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뉴브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지음, 이승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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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노나 요제프 K처럼, 패배를 두려워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은 문학으로, 종잇장의 골 속으로 후퇴하고 만다. 그곳에서는 패배의 망령과 놀고, 그것을 교묘히 속이고, 그것을 감시하면서 희롱하거나 떼어놓거나 그것에게 알랑거릴 수 있다. 삶에서 훔쳐내 종이 위에 옮겨지는 덕에 문학은 부재에 대한 보상을 받지만, 삶은 여전히 좀더 공허하고 결핍되어간다. 장 파울이 말하길, 작가는 자신이 쓴 것 안에서만 모든 것을 인식하고 생각한다. 누군가 작가의 종이를 불사른다면 그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며 아무것도 못 한다. 수첩 없이 거리를 돌아다닐 때, 작가는 너무나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나라는 자아의 창백한 실루엣이자 복사물이며, 그 대리인이자 부재자 재산관리인 일 뿐이다.
그럼에도 종이는 좋은데, 이 겸손함을 가르치고 자아의 공허함에 눈뜨게 해주니 말이다. 글을 쓰고 난 뒤 30분 후 전차를 기다리면서 자신이 썼던 것을 전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작다고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의 공허함을 생각하면서 어떤 이는 각자 공들인 자신의 작품을 우주의 중심으로 만들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구나 그렇다. 그리고 작가는 수많은 사람 각각에 대해 형제애를 느낄 것이다. 그 자신처럼 선택받은 영혼들이 저마다의 공상 속에서 죽음으로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무를 향해 다같이 몰려가고 있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작가들은 범우주적인 비밀집단, 프리메이슨, 어리석은 비밀결사 본부를 만든다. 장 파울에서부터 무질에 이르는 작가들이 어리석음에 대한 찬가와 에세이를 썼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부족한 글쓰기 능력은 지성의 부족함과 상대성을 발견하게해주며, 형제의 마음으로 서로 이해하고 인내하며 길을 갈 수 있도록해준다. 종이는 그 길을 너무 진지하게 가지 마라 가르친다. 싱어보다 카프카와 더 닮은 사람조차도,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법을 『성이나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배운다. 머지않아 자식들이 자신의 종이를 마구 흩트리고 종이배나 불쏘시개로 만드는 걸 기쁘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어느정도 인식한 문인은, 글이 저절로 써지지 않는다는 걸 자각한 덕분에 쓴 것들에 대해 열정을 품게 되고,
그 말들이 자신을 앞으로 끌고 나가도록 해서 장 파울 작품의 한 인물처럼 옛 서문 •프로그램 · 광고전단 · 부고 공고 들을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이미지와 문장들을 붙잡으면서 떠오르는대로 글을 쓰게 된다. 수첩이 낙서로 가득 차자, 영혼은 더 평온해져 지나가는 시간에 대고 태연하게 휘파람을 분다. 121




되돌이되돌이되돌이.
알듯말듯.
수첩이 낙서로 가득할 날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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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브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지음, 이승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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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파울은 현재를 사랑했다. 현재가 아직 미래이거나 이미 과거일때는 기다려지거나 애석해하는 대상이 되지만, 그것이 현재일 때는경멸받고 낭비된다. 이 순수한 현재는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매 순간 현재를 무로 만들어버린다. 현재는 시간의 바깥, 즉 삶의 바깥에만, 기억이나 글쓰기가 보기 드문 무언가를 이뤄낼 때만 존재한다. 소설 『크빈투스 픽슬라인의 생애」에서 말하기를, 연기는 고통스러운 우리들의 실존에서 솟아올라 안티몬 증기처럼 새로운 기쁨의 꽃들로 피어오른다. 그 꽃은 단지 시의 꽃, 혹은 글쓰기가 소진되어가는 이 삶에서 끌어낸 이미지들일 뿐이다. 마음의 형상들을 투영해내는 무無로부터 끌려나온 이 비물질적 공간의 빛은 구체적인 현실에 반사되어, 아늑한 집을 ˝우주의 궁륨 속에 파고든 자그마한 자기집˝으로 바꿔놓는다. 장 파울이 아주 다정히 노래했던 가족 목가는 우주적 차원을 취한다. 부부의 사랑, 집안일, 행복한 하루, 요람과 관 등 가정생활을 노래한 서사시는 무한의 씨실과 날줄에 섞여 짜인다. 시간이 떨어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리아 부츠의 전기 작가는 ˝우리 실존의 허무함을 느꼈고 그토록 보잘것없는 삶을 경멸하고 누리고 깊이 음미할 것˝을 맹세한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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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공화국
안드레스 바르바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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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1세기판 파리대왕.

그저 이 문구 한마디만을 기억하고 책을 펼쳐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내게 파리대왕은, 어린시절 뭔가 동화가 아닌 새로운 책을 읽을만한 것이 없을까 하고 책장을 살펴보다가 무심코 집어 들어 읽었는데 그때의 내 기억은 '15소년 표류기'와 같은 소년들의 모험과 용기,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다가 한대 얻어맞은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21세기 파리대왕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지, 더구나 평소 많이 읽어보지 못했던 스페인 현대문학이라니 예측이 안되는 묘한 설레임으로 기대를 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내용은 산크리스토발 지역의 사회복지과 공무원으로 발령받은 화자인 나,의 20년 전 있었던 사건에 대한 회고를 담은 글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이렇게만 한문장을 쓰면 그저 20년전의 사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만 생길지 모르겠다. 

이 책은 "산크리스토발에서 목숨을 잃은 32명의 아이들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물어본 사람의 나이에 따라 다르게 대답한다"로 시작하고 "아이들이 우리를 피해 달아나면서 우리를 배신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또한 살기 위해 그들을 배신한 것이다"로 끝을 맺고 있다. 책을 다 읽고난 후 이 문장들을 다시 읽는순간 32명의 아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20년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아니, 그러한 결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그 아이들은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25)라는 물음을 던질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이야기가 진행되어갈수록 우리의 현실 속 아이들의 모습은 어떤지 자꾸만 겹쳐지고 끝내 내몰리듯 아이들의 죽음에 이르렀을 때, 내가 글을 제대로 읽은 것인가 싶어 다시 되돌아가 읽기도 했는데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이야기속에 담겨있는 진실이 무엇이지? 라는 물음을 던지는 순간 이 책은 단순한 이야기로만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 순간적으로 '그들의 현실과 우리의 현실은 다르다'라는 생각을 얼핏 했던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비겁한 생각인가를 깨닫고 잠시 책을 덮어두었다. 아이들을 통해 드러내는 인간성, 특히 악함에 대한 이야기는 뭔가 불편하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 실존의 느낌을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생존자를 찾아내고 그 아이를 통해 - 그 과정 역시 인성을 상실한 폭력적인 고문으로 인해 마음이 편치않았는데 그의 생존이 두 세계를 잇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상투적인 기대를 했다는 것 역시 내 단순한 상상력의 한계임을 깨달을뿐이었다. 


"나는 요즘 산크리스토발시가 32명의 아이들에게 끝내 주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틈날 때마다 생각해보려고 한다"(244)


32명의 아이들이 어느 순간 나타났고 우리의 현실 세계를 헤집어 놓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결국 찾아낸 그들과 그들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닮은 듯 다른, 다른 듯 닮은꼴임을 깨닫게 되는데 우리에게 32명의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보고 있다. 


"인간의 정신을 파멸의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비극적인 운명을 이해하려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눈여겨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어른은 어떤 것이든 자신과 상관없이 계속 존재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어린아이는 자기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듯하다."(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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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지음, 이승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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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말하는 의견이나 믿음이 어떤 것이든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은 그들의 생각과 개성 안에 저 너머의 것이 있느냐 없느냐, 자기 자신 안에서 소진되는 완성된 세상을 사느냐 혹은 다른 곳으로 열려 있는 완성되지 않은 세상을 사느냐의 감정이다. 여행은 저 먼 곳을향한 여정인 듯하다. 여행은 태양이 떠올랐다가 지는 곳, 바다 수평선과 산 지평선 너머 저녁 하늘에서 붉은 보라색으로 타오르는 저 먼곳을 향한 여정 같다. 여행자는 저녁 무렵 여행을 나선다. 발걸음이 그를 노을 지는 곳으로 데려가고, 꺼져가는 노을빛 너머로 인도한다.
장 파울이 쓰기를, 여행자는 환자와 비슷하다. 두 세상 사이에 불안하게 걸쳐 있다. 여정은 길다. 비록 그 여정이란 게 고작 주방에서 창문유리를 통해 노을 진 지평선을 내다볼 수 있는 방으로 움직인 게 다라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집은 미지의 넓은 왕국이고, 삶이란 것은어린 시절의 방, 침실,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복도, 병뚜껑이 축포처럼 펑 터지는 식탁, 부엌과 사무실 사이, 트로이와 이타카 사이를 오가는 의미를 말해주려는 몇몇 책과 종이가 놓인 책상, 그 사이를 오가는 오디세이아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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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1-11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두 세상 사이에 불안하게 걸쳐 있다. 라는 표현이 뭔가 가슴에 들어오네요. 늦은 밤 좋은 꿈 꾸세요^^

chika 2022-01-12 17:42   좋아요 1 | URL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

다뉴브의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오묘하게 빠져들게 되는 것 같아요. 이해가 안되는 말도 많고, 좋은데 다시 읽어보면 더 좋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 막. ㅎ
어제 저 글에 대한 느낌을 적으려고 책 펼쳐놓고 있다가 ... 잠들어버렸네요;;;;
 
다뉴브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지음, 이승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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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맨손으로 제3제국에 대항하다

울름에서 독일의 내면성을 상징하는 커다란 꽃이 피어났다. 히틀러 정권에 반대하며 맹렬히 싸우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1943년 처형당한 한스와 조피 숄 남매‘는 울름 출신이고, 현재 그들 이름을 딴 고등학교가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크라토스 Kratos에 대항하는 에토스Ethos의 순수한 저항을 보여주는 예다. 그들은 대개의 사람들이 수치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꼈던 것에 저항할 줄 알았다. 골로 만 이 썼듯이 그들은 제3제국의 거대 권력에 대항하여 맨손으로 싸웠고, 자신들의 윤전기만으로 나치의 정치군사기구에 대항해 이 기계로 히틀러에 반대하는 선전문을 찍어 유포시켰다. 그들은 젊었고 죽고 싶지 않았으며, 조피가 사형집행일에 조용히 말했듯, 좋은 날을 뒤로하고 작별을 고하기 싫었다. 하지만 목숨이 최상의 가치는 아니며, 목숨보다 더 가치 있는 무엇, 해처럼 삶을 밝고 뜨겁게 만드는 무엇을 위해 헌신할 때 삶이 더 사랑스럽고 유쾌해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두려움 없이 그들이 조용히 죽음을 맞았던 것은, 이 세상의 원칙이 이미 심판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것이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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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한다고 그 옛날 처음으로 오래비에게 책선물을 받았는데 그 책이 바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었다.
어린 내게 죽음이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무죄한 이들의 죽음에 대한 충격은 쉽게 잊히지않았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다시 그들을 떠올려보면.
평범한 그들의 위대함에 뭐라 표현할 말이 없다.
오늘 이 짧은 글에서 그 많은 걸 다시 느낀다.
아니, 내 말은 전혀 필요가 없는 말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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