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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들의 초상화가 들려주는 욕망의 세계사
기무라 다이지 지음, 황미숙 옮김 / 올댓북스 / 2015년 4월
평점 :
제목이 '초상화가 들려주는 욕망의 세계사'였다면 더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미녀'라고 굳이 명명하니 조금 반감이 들었고,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전혀 '미녀'가 아니어서 또 약간 불만이 있었다는 걸 밝혀둔다. 궁금하긴 했지만 조금 심드렁하게 읽었는데, 초반엔 몰입이 좀 힘들다가 조금 지나니 차츰 재밌어졌다. 역시 뭐든 아는 인물이 나와야 흥미로워지는 법!
53쪽
프랑스 왕 샤를 7세(재위 1422-1461)의 공식적인 총희인 아네스 소렐(1421-1450). 당시까지 남성의 장식품이었던 다이아몬드를 처음으로 몸에 걸친 여성. 당시의 다이아몬드는 지금처럼 잘 다듬어졌던 것은 아니고, 루비나 에메랄드에 비해 가격이 싼 보석에 불과했다.
다이아몬드의 영광이 생각보다 길지 않았구나!
77쪽
디안(1499-1566)을 궁정에서는 왕족에 버금가게 대우했다. 앙리(1519-1559)도 그녀를 ‘나의 귀부인(마담)’이라고 불렀고 주위에서도 그녀를 ‘마담’이라고 칭했다. 참고로 ‘마담’은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왕의 여자 형제들이나 딸에게 쓰는 호칭이었다.
꼭 '마님'같네.
87쪽
당시의 기준으로 봤을 때 앤 불린(1507-1536)은 결코 미인의 범주에 드는 타입이 아니었다. 검은 머리에 약간 검은 피부, 풍만하지 않은 가슴, 게다가 오른손에는 작은 여섯 번째 손가락이 옆으로 나와 있었다. 하지만 머리 회전이 빨랐으며, 프랑스 궁전에서 익힌 우아하고 요염한 행동, 세련된 패션 센스가 앤의 매력을 끌어올렸다. 진주로 장식된 모자도 그녀가 프랑스에서 가지고 와 유행시킨 것이다.
1533년 1월에 앤이 임신한 사실을 안 헨리 8세는 이혼을 금하는 로마 교회와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앤과 비밀리에 결혼한다. 서자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없기 때문이다.
노년에 극도로 살이 찐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젊은 시절의 헨리 8세는 키가 크고 날씬한 절세의 미남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의 유럽 궁정에서 제일가는 지식인으로, 문무도 겸비한 왕이었다. 운동과 무예, 음악에 이르기까지 그의 재능은 끝을 몰랐다. 작곡에도 재능을 발휘해 성가를 몇 곡인가 남겼을 정도다.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 감금되어 있던 캐서린은 메리 왕녀와의 면회나 편지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헨리와의 이혼을 인정하지 않은 채, 1536년 1월 7일에 하늘의 부름을 받는다. 한편 새로운 왕비 앤은 그 후 두 번의 임신을 하지만 모두 유산하고 만다. 두 번째 유산은 캐서린이 죽고 난 뒤 몇 주 후의 일이었다.
헨리8세의 초상화가 번뜩 지나간다. 영화 천일의 앤에서 나탈리 포트만의 외모는 앤 불린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94쪽
중세 이래로 예수만이 정면상으로 그려지는 것이 전통적이었다. 따라서 이 초상은 앤(헨리 8세 네 번째 왕비 앤 오브 클레베)이 성상 숭배를 금하는 개신교도임을 뜻한다. 그와 동시에 ‘선보기용’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묘사하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잉글랜드로 시집 온 앤을 본 헨리 8세는 “그림과 다르다!”며 격노했고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왕과 부부의 연이 끊어진 앤 오브 클레베는 ‘왕의 여동생’의 칭호를 받고 아무 불편 없이 생활하다가 잉글랜드에서 생을 마쳤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헨리 8세의 여섯 왕비 중에서 가장 평온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겠다.
왕의 눈밖에 났어도 목숨 부지했으니 평온한 인생이었다고 하는 게 틀린 말이 아니다.
100쪽
두 살하고도 8개월 때에 어머니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왕녀의 신분에 있던 엘리자베스(1533-1603)는 단번에 왕위 계승권이 없는 서녀로 취급을 당하게 된다. 엘리자베스가 열 살이던 1543년, 헨리 8세의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1512-1548)가 시집을 온다. 새로운 왕비 캐서린은 헨리 8세와 견줄 만큼 교양이 있고, 신앙심이 매우 두터운 여성이었다. 사랑이 많은 그녀는 헨리 8세에게 부탁해 서녀 신분에 있던 엘리자베스와 이복언니인 메리(메리1세. 1516출생. 재위 1553-1558)의 신분을 왕녀로 복귀시켜 주었다.
바람직한 새엄마일세.
참고로 손가락이 이상할 정도로 눈에 띄게 그려졌지만 화가의 실수는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자랑스레 여겼던 만큼 늘 일부러 눈에 띄게 했다. (13세의 엘리자베스 왕녀 초상화)
내 생각엔 첫번째 초상화의 손이 제일 자연스러워 보인다.
103쪽
메리1세는 1554년, 국민감정을 무시하고 사촌 형제인 신성 로마 황제 카를5세의 아들이자 열한 살 연하의 펠리페(1527출생. 재위 1556-1598)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 결혼은 국가에도 그녀에게도 불행을 가져왔다. 당시로서는 나이 많은 신부였던 메리는 자식을 갖고 싶은 나머지 펠리페에게 몇 번이나 임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상임신이었고, 실제로는 난소종양을 앓고 있었다. 메리는 펠리페에게 빠졌지만 그 사랑은 일방통행. 그녀와 잘 맞지 않았던 펠리페는 1556년에 스페인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돌아갔다가 1년 6개월 후에 잉글랜드로 되돌아와서도 3개월밖에 같이 살지 않았다. 그리고 펠리페가 다시 돌아온 이때의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에 휘말려 대륙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영토 칼레를 잃게 된다.
1558년에 마흔두 살의 메리 1세는 난소종양으로 사망한다. 그녀는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앤 불린으로 인해 자신의 어머니인 캐서린과 헨리 8세가 이혼한 것 때문에 엘리자베스를 증오했다.
1554년에는 모반의 죄를 씌워 엘리자베스를 두 달 정도 런던탑에 투옥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를 유죄로 만들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유폐르르 풀어주어야 했다. 이복자매는 화해하지 않았다. 메리는 죽기 전날에야 비로소 자신의 후계자로 엘리자베스를 지명할 정도였다.
얼굴에서 고집과 심술, 노여움이 모두 읽힌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자연스럽다. 그녀의 생을 돌이켜보건대.
126쪽
1558년 4월 28일, 늘씬한 미녀로 자란 메리와 어린 시절부터 궁정에서 함께 자란 프랑수아 황태자의 결혼식이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같은 해 11월 17일에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 여왕으로 즉위한다. 하지만 프랑스 왕 앙리2세는 잉글랜드를 프랑스의 영토로 만들고자 하는 야심 때문에, 가톨릭교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워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을 무효라고 지적하며 엘리자베스를 왕위 약탈자로 규탄한다. 앙리는 헨리 7세의 증손인 메리야말로 스코틀랜드 여왕이자 프랑스 황태자비이며 진정한 잉글랜드 여왕이라고 선언했다. 로마 교황청 역시 엘리자베스를 서녀로 인정하며 앙리2세의 손을 들어주고는, 메리1세의 뒤를 이을 왕위 계승자는 메리 스튜어트라고 주장했다.
이에 메리는 악의 없이 자신의 문장에 잉글랜드의 왕관을 집어넣는데, 이 일로 엘리자베스는 크게 격노한다. 엘리자베스의 출생을 부정하고 그녀가 정식 왕위 계승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로마 교황과 프랑스 왕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내에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금수저를 뛰어넘어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정치적 식견을 별로 없었나보다. 하다 못해 눈치도 없었나보다. 그녀가 상대하기에 엘리자베스 1세는 노련미의 정수랄까.
127쪽
메리는 열다섯 살에 인생의 정점을 맛보지만 그 후의 삶은 급격히 달라진다. 결혼한 이듬해의 7월 10일, 시아버지인 프랑스 왕 앙리2세가 서거한다. 곧 그녀의 남편이 열다섯의 나이로 프랑수아 2세에 즉위하고 메리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왕태후가 된 카트린은 어린 시절부터 병약했던 프랑수아2세의 치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왕위 계승자인 차남 샤를(훗날 샤를 9세, 재위 1561-1574)이 즉위해 섭정을 하며 권력을 휘두를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128쪽
1560년 11월 중순, 선천적으로 이비인후과 계열의 지병을 갖고 있던 프랑수아 2세는 중이염이 발병하면서 쓰러지고 만다. 프랑스 제일의 외과의사가 귀를 절개하고 고름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면 생명은 구할 수 있다고 진단했지만, 어머니 카트린은 수술을 거부한다. 고름이 뇌까지 찬 프랑수아는 1560년 12월 5일에 16년의 생애를 마쳤고, 그로부터 사흘 후면 열여덟 살의 생일을 맞이하는 메리는 미망인이 되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와 그녀의 자녀들도 동시대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 못지 않은 드라마를 연출했다. 동시대에 한꺼번에 말이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여왕 마고'를 보고 오셔서 너무 재밌었다며 독이 묻은 책장을 침묻혀 가며 넘기던 장면을 묘사해주시던 게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정작 이 영화를 보지 못했구나. 황미나 작품 '불새의 늪'은 아주 재밌게 보았지만.
130쪽
수도 에든버러에 도착한 메리는 왕권의 무력함을 실감하고, 당장 이복오빠인 제임스 스튜어트(1531-1570)에게 섭정을 맡긴다. 참고로 당시는 제임스가 개신교였듯이 스코틀랜드인 대부분이 개신교로 개종한 상태였다. 반면 메리는 타국에서 자란 데다 젊은 여성이며 가톨릭 교도였다. 사실상 혼자의 힘으로 나라를 통치하기란 어려웠다.
134쪽
메리 앞에 세 살 연하의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1545-1567)가 나타났다. 그는 메리와 같은 가톨릭 교도이자 스튜어트 가의 일원이었다. 메리와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2세(재위 1437-1460)의 자손이면서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증손이기도 했으므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국의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135쪽
두 사람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주위에서는 거세게 반대했다. 특히 메리가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단리와 결혼하는 데 위협을 느낀 엘리자베스의 반대는 대단했다. 심지어 그녀는 메리에게 자신이 추천한 로버트 더들리와 결혼하면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약속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메리는 이미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고국에서도, 잉글랜드에서도 메리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한다. 일찍이 남편이 죽은 프랑스야 말해 무엇하랴. 다 갖고 태어났지만 참 외로운 인생일세.
143쪽
메리는 암살미수범이 아닌 가톨릭의 순교자로서 처형에 임하기로 결심한다. 처형대가 그녀가 마지막으로 빛나는 무대가 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도 두 달 반 동안 메리의 사형 선고서에 서명을 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그러나 마침내는 서명하여, 마흔네 살의 메리는 1587년 2월 8일에 포더링게이 성에서 처형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명예로운 순교’였다. 순교자를 상징하는 색인 붉은 드레스를 입은 메리의 마지막은 그녀를 비롯해 그곳에 함께한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끔찍했다. 사형 집행인이 목을 한 번에 베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힘을 다해 참수하고, 가발인 줄도 모르고 적갈색의 마리를 잡자마자 메리의 목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헨리 8세가 앤 불린을 위해서 마지막에 베푼 온정이 참수대에 쓸 도끼날을 아주 날카롭게 벼린 걸 쓰게 했다고... 얼마 전에 들은 '글로벌 한국사 그날 세계는'에서 이원복 교수님이 얘기했던 게 떠오른다. 이거 책을 내가 산 것 같은데 어디다가 꽂았지??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아직 결제 전인가???
찰스1세 아들 찰스2세와 제임스2세
180쪽
반다이크의 그림 ‘난쟁이 제프리 허드슨 경과 함께 있는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의 초상’
프랑스에서 갓 시집온 헨리에타에게 버킹엄 공작 부부가 보낸 사람이 바로 일곱 살의 제프리였다. 그는 헨리에타의 궁정에서 생활하며 교육받았는데, 당시의 유럽 궁정에서 난쟁이는 드문 존재는 아니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나오는 못생긴 아이가 사실은 아이가 아니라 혹시 난쟁이였을까? 아님 궁정의 난쟁이는 남자만 해당할까??
195쪽
부르봉가가 스페인을 지배하기 시작할 무렵, 프랑스에서는 경쾌한 로코코(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 등이 특징인 양식) 예술이 꽃피려 하고 있었다. 이 로코코 예술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는 여성이 바로 퐁파두르 부인이다. 물론 그녀가 로코코 예술의 창시자는 아니다. 그녀는 세련된 ‘좋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었고 자신의 취미로 프랑스 궁정 문화를 수놓았다. 훗날 퐁파두르 부인이라 불리게 되는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은 1721년에 태어났다. 평민 출신이면서도 예술을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당시의 여성치고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잔 앙투아네트가 아홉 살쯤 되었을 때 어머니가 유명한 예언자에게 그녀를 데려간다. 예언자는 그녀에게 “왕비는 아니나 그에 가까운 사람이 되리.”라고 말했다. 당시의 프랑스에서 그 말은 곧 국왕의 ‘공인된 총희’를 의미했다.
196쪽
1745년 2월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왕의 적자인 루이 왕태자(1729-1765)의 결혼을 축하하는 가면무도회가 열렸다. 이때 서른다섯 살의 국왕과 이십대 초반의 잔 앙투안제트는 사랑에 빠진다. 부르봉 왕조 최초의 미남이었던 루이 15세는 내성적이면서도 여색을 매우 탐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총희 샤토르 부인을 잃은 지 얼마 안 되는 왕은 잔 앙투아네트에게 빠져 어떻게드는 그녀를 총희로 삼아 베르사유에 있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을 공인된 총희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왕의 공식 총희는 귀족 출신의 기혼 여성이어야 한다는 규율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분에 관한 문제는 국왕이 해결해 주었다. 후작 작위를 부활시키고 퐁파두르라는 이름의 영지를 하사함으로써, 잔 앙투아네트는 퐁파두르 후작부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후작부인이 된 그녀는 1745년 9월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왕, 왕비, 왕태자, 왕녀들에게 인사를 하고 ‘공인된 총희’로서 정식으로 선을 보인다. 드디어 약 20년 동안 궁정의 진정한 여주인으로서, 또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의 그림자 같은 재상으로서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숙부로부터 전해들은 그녀의 남편은 경악했고, 평생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198쪽
점잔을 빼는 귀족 여성들과 달리 밝고 솔직하며 친절한 성격의 그녀는 국왕뿐 아니라 그녀를 적대시하던 이들의 마음까지 사로잡는다. 그녀의 세심한 배려가 통했는지 루이 15세보다 일곱 살 연상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1703-1768)마저도 그녀를 인정하게 된다. 왕이 자신에게 상냥해진 까닭이 퐁파두르 부인 때문임을 왕비는 알고 있었다.
199쪽
1752년에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부인에 대한 배신행위를 참회하며 그녀의 직위를 공작부인으로 높였다. 하지만 그녀는 신분 상승에 따라오는 특권은 누리면서도 왕비에게 경의를 표하고 스스로는 후작부인이라 말하며 몸을 낮추었다.
퐁파두르 부인이 왕의 애인으로서 잠자리를 함께 한 것은 5년 정도였고, 이후로는 친구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육체적으로 관능미와는 거리가 먼 여성이어서 침실에서 국왕을 상대하는 일을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퐁파두르 부인의 헌신에 만족했던 루이 15세는 새로이 ‘공인된 총희’를 둘 생각은 없었다. 대신에 그녀는 따로 사슴 정원이라고 불리는 베르사유 시내의 저택에 시종들이 찾아낸 루이 15세가 좋아할 만한 여자들을 지내게 하면서 왕을 모시도록 했다. 사슴 정원의 여자들은 매춘부들이 많았는데, 퐁파두르 부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에게 대항할 만한 강력한 라이벌보다는 교양이 없는 이 여인들이 덜 위협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200쪽
하지만 프랑스 국민들에게 퐁파두르 부인은 강한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녀를 적대시한 일부 궁정 사람들이 퍼뜨린 소문들은 국민의 악감정에 불을 지폈다. 전통적으로 프랑스 국민은 외국 출신의 왕비를 싫어했는데, 전 폴란드 왕의 딸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는 선량한 인품 덕분에 인기가 있었다. 궁정 사람들에게는 따분하다고 평가되던 왕비의 성격도 가치관이 다른 민중에게는 좋게 비쳐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프랑스에서는 통치 능력이 부족한 국왕이나 외국 출신의 왕비가 국민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기보다 공인된 총희가 미움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예술사를 되돌아보면 퐁파두르 부인이 프랑스 문화에 끼친 영향은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대단했다. 박식하고 세련된 취미를 가진 그녀는 재능 있는 예술가를 후원하고, 독일의 마이센 자기와 견줄 수 있는 도자기를 프랑스에서도 만들어야 한다며 세부르 자기의 발전을 이끌었다. 당시의 프랑스에서 그녀만큼 좋은 후원자는 찾기 힘들었다. 또 프랑스의 발전을 위해 백과전서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퐁파두르 부인은 이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루이 15세에게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설득했다.
202쪽
당시의 귀족 여성 중에 독서가 취미인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사회적인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책을 모으는 일은 있어도 어디까지나 컬렉션일 뿐, 애독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그림 속에서 아름답게 앉아 있는 퐁파두르 부인은 실제로 책을 손에 들고 있다. 뒤의 캐비닛에 있는 책들도 자연스럽게 진열돼 있어, 장식이 아님을 보여준다. 독서는 궁정의 인간관계 등 골치 아픈 일들을 잊게 해주는 최고의 친구였다. 실제로 그녀는 상당한 양의 책을 수집했고 그녀가 죽은 이듬해에는 장서 3525권이 팔려 나왔다고 한다. 즉, 이 초상화는 퐁파두르 부인의 높은 지성을 강조한 작품이다. 오른손에 놓인 편지는 정무에도 관여했던 그녀의 정치적 지위를 드러낸다. 퐁파두르 부인은 ‘그림자 재상’답게 대신을 임명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잃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던 7년 전쟁(1756-1763)에서는 군대를 지휘한 적도 있었다. 육군사관학교도 퐁파두르 부인의 제안으로 창설되었다. 하지만 퐁파두르 부인은 1764년 4월 15일에 결핵으로 사십대 초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이지은 작가의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에서 퐁파두르 부인과 화가 부셰에 대한 이야기를 재밌게 읽었다. 부르주아의 유쾌한 사생활도 소장하고 싶은데 출판사조차 망한 건지 찾을 길이 없다. 역시 도서관밖에 답이 없나보다.
213쪽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찾아온 불행의 씨앗은 남편인 루이 16세(1754-1793, 재위 1774-1792)가 선대의 루이 15세처럼 공인된 총희를 두지 않은 데 있다. 남편이 성실하고 부인밖에 모른다면 감사해야 할 일이지 부인에게 불행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총희의 그늘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는 왕비에게 익숙했던 프랑스인들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틈만 나면 나서는 것처럼 비쳐졌다. 그녀가 정치적으로 참견을 한 적도 있지만, 실제로 루이 16세는 왕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왕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기가 약한 국왕이 나서기 좋아하는 왕비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왕의 사생활이 난잡하지 않고 가정적이었던 것이 이런 부작용을? 인과관계가 잘못 되었지만, 타이밍이 나쁘긴 했다.
226쪽
군주의 결혼은 소위 기업 간의 계약서 같은 것이라 여기는 궁정 사람들은 황제나 국왕이 총희를 두는 데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의 러시아 궁정에서는 소국인 헤센 공국의 대공녀 출신 황후가 황제의 부정에 대해 불만스러워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태도로 비쳤다. 초상화 속 그녀는 외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역시나 빈터할터의 작품답게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 알기는 어렵다. 외모만 아름답게 그리고 모델의 내면을 반영하지 못한 빈터할터에게 미술사에서 야박한 점수를 매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진중함’을 최상의 미덕으로 여긴 19세기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모델의 내면을 표현하지 않는 그림은 최상의 고객 서비스였으리라.
왼쪽의 엘리자베트 초상화는 뮤지컬 엘리자벳 때문에 눈에 익숙하다. 작품 속 드레스를 엘리자벳 역을 맡은 배우들이 입고 나오는데, 옥주현은 왕비의 미모에 적격이었다!
초상화에 이어 사진 이야기도 있었다.
사진의 역사는 거의 200년이구나.
드레스 하니 TBDRESS에서 처음으로 직구 해보고 두달에 걸쳐 배송받았던 힘겨운 기억이 떠오른다. 그 사이트는 드레스가 제일 예뻤지만 사서 입을 데도 없고 보관할 데도 없다. 가격만 착할 뿐!
책은 몇달 전에 읽었고, 한글 문서에 삽입했던 사진을 다시 찾아서 리뷰를 쓰려니 손이 고생이다. 역시 읽고 바로바로 리뷰를 쓰는 게 가장 좋지만 아직도 밀린 리뷰는 줄줄이... 분발하자. 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