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와 존재하기 -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 경험으로서의 달리기
조지 쉬언 지음, 김연수 옮김 / 한문화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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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인간에게 왜 달리냐고 묻는다는 것은 장미꽃에게 왜 피었냐고 묻는것과 같은 어리석은 물음이다,라는 역자의 말은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 왜 달리느냐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걸 새삼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은 달리기에 관한한 최고의 에세이라 일컬어지며 많은 이들이 읽고 있는 책이라고 하는데 읽어보기전에는 반세기쯤 전에 씌여진 글이 과연 지금도 여전히 흥미로울까 싶었다. 그런데 한세기가 넘어도 울림이 있는 문학은 지금도 인간의 본질을 꿰뚫고 있듯 이 책 역시 '달리기와 존재하기'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과 그 답을 찾아보게 해주고 있다. 아, 물론 그 해답이라는 것을 바로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수술을 하고난 후 체력은 안되지만 몸의 회복을 위해 걷는 것이 가장 좋다는 얘기를 듣고 한동안 날마다 한시간씩 걸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한시간을 걸으면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할 저질 체력이었는데 이제는 한시간쯤은 거뜬히 걷는다. 심지어 흙으로 덮인 오름의 평지를 걸을때면 가끔 1분정도는 가볍게 뛰곤 한다. 달리는 사람들이 보기에 전력질주도 아닌 조금 빠른 경보수준의 백미터 달리기는 달리기도 아닌것같겠지만 나는 겨우 그만큼의 달리기에도 희열을 느낀다. 겨우 그정도에도 숨이 가쁘고 힘들지만 그래도 멈출수가 없다. 발이 움직이지 않고 숨이 차오르고 헛구역질이 날만큼 힘든데도 달리는 것을 멈추기 싫을때가 있다. 뭐라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냥 그렇다. 그래서인지 달리는 인간,이라는 말에도 공감하고 달릴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에도 공감한다.

 

이 책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흔히 삶의 여정을 마라톤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저자인 조지 쉬언은 삶을 달리기 그 자체로 설명하고 있다 아니, 달리기를 삶으로 설명하고 있다해야할까?

후반부로 가면서 경주하기, 승리하기... 보스톤 마라톤 참가에 대한 경험 등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마라톤의 초반부에는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그냥 달릴 수 있고 반환점까지도 조금은 편하게 갈 수 있지만 조금씩 숨이 차오르고 힘들어지기 시작해도 멈출수는 없다. 그리고 "마지막 1마일은 즐겁게 달린다. 거기까지 이르는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이 그로써 모두 보상받는 듯한 흥분된 느낌이 든다. 그러니 내년에도 뛰지 않을 수 없다. 한 번에 1마일씩"(344)

한 번에 1마일씩 뛰기 시작하는것처럼 나의 삶도 이제 하루 하루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내 삶이란 나만의 것이라고 믿는다. 혼자서 재미있게 놀기 위해 이 지구상에 태어났다고 확신한다. 아이들처럼 나는 가능한한 가장 좋은 세계, 남들보다 빨리 달리기 위해 애쓰는 세계, 좋은 일만 일어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344)

 

그저 달리기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삶의 비유를 달리기로 표현한 인생 에세이라고만 할수있는 것도 아니다. 비유와 은유와 온갖 철학적인 인용과 삶의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역시 이 책은 '달리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과 사색이 담겨있는 달리기 책이 맞다고 해야겠다. 책을 다 읽어도 딱히 달린다는 건, 하고 말할 수 있지는 않겠지만.

 

"이제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진정한 러너란, 축구를 하기에는 몸집이 작다거나 농구 골대에 공을 잘 던지지 못하나거나 커브 공을 맞추는 재간이 없기 때문에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러너는 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달린다. 러너가 되면서, 고통과 피로와 아픔을 견디면서, 스트레스에 스트레스로 맞서면서,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만 남겨 놓으려고 하면서 러너는 자신에게 충실해지고 그대로 자신이 된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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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3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03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03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가 진정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으려 든다면 그건 매 순간 실패할 위험을 안는다는 뜻이다.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게 됐다면 결승점까지 걸어서 들어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도 부끄러울게 없다. 319




원하는 즉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곳이란? 죄악과 정면으로 부딪쳐 자신을 정화할 수 있는 곳이란? 쥐음을 경험하고도 다시 삶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
내가보기에 이 물음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답은 운동이다.운동을 통해 삶은 몇시간으로 압축된다. 삶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2에이커 정도의 운동장에서 느낄 수 있다.320


다른 장거리 러너들과 마찬가지로 니는 아직도 아이다. 특히 달릴 때면 정말 그렇다. 달릴 때, 내게 기장 중요한 것은 재미있게 노는 것이다. 그렇게 놀이를 통해 그 어느 순간에라도 나는 상상속의 세계로 들어간다.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나도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다. 내 삶이란 나만의 것이라고 믿는다. 혼자서 재미있게 놀기 위해 이 지구상에 태어났다고 확신한다. 아이들처럼 나는 가능한한 가장 좋은 세계, 남들보다 빨리 달리기 위해 애쓰는 세계, 좋은 일만 일어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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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20-05-02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도 나를 대신해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으며 그 누구도 대신 죽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고독한 상태가 시작된다. 그순간,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386
 

 

이제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진정한 러너란, 축구를 하기에는 몸집이 작다거나 농구 골대에 공을 잘 던지지 못하나거나 커브 공을 맞추는 재간이 없기 때문에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러너는 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달린다. 러너가 되면서, 고통과 피로와 아픔을 견디면서, 스트레스에 스트레스로 맞서면서,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만 남겨 놓으려고 하면서 러너는 자신에게 충실해지고 그대로 자신이 된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희생한 것은 하나도 없다. 어떤 게 불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 그냥 저절로 떨어져 나갔다. 반면에 어떤 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 아무런 문제없이 나는 받아들였다. 56

 

이제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진정한 러너란, 축구를 하기에는 몸집이 작다거나 농구 골대에 공을 잘 던지지 못하나거나 커브 공을 맞추는 재간이 없기 때문에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러너는 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달린다. 러너가 되면서, 고통과 피로와 아픔을 견디면서, 스트레스에 스트레스로 맞서면서,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만 남겨 놓으려고 하면서 러너는 자신에게 충실해지고 그대로 자신이 된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희생한 것은 하나도 없다. 어떤 게 불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 그냥 저절로 떨어져 나갔다. 반면에 어떤 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 아무런 문제없이 나는 받아들였다.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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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
존 란체스터 지음, 서현정 옮김 / 서울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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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라는 말은 고립, 차단, 봉쇄...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은 무너져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하루아침에 가족과 이웃을 가로막아버린 베를린 장벽이라거나 특히 멕시코에서 넘어오는 불법이민자들을 막겠다고 국경에 장벽을 세웠다거나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거주지의 중심에 벽을 세워 팔레스타인들의 통행을 규제하는 장벽들을 떠올리면 내게 벽이라는 이미지는 보호라기보다는 차단, 봉쇄 같은 안좋은 느낌이 먼저 든다.

소설에서도 벽,은 섬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지만 실제로 내게는 봉쇄의 의미로 다가온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한 생활의 변화와 자원의 부족상태가 된 섬나라는 바다 너머에서 오는 상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성벽을 쌓는다. 그리고 국민 모두에게 2년동안의 의무 복무 기간을 두고 그 기간에는 오로지 벽 위에서만 생활을 하며 경계 근무를 선다.

카바나 역시 성벽에서의 복무를 위해 경계 근무를 서게 된다. 아무 탈 없이 복무기간 2년을 넘기면 카바나는 안정적인 섬생활을 이어갈 수 있지만 만약 상대의 침입을 허용하기라도 한다면 그는 추방되어 바다를 떠돌아야 할지도 모른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시작된 성벽 생활도 익숙해질 즈음 카바나는 실전같은 모의 전투의 경험도 쌓게 되고 4번이나 성벽근무를 하는 대위와의 만남으로 작전수행도 하는데...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서로 미워하는 감정은 없었다. 교대로 살고 교대로 죽는다. 모두가 한 배를 탄 것이다. 정말로 모두가 똑같다. 상대나 경계병이나 뭐가 다른가? 나는 이것이 죽을때까지 싸우는 것과 정반대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에 대한 최선의 대비책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108)

 

사실 나는 이 소설이 절망을 말하는 것인지 희망을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나눌수가 없다. 물론 어떤 이야기이든 절망을 이야기하며 우리의 끝이 절망이다,라는 결론으로 끝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카바나가 성벽을 넘어 침입하려는 상대의 공격을 물리치는 것은 희망이고 제대로 경계를 못해 추방당하는 것은 절망일까? 만약 추방당한 후 죽음에 이르지 않고 새로운 정착지에서 새로운 생활이 이어진다면 그것은 과연 희망이라 할 수 있을까?

카바나와 히파가 발견한 시추선은 또 하나의 섬나라 같은 느낌인데 그곳에서의 생활은 과연 희망일까, 절망일까.

섬나라에서의 성벽과 시추선에서의 사다리는 서로 대비되면서 알 수 없는 저 너머 상대로부터의 침입이 두렵기도 하지만 외부와 단절된 안정이 과연 행복이라 할 수 있을까?

 

스포일러를 담지 않아보려고 했는데 그러다보니 온통 추상적인 이야기만 넘쳐나는 것 같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벽'이 보호는 아니라는 것이다. 소설의 첫문장과 끝문장은 '벽 위는 춥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벽 위는 춥고 벽 너머에는 경계해야하는 상대가 존재하지만 만약 벽을 허물어버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벽이 허물어지면 포로로 잡혀 도우미가 되어야 하는 미래의 노예들은 없어지는 것 아닐까...

"일부는 벽 방어에 찬성하지 않는다. 벽은 바닷물을 막기 위한 것이지 인간을 막기 위한 게 아니란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상대를 도우미로 쓰는 것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노예제로 보기 때문이다"(213)

 

그리고 한가지 더. 아무래도 카바나와 히파의 이야기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 같고 그것은 곧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확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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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달처 지음, 고유경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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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년 전 사실 겨우 20년이지만, 전 세계의 모든 삶과 마찬가지로 100만 년 전, 1000만 년 전처럼 느껴지는 어느 날, 재키는 나에게 자유롭게 살기 위해 뭘 할 건지 물었다."(443)

 

사실 이 물음에 대한 저자의 답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물론 그 대답이 정답이라고 하지도 않았고,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인 것도 아닌 것이 사실이지만.

솔직히 이 책은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너무 근본주의적인 목사의 권력 장악이라는 것과 그런 정책의 실현을 위해 폭압적인 정부와 점점 더 순응해가는 사람들의 묘사가 비현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나 적나라한 현실 같아서 자꾸만 책을 덮고 던져버리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순응적이고 다루기 쉬운 국민을 원하는 대통령과 성경의 가르침을 근본주의적으로 따르며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면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여자는 하루에 백마디 이상의 말을 허용해서는 안되며 순수운동이라며 여성을 온전히 남성에게 종속된 사람으로 법규정까지 만들어버린 곳에서 살아가는 진은 그 상황이 못견디게 싫지만 그에 저항할수록 규제는 더욱 강화된다. 심지어 현재 범죄자들이 차는 전자팔찌처럼 여성들에게는 손목팔찌인 카운터를 채우고 하루에 백마디 이상의 말을 내뱉으면 즉시 전기 충격이 가해진다. 겨우 5살박에 안된 진의 딸 소니아 역시 엄마와의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카운터를 팔에 채우고 무심코 말을 내뱉어 한밤중에도 가해지는 전기충격에 고통스러워할 뿐이다.

거기에 더해 아들 스티븐마저 학교에서 받는 수업을 통해 여성과 남성의 물리적인 차이를 말하며 남성의 우월함과 여성은 남성에 복종해야한다는 의식 교육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황과 이웃에 가해지는 국가의 폭력이 점점 더 거세어지고...

 

인지언어학자인 진이 새로운 규정에 의해 오히려 한마디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고 울음을 터뜨리는 딸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게 입을 막아야 하는 모순된 상황들이 처음엔 어리둥절하게 만들지만, 이 소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깨닫게 되면 이것은 현실이 아니야, 라고 하면서도 자꾸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비현실인 소설 속 이야기에 분노하고 있는 이유는 이 모든 상황들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전기 충격이 가해지는 카운터만 없을 뿐 침묵을 강요당하고 여성성이 존중받지 못하며 한낱 도구화 취급되어버리고 남성의 소유물처럼 여겨지고 있는 상황은 우리의 현실임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성의 인권, 인간의 존엄성을 마구 짓밟는 이야기가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과거의 그런 폭압적인 역사가 있었음을 알고 있고 그러한 과거의 모습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이라는 소설에서도 타임슬립을 통해 노예제가 있는 시대와 현재를 오가는 여성의 이야기가 중심주제인데, 현재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과거에 갔을 때 이동조차 쉽지 않은 - 그러니까 주인공 여성이 흑인이었기에 노예제 사회에서 물건으로 취급되는 상황은 그 어떤 암울한 SF 소설보다 더 암울함이 느껴지는 공포의 상황이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독특한 이야기이기는커녕 어쩌면 그냥 뻔한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볼수도 있는 크리스티나 달처의 '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라는 소설은 이미 우리가 역사를 통해 그 폭압적인 내용을 알고 있으며 우리의 현재가, 또한 지금 우리가 암묵적인 동의의 침묵을 지키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과거의 처참한 역사는 곧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으로도 전혀 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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