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지지난 주의 일이다. '나만의 책 만들기 프로젝트' 연수를 들었다. 15시간짜리 직무연수였는데 자유학기제나 중3 전환기 프로그램이나 동아리 활동 등 다방면으로 활용하기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3일에 걸쳐 나만의 책을 만드는 거였는데, 시간이 짧다 보니 자료 20페이지 정도 준비해 오라고 문자가 왔다. 생각나는 것은 세가지 주제였다. '한복', '뮤지컬', '여행'
작년 가을부터 나는 한복과 사랑에 빠졌고, 한 뮤지컬(곤 투모로우)을 10회 보고 올만큼 흠뻑 취해 있었고, 코앞으로 다가온 홍콩 여행을 앞두고 있던 터였다. 책으로 만든다면 이미지가 큰 부분을 차지할 텐데, 그렇다면 '한복'이 좋을 것이었고, 빠심으로 따진다면 뮤지컬도 못지 않았겠지만, 일단 나는 첫번째 자유여행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가이드북이 필요했다. 야근을 밥먹듯이 하던 지난 일년이어서 반년 전에 비행기 티켓을 구매해 놓았지만 여행책자 한줄도 읽기 힘들었다. 결국 홍콩 편만 다 읽고, '마카오' 편은 비행기 안에서 읽어야 했다. 사실 책보다는 이미 여행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가 더 도움이 되었지만!
다시 한복 이야기.
첫 시도는 5월이었다. 대학로에서 생활한복을 입고 지나가는 한 소녀를 보았고 그날 밤 냉큼 검색을 해서 한복을 주문했다.
일주일 기다려 받은 한복은 내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다. 색깔도, 무늬도, 디자인도. 무엇보다도 내가 입어보니 무슨 횟집 알바생처럼 보였다. 이건 아냐!!! 결국 반품했다.
재도전은 9월에 이뤄졌다. 더더더 많은 사이트들을 섭렵했다. 그리고 발견한 게 다래원!
아무 무늬 없는 흰 저고리 하나와 회색 치마를 주문했다. 흰 저고리는 광목 천 느낌인데 무슨 교복 느낌 나서 역시 반품...;;;;;
신상이었던 회색 치마는 후기가 하나도 없어서 모험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웠다.
한복 도착한 다음 날이 직장 동료 결혼식이었는데 네이비 블라우스에 한복 치마를 입고 갔다.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결혼식장이 명동 우리은행이었는데, 명동역까지 걸어와 보니 거기 한복 샵이 있는 게 아닌가! 꼬레아노였다.
그날 들어가서 레이스 흰 저고리를 샀다. 아주 고왔다. 그런데 날이 덥다 보니 이 제품은 그로부터 두달 뒤에나 입게 되었는데 큰 결점이 있었다. 총장이 너무 짧은 것이다. (다래원 저고리보다 6.5cm 정도 짧았다.)
팔을 움직이면 가슴 섶이 너무 올라가서 도저히 일상 생활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애석하게도 이 어여쁜 녀석은 어깨치마 속에나 입을 수 있는 옷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내 한복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10월이 되었는데 아직도 더워서, 린넨 소재는 힘이 없어서 속치마가 필요해서, 한복이니까 노리개가 필요해서... 등등등...
어떤 한복이 내 몸에 맞고, 어떤 한복이 내 마음에 드는지를 찾기까지, 정말 무수한 반품과 교환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치마 기장과 저고리 총장, 옷감 소재와 색깔 톤까지 대충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좀 가려졌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얻은 절실한 교훈은 이거였다.
"싸고 좋은 건 없다!"
반품의 향연이 이어지던 어느 날 모니터에 써 붙였다!!! 기억해! 싸고 좋은 건 없어!!!!
싸고 좋은 게 없다 보니 한복 마련을 위한 주머니가 필요했다.
이 무렵 나를 가장 홀릭하게 만든 건 장홍한복의 향수 치마였다.
정지용의 시 '향수'가 치마 폭에 새겨져 있는데 무려 그라데이션까지 들어가 있어서 더 깊은 바다 느낌을 준다. 14만원!
저 녀석을 가지려면 저금통을 깨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여겼다. 이런 날을 위해서 내가 수년간 동전을 모아왔지!
먼저 500원짜리만 모아놓은 저금통 뚜껑을 열었다.(원래 열리는 애다)
한 10만원은 나올 줄 알았는데 저금통이 너무 가벼웠다.
세어보니 32개였다. 16,000원.....
지금 장난하나... 댕기 하나 가격이잖아......;;;;;;;;;;;;;;
생각해 보니 거의 카드를 써서 현금 안 쓰니 동전 생길 일이 별로 없었다.
500원을 제외한 다른 동전만 모아둔 더 큰 저금통이 있지만... 열지 않았다. 상처 받을까 봐....;;;;;
그래서 또 머리를 굴렸다. 방법이 없나???
있다! 생각이 났다! 보험료를 청구하는 거다!
지난 일년 간 너무 바빠서 병원만 다니고 보험 청구를 못했는데 여름에 무릎 MRI 찍어서 꽤 비용이 나왔더랬다.
치료비는 내 건강을 위해서 쓴 거니까 퉁 치고(응?) 그걸로 한복을 사는 거야!
그래서 보험료를 청구했는데 무려 2년 동안 청구가 밀려 있었다. 아, 나 2년 동안 정말 많이 바빴어...ㅜ.ㅜ
그런 식으로 여윳돈이 생기면 모두 한복에 투자했다.
생일 선물도 친구들이 한복 사라고 돈 입금해 줘서 그걸로 모아서 장만했다.
한복이 옷만 입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한복에 어울리는 악세사리, 가방, 신발이 그동안 쓰던 것과 다 달라서 풀 코디가 쉽지 않다.
내 댕기(사은품이었다.)까지는 소화했는데 고무신은 마련하지 않았다.
사실 아직 예쁜 고무신은 발견 못함. 예쁘면 고려해볼 생각은 있다. ㅎㅎㅎ
덕분에 핸드메이드 페어도 다녀오고, 인사동과 북촌의 한복집도 다녀오고~
어제는 이태원 해방촌(다함)도 다녀왔는데 기대에 못 미쳤음!
아, 틈새장도 구입했다. 어깨 허리치마는 꽤 긴데 내가 쓰는 2단 행거에 걸면 치마가 바닥에 끌린다.
그래서 가로폭 40cm짜리 틈새장을 샀다. 공간 여유만 있으면 더 넓은 걸로 사는 건데 살짝 아쉽!
처음엔 신기하게 보던 직장 동료들이 나중에는 한복 입고 가지 않으면 살짝 서운해 했다.
그렇게 나홀로 주5일 한복 입기 운동을 하고 있다. 요새는 일반 양장 옷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다래원처럼 제법 물량을 갖추고 판매하는 곳도 있지만, 주문 들어오면 그때부터 바느질 시작하는 업체도 꽤 많았다.
기다림은 필수!
주문하고 보름 뒤에 왔던 르벙, 일주일 가까이 기다렸는데 절인 배추에 밀려 기어이 열흘 꽉 채우고 받은 민주화 한복도 있었다.
종로에 나가면 한복입은 사람 만나기는 아주 쉽다. 고궁 주변에는 대여점도 즐비하다. 보통 4시간 대여에 15,000원 정도 한다.
외국인들도 즐겨 입는다. 어느 순간 생활한복 붐이 일어서 요새는 어딜 방문해도 한복 입은 사람 마주치는 일이 곧잘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무슨 특별한 날이거나, 특별한 일을 하나 궁금해한다. 그냥, 단지 예뻐서 입는다. 마음에 들어서.
이번에 여행 갈 때도 한복 두벌을 챙겨갔다.
'솔이씨 한복' 저고리와 '꽃닮' 허리치마다.
여름엔 더워서 과연 한복을 입고 다닐 수 있을지 아직 모르겠는데, 아무튼 봄이 무르익을 때까지는 나의 한복 사랑이 식을 것 같지 않다. 요새는 기승전 한복이다!
여행(이라고 쓰고 '삽질'이라고 읽는) 이야기도 써야 하는데 언제 또 짬이 날지...
알라딘에 페이퍼 쓰는 게 백만 년 같다. 어색어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