌법위반이 아니냐는 주장이 그래도 많았어요. 정부가 원호 사용을 강요하려 했는데 결국 못했어요. 그런데 80년대 후반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일본 다수자들 중에서도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런데 지금은 거의 대다수가 아무 의식 없이 平成 몇 년 이렇게 써요. 그런 말은 없지만 저 같은 경우는 ‘양심적인 원호 거부자’라고 합니다. 가능한 한 원호를 안쓰고 서기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학교나 관청에 가서 공식 서류를 만들 때는 원호를 쓰게 돼 있어요. 제가 서기로 쓰면 컴퓨터 입력을 못합니다. 학교 같은 경우 사무 직원들이 그것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합니다. “서선생 때문에 우리가 쓸데없는 것도 다 고치고 입력해야 하나” 이런 얘기를 합니다. 누군가가 폭력적으로 곤봉 가지고 위협해서 원호를 쓰라고 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가 어쩔 수 없이 원호를 쓰게 됩니다. 불과 몇 년 동안 그렇게 자연스럽게 됐어요. 신용카드 같은 것도 원호로 합니다. 외국에 나가서 연도를 쓸 때는 머릿속으로 고쳐야 하고 아주 불편합니다.
여기서는 주민등록번호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죠. 그러니까 컴퓨터 같은 아주 현대적인 기술과 천황제라는 전근대적인 군주제 지배가 결부돼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군주제적인 사고 방식으로 첨단 기술을 사용하면 아주 효율적으로 인민을 지배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상대평가에 대해 그걸 하느냐 안하느냐 또는 A학점을 25%냐, 30%냐, 50%냐 논쟁을 하더라도 그런 걸 민주적으로, 공개적으로 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지 않습니까. 학생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도 없고요. 이렇게 컴퓨터로 해버리고 나면 아무도 저항할 수 없게 됩니다. 주민등록번호가 비합리적이라고 해서 저항하면, 이 번호 없이는 휴대전화도 못사고, 티켓 예매도 못하니까 너무 불편하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적응하는 거고요. 오히려 주민번호를 갖고 있는 것을 정당한 시민 취급을 받는 자격처럼 착각합니다. 그것처럼 컴퓨터 첨단기술을 사용해서 신자유주의 경쟁 전체주의가 진행됐습니다.
이 연세대 교수가 하는 얘기 중에 가장 무섭기도 하고 흥미로운 것 중의 하나가, 그렇게 되면 학생들 서로의 관계가 항상적인 견제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20~30%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지가 학생들의 의식을 지배합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습니다. 무슨무슨 보고서를 언제까지 내라고 했는데, A라는 학생이 마감을 지켜서 내고, B 학생은 아프다는 사정이 있어서 못내고 그 다음날 냈다고 합시다. 그런데 둘 다 A 학점을 받았다고 한다면 A라는 학생이 항의한다고 합니다. 불공평하다고요. “나는 마감 지켰고 그 놈은 안지켰는데 어떻게 같은 점수를 주느냐”고요. 학생들이 항상 그런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인문학을 공부합니까? 인간의 자유 그런 가치, 학문 자체가 공허화돼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마감을 지켜야 하지요. 그러나 마감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으로 학생 스스로가 지키는 거지요. 그리고 남이 못 지켰다고 해서 이 사람을 좀 낙제시키라고 하는 그런 것은 아니지요.
손=사모님을 부를 때 ‘파트너’라고 부르시는데요.(서교수는 기자를 맞이하며 "파트너는 연세어학당에 한국어 수업을 들으러 갔다"고 말했다)
서=고유한 한국어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 사실는 그런 것이 있기는 있는지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있다고 합시다. 그것도 잘 배워야 합니다. 저처럼 한국어가 모어가 아닌 처지에서는 참된 진정한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그 언어의 내부에는 위계제가 너무 강하게 반영돼 있어요. 다들 언어의 권력관계에 갇혀 있어요. 선·후배 관계라든가, 교사·제자 관계라든가, 아버지·자식 관계라든가 경칭이나 말하는 게 너무 면밀하고 복잡하게 정해져 있죠. 옛날에는 그렇게까지 복잡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가면 갈수록 더욱 복잡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심지어 식당에 들어가면 “다음에는 후식이 나오세요”라고 합니다. 후식은 경칭의 대상이 아닌데도 경칭을 붙입니다. 이런 게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일본도 그래요.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가 맥도널드로 대표되는 외식산업이 들어오고, 그리고 백화점, 영업사원 등이 말하는 것이 매뉴얼화 되어서 상대방 고객들에게 하는 말을 외워요. 암기하고 기계적으로 얘기하지요. 여기에도 ‘기계화’가 들어옵니다. 기계화 된 말로 얘기하면 싸워야 할 때 못싸워요. 싸움이 없다는 것이 진짜 사랑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서설이 길어졌는데, ‘아내’라는 말은 일본에서도 쓰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런 자각이 별로 없었는데요. 80년대 초반 나이가 30대 쯤 되면서부터, 여성해방운동 그런 게 많아지고, 아는 여성 친구들에게 많은 비판도 받고 스스로도 많이 생각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남편을 ‘주인’이라고 부릅니다. “주인이 아직 퇴근안했어요?”라고. 남편이 ‘주인’이라면 당신은 ‘노예’인가요? 평등한 관계로 살고 싶으면 호칭도 평등해야 합니다. 그런데 적당한 말이 없습니다. 다른 말을 쓰면 말 잘 못하는 사람, 상식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게 됩니다.
일본 같은 경우 배우자를 부를 때 ‘같이 다니는 사람’ ‘같이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쯔레아이(つれあい)’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진보적인 소설가나 평론가 같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처음 썼죠. 우리 마음에도 적절하다고 여겨져 사람들이 쓰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보급됐어요. 사회 대다수가 쓰지는 않지만, 저 같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써도 상대방이 뜻을 이해해주고, 별로 불편함을 못느끼는 정도로 쓰입니다. 이 사람 쯔레야이라는 말을 쓰면서 아내를 얘기하고 있구나 별로 일일이 설명안해도 이해해주는 정도로 됐습니다. 한국에서도 우리는 원래 그런 말 안쓴다는 식으로 이상하게 대하면 절대로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좀 어려운 얘기이기도 한데, 한국사회에는 가족의 비유가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끼리 만나면 학벌 따지고, 상대방이 연배가 위이면 “형님”이라고 하죠. 그렇게 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관계가 더 진전되는 것처럼 느낍니다. 가령 제가 손기자께 “제민이”라 하고 손기자가 제게 “형님” 이렇게 부르면 그런 관계가 성립되죠. 누군가가 이명박에게 “형님”이라고 불러서 이명박도 무척 좋아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사회 관계가 모두 가족에 비유가 돼 있죠. 그리고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남편이나 애인을 “오빠”라고 부르죠. 옛날에는 그런 게 없었는데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건 한국이 옛부터 가족적인 가치를 소중히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가족의 비유가 이중성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을 바로 봐야 합니다. 김상봉 교수와 만나 대담을 다 끝난 뒤에도 김상봉 교수가 그러더군요. "이제 서로 속을 많이 알게 됐고 서교수님이 저보다 연배가 위이니 ‘형님’이라 부르고 싶다"고요. 그 제안에 저는 단호히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타자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냉정하다, 또는 서운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사회는 타자와 타자가 만나는 것이죠. 부모나 부부도 타자입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저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쌍하다고 말합디다. 너무나 디아스포라적으로 어렵게 섭섭하게 외로운 세상을 살아온 신세였기 때문에 가족의 따뜻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대합니다. 그런데 한 번 보시지요. 가족이란 게 얼마나 억압적인지.
제가 혈압이 높아 강남에 사흘간 입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제 병실에 6명이 입원해 있었는데. 증상이 가볍건, 중하건 모두가 가족들이 와서 병간호를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전부 다 며느리나 부인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그 분들이 항상 같이 있고, 집에서 음식 해가져와서 간병하더군요. 그것을 보며 아름다운 가족애라기보다는 이러면 여성들이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위독해서 아파 죽을 상황이라면 가족이 와 있어야 하지만, 일본 같은 경우는 가족이라도 허가된 시간만 면회하게 돼 있습니다. 간호사 대신 음식 먹이고 하면 안되게 돼 있습니다. 아, 그러면 일본이라는 나라가 너무나 차가운 세상이다, 가족이라는 가치가 완전히 무너진 산 지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의 시간, 독립성이 미흡하나마 보장될 수 있는 겁니다.
자신의 일을 다 하고 난 뒤에 면회시간에 면회하고 마음의 교류를 하는 것이야 말로 진짜 사랑이 아닐까요. 마음은 그런 마음이 없는데, “저기 손씨 집안 며느리가 좋은 며느리네”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그건 권력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고 나는 조금 더 중요한 약속이 있거나 학교도 다니고, 시험도 봐야 하고 논문도 써야 해서 병실에 자주 못 나오면 나쁜 며느리, 부인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권력에 대해 문제제기 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사회가 한국사회입니다. 사회 제도상 그렇게 돼 있는 것 뿐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방식, 심지어 언어의 위계질서도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대해 문제제기 하려면 우리부터, 김상봉 교수부터 저를 형님이라 부르는 것은 그만 두고, 낯선 표현이라도 새로운 표현으로 우리가 서로, 타자가 타자끼리 구성하는 동등한 공간으로서의 사회를 구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피를 나눈 가족, 말로 표현안해도 눈빛만 보고 이해하는 가족이라는 것도 망상입니다. 이런 망상이나 공상이 권력화되는 그런 사회가 되면 피를 나누지 않고,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사회 성원으로 인정 받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 외국인 노동자도 있고, 외국에서 시집 온 사람들도 있고, 저 같은 디아스포라도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은 외면상 타자죠. 내부의 타자도 있어요. 아버지에게 억압받는 자식, 남편에게 억압받는 부인… 너는 내 마음을 얘기 안해도 다 이해하는 며느리여야 한다고 하면 그건 아닌데 하면서도 아무런 얘기조차 못하는 상황입니다. 가족이라고 하면 타자 중에서도 제일 가까운, 제일 잘 아는 타자니까 물론 정(情)도 생기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타자는 어디까지나 타자입니다.
아이들도 태어난 순간 타자이긴 하지만 적어도 사춘기 지나면서 그야말로 타자가 되어가는, 존중해야 하는 타자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이 좀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 때까지 있어온 사고방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너무 서양적인 개인주의나, 포스트모던적인 보편주의를 주장한다는 오해를 사기 쉬운데 그건 아닙니다. 이 사회가 가족주의적인 사고방식, 문화 때문에 지금 있는 억압 상황을 바로 보지 못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입니다.
손=한일 양쪽 사회에서 다 소수자로서 정체성을 갖고 계신데. 일본에서는 국적 소수자, 한국에서는 언어 소수자. 양쪽 사회의 소수자를 대하는 차이나 공통점이 있다면.
서=물론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저 같은 재일조선인은 숫적으로 적을뿐만 아니라 일본은 과거 식민지 역사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회이기 때문에 과거 1세기의 역사문제까지 모두 부담으로 짊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소수자로서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80년대 후반쯤부터 다민족, 다문화라고 해서 다수자가 소수자에게 배려 있는 그런 사회로 가자는 구호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가 나카소네 보수 정권 때인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오고,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외국인들과 같이 사는 열린 사회라는 구호가 많이 유행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공허한 구호로만 들렸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역사적인 인식이 없이 나온 것이니까요.
지금 이 순간 아무 배경 없이 일본 사회에 들어온 소수자와 원래 있던 우리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역사, 식민지 지배의 청산, 사상·문화적인 청산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종전인 1945년 시점 이후에도 식민지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고, 본국인 우리나라가 분단되고 그 때문에 자신들의 중심지인 조국을 자유롭게 왕래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죠. 지금도 일본은 이북과 국교가 없으니까 왕래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식민지 지배와 분단이라는 역사의 상처가 지금도 쑤셔대고 있는 거죠. 그게 일본에 있을 때 우리의 상황입니다. 저는 일본의 다수자인 일본인들이 그런 역사 인식이 없이 그냥 소수자에 대한 연민이나 배려 같은 태도로 나왔을 때 오히려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따라서 그런 다문화주의는 역사를 부인하는 효과가 진짜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는 이런 역사적 측면에 대한 인식은 물론 공유할 수 있죠. 그런 측면에서는 편안해요. 이것도 과거 식민지 지배의 소산이긴 하지만 일본에 있으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문화나 정체성에 대한 별로 근거 없는 열등감 같은 것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가령 밥을 먹는 방식 얘기를 해보죠. 밥을 쌈에 싸먹는 것이라든가, 국에 밥을 넣고 먹는 것이 일본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 버릇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그냥 문화가 다를 뿐이죠. 여기에는 우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도 그런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긴장 상태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여기 오면 편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여기가 그렇게 천국 같은 느낌인가 하면 아닙니다.
1960년대에 젊었을 때 두 번 한국을 짧게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우리 재일조선인은 본국 여러분들이 볼 때는 일본에 대한 표상, 일본에 대한 온갖 감정들이 다 투영됐어요. 우리를 볼 때 일본에 대한 굴절된 분노도 나오고 또 동경도 나오는 거죠. 나라가 이렇게 분단돼 여러 분들이 고생하고 있을 때 일본이라는 안전지대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라는 시선 같은 것도 많이 느꼈어요. 그것도 일리는 있었어요.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감정을 갖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이해가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것보다 일본에 대해, 특히 젊은 사람들의 감정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애니매이션이나 소설, 대중음악 등을 중심으로 일본에 대한 동경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 동경을 우리에게 투사하고 우리에게 호의 갖고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사실 재일조선인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일본에 대한 관심을 갖고 다가오는 사람들이지요. 그런 것이 저 같은 사람에게는 어색하고 때때로는 별로 기분이 안좋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60년대 얘기와 다른 식으로 이해할 측면도 있습니다. 이 젊은 사람들에게 과거 식민지 시기 역사는 좀 알려야 합니다. 이 사람들도 공부를 좀 해야 하는데, 제 상상과 달리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한국의 젊은 사람들이 역사교육을 지나치게 받고 있어서 ‘역사중독’에 걸린 것 아니냐 그런 얘기까지 나오는데, 실제로 제가 와보니까 안그래요. 별로 몰라요. 독도니 뭐니 하는 것도 몰라요. 모르면서 다들 분노하고 그러는 것 같아요. 그것이 좀 한심스럽고 걱정이 되기도 해요. 한편에 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일본에 대한 시선에, 그래도 일방적으로 부정만 할 수 없는 측면도 있는 듯 합니다. 젊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며 알게 됐는데, 이것이 일본 사회에 대한 오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사회가 이 사람들이 동경할 정도로 개방된 자유로운 사회가 아닌데 말입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는 일본 사회에 있는 개인의 자유, 사생활에 대한 존중에 대해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서 가족주의나, 70년대까지 있어온 큰 서사, 거기에다 최근에는 경쟁 논리까지 부과됐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는 좀 부담스러운 사회 분위기가 된 측면이 있죠. 너무 짙고 열기가 가득 차 있고요. 진짜로 열기가 가득 차 있지는 않지만, 가득 차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라고 할까요. 월드컵 축구경기가 있으면 같이 응원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이죠. “나는 그런 데에 관심없다”고 하면 왠지 고립될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이죠. 그것은 오히려 일본사회의 젊은 사람들과 정서가 비슷해요. 그것이 건전한 상황이 아니지만 위에서 질타하더라도 효과가 별로 없어요.
또 이런 얘기하는 분도 있었어요. 여성인데, 자신이 일본을 좋아하는 것은, 서로가 별로 간섭 안한다는 것 때문이래요. 한국에서는 회사 다니면, 꼭 물어보는 게 “왜 아직 결혼 안하냐” “아기는 왜 안 낳냐” “둘째는 언제 낳을거냐” 등이라는 거죠. 인사 대신 하는 말인데, 너무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고 합니다. 사실 일본에서는 그렇게 하면 성희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30년 이상 여성들에 의한 문제제기가 있어왔기 때문에 남자들 스스로도 좀 심하게 하면 여성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더 심하면 소송을 당해 손해배상 해줘야 할 지도 모른다는 경계가 있기 때문에 조심합니다. 그 여자 분이 도쿄 비행장에서 도쿄 시내로 전철 탔을 때, 전철역에서 퇴근하는 일본 여성들이 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고 “아 여기가 여성으로 편하게 살 수 있는 사회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저는 잘 몰랐는데, 아, 그렇게도 생각하는구나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역사 인식이 모자란다든가, 일본이 과거에 식민지배 했으니 일본 좋아하는 것은 친일이다 하는 식의 단순논리로는 이 사람들을 별로 설득할 수 없겠죠.
문제는 그런 측면만 볼 때에는 일본이 더 열린 사회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여행자로서는 그렇게 보이죠. 사람들이 모두 친절하고, 거리도 깨끗하고, 질서 잘 지키니까요. 그런데 거기서 살다보면 얼마나 억압적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 동조압력이랄까. 모두가 가는 방향으로 말 없이 따라 가야만 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어요.
일본에는 요즘 ‘KY’라는 말이 유행 중입니다. ‘공기를 읽는다’ ‘분위기를 읽는다’는 뜻인데요. 친구끼리 있을 때에도, 회사 회의 때에도 사람들이 모였을 때 분위기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런 말을 하면 안된다라든가 여기서 지나치게 사람들 눈에 띄는 행동 하면 안된다는가, 여기서 리더가 누구인데 그 사람을 따라가야 한다든가, “자, 오늘 중화요리 먹으러 가자”고 하면 “같이 갑시다”하며 기꺼이 가는 것처럼 연기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걸 잘 읽는 사람이 케이와이입니다. 아베 신조가 지난 해에 사임했는데, 아베 신조가 전형적인 공기를 못읽는 사람이라고 젊은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공기 잘 읽는 사람으로 이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지요.
한국사회가 일본사회를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한국에서도 케이와이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조금 시차가 있으니까, 이 시차 있는 동안은 한국에서 일본에 가면 조금 공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선호가 일본의 전부, 천황제 전부, 보수파에 대한 선호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적인, 해방적인 의미가 있는 긍정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요. 아직까지 불분명한 두 가지 요소를 가지면서 표류하고 있는 상태죠. 그만큼 우리의 책임이 무겁다는 것입니다. 기존 세대 지식인들의 책임입니다. 특히 저 같은 경우는 양측 사회를 보고 있고, 지금 말씀드린 과도기의 시차 같은 것도 느끼고 있으니. 일본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 가진 이 나라 여러분에게도 그것은 아니다, 이렇게 경고할 수 있는 처지이고요. 그런 사람이 맡아야 하는 책임입니다.
일반화하자면, 디아스포라가 그런 것입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런 존재입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회도 알고, 미국 사회도 즉 서양중심 문화도 아니까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을 쓸 수 있었습니다. 한쪽만 알면 못썼겠지요. 이 사람은 어떻게 보면 양쪽 사회에서 고립되고 외롭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 그런 디아스포라들이 있고, 이 때까지 디아스포라이면서도 지식인인 존재는 별로 많이 없었습니다. 유럽에는 있었죠. 20세기 초반부터 유대인들이 그랬죠. 그런데 전세계적으로 볼 때 아시아나 아프리카에는 디아스포라 지식인이라는 존재가 많이는 없었어요. 있었을 경우에도 미국 같은 사회에서 상품화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출신 지식인으로 미국 유명 대학의 명물 교수가 되고, 결국 백인 사회에서 상품화되는 과정을 겪었어요.
영어로는 토큰(token)이라고 하는데. 뉴욕에서 지하철 탈 때 사는 토큰 말입니다. 미국사회가 얼마나 다문화되고 얼마나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는가를 표시하기 위한 토큰이 되기 쉬웠습니다. 그렇지 않은 디아스포라 지식인이 지금까지는 별로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동아시아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이렇게 되면, 좋건 싫건 이 사람들이 경계를 넘어 이동하게 되면 저 같은 디아스포라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되겠죠.
디아스포라 지식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긍정적인 역할을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디아스포라가 기본적으로 불안정한 존재이죠. 안정을 얻기 위해서는 과잉 충성을 하게 되고, 국가주의에 경도될 가능성이 더욱 높기도 합니다. 디아스포라니까 꼭 도덕적으로 옳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 지식인들이 제대로 역할을 하면 여러 개 있는 척도를 상식화해 개인의 자유도 지키면서 공동체도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손=한국에 있으면 그런 디아스포라 지식인을 만난 적이 있는지요.
서=한국사회는 공동체 의식이 너무 강해서 개인주의자가 드뭅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고립화 돼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동문의식, 동향, 학벌 같은 공동체 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흥미로운 사례가 있습니다. 외국 유학을 갔는데 일본인 친구가 파리에서 철학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를 받자 가장 친한 친구 1명만 와서 와인 마시며 축하를 해주더랍니다. 한국인들은 한 명이 학위를 받으면 유학생들이 다 모여서 축하를 했다고 합니다. 그걸 좋게 얘기할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요. 학문하는 사람은 철학적으로 적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철저히 비판하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한 가족이어서 고립된 독립적인 지식인으로서 치열하게 비판하는 게 아니라, 같이 유학 가서 고생하고 드디어 사회의 주류가 됐다며 축하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요. 그 사례를 접하며 이런 게 떠오릅니다. 옛날에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가문 전체의 신분이 올라가는 게 있었지요. 죽고 난 뒤에도 호칭이 달라지지요. 그런 문화의 유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열심히 공부해서 학위를 얻거나 교수가 되는 것이 독립적 지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류 지배기득권층에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목표가 됩니다. 양반, 관직이 되는 게 목표이지 학문이 목표가 아닙니다.
제가 오늘 좀 격하게 말했지만 그래도 60~70년대 유신체제 때 이 나라 민주화를 이끈 지식인들의 역할은 아주 빛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것이 정말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런 전통은 소중히 기억하고 그런 선학들에게 많이 배워와야 한다고 봅니다. 60년대 4·19 교수단이나, 70년대 창비그룹의 리영희 선생 그리고 학생운동 진영도 모두 디아스포라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2000년대와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당시만 해도 장래 진로 걱정을 안하던 때였습니다. 불안정한 디아스포라였지만 그래도 지식이 있었고요. 지금은 60~70년대보다 여유 있게 생각할 수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입니다.
손=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서=일본에 돌아가면 학교 일로 바빠질 것입니다. 소모적인 행정적 업무도 많을 것이고. 제가 와 있는 2년간 일본도 많이 나빠졌습니다. 일본 헌법 개정이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성립되었고요. 물론 제가 있어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헌법이 본격 개악되리라는 것이 구체적인 일정에 올라오는 나날이 된 듯 합니다. 이르면 3~4년 내에 그게 구체화 될 것입니다. 이 선을 지켜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일본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군비가 금지된 것이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결과로 인한 것인데, 그것을 청산하지도 않고 다시 군비를 하는 것은 역사적인 반동입니다. 재일조선인, 일본인들이나 어느 정도 같이 대들 수 있을 지 막막합니다. 재일조선인의 처지나 입장이 우경화 문제와 관련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아마 재일조선인 사회의 어려움에 대해 계속 천착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는 장기간 올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한 자주 오고자 합니다. 2년 전만 해도 공기가 희박해지는 일본 사회에서 조금이나마 도망해서 숨 쉬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요. 하지만 이 나라에도 공간이 얼마나 남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쉬러 온다기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같이 고민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손제민기자)
08. 0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