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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평점 :
책을 읽어나갈수록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정점으로 치닫는다고 생각한 순간 소설의 제목이 스포일러가 되었네,라는 씁쓸함을 느끼며 남은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 글을 읽기 시작했을때만 해도 그냥 쉽게 술술 읽히는 소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솔직히 제목이 스포일러야,라는 생각을 할때까지만 해도 내 생각은 이야기의 전개에만 빠져있었다. 예상되는 결말을 미리 앞질러가면서 정말 내 생각대로 이야기가 끝이 나버린다면 나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깨닫게 될까... 그 불편한 진실 앞에서 나는 무엇을 받아들여야할까....
책을 다 읽고 더 많은 시간을 두고 다시 이 이야기를 곱씹어봐야겠지만 그 시간을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이야기란 느낌이 들어 서둘러 이 느낌을 정리해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도대체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미래의 이야기는 현재의 현실을 바탕으로 그려낼 수 있는 것이기에 다윈 영이 살아가는 시대의 이야기는 미래의 이야기이지만 현재의 이야기로 읽는다해도 별 괴리감이 들지는 않는다. 다윈 영이 살아가는 세상은 계급으로만 나뉘는 것이 아니라 계급별로 살고 있는 구역까지 나뉘어 철저한 신분사회제가 되어 있는 세상이며, 신분중에서도 최고 계급이 살아가는 제1지구이다. 그곳에서도 특히 엘리트들만 입학할 수 있는 프라임스쿨에 다니고 있는 다윈 영은 아쉬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는 또한 자신이 얼마나 큰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조차 깨달을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다윈이라는 이름에 별 생각이 없다가 조금씩 떠오르는 진화론과 자연선택이라는 이론이 툭 튀어나오기 시작하면서 전체 이야기의 그림이 조금씩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실 이야기의 줄거리를 미리 알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박지리 작가의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너무나 잘 짜맞춰진 퍼즐이야기이기 때문에 전체 그림을 보면서 맞춰가는 재미보다는 이 작은 조각들이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게 될지 궁금해하면서 퍼즐을 하나씩 맞춰가는 것이 더 흥미로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도무지 이 조각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앞에서 슬쩍 넘겨버린 조각 하나와 교묘하게 맞물리는 새로운 조각을 발견하게 되는 그 느낌은 경험해본 사람은 어떤 것일지 알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그런 느낌으로 읽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부는 아니며 인간의 실체는 그 누구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듯 하지만,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 안에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이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악을 행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다윈 영의 입장이 아니라 레오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서술되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맴돌았다. 법의 집행에 있어서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다윈의 생각과 달리 '인간이 인간에게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는 없다'는 레오의 생각에 자꾸만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 훌륭한 이야기를 두고 왜 작가는 '악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까.
물론 그래서 더 많은 생각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가만히 내 느낌을 정리해보려고 하지만 쉽지가 않다. 그저 멍하니 책의 표지에 그려진 후디의 모습을 바라만 보게 된다. 후디는 순결한 무결점의 제이를 살해하였고 후디는 프라임스쿨의 명예를 저버린 레오를 살해하였다. 겉모습은 그렇지만 제이와 레오의 본질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해 인물들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인간의 본질,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다보니 문득, 작가는 그저 '악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뿐이었을까 싶어진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스멀거리며 반발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밤이 없었다면 죄도 없었을까. 죄가 없었다면 아기 예수가 태어난 오늘 밤도 없었을까. 성탄절 밤이 없었다면 죄의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수많은 다른 밤들도 없었을까. 그랬다면 인간은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까"(773)
좀 멀리 돌게 되는 이야기겠지만 자꾸만 '죄와 벌'에 대한 상념이 떠오른다. 어쩌면 나 역시 제이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한 해를 지내고 난 후 죄의 무게를 쟀을 때 3g이 아니라 도저히 읽을 수 조차 없는 숫자가 나오는 죄인이 아닐까,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렇다고 '척결'을 외쳐대는 이에게 속수무책으로 형벌을 받을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원래 인간은 무서운 존재지. 전부 파악되지도 않고 완전히 제어되지도 않는......"
"그럼 인간은 뭘 믿으며 살 수 있는 거죠? 자기 자신조차도 파악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없다면?"
"사랑..... 사랑은 믿어도 된단다. 내 어머니가 나에게 주신 사랑, 엄마가 너에게 주고 간 사랑, 다윈 내가 너에게 주고 싶은 사랑. 거기엔 어떤 의심과 불안도 없지. 아마 너도 나중에 부모가 되면 네 자식에게 그런 사랑을 주게 될 거야.
그러고보면 재미있구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길을 품고 사는 무서운 인간도 결국엔 사랑으로 진화한 것이라니."(725-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