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트 - 산업 혁명과 서부 개척 시대를 촉발한 리볼버의 신화 건들건들 컬렉션
짐 라센버거 지음, 유강은 옮김, 강준환 감수 / 레드리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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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개그맨 김민경이 사격 국가대표가 되었다며 이게 예능이 아니라 진짜라고 강조한다. 뭔소린가 하고 찾아봤더니 운동부가 아닌 연예인이 사격실력으로 국가대표가 되었다는 것이다. '콜트'를 읽으며 책보다 현실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떠올렸는데...


콜트,는 '산업 혁명과 서부 개척 시대를 촉발한 리볼버의 신화'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샘 콜트의 평전...이라고 설명을 해야할지. 아무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 재미없고 그렇다기에는 막장드라마같은 인생의 내용이 담겨있고 행간을 잘 훑어 읽다보면 북아메리카의 역사에 담긴 피로 얼룩진 총기의 역사와 콜트의 인생운(!)도 볼 수 있어서 어떤 측면에서는 재미있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솔직히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내가 알지도 못했던 콜트라는 인물의 전기 -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게 느껴지는 인생이야기를 읽어야하나 싶었는데 대충 설렁거리며 읽기 시작하다가 조금씩 그 핵심이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설렁설렁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 특히 내가 처음부터 이 책에서 기대를 했었던 역사속 총기 발달과 사용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있어서 좀 더 깊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책에는 에드거 앨런 포가 콜트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은 살인사건(243),이라는 출판사 홍보가 있지만 그보다는 "차일드는 평화주의자이고 콜트는 무기 제조업자였다. 차일드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를 옹호한 반면 콜트는 인디언을 죽이는 이들에게 총을 공급했다. 차일드는 노예제 폐지론자였고 콜트는... 폐지론자는 절대 아니었다"(242)라는 문장에 더 중점을 둬야하지 않는가 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2차세계대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핵폭탄일 것이다. 전쟁을 무기에 대한 관점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지만 무기의 발달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신식무기인 총을 사용하는 적군앞에서 칼을 휘두르는 군인이 이길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저렴하게 재생산되어 보급된 AK 소총 시리즈는 결국 아프리카 내전을 더 악화시키고 쉬운 총기사용법은 또한 비극적인 소년병들의 탄생을 촉발시키는데 한몫을 했다는 것에 수긍을 한다면 자동소총 리볼버의 발명은 총을 한발 쏘고 재장전을 하고 총검을 꽂아 육탄전을 준비하는 동안 연달아 총을 발사하며 살육을 저지르는 전쟁터에서 남북전쟁의 승패가 갈리고 골드러시에 일확천금을 꿈꾸며 서부로 달려간 백인들에게 속절없이 무너지는 인디언들의 멸망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과장된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콜트의 발명품이 없었더라도 틀림없이 이 모든 일이 벌어졌겠지만, 아마 양상이 달랐을 것이다. 적어도 인디언들이 더 오랫동안 우위를 차지했을테고, 백인들이 발판을 확보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며, 아마 살인보다는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다"(466)


사실 책을 읽은 후에도 그닥 콜트의 가족사에 대해서는 더 알고 싶지도 않고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가 더 많아 떠올리고 싶지 않고 있지만 이 책 '콜트'는 그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단순히 리볼버 총기의 역사만이 아니라 미국의 역사속에 '총'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책이다.

책의 말미에 코네티컷주 뉴타운의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격사건에 대한 언급이 있다. 물론 미국에서의 총격사건은 계속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총격사건에 사용된 AR-15 속사소총은 콜트 회사가 소유했던 특허를 바탕으로 개발된 총이며 2019년 민간시장에 공급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다고 미국에서의 총기사고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어떤 의미가 될지는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콜트와 그의 6연발총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누구든 총에 관한 견해를 180도 바꾸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순진한 생각일 테지만, 적어도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우리가 특히 한 총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기억을 더듬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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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 아름다움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조주관 지음 / arte(아르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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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라는 말은 익숙해져있지만 사실 이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적은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역시 죄와벌,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외에는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런 내가 무작정 이 책을 읽으려고 시도한 것이 무리였는지 모르겠다. 

그의 소설 백치의 주제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고 하는데 도스토옙스키가 조카딸 이바노바에게 보낸 편지에서 "백치의 주요사상은 '온전히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 세상에서 '온전히 아름다운 인간은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를 '가장 아름다운 이상'의 모델로 간주한 도스토옙스키는 미시킨을 그와 비슷하게 그리고자 한다"(139)라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며 백치를 읽어야겠다,라는 생각을 되새기기는 하지만 그 책을 읽은 적 없는 지금 현재의 나로서는 이 책을 쓴 저자의 글을 그냥 읽는 것뿐 내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알면서도 책을 꾸역꾸역 읽다보니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이나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그 맛을 음미할 줄 알아야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인데.


"아름다움은 윤리학을 넘어 종교적 미학과 만나면서 의미의 지평이 확대된다. 아름다움은 진과 선이라는 추상의 영역으로부터 ‘신성한 물질성‘의 영역으로 강림하게 된다. 이 강림한 아름다움이 바로 성스러움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최고의 아름다움은 성스러움으로, 그의 소설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은 항상 초월적인 성스러움과 함께한다."(138)


물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지 않아도 이 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해하고 생각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런 이야기인가보다,하며 술렁술렁 책을 읽고 있는 내가 좀 한심해보인것은 사실이다. 

두리뭉실하게 정리해보자면 도스토옙스키가 말하고자하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아닌데 - 아니,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의 사상에 더 깊이 파고들어갈 수 있으니 천천히 그의 문학작품에 인용된 그림에 대한 생각도 비교해볼 수 있고 그림뿐 아니라 문학작품속에 담겨있는 '아름다움'의 사상에 대해 고찰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좀 많이 아쉽다. 그 유명한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에 담겨있는 그림의 의미뿐만 아니라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을 보는 시선 역시 새삼스럽다. 아무래도 익숙한 그림에 더 눈길이 가게 마련이고 그에 대한 비유와 작품과의 연관이 더 쉽게 이해되고 기억에 남기는 하겠지만 이 책에서 그림과 관련된 글을 떠올리게 된다면 야코비의 [죄수들의 휴식]에 대한 사실적인 언급과 그 그림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사실적인 비평이다. 그림에 묘사된 세부적인 부분들 - 발목의 쇠고랑이라든가 죽어가는 죄수의 몸에 보석이 남아있을리 없으리라는 현실적인 부분들에 대한 지적이 있는데 단순히 그런 사실적인 부분들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고차원의 리얼리티"가 담겨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그림을 바라보는 도스토옙스키의 시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도스토엡스키의 문학작품을 읽으며 직접적으로 언급된 미술작품을 다시 보고 그의 문학속 인물들을 다시 살펴본다면 작품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지려나. 아직은 장담할 수 없지만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문장의 의미에 대해서는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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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22-11-08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 그림에 방점을 두고 읽었으나 이 책은 그림이 아니라 문학작품에 방점을 두고 읽어야하지 않나,라는 생각.
뭔가 좀 집중이 안되어 아쉬움이 많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름다움의 비밀을 탐구한 작가다. 그의 소설에서 아름다움(美)은 진(眞)과 선(善)을 그 안에서 포괄하고 있다. 인간의 감각에서 아름다움은 유일하게 현시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이지각할 수 없는 진과 선의 육화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은 진과 선의
‘보이지 않는 추상성‘이 ‘보이는 이미지‘로 현현된 것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윤리학을 넘어 종교적 미학과 만나면서 의미의 지평이 확대된다. 아름다움은 진과 선이라는 추상의 영역으로부터 ‘신성한 물질성‘의 영역으로 강림하게 된다. 이 강림한 아름다움이 바로 성스러움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최고의 아름다움은 성스러움으로, 그의 소설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은 항상 초월적인 성스러움과 함께한다.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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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화에서 빛과 미의식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라는 말은 도스토옙스키의 미의식을 대표하는 경구(警句)다. 이 미(美)라는 개념을 문자 그대로 아름다움의대상 자체를 다루는 미학적인 관점으로만 생각한다면 해석의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 이 경구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러시아정교회에서 이야기하는 ‘러시아 정신 (Russkaya Dusha)‘이자
‘신적 본질‘이기 때문이다.
신성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것이고, 그러한 아름다움은 바로 빛속에 반영되어 있다.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 위에 성스러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한 줄기 빛이다. 그리하여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미는 빛의 은유이고, 이 빛이 러시아를 구원하는 것이다.
경구는 ‘빛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 빛은 러시아정교회에서 말하는 초월적 성스러움의 신적 본질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천상의 ‘빛‘은 지상의 ‘불‘과 서로 상응하는 물질적 정신적 요소다.
동토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러시아인들은 ‘불‘ 없는 삶을 생각할수 없다. 불과 빛은 인간과 모든 생명체에게 끊임없는 순환과 재생의 상징적인 힘을 제공한다. 그들에게 불은 ‘생명의 빛‘이요 ‘구원의빛‘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이전 고대 러시아인들이 숭배하는 최고의 신은 태양신이었다. 태양은 세상의 모든 빛과 불의 근원이다. 태양 ‘빛‘
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사랑은 그리스정교수용 이후에도 계속됐다.
‘빛‘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신‘을 상징한다. 그들에게 ‘빛신‘이라는 절대적 가치관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이 명제를 진실로 받아들인 이후, 신의 아름다움은 ‘빛‘의 아름다움이라고 인지한 것이다. 그리하여 ‘빛‘은 자연스럽게 아름다움과 연결된다. 궁극적으로 러시아인들의 의식 속에서 ‘빛‘은 삶 그리고 생명과연관된 아름다움의 전형이다. 이러한 미의식은 도스토옙스키에 의해 코레조의 <거룩한 밤>에서도 확인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에서 풀밭에 누워 검푸른 창공에서 빛나는 별을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이는 그에게 우주와 일체가 되는 신비한 종교적 경험이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인공 알료샤역시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빛 찬란한 우주와의 합일을 체험한다. 110







아름다움에 대한 담론은 옛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의 흥미를 끌었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동물이기 때문에미(美)는 영원한 화두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은 ‘종합적 생활 감정의이해 작용‘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는 러시아인들이 생각하는아름다움에 대한 종합적 정의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의 중심적인예술관 중 하나가 이상적인 미에 대한 개념의 문제다.
『백치』의 주인공 미시킨 공작의 생일에 아마추어 법률가인 레베제프는 미시킨에게 "어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이 문장은 『백치』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다.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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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범죄들은 아이의 떠돌이 생활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빠리는 제외하자. 상대적으로 보면, 그리고 앞에서 환기한 옛 모습에도 불구하고, 빠리를 예외로 치는 것은 정당하다. 다른 모든 대도시에서는 떠돌이 아이가 곧 파멸된 인간인 반면, 그리고 이세상 거의 모든 곳에서는 홀로 내던져진 아이가 어떤 점에서는 그아이의 정직성과 양심을 삼켜버리는 사회적 악의 숙명적 홍수에게맡겨져 그것에 충직하게 복종하는 반면, 빠리의 개구쟁이는 거듭 강조하거니와, 비록 그 표면이 아무리 마멸되고 상하였어도, 내면적으로는 거의 손상을 입지 않았다. 확인할수록 장엄한 것이며, 우리의 여러 민중 혁명에서 찬연한 정직성으로 개화하는, 마치 대양의물 속에 있는 소금처럼, 빠리의 대기 속에 있는 이념에서 비롯되는특이한 청렴함이다. 빠리의 대기를 호흡하는 것 자체가 영혼을 보존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런 아이들 중 하나를 만날 때마다 조여드는 우리의 가슴을 완화시켜 주지는 못하는 바, 그러한 아이들 주위에 파괴된 가정의 아들들이 맴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도몹시 불완전한 현재의 문명 속에서는, 어둠 속에서 그 구성원이 몸땅 빠져나가 텅 비워지고,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며, 그리하여 자기의 내장들을 길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그러한 가정의 균열 현상이 전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에서 예측 불허의 혼미한 운명들이 발생한다. 그 슬픈 일이 하나의 속담을 탄생시켰으니, 그 현상을 가리켜 ‘빠리의 포석 위에 던져졌다‘고 한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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