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킨토시가 만든 자세한 예시들 덕분에 많은 백인들이 자신의 특권을 돌아볼 수 있었다.
...
-내가 승진에 자꾸 실패한다면 그 이유가 성별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내가 밤에 공공장소에서 혼자 걷는 걸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책임자를 부르면 나와 같은 성별의 사람을 만날 것이 거의 분명하다. 조직에서 더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확신할 수 있다.
-내가 운전을 부주의하게 한다고 해서 나의 성별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많은 사람과 성관계를 한다고 해서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외모가 전형적인 매력이 없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며 무시할 수 있다.-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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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0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15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2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4 0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 역사가 말하다 - 전우용의 역사이야기 300
전우용 지음 / 투비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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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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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4-09-24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쓴 카테고리가 디폴트 값으로 되는구나. 북플에서 보면 책 표지가 꽉 차게 나오는데 그게 아주 예쁘다. 냄비받침 받았을 때처럼 가슴이 왈랑거렸다. 사진의 여백을 자를 수 있는 기능이 있거나 글자 부분만 인식해 주면 좋겠다.
사진 위에 펜으로 글씨 쓰듯 낙서하는 기능은 많이 어려우려나?

마노아 2014-09-24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니까 페이지 적는 칸도 필요하겠다. 인상깊은 구절 적는 칸에...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442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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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등장한 '말'이 그 말이었구나. 

'모두 다 예쁜 말들'이 떠오른다.

어떤 나무의 말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棺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9쪽

뿌리로부터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10쪽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

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
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나는 물거품 속으로 들어간다

이 해변에 이르러서야
히히히히힝, 내 안에서 말 한 마리 풀려나온다

말의 눈동자,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가라, 가서 돌아오지 마라
이 비좁은 몸으로는

지금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
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
-18쪽

호모 루아


호모 파베르이기 전에
호모 루아*, 입김을 가진 인간

라스코 동굴이 폐쇄된 것은
사람들이 내뿜은 입김 때문이었다고 해요
부드러운 입김 속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세균과 독소가 들어 있는지
거대한 석벽도 버텨낼 수 없었지요

오래전 모산 동굴에서 밤을 지낸 적이 있어요
우리는 하얀 입김을 피워 올리며
밤새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의 투명성을 믿던 시절이었어요
노래의 온기가
곰팡이를 피우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몸이 투명한 동굴옆새우들이
우리가 흘린 쌀뜨물에 죽었을지 모르겠어요

입김을 가진 자로서 입김으로 할 수 있는 일들
허공에 대한 예의 같은 것

얼어붙은 손을 녹일 수도
유리창의 성에를 흘러내리게 할 수도
후욱, 촛불을 끌 수도 있지만
목숨 하나 끄는 것도 입김으로 가능해요
참을 수 없는 악취
몇 마디 말로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지요

분노가 고인 침으로
쥐 80마리를 죽일 수 있다니,
신의 입김으로 지어진 존재답게 힘이 세군요
그러니 날숨을 조심하세요
입김이 닿는 순간 부패는 시작되니까요

———
* Homo Ruah. 'Ruah'는 히브리말로 ‘숨결’ ‘입김’을 뜻함
-24쪽

아홉번째 파도

오늘 또 한 사람의 죽음이 여기에 닿았다
바다 저편에서 밀려온 유리병 편지

2012년 12월 31일
유리병 편지는 계속되는波高를 이렇게 전한다

42피트···쌍용자동차
75피트···현대자동차
462피트··영남대의료원
593피트··.유성
1545피트··YTN
2161피트···콜트-콜텍
2870피트···코오롱유화

부서진 돛대 끝에 매달려 보낸
수많은 낮과 밤, 그리고 계절들에 대하여
망루에서, 광장에서, 천막에서, 송전탑에서 나부끼는 손에 대하여
떠난 자는 다시 공장으로, 공장으로,
남은 자는 다시 광장으로, 광장으로, 떠밀려가는 등에 대하여
밀려나고 밀려나 더 물러설 곳이 없는 발에 대하여
15만 4000볼트의 전기가 흐르는電線 또는 戰線에 대하여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불빛에 대하여

사나운 짐승의 아가리처럼
끝없이 다른 파도를 몰고 오는 파도에 대하여
결국 산 자와 죽은 자로 두동강 내는
아홉번째 파도에 대하여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젖은 종이, 부서진 문장들,
그들의 표류 앞에 나의 유랑은 덧없고
그들의 환멸 앞에 나의 환영은 부끄럽기만 한 것

더이상 번개를 통과시킬 수 없는
낡은 피뢰침 하나가 해변에 우두커니 서 있다
-74쪽

잉여의 시간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일곱,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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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9 0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4-07-29 21:45   좋아요 0 | URL
예! 꼭 필요해요. 4.16 특별법!!!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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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책방 카페에는 이동진이 직접 고르고 한줄 평을 쓴 책들이 꽂혀 있다. 제일 먼저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이 책이었는데, 나를 흠뻑 빠지게 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이란 표현은 시인의 것이었다. 그래서 따옴표가 있었던 거구나!

마침 내 가방 속에는 이 시집이 있었다. 


시에 한자가 포함되어 있는 게 좋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그 덕분에 천천히 읽을 수 있었다.

너무 쉬운 한글로만 쓰여 있었다면 휙휙 지나쳤을 문장들을 조금 더 음미하면서 다가갈 수 있었다. 

좋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더 무엇을 보태기 어려운 게 바로 시집이다. 

그래도 역시 좋았다는 말은 남겨 본다. 


덧글) 의도하지 않았는데, 좋다고 표시해둔 시 세 편이 모두 '그'로 시작하는구나. 하하핫!

그 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63쪽

그해 가을

그해 가을 나는 아무에게도 편지 보내지 않았지만
늙어 군인 간 친구의 편지 몇 통을 받았다 세상 나무들은
어김없이 동시에 물들었고 풀빛을 지우며 집들은 언덕을
뻗어나가 하늘에 이르렀다 그해 가을 제주산 5년생 말은
제 주인에게 대드는 자가용 운전사를 물어뜯었고 어느
유명 작가는 남미기행문을 연재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여기 계실 줄 몰랐어요
그해 가을 소꿉장난은 국산영화보다 시들했으며 길게
하품하는 입은 더 깊고 울창했다 깃발을 올리거나 내릴
때마다 말뚝처럼 사람들은 든든하게 박혔지만 햄머
휘두르는 소리, 들리지 않았다 그해 가을 모래내 앞
샛강에 젊은 뱀장어가 떠오를 때 파헤쳐진 샛강도 둥둥
떠올랐고 고가도로 공사장의 한 사내는 새 깃털과 같은
속도로 떨어져내렸다 그해 가을 개들이 털갈이할 때
지난 여름 번데기 사 먹고 죽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후미진
골목길을 서성이고 실성한 늙은이와 천부의 백치는
인골로 만든 피리를 불며 밀교승이 되어 돌아왔고 내가
만날 시간을 정하려 할 때 그 여자는 침을 뱉고 돌아섰다
아버지, 새벽에 나가 꿈 속에 돌아오던 아버지,
여기 묻혀 있을 줄이야

그해 가을 나는 세상에서 재미 못 봤다는 투의 말버릇은
버리기로 결심했지만 이 결심도 농담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떨어진 은행잎이나 나둥그러진 매미를 주워
성냥갑 속에 모아두고 나도 누이도 방문을 안으로
잠갔다 그해 가을 나는 어떤 가을도 그해의 것이
아님을 알았으며 아무것도 미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비하시키지도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내가 네 아버지냐
그해 가을 나는 살아 온 날들과 살아 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벽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가 흩어지기 전까지 세상 모든 눈들이 감기지
않을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들이
이장을 끝내고 소풍 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그해 가을. 가면 뒤의 얼굴은 가면이었다

-66쪽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이성복



어느날 갑자기 망치는 못을 박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벼는 잠들지
못한다 어느날 갑자기 재벌의 아들과 高官의 딸이 결혼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 없이 해고된다 어느날 갑자기 새는 갓낳은 제 새끼를 쪼아먹고
카바레에서 춤추던 有婦女들 얼굴 가린 채 줄줄이 끌려나오고 어느날
갑자기 내 친구들은 考試에 합격하거나 文壇에 데뷔하거나 美國으로
발령을 받는다 어느날 갑자기 벽돌을 나르던 조랑말이 왼쪽 뒷다리를
삐고 과로한 운전수는 달리는 버스 핸들 앞에서 졸도한다

어느날 갑자기 미류나무는 뿌리채 뽑히고 선생은 생선이 되고 아이들은
발랑까지고 어떤 노래는 금지되고 어떤 사람은 수상해지고 고양이 새끼는
이빨을 드러낸다 어느날 갑자기 꽃잎은 발톱으로 변하고 처녀는 養老院으로
가고 엽기 살인범은 불심 검문에서 체포되고 어느날 갑자기 괘종시계는
멎고 내 아버지는 오른팔을 못 쓰고 수도꼭지는 헛돈다


어느날 갑자기 여드름 투성이 소년은 풀 먹인 군복을 입고 돌아오고
조울증의 사내는 종적을 감추고 어느날 갑자기 일흔이 넘은 노파의 배에서
돌덩이 같은 胎兒가 꺼내지고 죽은 줄만 알았던 삼촌이 사할린에서 편지를
보내 온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옆집 아이가 트럭에 깔리고 축대와 뚝에
금이 가고 月給이 오르고 바짓단이 튿어지고 연꽃이 피고 갑자기,
한약방 주인은 國會議員이 된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갑자기, X이 서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주민증을 잃고 주소와 생년월일을까먹고 갑자기,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풀섶 아래 돌쩌귀를 들치면 얼마나 많은 불개미들이
꼬물거리며 죽은 지렁이를 갉아 먹고 얼마나 많은 하얀 개미 알들이 꿈꾸며
흙 한점 묻지 않고 가지런히 놓여 있는지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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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4-07-23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시집인데 갖고 있군요~
이성복 시는 가슴에 콕콕 박히면서 아파요.ㅜ

마노아 2014-07-23 08:23   좋아요 0 | URL
한글자 한글자 콕콕 박으면서 읽게 되더라구요. 좋은 시들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시들은 아픈 시들이 많은 것 같아요.^^;;
 
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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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11쪽

월식

젊은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달을 따주겠다고 했겠지요

달의 테두리를 오려 술잔을 만들고 자전거 바퀴를 만들고 달의 속을 파내 복숭아 통졸미을 만들어 먹여주겠노라 했겠지요

오래전 아버지 혼자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간 밤이 있었지요 사춘기의 풀벌레가 몹시 삐걱거리며 울던 그 밤,

그런데 누군가 달의 이마에다 천근이나 되는 못을 이미 박아놓았던 거예요 그 못에다 후줄근한 작업복 바지를 걸어놓은 것은 달빛이었고요

세월이 가도 늙지 못한 아버지는 포충망으로 밤마다 쓰라리게 우는 별들의 울음소리 같은 것을 끌어모았을 거예요

아버지 그림자가 달을 가린 줄도 모르고 어머니, 그리하여 평생 캄캄한 이슬의 눈을 뜨고 살았겠지요
-14쪽

빗소리

저녁 먹기 직전인데 마당이 왁자지껄하다

문 열어보니 빗줄기가 백만대군을 이끌고 와서 진을 치고 있다

둥근 투구를 쓴 군사들의 발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다

부엌에서 밥 끓는 냄새가 툇마루로 기어올라온다

왜 빗소리는 와서 저녁을 이리도 걸게 한상 차렸는가

나는 빗소리가 섭섭하지 않게 마당 쪽으로 오래 귀를 열어둔다

그리고 낮에 본 무릎 꺾인 어린 방아깨비의 안부를 궁금해한다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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