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 나는 이렇게 본다 보리 한국사 3
김용심 지음 / 보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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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못본지 한참 됐다. 마지막에 본 드라마가 '미스터 션사인'인데 기억에 2월에 보았나? 싶어 검색해 보니 세상에, 작년 9월이었다. 시간, 참 빠르구나.


정확히 회차까지 기억난다. 9회 마지막 부분이었다. 강물이 하얗에 얼어붙어 있고 애신과 유진이 그 위를 천천히 걸었다. 거기서 유진(이병헌 역)이 자신이 조선을 떠난 이유를 말했다. 노비의 아이였던 그가, 상전의 손에 죽게 되자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던 9살의 시린 기억들에 대해서. 애신(김태리 역)은 충격을 먹었다. 예상했던 반응과 마주하며 유진이 되물었다. 


"무엇에 놀란 거요? 양반의 말에, 아님 내 신분에?"

애신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은 무엇에 놀란 것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더 놀랐을 것이다. 유진이 재차 물었다.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


그 질문이 폐부를 뚫고 지나갔다. 그대가 구하려는, 그대가 살고 싶은 이 땅은 과연 모두를 위한 세상인가? 


백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날 무심코 사용했던 단어들에 대해서 반성했다. 


심지어 살인을 일삼는 패륜아를 두고 인간 백정이라 부르며 가슴 찢는 모멸을 주기도 합니다. -20쪽


그러니까 광주를 피로 물들였던 어느 인사를 떠올릴 때 같이 떠오른 단어는 '인간 백정'이었다. 미안하다. 잘못 사용했다. 그렇게 내뱉을 단어가 아니었다. 그런 대접 받을 당신들도 아니었다. 백정, 백정, 백정......


책은 정성을 담아 백정의 기원을 정성껏 밝힌다. 사료와 구전 정보까지 샅샅이 훑으며. 천 년도 더 전에 이 땅에 흘러 들어온 유목민들의 후예, 혹은 나라가 망했을 때 새 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버티던 이 땅의 후예들. 뿌리가 어디이든 그들은 가진 재주가 많아서 더 많이 착취당했던, 농경민과의 '다름'을 인정받지 못한 자유인들이었다. 


항심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 항상 잔잔하고 편안한 마음을 뜻한다. 항상 마음이 편안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일단 등 따습고 배불러야 한다. 등 따습고 배부르려면 또 어찌해야 하는가? 당연히 먹고살 재산이 있거나 밥벌이가 가능한 직업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평안할 수 있으니 이런 재산이나 직업을 항산(恒産)’이라 했다. 곧 사람은 누구나 항산이 있어야 걱정 없이 배부르게 잘 살고, 그래야 잔잔하고 편안한 항심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니 참된 군왕은 백성이 항상 항심을 가지도록 잘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함부로 방자하거나 치우치거나 사악하거나 사치스러워지지 않는다. 거기에 맹자가 말하는 인의 정치, 왕도 정치의 핵심이 있었다.

그런데 조준은 백정을 항심이 없는 자들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항심, 곧 항산이 없다는 것은 먹고사는 데 필요한 생업이나 재산이 없다는 말이다. 백정들에게도 엄연히 사냥이나 도축, 고리 짜는 기술들이 있었지만 그저 천한 재주로 치부했을 뿐 제대로 된 생업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농사짓지 않는 백정은 나라 백성이 아니었다. 이 확고한 농본주의, 꿋꿋한 농경 중심 사회에서 백정들의 재주는 하릴없이 묻혔다. -62쪽

농본주의 조선에서 농사짓지 않는 백정들을 천시하고 학대했으면서 그들의 재주는 또 필요했다. 농사에 가장 필요한 소를 잡는 건 경을 칠 일이면서, 그 소를 잡기 위해선 백정이 필요하고, 그래놓고 소 잡았다고 백정을 핍박하고... 이 말도 안 되는 모순의 반복. 백정의 한이 쌓이고 또 쌓일 일이었다. 


비단 지배층만 백정을 이용하고 학대한 것이 아니었다. 피지배계층도 자신보다 천한 신분의 백정을 손가락질하고 욕보이기 바빴다. 그렇게 나보다 낮은 누군가가 있어야만 내가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요즘 무대 위에서 한참 관객의 흥을 돋우는 뮤지컬 '스웨그에이지:외쳐, 조선!'에서 순수는 자신의 소원을 이렇게 노래한다. 


내는 말이여

전라도에서 온 백정의 딸내미란 말이여

울 아부지 나가 말 한마디 잘못 혀서 뒤져 부렀어

그 날로 아갈통 싸물고 무술연마 거시기 해부렀어!

소원이 있는디 울 아부지 관이라도 짜달란 말여

그 소원 다함께 응원하며 한잔 하세! (얼쑤!)


노래는 흥겹지만 그 내용은 얼마나 슬픈가. 그랬다. 백정은 시집갈 때 남들 다 입는 그 화려한 옷도 치장도 할 수 없었고 신랑 역시 말을 탈 수 없었다. 흔한 비녀 하나 꽂을 수 없었고 죽어서 관에 눕지도 못하고 거적데기에 싸여 나간 게 백정이었다. 


백정의 역사를 짚어본다는 건 그들이 학대받아왔던 눈물의 역사를 돌아보는 길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한숨 나오는 이야기만 등장한다면 책 보면서 우울에 빠질 일. 다행히 반전의 기미가 보인다. 백정 박성춘의 등장이 그것이었다. 아들만은 백정의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예수교에서 운영하는 학당에 아이를 보내면서도 골깊은 불신 때문에 주일 예배는 보내지 않던 그가 콜레라에 걸리고 말았다. 아들 봉주리에게서 박성춘의 발병 소식을 들은 무어 선교사는 무려 고종의 주치의를 동원해서 박성춘을 살려 냈다. 그러니까 백정의 병을 살피기 위해 임금의 주치의가 움직인 것이다. 이 조.선.에서 말이다. 


기적처럼 살아난 박성춘이 새사람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의 마음문도 활짝 열렸다. 이후 그는 만민운동회에서 대표 연설을 하는 인물로, 우리 역사책에 소개되는 한 사람이 되고 만다.


만민공동회는 우리나라 역사 최초로 열린 근대적인 민중 집회다. 1회 만민공동회는 1898310일 종로 육의전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만여 명이 모여 시작되었다. 공동회 대표는 쌀장수 현덕호가 맡았고, 연사들은 천을 파는 백목전 다락 위에 올라가 연설을 하였다. 마치 120여 년 뒤 종로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집회와 같았다.

더 놀랍게도 이틀뒤 곧바로 열린 제2회 만민공동회는 남촌 사는 평민들이 열었다. 독립협회의 지도 없이 백성들 스스로 연 것이다. 그리고 이틀 전보다도 훨씬 더 많은 수만 명 시민이 모였다.

서울 인구가 대략 17만 명이었던 당시 이 규모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리고 1029일 규모가 더욱 커져서 관까지 함께해 시작된 만민공동회는 그야말로 시민운동의 꽃이었다. 일반 배 백성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부 관료와 대신들, 외교 사절들, 지식인과 학생, 승려와 상인들까지 그야말로 각계각층 온갖 사람들이 다 모였다. 특히 이때 고종 황제에게 국정 개혁을 건의하는 헌의6를 결의하기로 했기에 공동회의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이 뜨거움 속에 첫 연설자가 단상에 올랐다. 숨 막히는 긴장과 기대 속에 나타나는 이는 다름 아닌 박성춘이었다. 조선 최초로 열린 이른바 대정부, 대국민 집회의 첫 연설자가 바로 천민 중의 천민박성춘이었던 것이다. 박성춘은 떨리면서도 옹골지게 첫마디를 떼었다. “저는 대한에서 가장 천한 사람입니다하고. -211쪽


박성춘의 아들 봉주리(박서양)는 제중원 1회 졸업생으로 의사가 된다. 와우, 백정의 아들이 조선 최초의 의사가 되어서 이후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에 헌신하다가 사망했다. 이렇게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이 다 있을까. 그러고 보니 꽤 예전에 방영했던 드라마 '제중원'에서 박용우가 맡았던 역할이 봉주리가 아닐까??


박성춘의 이야기가 반갑게 들렸다면, 강상호의 이야기는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백정 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운동. 그 형평운동의 산 증인 강상호. 천석꾼 지주의 아들로서 평탄하게 양반입네 하고 살 수 있었던 그가 '새백정'이란 평판을 들으며 백정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그들의 해방에 일생을 바쳤다. 백정의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심지어 자신의 호적에 이름을 올려 양자를 만들고, 67번이나 되는 체포도 감내하였다. 정작 그는 재산을 다 잃고 굶주리며 살다가 세상을 떴지만, 그의 죽음 소식은 전국의 백정 출신들을 움직였다. 무려 9일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에서 백정들은 기꺼이 상주가 되어 주었다. '일생'으로 인간 해방의 가치를 말한 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백정을 주제로 시작한 이야기이지만, 결국은 인간과 인간 해방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형평운동의 대상에는 비단 백정뿐 아니라 백정을 잘못 생각하는 일반 사회인들까지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 또한 잘못된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깨달아야 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불평등, 불공평, 부조리함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것은 나뿐 아니라 당신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238쪽


책을 덮으며 이 시리즈의 제목을 다시 한 번 들여다 본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보리 한국사 시리즈. 더 나은 세상이라는 말이 가슴에 콕 박힌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씩 발을 옮겨가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책을 쓰고, 또 누군가는 책을 읽고, 그리고 또 주변을 돌아볼 테지. 선한 영향력을 주는 고마운 책이라고 생각했다. 책 날개에 보니 출간 예정에 '친일파와 반민특위, 나는 이렇게 본다'가 있다. 와우! 몹시 기대가 되는데 과연 언제 나올지... 


읽은 지 한참 되었는데 리뷰 쓰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리뷰 안 쓰고 산지 너무 오래 되어서 뭐라고 글을 열어야 할지 막막했다. 중요한 건 한걸음이니까. 일단 나는 등록 버튼을 누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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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1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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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16: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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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2 09: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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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3 2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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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2 0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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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3 1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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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4 1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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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4 2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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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17: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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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9 0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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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들의 초상화가 들려주는 욕망의 세계사
기무라 다이지 지음, 황미숙 옮김 / 올댓북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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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초상화가 들려주는 욕망의 세계사'였다면 더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미녀'라고 굳이 명명하니 조금 반감이 들었고,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전혀 '미녀'가 아니어서 또 약간 불만이 있었다는 걸 밝혀둔다. 궁금하긴 했지만 조금 심드렁하게 읽었는데, 초반엔 몰입이 좀 힘들다가 조금 지나니 차츰 재밌어졌다. 역시 뭐든 아는 인물이 나와야 흥미로워지는 법!


53쪽

프랑스 왕 샤를 7세(재위 1422-1461)의 공식적인 총희인 아네스 소렐(1421-1450). 당시까지 남성의 장식품이었던 다이아몬드를 처음으로 몸에 걸친 여성. 당시의 다이아몬드는 지금처럼 잘 다듬어졌던 것은 아니고, 루비나 에메랄드에 비해 가격이 싼 보석에 불과했다.


다이아몬드의 영광이 생각보다 길지 않았구나!


77쪽

디안(1499-1566)을 궁정에서는 왕족에 버금가게 대우했다. 앙리(1519-1559)도 그녀를 ‘나의 귀부인(마담)’이라고 불렀고 주위에서도 그녀를 ‘마담’이라고 칭했다. 참고로 ‘마담’은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왕의 여자 형제들이나 딸에게 쓰는 호칭이었다.


꼭 '마님'같네. 



87쪽

당시의 기준으로 봤을 때 앤 불린(1507-1536)은 결코 미인의 범주에 드는 타입이 아니었다. 검은 머리에 약간 검은 피부, 풍만하지 않은 가슴, 게다가 오른손에는 작은 여섯 번째 손가락이 옆으로 나와 있었다. 하지만 머리 회전이 빨랐으며, 프랑스 궁전에서 익힌 우아하고 요염한 행동, 세련된 패션 센스가 앤의 매력을 끌어올렸다. 진주로 장식된 모자도 그녀가 프랑스에서 가지고 와 유행시킨 것이다.

1533년 1월에 앤이 임신한 사실을 안 헨리 8세는 이혼을 금하는 로마 교회와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앤과 비밀리에 결혼한다. 서자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없기 때문이다.

노년에 극도로 살이 찐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젊은 시절의 헨리 8세는 키가 크고 날씬한 절세의 미남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의 유럽 궁정에서 제일가는 지식인으로, 문무도 겸비한 왕이었다. 운동과 무예, 음악에 이르기까지 그의 재능은 끝을 몰랐다. 작곡에도 재능을 발휘해 성가를 몇 곡인가 남겼을 정도다.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 감금되어 있던 캐서린은 메리 왕녀와의 면회나 편지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헨리와의 이혼을 인정하지 않은 채, 1536년 1월 7일에 하늘의 부름을 받는다. 한편 새로운 왕비 앤은 그 후 두 번의 임신을 하지만 모두 유산하고 만다. 두 번째 유산은 캐서린이 죽고 난 뒤 몇 주 후의 일이었다.

 

헨리8세의 초상화가 번뜩 지나간다. 영화 천일의 앤에서 나탈리 포트만의 외모는 앤 불린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94쪽

중세 이래로 예수만이 정면상으로 그려지는 것이 전통적이었다. 따라서 이 초상은 앤(헨리 8세 네 번째 왕비 앤 오브 클레베)이 성상 숭배를 금하는 개신교도임을 뜻한다. 그와 동시에 ‘선보기용’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묘사하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잉글랜드로 시집 온 앤을 본 헨리 8세는 “그림과 다르다!”며 격노했고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왕과 부부의 연이 끊어진 앤 오브 클레베는 ‘왕의 여동생’의 칭호를 받고 아무 불편 없이 생활하다가 잉글랜드에서 생을 마쳤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헨리 8세의 여섯 왕비 중에서 가장 평온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겠다.

왕의 눈밖에 났어도 목숨 부지했으니 평온한 인생이었다고 하는 게 틀린 말이 아니다. 

100쪽

두 살하고도 8개월 때에 어머니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왕녀의 신분에 있던 엘리자베스(1533-1603)는 단번에 왕위 계승권이 없는 서녀로 취급을 당하게 된다. 엘리자베스가 열 살이던 1543년, 헨리 8세의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1512-1548)가 시집을 온다. 새로운 왕비 캐서린은 헨리 8세와 견줄 만큼 교양이 있고, 신앙심이 매우 두터운 여성이었다. 사랑이 많은 그녀는 헨리 8세에게 부탁해 서녀 신분에 있던 엘리자베스와 이복언니인 메리(메리1세. 1516출생. 재위 1553-1558)의 신분을 왕녀로 복귀시켜 주었다.

바람직한 새엄마일세.



참고로 손가락이 이상할 정도로 눈에 띄게 그려졌지만 화가의 실수는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자랑스레 여겼던 만큼 늘 일부러 눈에 띄게 했다. (13세의 엘리자베스 왕녀 초상화)


내 생각엔 첫번째 초상화의 손이 제일 자연스러워 보인다.


103쪽

메리1세는 1554년, 국민감정을 무시하고 사촌 형제인 신성 로마 황제 카를5세의 아들이자 열한 살 연하의 펠리페(1527출생. 재위 1556-1598)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 결혼은 국가에도 그녀에게도 불행을 가져왔다. 당시로서는 나이 많은 신부였던 메리는 자식을 갖고 싶은 나머지 펠리페에게 몇 번이나 임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상임신이었고, 실제로는 난소종양을 앓고 있었다. 메리는 펠리페에게 빠졌지만 그 사랑은 일방통행. 그녀와 잘 맞지 않았던 펠리페는 1556년에 스페인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돌아갔다가 1년 6개월 후에 잉글랜드로 되돌아와서도 3개월밖에 같이 살지 않았다. 그리고 펠리페가 다시 돌아온 이때의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에 휘말려 대륙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영토 칼레를 잃게 된다.

1558년에 마흔두 살의 메리 1세는 난소종양으로 사망한다. 그녀는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앤 불린으로 인해 자신의 어머니인 캐서린과 헨리 8세가 이혼한 것 때문에 엘리자베스를 증오했다.

1554년에는 모반의 죄를 씌워 엘리자베스를 두 달 정도 런던탑에 투옥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를 유죄로 만들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유폐르르 풀어주어야 했다. 이복자매는 화해하지 않았다. 메리는 죽기 전날에야 비로소 자신의 후계자로 엘리자베스를 지명할 정도였다.

얼굴에서 고집과 심술, 노여움이 모두 읽힌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자연스럽다. 그녀의 생을 돌이켜보건대.

 


126쪽

1558년 4월 28일, 늘씬한 미녀로 자란 메리와 어린 시절부터 궁정에서 함께 자란 프랑수아 황태자의 결혼식이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같은 해 11월 17일에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 여왕으로 즉위한다. 하지만 프랑스 왕 앙리2세는 잉글랜드를 프랑스의 영토로 만들고자 하는 야심 때문에, 가톨릭교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워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을 무효라고 지적하며 엘리자베스를 왕위 약탈자로 규탄한다. 앙리는 헨리 7세의 증손인 메리야말로 스코틀랜드 여왕이자 프랑스 황태자비이며 진정한 잉글랜드 여왕이라고 선언했다. 로마 교황청 역시 엘리자베스를 서녀로 인정하며 앙리2세의 손을 들어주고는, 메리1세의 뒤를 이을 왕위 계승자는 메리 스튜어트라고 주장했다.

이에 메리는 악의 없이 자신의 문장에 잉글랜드의 왕관을 집어넣는데, 이 일로 엘리자베스는 크게 격노한다. 엘리자베스의 출생을 부정하고 그녀가 정식 왕위 계승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로마 교황과 프랑스 왕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내에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금수저를 뛰어넘어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정치적 식견을 별로 없었나보다. 하다 못해 눈치도 없었나보다. 그녀가 상대하기에 엘리자베스 1세는 노련미의 정수랄까.


127

메리는 열다섯 살에 인생의 정점을 맛보지만 그 후의 삶은 급격히 달라진다. 결혼한 이듬해의 7월 10일, 시아버지인 프랑스 왕 앙리2세가 서거한다. 곧 그녀의 남편이 열다섯의 나이로 프랑수아 2세에 즉위하고 메리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왕태후가 된 카트린은 어린 시절부터 병약했던 프랑수아2세의 치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왕위 계승자인 차남 샤를(훗날 샤를 9세, 재위 1561-1574)이 즉위해 섭정을 하며 권력을 휘두를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128

1560년 11월 중순, 선천적으로 이비인후과 계열의 지병을 갖고 있던 프랑수아 2세는 중이염이 발병하면서 쓰러지고 만다. 프랑스 제일의 외과의사가 귀를 절개하고 고름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면 생명은 구할 수 있다고 진단했지만, 어머니 카트린은 수술을 거부한다. 고름이 뇌까지 찬 프랑수아는 1560년 12월 5일에 16년의 생애를 마쳤고, 그로부터 사흘 후면 열여덟 살의 생일을 맞이하는 메리는 미망인이 되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와 그녀의 자녀들도 동시대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 못지 않은 드라마를 연출했다. 동시대에 한꺼번에 말이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여왕 마고'를 보고 오셔서 너무 재밌었다며 독이 묻은 책장을 침묻혀 가며 넘기던 장면을 묘사해주시던 게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정작 이 영화를 보지 못했구나. 황미나 작품 '불새의 늪'은 아주 재밌게 보았지만.


130

수도 에든버러에 도착한 메리는 왕권의 무력함을 실감하고, 당장 이복오빠인 제임스 스튜어트(1531-1570)에게 섭정을 맡긴다. 참고로 당시는 제임스가 개신교였듯이 스코틀랜드인 대부분이 개신교로 개종한 상태였다. 반면 메리는 타국에서 자란 데다 젊은 여성이며 가톨릭 교도였다. 사실상 혼자의 힘으로 나라를 통치하기란 어려웠다.

134

메리 앞에 세 살 연하의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1545-1567)가 나타났다. 그는 메리와 같은 가톨릭 교도이자 스튜어트 가의 일원이었다. 메리와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2세(재위 1437-1460)의 자손이면서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증손이기도 했으므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국의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135

두 사람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주위에서는 거세게 반대했다. 특히 메리가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단리와 결혼하는 데 위협을 느낀 엘리자베스의 반대는 대단했다. 심지어 그녀는 메리에게 자신이 추천한 로버트 더들리와 결혼하면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약속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메리는 이미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고국에서도, 잉글랜드에서도 메리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한다. 일찍이 남편이 죽은 프랑스야 말해 무엇하랴. 다 갖고 태어났지만 참 외로운 인생일세.


143

메리는 암살미수범이 아닌 가톨릭의 순교자로서 처형에 임하기로 결심한다. 처형대가 그녀가 마지막으로 빛나는 무대가 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도 두 달 반 동안 메리의 사형 선고서에 서명을 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그러나 마침내는 서명하여, 마흔네 살의 메리는 1587년 2월 8일에 포더링게이 성에서 처형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명예로운 순교’였다. 순교자를 상징하는 색인 붉은 드레스를 입은 메리의 마지막은 그녀를 비롯해 그곳에 함께한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끔찍했다. 사형 집행인이 목을 한 번에 베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힘을 다해 참수하고, 가발인 줄도 모르고 적갈색의 마리를 잡자마자 메리의 목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헨리 8세가 앤 불린을 위해서 마지막에 베푼 온정이 참수대에 쓸 도끼날을 아주 날카롭게 벼린 걸 쓰게 했다고... 얼마 전에 들은 '글로벌 한국사 그날 세계는'에서 이원복 교수님이 얘기했던 게 떠오른다. 이거 책을 내가 산 것 같은데 어디다가 꽂았지??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아직 결제 전인가???



찰스1세 아들 찰스2세와 제임스2세


180쪽

반다이크의 그림 ‘난쟁이 제프리 허드슨 경과 함께 있는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의 초상’

프랑스에서 갓 시집온 헨리에타에게 버킹엄 공작 부부가 보낸 사람이 바로 일곱 살의 제프리였다. 그는 헨리에타의 궁정에서 생활하며 교육받았는데, 당시의 유럽 궁정에서 난쟁이는 드문 존재는 아니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나오는 못생긴 아이가 사실은 아이가 아니라 혹시 난쟁이였을까? 아님 궁정의 난쟁이는 남자만 해당할까??


195쪽

부르봉가가 스페인을 지배하기 시작할 무렵, 프랑스에서는 경쾌한 로코코(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 등이 특징인 양식) 예술이 꽃피려 하고 있었다. 이 로코코 예술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는 여성이 바로 퐁파두르 부인이다. 물론 그녀가 로코코 예술의 창시자는 아니다. 그녀는 세련된 ‘좋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었고 자신의 취미로 프랑스 궁정 문화를 수놓았다. 훗날 퐁파두르 부인이라 불리게 되는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은 1721년에 태어났다. 평민 출신이면서도 예술을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당시의 여성치고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잔 앙투아네트가 아홉 살쯤 되었을 때 어머니가 유명한 예언자에게 그녀를 데려간다. 예언자는 그녀에게 “왕비는 아니나 그에 가까운 사람이 되리.”라고 말했다. 당시의 프랑스에서 그 말은 곧 국왕의 ‘공인된 총희’를 의미했다.

196쪽

1745년 2월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왕의 적자인 루이 왕태자(1729-1765)의 결혼을 축하하는 가면무도회가 열렸다. 이때 서른다섯 살의 국왕과 이십대 초반의 잔 앙투안제트는 사랑에 빠진다. 부르봉 왕조 최초의 미남이었던 루이 15세는 내성적이면서도 여색을 매우 탐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총희 샤토르 부인을 잃은 지 얼마 안 되는 왕은 잔 앙투아네트에게 빠져 어떻게드는 그녀를 총희로 삼아 베르사유에 있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을 공인된 총희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왕의 공식 총희는 귀족 출신의 기혼 여성이어야 한다는 규율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분에 관한 문제는 국왕이 해결해 주었다. 후작 작위를 부활시키고 퐁파두르라는 이름의 영지를 하사함으로써, 잔 앙투아네트는 퐁파두르 후작부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후작부인이 된 그녀는 1745년 9월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왕, 왕비, 왕태자, 왕녀들에게 인사를 하고 ‘공인된 총희’로서 정식으로 선을 보인다. 드디어 약 20년 동안 궁정의 진정한 여주인으로서, 또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의 그림자 같은 재상으로서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숙부로부터 전해들은 그녀의 남편은 경악했고, 평생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198

점잔을 빼는 귀족 여성들과 달리 밝고 솔직하며 친절한 성격의 그녀는 국왕뿐 아니라 그녀를 적대시하던 이들의 마음까지 사로잡는다. 그녀의 세심한 배려가 통했는지 루이 15세보다 일곱 살 연상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1703-1768)마저도 그녀를 인정하게 된다. 왕이 자신에게 상냥해진 까닭이 퐁파두르 부인 때문임을 왕비는 알고 있었다.

199

1752년에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부인에 대한 배신행위를 참회하며 그녀의 직위를 공작부인으로 높였다. 하지만 그녀는 신분 상승에 따라오는 특권은 누리면서도 왕비에게 경의를 표하고 스스로는 후작부인이라 말하며 몸을 낮추었다.

퐁파두르 부인이 왕의 애인으로서 잠자리를 함께 한 것은 5년 정도였고, 이후로는 친구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육체적으로 관능미와는 거리가 먼 여성이어서 침실에서 국왕을 상대하는 일을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퐁파두르 부인의 헌신에 만족했던 루이 15세는 새로이 ‘공인된 총희’를 둘 생각은 없었다. 대신에 그녀는 따로 사슴 정원이라고 불리는 베르사유 시내의 저택에 시종들이 찾아낸 루이 15세가 좋아할 만한 여자들을 지내게 하면서 왕을 모시도록 했다. 사슴 정원의 여자들은 매춘부들이 많았는데, 퐁파두르 부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에게 대항할 만한 강력한 라이벌보다는 교양이 없는 이 여인들이 덜 위협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200

하지만 프랑스 국민들에게 퐁파두르 부인은 강한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녀를 적대시한 일부 궁정 사람들이 퍼뜨린 소문들은 국민의 악감정에 불을 지폈다. 전통적으로 프랑스 국민은 외국 출신의 왕비를 싫어했는데, 전 폴란드 왕의 딸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는 선량한 인품 덕분에 인기가 있었다. 궁정 사람들에게는 따분하다고 평가되던 왕비의 성격도 가치관이 다른 민중에게는 좋게 비쳐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프랑스에서는 통치 능력이 부족한 국왕이나 외국 출신의 왕비가 국민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기보다 공인된 총희가 미움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예술사를 되돌아보면 퐁파두르 부인이 프랑스 문화에 끼친 영향은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대단했다. 박식하고 세련된 취미를 가진 그녀는 재능 있는 예술가를 후원하고, 독일의 마이센 자기와 견줄 수 있는 도자기를 프랑스에서도 만들어야 한다며 세부르 자기의 발전을 이끌었다. 당시의 프랑스에서 그녀만큼 좋은 후원자는 찾기 힘들었다. 또 프랑스의 발전을 위해 백과전서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퐁파두르 부인은 이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루이 15세에게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설득했다.

202

당시의 귀족 여성 중에 독서가 취미인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사회적인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책을 모으는 일은 있어도 어디까지나 컬렉션일 뿐, 애독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그림 속에서 아름답게 앉아 있는 퐁파두르 부인은 실제로 책을 손에 들고 있다. 뒤의 캐비닛에 있는 책들도 자연스럽게 진열돼 있어, 장식이 아님을 보여준다. 독서는 궁정의 인간관계 등 골치 아픈 일들을 잊게 해주는 최고의 친구였다. 실제로 그녀는 상당한 양의 책을 수집했고 그녀가 죽은 이듬해에는 장서 3525권이 팔려 나왔다고 한다. 즉, 이 초상화는 퐁파두르 부인의 높은 지성을 강조한 작품이다. 오른손에 놓인 편지는 정무에도 관여했던 그녀의 정치적 지위를 드러낸다. 퐁파두르 부인은 ‘그림자 재상’답게 대신을 임명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잃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던 7년 전쟁(1756-1763)에서는 군대를 지휘한 적도 있었다. 육군사관학교도 퐁파두르 부인의 제안으로 창설되었다. 하지만 퐁파두르 부인은 1764년 4월 15일에 결핵으로 사십대 초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이지은 작가의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에서 퐁파두르 부인과 화가 부셰에 대한 이야기를 재밌게 읽었다. 부르주아의 유쾌한 사생활도 소장하고 싶은데 출판사조차 망한 건지 찾을 길이 없다. 역시 도서관밖에 답이 없나보다. 


213쪽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찾아온 불행의 씨앗은 남편인 루이 16세(1754-1793, 재위 1774-1792)가 선대의 루이 15세처럼 공인된 총희를 두지 않은 데 있다. 남편이 성실하고 부인밖에 모른다면 감사해야 할 일이지 부인에게 불행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총희의 그늘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는 왕비에게 익숙했던 프랑스인들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틈만 나면 나서는 것처럼 비쳐졌다. 그녀가 정치적으로 참견을 한 적도 있지만, 실제로 루이 16세는 왕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왕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기가 약한 국왕이 나서기 좋아하는 왕비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왕의 사생활이 난잡하지 않고 가정적이었던 것이 이런 부작용을? 인과관계가 잘못 되었지만, 타이밍이 나쁘긴 했다.


226쪽

군주의 결혼은 소위 기업 간의 계약서 같은 것이라 여기는 궁정 사람들은 황제나 국왕이 총희를 두는 데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의 러시아 궁정에서는 소국인 헤센 공국의 대공녀 출신 황후가 황제의 부정에 대해 불만스러워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태도로 비쳤다. 초상화 속 그녀는 외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역시나 빈터할터의 작품답게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 알기는 어렵다. 외모만 아름답게 그리고 모델의 내면을 반영하지 못한 빈터할터에게 미술사에서 야박한 점수를 매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진중함’을 최상의 미덕으로 여긴 19세기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모델의 내면을 표현하지 않는 그림은 최상의 고객 서비스였으리라.


왼쪽의 엘리자베트 초상화는 뮤지컬 엘리자벳 때문에 눈에 익숙하다. 작품 속 드레스를 엘리자벳 역을 맡은 배우들이 입고 나오는데, 옥주현은 왕비의 미모에 적격이었다!


초상화에 이어 사진 이야기도 있었다. 



사진의 역사는 거의 200년이구나. 


드레스 하니 TBDRESS에서 처음으로 직구 해보고 두달에 걸쳐 배송받았던 힘겨운 기억이 떠오른다. 그 사이트는 드레스가 제일 예뻤지만 사서 입을 데도 없고 보관할 데도 없다. 가격만 착할 뿐!


책은 몇달 전에 읽었고, 한글 문서에 삽입했던 사진을 다시 찾아서 리뷰를 쓰려니 손이 고생이다. 역시 읽고 바로바로 리뷰를 쓰는 게 가장 좋지만 아직도 밀린 리뷰는 줄줄이...  분발하자.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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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2-12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마노아님 ,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마노아 2016-02-12 18:57   좋아요 1 | URL
어느새 금요일이네요. 서니데이님도 불금 즐겁게 보내셔요~ 오늘 같은 날씨엔 뜨거운 국물을 추천합니다.^^

단발머리 2016-02-14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은 힘들었겠지만.... ㅎㅎㅎ 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네요.
메리 여왕 사진 보고, 와... 진짜 심술궂게 생각했는데, 진짜 힘든 삶이었군요.
죽을 때까지 고생이 많았어요...

옥주현 엘리자벳 사진도 눈에 쏙 들어오구요.
제가 그 공연 봤을 때는 엘리자벳이 옥주현이랑 김소현이었는데, 저는 남자배우들은 보지도 않고,
와하... 진짜 이쁘다. 와하... 진짜 이쁘다, 이러면서 프로그램을 정신없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는...

마노아 2016-02-16 01:00   좋아요 0 | URL
그쵸? 그 드레스 정말 너무 예뻤어요. 배우가 빛나니까 더 멋지더라구요.
손 꼽는 뮤지컬인데 할 때마다 다시 보려구요. 완벽해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도 이야기 거리가 많을 텐데 작품 하나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럼 메리 여왕도 같이 출연하겠네요. 안타까운 조연이 될듯요...;;;
 
그들의 무덤은 구름 속에 -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아우슈비츠 이야기
아네트 비비오르카 지음, 최용찬 옮김 / 난장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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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기 전까지는...


이 책은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아우슈비츠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모녀는 여름 휴가 때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났는데 열세 살 어린 딸에게 이 끔찍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여러 주에 걸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이때의 만남을 갖기 전 학교 숙제로 족보를 그린 적이 있었다. 외가와 친가의 가계도를 그리고 증조 할아버지 대에까지 올라가니 아우슈비츠에서 돌아가셨던 일족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아이에게는 이 이야기가 그저 과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자기 가족의, 자기 이웃의 현재 이야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이는 아우슈비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역사가인 엄마는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눈높이에 맞추어 대답을 풀어나갔다. 아이는 다시 질문하고, 엄마는 다시 답했다. 그렇게 이어지는 설명들은 쉽게 풀었지만 어린이들만 만족시킬만한 내용인 것도 아니다. 곰곰 되씹어서 다시 소화시키게 만드는 양서임에 분명하다. 


아이의 눈높이를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분명 이 주제는 무겁고 부담스럽다. 하지만 저자는 질문에 대한 답을 피하지 않고, 어린 딸 마틸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가면서 이 책의 주제는 다섯 가지로 모아진다. 


첫째, 반유대주의의 기원

둘째, 유대인 학살

셋째, 바르샤바 게토의 생활조건과 봉기

넷째, 학살 책임의 소재

다섯째, 기억의 의무


그저 이런 끔찍한 사건이 있었단다-하고만 끝내서는 아무 깨달음도 남길 수가 없을 것이다. 그저 머나먼 나라의 웬 미치광이가 저지른 학살쯤으로 치부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에 '기억의 의무'로 정리한 것이 인상 깊다. 그게 얼마나 필요한지, 또 얼마나 중요한지를 저 주제에 우리 역사를 대입해 보아도 쉽게 나오지 않겠는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혹은 라이따이한 등등...



책에 나온 이 사진을 찍고서 고민이 되었다. 여기에 포함시켜도 될까 싶어서.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로 사진의 크기를 줄였다. 단지 숫자로는 막연히 감 잡을 수 없는 현장의 한 대목을 짐작하게 하고 싶어서.


이럴 때는 또 영화가 크게 한몫을 하기도 한다.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사라의 열쇠, 더 리더 등등... 함께 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영화들이 많이 있다. 또 옮긴이가 함께 추천한 유타 바우어의 책들도 찾아보려고 한다. 


오늘 어떤 방송을 들으면서 출연자가 한창훈 씨의 말을 빌려 소수의 몇몇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인류에게, 세상에 더 큰 도움을 준다는 말을 했다. 그만큼 인간이 손을 대어 망가지고 버려지고 나빠지는 것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인간들이지만 그럼에도 한걸음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기록하고 기억하고 반성하는 인간이 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끔찍했던 인간의 흔적을 빌려서 또 인간에게서 희망을 보게 하는 책이다. 진솔한 역사 교육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반듯한 길잡이이기도 하다. 품절 도서라는 게 안타깝지만, 도서관을 이용해서라도 일독하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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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연대기 2 - 프랑스 혁명전쟁부터 이란-이라크 전쟁까지 전쟁 연대기 2
조셉 커민스 지음, 김지원.김후 옮김 / 니케북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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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성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사망했다.

한달 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물론 목표는 세르비아라기보다 그 뒤의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믿는 빽이 있었다.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잘 훈련된 군대를 가진 독일이 동맹국으로 버티고 있으니까.

독일은 러시아를 향해, 이어서 프랑스, 영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물론 영국도 가만 있지 않았다. 일주일 사이에 협상국과 동맹국은 서로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탈리아 빼고.


암튼, 바로 그 독일의 선전포고에 열광하는 군중의 사진을 담은 것이다. 모두가 전쟁을 싫어하고 피하려고만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 들끓는 피를 주최하지 못하며 전쟁에 광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독일만 그랬던 건 물론 아니다. 그러나 저 사진은 중요한 인물을 담고 있으니, 저 동그라미 안에 있는 인물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히틀러다. 1차 대전 때에도 이미 그는 전쟁의 광기 속에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세상에, 저 사진을 찾아낸 사람이 더 대단해 보인다. 


전쟁으로 활기를 찾은, 천직을 찾아내고 기뻐하는 히틀러를 보니 황국 최후의 군인 박정희가 떠올랐다. 교사로 재직할 때는 성정에 맞지 않아 했던 박정희는 혈서까지 쓰고서 천황을 위해 봉사하는 군인이 되었다. 학생 때 그가 가장 좋은 점수를 받은 과목도 교련이었다지. 독립군 때려 잡으러 출정할 때 가장 흥분했었더라는 증언도 들은 기억이 난다. 라디오 백년전쟁 이전 제목이 뭐였더라? 아니, 라디오 반민특위에서 들었나 보다. 


전쟁은 1918년에 끝났다. 4년 넘게 끈 전쟁이었다. 낙엽이 지기 전에 돌아오겠다던, 6주면 충분하다던 독일 황제의 장담은 지켜지지 못했다. 독일의 황제 빌헬름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네덜란드는 도망친 황제의 인도를 거절했다. 쫓겨난 황제는 천수를 누렸고 80넘어서야 숨을 거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독한 놈들이 더 오래 사는 것 같아.ㅡ.ㅡ;;;;


미국은 1917년 4월에야 이 전쟁에 끼어들었다. 이제까지 전쟁 특수로 경제적 이득도 충분히 취했고, 때마침 미국이 참전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명분도 생겼다. 미국의 개입은 연합국에게 큰 힘이 되었다. 매달 20만 명 이상의 군사가 투입되었고, 양질의 보급품 덕에 얼굴에 나름 윤기도 생겼을 것이다. 반면 보급에 큰 차질을 빚은 독일 군사들은 면역력 저하로 크게 고생하였다. 때는 1918년. 스페인 독감이 막 활개치던 시점이 아니던가. 특이하게도 이 바이러스는 노약자보다 2,30대 젊은이에게 더 잘 퍼지는 강력한 A형 바이러스를 가졌다. 문득, 에볼라 바이러스가 생각나는구나. 


전쟁으로 1천만 명 가까운 군인이 죽었다. 부상자는 2천만 명이 넘고, 민간인 희생자도 천만을 아우른다. 당시 세계 인구는 20억이 되지 않았는데, 4,500만 명 정도의 희생자를 낳았다. 보수적으로 4천만 잡고, 세계 인구도 반올림해서 20억이라 쳐도 50명당 1명 꼴로 이 전쟁의 피해를 입은 것이다. 가히 세계'대'전이라 불릴 만한 희생이다. 물론, 이 숫자는 20년 뒤 다시 갱신되지만.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저만큼인데, 스페인 독감이 20년대에 내린 심판도 그 비슷한 희생을 낳았다. 2,000만에서 4,000만까지 잡는다.


다시, 트와일라잇이 생각났다. 주인공 에드워드가 스페인 독감으로 17세에 죽어가던 것을 뱀파이어 칼라일이 물어서 불멸의 생명을 주었다. 그래서 영원히 17세에 멈춰있는 미오의 소년 에드워드!


아, 너무 멀리 갔다. 하여간 이 책, 사진도 훌륭하고 편집도 깔끔하고 내용도 충실하다. 사두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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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릴로 프린치프 - 세기를 뒤흔든 청년
헨리크 레르 글.그림, 오숙은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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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린다. 저격 대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대공비. 대공비가 먼저 숨을 거뒀고, 총독 관저에 도착한 대공도 이어서 숨을 거뒀다. 이 사건은 안 그래도 화약통 같았던 발칸반도 위에 불씨를 떨어뜨린 결과가 되었으며, 정확히 한 달 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러시아가 세르비아의 뒤에 서서 역시 선전포고를 했고, 독일이 협상국 측으로, 협상국은 다시 동맹국 쪽으로 맞 선전고포를 하며 대 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단기전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예상과 달리 장기전이 되었으며 전 세계를 큰 혼란으로 몰아가는, 인류 역사상 이전에 없던 큰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다. 사라예보에서의 총성이 없었어도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도화선이 된 것은 황태자 부부의 죽음이 맞고, 그 죽음을 가져온 청년은 세르비아의 가브릴로 프린치프다. 이 책의 주인공!


사건 당시 가브릴로는 19세였다. 오스트리아 법에 따라 미성년자였던 관계로 사형판결은 피했고 징역 20년을 선도받지만 전쟁이 끝나기 몇 달 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얼마만큼의 증오가 따라오면, 얼마만큼의 각오가 다짐되면 19세 청년이 이런 과격한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일까? 하긴,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찔렀을 때 스무 살이었고, 윤봉길 의사가 물폭탄을 던졌을 때는 24세였다. 100년 전의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보다 좀 더 어린 사람이 좀 더 어른으로 인식되기는 했었다. 또 시절이 하수상할 때에는 일찍 철들 수밖에 없는 게 또 인간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그림으로는 절대 자기들 나이로 안 보인다. 거사 몇 년 전 연애 시작할 때의 모습인데 십대 중반의 나이로는 결코...;;;;)


발칸반도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의 먹잇감이 되기 좋았다. '녹색의 땅'이란 뜻 답게 푸르고 기후도 온화했고,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이 만나는 곳인지라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에 딱 좋았다. 늘 바다로 나갈 출구전략만 찾는 러시아의 눈독을 받아야 했고, 그런 러시아를 견제하는 영국이 중동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 밟아야 하는 땅이었다. 고대로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로마제국의 침략대상이었고, 훈족의 침입에 이어 십자군 전쟁 때도 살육의 현장이 되었으며, 칭기즈칸의 몽골군대도 어김 없이 지나간 땅이었다. 이런 복잡한 역사 덕분에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았고, 마찬가지로 여러 종교가 뒤섞였으며, 여기에 이념분쟁까지 끼어들었으니 유럽의 화약고란 표현이 결코 지나치지 않다. 


발칸반도는 400년 이상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에 이어 18세기까지는 세계 경제대국 2위를 자랑하던 나라였다. 하지만 청나라가 종이호랑이였다는 것이 증명되던 그 시점에 오스만 투르크도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했고, 이탈리아에게도 졌다. 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본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는 똘똘 뭉쳐서 오스만 투르크와 맞붙었다. 1912년 1차 발칸 전쟁이다. 전쟁은 어이없게도 두 달 만에 오스만 투르크의 패배로 끝났고, 이 늙은 제국은 발칸반도의 영토 대부분을 잃는다. 좀전까지 한 편이었지만,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들은 다시 분열해서 싸웠고, 마케도니아를 삼키려고 했던 불가리아가 다른 발칸반도 나라들에게 몰매를 맞는다. 1913년 2차 발칸전쟁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일년 전의 일이었다. 


전리품을 챙겼던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08년에 병합해 버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때문에 신경질이 난다. 남슬라브족의 왕국을 세울 기회를 오스트리아 때문에 놓쳤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자가 자신들이 놓쳤다고 여기는 땅 보스니아에 온다. 그것도 자신들이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해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던 날짜, 비도브단의 날에 온다. 민족감정을 건드렸다는 이야기이다. 


무슨 근거없는 자신감이었을까. 자신들의 날개 아래에서 보스니아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여긴 것일까? 암살 위험에 대한 경고가 누차 제공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그것도 '그날'을 꼭 집어서 보스니아를 방문한 것은...


아무튼 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 황제는 아들은 자살, 아내(엘리자벳 황후)는 암살로 잃고 후계자로 내세운 조카마저도 잃었다. 그리고 거대한 전쟁이 시작되었고, 군인만 1000만 명 가까이 사망하고 부상자는 2천만 명이 넘으며 민간인 희생자도 1,100만 명을 아우르는 어마어마한 대전이 일어난다. 


물론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이 전쟁의 결과를 보기 전에 죽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서 이 전쟁의 결과를 안다 할지라도 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할 것 같지는 않다. 그는 확실한 확신범이었으니까. 





거사에 참여한 일곱 명은 모두 '검은 손' 회원이었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이 그들의 모토였다. 아버지가 사제였던 트리프코 그라베주는 늘 아버지의 업신여김을 받곤 했는데, 그런 아버지가 아들이 하려는 일을 짐작하는 순간 지지해 주는 장면이다. 종교를 넘어서는 민족감정이 한편으로 섬뜩했다. 물론 민족을 뛰어넘는 종교는 더 끔찍하지만...



덴마크 만화가의 작품인데 그림체가 독특하다. 그래픽 노블 같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판화로 그린 것 같기도 한데 또 인물이 등장한 걸 보면 펜으로 그린 것 같고... 둘을 섞어서 작업했을지도. 확실히 가브릴로가 태어날 때를 묘사한 저 장면들은 판화 그림을 연상시킨다.


이 거대한 세계대전의 결과는 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전쟁에 불씨를 제공한 세르비아는 승전국이 되어 주변 나라들을 통합해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되었고, 곧 몬테네그로와 마케도니아 일부 지역까지 합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되었다.(유고슬라비아는 '남슬라브족의 나라'라는 뜻) 그 유고슬라비아가 지금은 없는 나라가 되었고, 다시 해체되기까지 인종청소까지 해가며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를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그러니까 마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당연히 잘못한 일인데, 그 유대인이 세운 나라 이슬라엘이 지금 주변 나라들에게 하고 있는 학살을 생각하면......


의열단이나 한인애국단 같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을 대상으로 치룬 거사들은 그래 마땅했다고 여겨지는데, 낯선 이름들의 외국에서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모두 공감이 가질 않는다. 익숙하지 않은 것도 이유겠지만, 일단 그로 인해 일어난 파장이, 그 결과의 규모가 너무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만약 이 책에서 오스트리아의 압제가 이들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또 세르비아와 마찬가지로 보스니아도 남슬라브족의 대통합을 간절히 바랐던 게 드러났다면 조금 다르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슬라브 민족주의자이며,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해방된 범남슬라브족의 통일을 믿습니다. 

나는 테러로써 그 목표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사악한 것을 파괴했으니, 나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나는 내가 선한 일을 행하였다고 믿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생각이 자라났고, 그래서 우리는 암살을 결행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우리 민족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나를 변론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1914년 10월 23일, 사라예보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범정 최후진술  -227쪽



민족주의는 언제나 뜨겁다. 청년의 피를 뜨겁게 달구기도 하고, 누군가의 광기를 자극하여서 집단 학살에 첨여하게도 만든다. 이것이 '애국심'과 결합하면 그 힘은 더 커지고 파괴력도 덩달아 커진다. 너무 없는 것도, 너무 많은 것도 문제가 되는 성질의 것이다. 


이런 혼란감을 주고 또 곱씹어 보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을 읽은 가치이며 또 메시지가 된다고 생각한다. 인류가 거쳐온 탐욕의 역사도 함께 보았다. 그리고 오늘따라 절절하게, 이 노래가 생각난다. 




존 레논 imagine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Ah -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Any You -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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