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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시절, 텔레비전에 나온 한 배우를 보고 한순간 반해버렸다.  중고생에게 흔히 있는 현상이었지만 내게는 흔치 않았던 별스런 일. 드라마의 제목은 "칠협오의"였고, 그의 배역은 천하제일검 "전조"였다.

그러나 나의 달콤한 짝사랑은 뜻밖의 난관에 부딪쳤으니, 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이 끝나버렸다.  난 맨 마지막 방송(8부작)의 첫회, 그것도 달랑 20분만 본 것이다.(ㅡㅡ;;;)

그러나 뜻밖의 구세주가 있었으니 바로 내 짝꿍.  당시 문.이과를 통틀어 전교 1등이 화려한 명함을 내밀던 그녀석이 이 배우를 너무 좋아하여 몇몇 작품을 녹화해 둔 것이다.(그 친구는 텔레비전도 음악도 듣지 않는 순수? 공부파였는데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나의 짝사랑은 다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좋다고 자기 암시를 많이 걸었던 탓인지, 마음 속이 자꾸 허전하고 점점 더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 그의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이야 "팬픽"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된 글쓰기이지만, 그때는 그런 것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없었고, 나 역시 일종의 연애편지 감정이었을 뿐이다.

첫 시작이 중요하다며, 95년. 12월 25일부터 자정부터 시작된 글쓰기는, 이듬해 6월 22일, 정확하게 180일 뒤에 완결이 되었다. (흠, 내가 고3이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그리고, 금세 잊혀졌다.  정말 잊고 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기억에만, 가슴에만 묻힌 채 시간이 흘렀다. 언제까지? 2000년까지.

내가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한 해였다.  인터넷이라는 것의 편리성을 막 깨닫던 어느날, 우연히 그 배우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초은준"이라고.

그랬더니, 어머나 세상에. 그토록 많은 자료가, 그토록 많은 팬페이지들이 나타날 줄이야.  심지어 미국팬 중국팬 등등등 나올 정도였으니 나의 놀라움은 끝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첫번째 줄 사이트에 들어갔다. 나중에 알았는데, 국내에서 초은준 팬페이지로는 처음 등장한 홈페이지였고, 꽤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 방명록에 제 홈에도 놀러오세요~라고 수줍은(...;;;) 요청을 했었다.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내 홈페이지를 찾아주는 것이다.

당시 나는 네이버에서 만들어주는 3분 만에 뚝딱 홈페이지를 갖고 있었는데, 두달 동안 나 혼자서 빈집을 지키고 있던 터였다.  왜 사람들이 오지 않느냐고 투덜대면서..ㅡ.ㅡ;;;;

그래서, 컴퓨터 쓰는 재미가 늘어났다.  홈페이지를 예쁘게 가꾸고 싶어서 태그라는 것도 배워보고 이것저것 많이 시도도 해보았다. 

컨텐츠가 없었던 때였기에 고딩 시절 썼던 소설을 워드로 옮겨서 게시판에 올렸는데, 내 홈을 찾아준 이들이 재밌다고 해주는 것이다.  역시나 순박했던 시절, 독자들의 아우성이 얼마나 기쁘던지...

다시금 내 글을 읽어보니 그 유치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이 졸작을 그대로 옮길 수가 없어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교정이라는 것이 손을 대면 댈수록 일이 커지는 법. 이야기가 커지고 등장인물이 늘어나고 이야기도 바뀌는 것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헤어날 수 없는 늪이었다ㅠ.ㅠ)

사람들의 반응이 기쁘고, 거기에 부합하고 싶고, 더 멋진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은 나를 굉장히 압박하곤 했었다.

그래서 그 글은 너무도 오래 연재되면서 끝을 보지 못했다.  고백하자면, 지난 2005년 10월 초에 연재를 하고 장기간 휴면 상태.

신상에 여러저러한 일들이 생겨 글쓰고 있을 여유가 전혀 없었던 탓도 있지만, 너무 커져버린 이야기에 내 스스로 책임을 지지 못했던 까닭.

그래도 여전히 기다려주는 이들이 있다. 가끔 언제 다시 쓰냐고 묻지만 재촉하지 않고 마냥 기다려주는 소중한 독자들이 아직도 있다.  나 자신도 무사히 끝내고 싶은 마음 굴뚝이지만, 현재로서는 언제 다시 이어질 지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A41500장 분량의 장편을 먼저 포기할 마음은 없다.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끝내고 말 것이다.

이쯤되니, 내가 처음 좋아했던 배우보다, 어느새 작품 속의 "전조"를 나는 더 사랑하게 되었다.  너무 완벽한 주인공상을 원했고, 때문에 무리한 에피소드의 전개로 주인공 고생도 많이 시켰지만, 이제는 마치 내 가족이나 된 것처럼 가깝고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처음 십대의 그 마음으로 지금껏 그 배우를 좋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나는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소중한 글쓰기를 통해서 다양한 기쁨도 맛볼 수 있었다.  멋진 추억을 만들어준 그에게 무척 감사하게 여긴다

이제는 꽃미남 소리를 하기에는 그도 나이를 먹었고, 나도 나이를 먹었지만, 그는 여전히 내게 멋진 배우로 남아 있다.



최근 그가 한국에 오겠다는 발언을 했다.  만우절 농담으로 판명되었지만, 언제고 올 마음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언제나 고아원을 방문하며 이웃 돕기에 앞장섰던 그는, 우리 한국 팬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자선 행사에 열심인 줄로 안다...;;;;;

지인들과, 당장 자선 단체부터 가입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발 동동 구르며, 괜히 한번 웃어보았다.  순수한 열정에서 시작된 자선돕기가 아니어도, 그를 통해서 좋은 일 한가지를 더 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닌가.  아마 이후로도, 그를 통한 우리의 만남과 추억들은 계속해서 쌓일 것이다.  행복한 기대를 미리부터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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