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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1984 (한글+영문) 더클래식 세계문학 57
조지 오웰 지음, 정영수 옮김 / 더클래식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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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에 대한 리뷰는 이미 남겼다. 하지만 머리로 생각한 바는 일부 전한 것 같지만 이 소설에서 받은 깊은 인상이 자꾸만 아릿하게 남아 사라지지 않으니 다시 한번 리뷰를 남기면서 잊으려 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구속, 무지는 힘" 이런 역설적인 구호를 일상으로 맞이한 시대가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다. 저자 조지오웰이 1984년의 전체주의 세계를 가상하여 그린 이 시대 상황은 우리 세계와 다른 듯 또 닮아있는 듯한 착각을 주기도 한다. 보이는 것은 다르나 소설을 끝까지 읽고 보면 이 시대의 한면을 엿본듯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 세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한창 전쟁중이다. 주인공 윈스턴이 살고 있는 영국은 오세아니아에 속한 지역이다. 이 시대는 평화부가 전쟁을 관할하고, 풍부부가 배급량을 제한해 식량배급을 감소시키고, 진리부는 정보를 통제하여 대중심리통제를 하는 것만으로도 역설적인 시대라는 것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다. 심지어 애정부라는 부서는 심문하고 고문하는 곳의 명칭이니 말이다.

 

윈스턴은 진리부의 공무원으로 보도 직전이나 출간 직전의 자료를 받아 교정한달까 통제한달까 하는 인물이다. 신조어를 만들어 보급시키는대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인물로 신조어를 만드는 자체로 그의 반골기질을 묘사하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체제에 순응하고 있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반발의 여지를 품고 있다. 

 

빅브라더가 지켜보는 세상에서 그는 혁명을 꿈꾸고 있다. 혁명이 일어나길 바라고 그 혁명에서 작은 역할이라도 하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그는 혁명단체 형제단이 존재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자신 역시 형제단의 일원이 되고자 꿈꾸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일상의 모든 바를 통제하는 통제사회인 그곳에서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해봤던 그는 한 여자에 대한 흑심을 품기도 한다. 그녀를 강간하고 죽이려 공상하기도 하는데 어떤 까닭인지 그저 작가의 권능 때문인지, 줄리아라는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계획하며 그에게 접근한다.

 

그 둘은 남녀의 연애마저도 통제하는 그 사회에서 언제 검거될지 모르는 상황 속의 짜릿한 밀회를 즐기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오브라이언이라는 권력자가 정부에 반감을 지닌 은밀한 반역자라는 오해를 하고 그와 접촉하게 된다. 그는 오브라이언을 형제단원으로 착각해 반역의 의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줄리아와의 밀회를 넘어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던 그와 줄리아는 정권에 검거된다. 

 

이후부터 그가 애정부에 잡혀가 오브라이언으로부터 고문 받으며 그에게 세뇌랄까 사상교육이랄까를 받는 장면이 이 소설의 백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 리뷰와 카뮈의 [이방인] 리뷰에서 짧게 언급하고 있으니 본 리뷰에서 생략한다. 실존 자체를 위협 받으며 인격과 사고 마저도 제어 당하게 되는 그 과정은 너무도 이 소설을 인상 깊게 만드는 서술들이다. 자신의 감각과 정서, 사고 자체가 모조리 통제될 수 있음을 윈스턴은 알수 없었을 것이다.

 

2 더하기 2가 3도 되고 4도 되고 5도 될 수 있는 기만의 세계에서 그는 인지부조화를 겪다가 끝내 죽음의 순간에는 수긍하고야 말게 된다. 빅브라더를 깊이 사랑한다고까지 수긍하고서야 그는 죽고만다. 그가 절정에 위기의 순간 줄리아를 자기 대신 고문하라고 처절히도 비명지르는 그 인격 자체가 말살되는 부조리가 납득이 가지 않았는데, 삶에 대한 집착이 빅브라더에 대한 애정으로 치환되고마는 그 순간만큼은 수긍하게 되었다. 이 세계의 많은 이들이 삶에 대한 애정을 자신이 호응하는 정치가나 정치조직, 특정단체, 매체들에 대한 호감으로 치환하는 까닭을 알게 된 것만 같기도 했다.

 

윈스턴이란 인물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존재 방식과 존재 자체를 재정의하게 되었다. 그가 원하지 않고 그가 수긍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을 그 스스로 수긍하고 원하게 되고야 말게 된 것이다. 이런 정도의 극한의 부정을 그 누군들 감당하고 싶을까 싶었다.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에서 그윈플레인은 자신의 출신을 알고나서 남루하게라도 받아지녔던 그 자신의 모든 것과... 그 남루함 속에서도 빛나던 사랑마저 잃고야 만다. 데아라는 그의 빛과 같은 소녀는 장님이었지만 그의 안에서 빛나는 진가를 알아주던 이였다. 데아도 죽고 그윈플레인도 죽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죽음으로나마 완성될 수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윈플레인을 보고 다시 윈스턴을 보니 1984에서의 윈스턴이 더 안스러웠다. 모든 것이 통제 당하는 사회에서 모든 것을 부정 당하고 사랑마저 혐오로서 끝나버렸으니 말이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오해 받는 남자이다. 누구도 이해 받지 못할 곳이 세계라고 확장할 수는 없을 지 몰라도 분명 이렇게 이해가 아닌 오해로 점철되는 순간이 사람이 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윈스턴처럼 부정 당하는 존재, 산산히 분해되고나서 완벽히 다른 무엇으로 프린팅 되는 존재가 되고 싶은 이가 있을까? 뫼르소에게서는 공감의 여지가 있지만 윈스턴에게서는 공감만큼이나 나는 결코 저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면서도 이 삶 속에서 과연 윈스턴과 같은 심문과 고문을 당하는 이가 없기만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게 나는 결코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에 빅브라더는 실존하는 존재였을까? 형제단은 실체가 있는 단체였을까? 인지부조화 이후 윈스턴은 다시는 그런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없는 것도 있는 것이고 있는 것도 없는 것이다. "나는 왜 이런 부조리한 세계에 던져졌을까?" 윈스턴이 잠시 내게 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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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맵 독서법 마인드캐비닛 3
미소천사 한이 지음 / 부크크(bookk)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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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맵과 독서법이 연계된 매혹적인 주제라 선택한 책이다. 정보 전달의 비중만큼이나 수필적인 요소가 커서 다소 당황스러웠다. 마인드맵을 이미 알고 실적용하고 계신 분들에게는 실망스러울수도 있다. 첨부된 사진자료들은 다소 조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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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mong 2023-08-05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도 서평 남기셨군요. 잘 했어요.
 
달라이 라마의 마지막 수업 - 내 삶의 방향키를 잃어버렸을 때
달라이 라마 지음, 소피아 스트릴르베 엮음, 임희근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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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출간을 처음 알고 나의 영혼이 그리도 기다렸던 책이구나 싶었습니다. 공감과 연민이란 주제로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면 정말이지 내 영혼이 길을 찾는 것만 같다고 여겨졌거든요.

 

팬데믹 이후 이리 길어지며 적응도 좀 되련만 정신도 감성도 피폐해져 가는 것만 같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세상 메마름의 정점인듯 갑갑함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공감이나 연민의 심정도 더 힘을 잃은 것만 같았습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설하신 불교 명상에 관한 저작으로 가르침을 처음 접해보았기에 그분이 전하는 명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그분 가르침 전반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해주었었습니다. 하지만 쿤달리니 수행을 근간으로 하고, -위빳사나(사념처) 수행이 배제된- 아나빠나사띠(안반수의)만을 보조 수행으로 삼는 저의 수행은 정신과 지성에는 유익했으나 메마른 심경에 공감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기적은 경험하지 못한 듯했습니다. 그래서 공감과 연민 그 자체가 주제인 본서에 더더욱 관심이 갔습니다. 

 

하지만 읽고 보니 성인을 위한 말씀은 아니라는 생각이 다소 들었습니다. 말씀의 시작부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젊은 친구들, 여러분은 이 세 번째 천 년(2001~3000년) 초에 태어났습니다.' 라고 독자 대상을 못 박으시면서 시작하시니까 더더욱 그렇게 느껴지네요. 본서는 달라이 라마께서 82세실 때 하신 연설이나 쓰신 저작이 바탕이 되니, 현재 89세이신 걸 감안 한다면 7년 전인 2015년에, 2001년 부터 그 이후 태어난 2015년 당시 초등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쉬우면서도 명료하신 것 같기는 합니다. 다만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싶은 대목들에 대한 말씀이 없다시피 한 것이 단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주 짧게나마 달라이 라마로 추대되신 시대의 상황과 이후 중국의 티베트 복속, 자신의 망명, 망명 이후 타국에서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려 노력하신 과정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밖의 예로 드신 시대 상황들은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거쳐왔지만 여러분의 시대는 달리 만들어 마주할 수 있다는 여운을 남기시려는 말씀이기도 했다고 보입니다. 

 

'젊은 친구들, 여러분은 인류를 위해 품은 나의 희망입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이 어린 학생들 이제는 젊은이가 되었을 이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저는 기성세대가 난제만을 만들어대다가 그 해결은 다음 세대에게 떠넘기는 것은 무척이나 무책임하고 몰상식한 짓이라고 여기지만 이 말씀은 니들이 해결해라는 말씀보다는 후학에게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거는 어르신의 말씀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각 대륙의 젊은이들에게 아프리카 연합, 북미연합, 라틴아메리카연합, 아시아연합을 만들기를 권하며 그것을 새시대의 희망으로 보는 달라이 라마의 기대에는 자못 회의가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달라이 라마께서 말씀하시는 세계 곳곳에서 지역사업을 하는 기구들이 더 활발히 통합되기를 바라는 이유는 압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세계 경제기구들이나 UN, 하다 못해 WHO에 까지 각국 정부나 정치경제인의 영향력이 행사되며, 기존의 체계에 어떠한 왜곡을 불러왔는지를 보아온 사람들에게는, 신세계질서라던가 그레이트 리셋의 과도기적인 연합들의 출현이 곱게만 보이지는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반부에서는 자신의 어머니께서 자신의 연민 수행에 첫스승이였다며 여성의 힘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성이 감정이입이 더 잘 되고 수용적이라면서 여성이 세계를 주도해 나가면 세계가 달라지리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여성이 다스리는 나라들에는 전쟁, 폭력, 경제 및 사회적 불의가 덜할 것입니다.' 

 

과연 스페인이나 영국의 여왕들 시대에는 그러했던가요? 신라의 여왕들 시대에는 전쟁도 폭력도 사회적 불의도 덜했을까요? 여성이 자신의 가족들까지 희생하며 일으키는 살인과 보험사기 사건들을 사건사고 재현 드라마들에서 보았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젊은 여성 금융사기범의 사례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습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여성 단체들의 고위급 인사가 북한 지령을 받고 사드 반대 시위에 여성단체들이 대거 투입되기도 했던 전적이 있습니다. 북한의 자금과 지령을 받은 여러 시민 단체장들 중 분명 여성 단체의 고위급 인사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뉴스를 보신 분들도 많을 겁니다.

 

여성이라서 다를 거다. 무슨 논리 입니까? 남성도 여성도 문제와 혜안의 비중이 비슷할 것입니다. 그냥 남녀를 가르지 않고 '젊은이들이여 깨어나 변화를 위해 일어서라'고 하는 정도가 맞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공감과 연민에 대한 말씀은 감상이 아리게 남습니다.

 

'분노의 대상에 대한 부정적 생각의 90%는 우리 자신의 정신적 투사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 이해한다는 것은 해방되어 평화롭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합리적인 추론에 의거하면 분노와 그 분노의 결과인 공격성과 폭력을 줄이거나 배제할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흄처럼 원인과 결과로서 바라보지 않고 사건과 사건으로 단절해 본다거나, 인과론이나 목적론으로 보지 않고 비선형적인 인과를 가정한다면, 더 떠나서 결정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 누구도 원망할 필요가 없으며 남 탓도 내 탓도 할 필요가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외의 합리적 추론이란 것으로는 오히려 원인을 찾기에 급급해 탓할 누군가를 찾거나 자신을 탓하며 한탄하는 경우 밖에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입보리행론처럼 연민의 시작을 어머니의 사랑에서... 보다 자세하자면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자녀된 입장의 심정에서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프레드 애들러처럼 어머니와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사람이나 유년기에 버림 받아 어머니의 보살핌도 사랑도 못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내면에 자리잡은 어머니 원형에 비추어 세상 모두에게 자신을 사랑해준 어머니에게 갖을 심정을 가지라는 것은 지나친 무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애들러가 말년에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해소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와 비슷한 이들이 한창 어머니를 원망하던 시기에라면, 입보리행론의 가르침이나 달라이 라마처럼 일부 보편적인 사람들의 사적인 견해에 근거한 연민에 대한 해석은 수용 가능한 가르침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라는 원형상 보다는 그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준 누군가를 연상하는 쪽이 각각의 입장의 대중들에게 더 납득하기 쉬울 예가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연민과 공감의 마음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해 주고 보살펴준 누군가를 연상함으로써 발현된다면 그 마음이 다른이와 다른 모든 생명과 자연을 향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연민과 공감을 환경과 자연 문제로 까지 확장하시는데 이는 가장 불교적인 메시지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중생은 산스끄리뜨어와 빨리어로 사뜨와라고 하는데 이것은 비단 사람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고 감정을 지닌 모든 대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동물도 외계인도 다른 차원의 존재들 이를테면 영혼이나 신까지도 사뜨와 입니다. 불교에서 연민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사유하고 감정을 지닌 모든 대상을 말합니다. 

 

그러하기에 인간의 탐욕만으로 자연을 훼손하여 인간의 이기심을 충족하며 뭇생명들을 죽이거나 그들의 터전을 빼앗으며 그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어떠한 행위도 결국 우리를 해치는 행위가 될 거라는 것을 이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타주의를 수용하기 위해 이기주의를 이용하신 탁월하신 전략이라고 생각되던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서두부터 젊은이들이라고 말씀하신 그 세대들에게 여러분은 최초의 인터넷 세대이니 그를 잘 수용해 선한 영향력을 사용하라는 관점의 말씀도 하십니다. 가짜뉴스에 깨어있고 타인을 위해 유익한 정보를 나누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행동 표현 반경은 전 세계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이 개인적 자유를 행사하는 데에는 지구 차원의 권리와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도 따르게 됩니다.'

 

사실을 말씀하심과 동시에 달라이 라마께서 새로운 세대에 대해 갖으시는 기대와 희망이 어찌 그리 큰지도 설명해주는 문장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누구보다 2001년부터 그 이후 출생한 새로운 세대들에게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은 '너희가 함께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함께 나아가라. 서로를 깨닫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셨을까 싶습니다. 

 

만약 본서가 대담집이였고 독서 대상이 초등생 중학생이 아니라 그 이상인 연령대였더라면 제가 갖은 이견들은 충분히 반박되었을 것이고 달라이 라마께서는 더더더 설득력있는 말씀을 남기셨을 겁니다. 출판사의 작명솜씨가 보통이 아니라 다소 기대 이상의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초등 고학년 자녀나 조카, 중학생 자녀나 조카를 두신 분들이라면 선물하셔도 좋을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갈 세대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달라이 라마의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것도 우리 몫의 책임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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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유럽 문명의 종말 - 대규모 이슬람 이민이 바꿔 놓은 유럽의 현재와 미래
유해석 지음 / 실레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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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 이슬람의 폐해나 유럽의 난민 문제에 대해서는 2014년부터 2016년 사이 깊은 관심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본서는 그 시절에 제가 가진 많은 의문, 생각들과 비슷한 논조로 유럽과 이슬람의 문제에 주목하는 책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읽고보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깊이 듭니다.

 

본서를 아직 다 읽기 전입니다. 전체 6부의 내용 중 4부까지를 읽었습니다. 책을 완독하기 전에 리뷰부터 작성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기는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인상 깊은 자료들, 저자의 인용문장인 정보들을 기록해 두려 리뷰를 작성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인용하고 싶은 자료들과 정보들이 너무 너무 많다보니 어찌 리뷰에 옮길지 엄두가 나지 않네요.

 

그래서 4부까지의 저자의 논리와 주장을 따라가다가 핵심 안건이다 싶은 몇몇 문장만을 인용하려 합니다. 요즘 들어 긴 문장은 도통 써내려가거나 인용할 엄두를 못내겠습니다. 일종의 번아웃 상태인가 싶기도 합니다.^^;

 

1부 유럽의 이슬람 인구 성장 배경
1. 유럽과 문명의 충돌
2. 유럽의 노동력 부족
3. 유럽의 저출산
4. 유럽의 고령화 사회

2부 유럽 이슬람의 성장 원인
1. 무슬림의 이민
2. 무슬림들의 다산
3. 무슬림의 결혼 제도
4. 현지인들의 무슬림으로의 개종
5. 무슬림 난민들

3부 서유럽과 북유럽의 이슬람
1. 영국의 이슬람
2. 프랑스의 이슬람
3. 독일의 이슬람
4. 네덜란드의 이슬람
5. 스웨덴의 이슬람
6. 노르웨이의 이슬람
7. 덴마크의 이슬람

4부 유럽의 다문화주의 실패 선언의 배경
1. 무슬림에 의한 테러
2. 무슬림에 의한 성폭력
3. 폭력적인 범죄
4. 마약의 만연

5부 유럽 이슬람 인구 증가로 나타나는 다양한 문제들


6부 다문화 사회에서 이슬람에 대한 정부의 역할
 

제가 읽은 4부까지의 소제목들은 리뷰에서 굳이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되게 복붙했습니다.

 

본서는 이슬람의 폐해들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만, 그 주제는 유럽에서 야기되는 이슬람과의 충돌입니다. 유럽 문명과 이슬람 문명은 오랜 숙적이었다가 근래 들어 그 관계가 완화되기는 했습니다만 이제는 다른 세기의 다른 문제들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그저 문화 차이만이 있겠지 또는 언젠가 유럽 문화에 귀속될 한시적인 소요일뿐이겠지라고 우습게 여길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성찰하게 만드는 저작이라고 해야 할 듯합니다.

 

본서의 1부의 주제와 소제목들을 봐도 유럽에서 이슬람 인구가 유입된 것은 유럽의 고령화 문제와 저출산, 그리고 그로 인해 야기되는 노동인구의 감소가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 노동인구의 유입과 이민으로 유럽 각국은 노동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유럽 각국이 아프리카,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을 받아들인 이후 이들 문명의 다산문화와 본국에서 결혼할 사람을 데려오는 문화, 그 가족들과의 결합을 위해 2차 3차 이민이 진행되었고 유럽에서의 무슬림들은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기존의 유럽 각국 원거주민들의 문화와 전통이 유지하기에도 벅찬 1차적인 문제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기존의 유럽의 법을 무시하고 무슬림의 법률인 샤리아를 근거해, 기존 유럽 각국의 법의 울타리가 해체됨을 유럽인들은 경험해야 했습니다.

 

종교가 그저 신앙의 대상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지켜야 할 불문률인 무슬림들에게는 유럽은 자기들의 종교와 제도로 변모시켜야 하는 대상이기만 했습니다. 기존의 기독교나 불교에서는 융화의 여지가 있고 화합을 도모할 틈이라는 것이 존재했지만 이슬람은 생활의 하나하나까지를 장악하고 있는 종교 아닌 제도이자 율법입니다. 무슬림 여성은 타종교를 믿는 이와 결혼할 수 없으나 무슬림 남성은 종교와 인종에 관계 없이 어느 여성과도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피임을 영적 타락이나 훼손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인구 증가는 타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유럽 각국마다 인구 증감율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본서에서 예를 드는 유럽 각국의 경우를 취합해 보면 무슬림의 출생율은 2.3명, 기독교인들의 출생율은 1.3명, 무신론자들의 출생율은 0.8명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유럽 원거주민들의 경우 결혼제도 자체를 점점 더 거부하는 추세다 보니 이러한 출생율 문제는 앞으로 보다 큰 사회문제로 대두될 것이기도 합니다. 

 

: 예를 들어서 어떤 사회가 1.8명의 총 출산 인구를 유지한다면 한 세기가 끝난 무렵 인구는 80%만 남게 된다. 1.3명의 총 출산율을 유지하는 사회(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그리고 발트해 국가들)는 4분의 1의 인구만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 

 

(여기서 출산율이 0.8명인 한국의 문제가 더 심각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본서의 주제를 벗어나지 않고 유럽의 문제만을 보자해도 인구문제에 있어 유럽 원거주민과 무슬림들의 심각한 인구 역전 현상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 통계에 의하면 독일 여성의 24~30%가 아기를 낳지 않겠다고 밝혔다. :

 

아일랜드를 제외한 유럽에서 가장 출생율이 높은 나라인 프랑스의 경우 총 출생율이 1.8명 이상이라고는 하지만 이 수치는 출생율이 매우 낮은 프랑스 원거주민 여성과 출생율이 매우 높은 이민자 여성을 합한 수치라고 하는군요.

 

인구문제는 점차 무슬림이 유럽인구의 다수를 차지해 유럽이 서부의 이슬람이 되는 것이 기정사실이라고 유럽 지식인들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난민 문제도 유럽의 이슬람화를 가속시키고 있는데 '2017년까지 독일에 약 141만 명, 프랑스에 40만 명, 이탈리아에 35만 명, 스웨덴에 33만 명, 오스트리아에 17만 명의 난민들이 정착하였다.' 고 합니다. 

 

: 퓨 리서치에 따르면 유럽 내 불법 이민자는 2014년 300~370만 명, 2015년 330~490만 명, 2016년 410~530만 명으로 꾸준히 늘어났다. :

 

유럽 각국에서 수용하는 합법적인 이민자들을 제외하고도 불법 이민자들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난민 인정을 못받을 불법 체류자가 유입되고 있기 때문인데요. 

 

: 불법 체류자의 70%는 독일과 영국 이민자의 절반을 차지했으며...... 독일에 사는 불법 체류자는 2017년 기준 100~120만 명으로 유럽 국가 중 1위를 차지 하였다. 영국에는 80~120만 명의 불법 체류자가 있다. :

 

이러한 난민 문제 불법 체류자 문제에 있어 같은 이슬람의 부호 국가들은 도대체 왜 손을 놓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오만 6개국으로 구성된 걸프협력회의 국가들은 단 한 명의 시리아 난민도 받지 않았다. :

 

2015년 9월 경 3살된 시리아 난민 소년 아일란 쿠르디의 시신이 터키 해변에 밀려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유럽의 많은 국민들이 이 난민 아기에게 가련함을 느꼈고 유럽이 다시 난민문제에 관대해 지는 계기가 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쿠웨이트 공무원 파하드 알 살라미가 '프랑스 24시'와의 인터뷰에서 걸프 국가들이 시리아 난민의 망명을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했다고 하는 데 아주 가관입니다. '쿠웨이트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의 물가가 비싸서 근로자들에게는 적합하지만 난민들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는군요. 

 

: 2015년 위기의 절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킹 살만 국왕은 단 한명의 난민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대신 독일에 새로운 이민자를 위하여 새로운 모스크를 지어주겠다고 제안하였다. :

 

어떤 사람들은 꾸란의 예외적인 단 몇 구절만을 들어 이슬람이 관용적이고 연민어린 종교이자 문화라고 호도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저는 이런 일화들을 알게 되니, 자신들 문명권의 재난에도 그것을 공감하고 함께 감당하기 보다 타 문명에 짐을 전가 시키는 놀랄울 정도로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문화가 이슬람의 본모습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만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한 우크라 사태에 39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 난민들을 걸프국들에게 수용해 달라고 했다면 그들은 뭐라고 했을까요? 

 

어쨋건 이렇게 유입된 무슬림들이 유럽에 잘 동화하고 화합하였다면 이슬람과 유럽 문명의 종말을 이야기 하는 이런 저작 자체가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유입된 난민들의 문제는 폭력과 테러와 성폭력으로 유럽 각국의 치안 체계마저 동요하고 불안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안들에 대한 자료와 정보가 너무도 세세하고 방대해서 저는 도무지 인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기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2014년 2015년의 기록은 등장하지 않는 것도 있던데 그런데도 이렇게나 방대한 범죄 기록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각국에서 무슬림들로 인한 유럽 원거주민 여성들에 대한 강간 사례가 늘고 있으며 적반하장 격으로 무슬림 남성이 너무 많다는 발언에 마저 맹비난을 쏟아내고 있다고 합니다. 유럽 각국의 각 지역 도시와 소도시마다 무슬림 인구가 많은 곳은 여성들의 차림이 범죄를 불러온다며 여성의 옷차림을 단속하고 혼자다니지 말라는 것이 그곳 경찰들의 범죄에 대한 대응이라고 합니다. 강간범이 무슬림이라는 통계를 내놓거나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인종차별이라는 프레임으로 맹폭격을 해대기 때문에 사회에서 강간과 무슬림을 연결한 발언 자체를 할 수 없다고 하네요. 

 

그 중 스웨덴이 서구 사회에서 가장 강간 범죄율이 높은 지역인데 스웨덴 범죄 예방 담당국 BRA은 2012년 여름 한달 만에 총 1,091건의 강간 사건이 보고되었다고 팔표 했으며 15세 미만의 아동을 대상으로하는 강간 범죄는 같은 기간 53% 급증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스웨덴의 강간 범죄율은 2017년이 되면서 10% 더 늘었다고 합니다.

 

유럽의 타 지역들도 이런 추세가 하루가 갈수록 더 높아간다고 하는군요. 강간 범죄는 무슬림들이 일으키는 것이 거의 전부이고 발생빈도는 이민자들과 이민 2세 3세가 주로 거주하는 지역들에서 나타나는데도 이런 사안을 언급하면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리기에 전혀 공론화하지도 사적으로도 언급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왜 여성들을 강간했느냐는 질문을 하자 이들은 거리낌없이 무슬림 여성이 아니라서 강간했다고 답변했다는데도 말입니다.

 

문화의 차이를 인식하고 각 문화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 자체를 막는다는 게 옳은 일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인종차별이라는 프레임으로 문화의 차이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인식과 문제 해결의 여지를 거세해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접근인 것일까요?

 

각종 테러와 마약 등의 중범죄에 무슬림들이 연루되는 것은 그들이 연루되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범죄를 주도하고 있다는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각 지역에서 인구의 몇 %밖에 차지 하지 않으면서 유럽 각국마다 전체 감옥 수감자의 50~70%를 차지 하거나(프랑스 감옥 수감자 중 무슬림은 약 50%를 차지하며, 특히 교외 감옥에는 무슬림 수감자가 80%에 육박하기도 한다는군요. 2002년에 한정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2002년 이미 프랑스의 범죄율은 10만명당 4,244건으로 그 당시 이미 미국 범죄율을 능가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범죄는 이민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에 의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전체 복지 비용의 40~60% 소진하고 있습니다. (덴마크 일간지 [질란트 포스텐]의 자체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5%를 차지하는 무슬림들에게 복지예산의 40%가 지출되며 코펜하겐의 모든 범죄의 70%를 무슬림이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 드렸다시피 유럽에서는 이런 문제제기만으로도 인종차별주의로 낙인 찍혀 오히려 맹비난의 대상이 된다고 합니다. 

 

저는 왜 이런 부조리가 만연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미 1960년대 부터 무슬림 이민자들이 유입되어 왔고 그들로 인한 사회문제가 차츰 문제시 되었을텐데 왜 급격한 난민 수용까지 하여 문제가 증폭되도록 관망했을까요? 이에 대해 서구의 연구자들은 이민자 수용은 노동력을 충원하여 유럽경제를 부양할 것이라며 장밋빛 해답을 제시하여 왔습니다. 고작 얼마후면 AI와 로봇기술로 인해 노동력 50%를 대체할 시기를 앞두고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는 현재입니다. 2015년에도 미래학자들은 이런 시대가 이렇게 조만간은 아니더라도 근미래에는 등장하리라 예측하였을텐데, 왜 난민수용이라는 과도한 무리수를 유럽 각국은 선택했을까요? 

 

저는 이것이 의도된 한 수라고 생각합니다. 난민 수용으로 인한 테러 위협과 치안 불안을 불러와 대중이 기꺼이 대중통제를 자발적으로 요구하도록 하려는 한 수였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불안과 위협 속에서 자발적인 통제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사회는 그런 양상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대중통제 시대에 대해 예견하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 여러 지성들이 있지만 저로서는 아직까지 명확한 해결안이라고 생각되는 제안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혁명이나 저항이라느니 소규모 집단 사회로의 회귀라는니 하는 해법들이 이 시대에는 적용되기 힘들 것 같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발전한 테크놀로지에 의지한 직접민주정치 시대로의 진입이라는 기대어린 해결안을 생각해 보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진정한 해답은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초고속 결속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디스커넥트의 시대이기도 한 현재, 게다가 분열이 화두인 시대이기에 지금까지의 대안들과는 혁신적이면서 획기적인 대안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이 문제적 시대를 풀어나갈 방법이 안보이기에 난감합니다. 

 

어쨋건 분명한 건 유럽이 실패하고 포기한 다문화라는 과제가 이제 한국에서도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인구감소를 불안해 하며 다문화를 부추기는 지금 이 시대는 오히려 인구가 간소해야 풀어나갈 수 있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량실업자의 시대에 인구란 것은 오히려 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인구는 결국 분열과 충돌을 극대화 하게 될 것입니다. 유럽을 보고 우리는 느끼고 대비하여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본서는 더더욱 일독은 해봐야 할 책이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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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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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딩 1, 2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다. 물론 다른 역자의 책이었지만. 지금까지 본서의 역자가 이야기하는 그런 번역상의 오류들이 있다는 것은 인식도 못했다. [이방인]은 내겐 그저 짧은 잔상 같은 이미지 몇 개로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 장례. 태양. 그날 이후 언젠가의 총격 살인. 오해 받는 재판정. 사형 판결 ... 이 몇가지 이미지가 내겐 [이방인]에 대한 인상의 전부였다. 딱히 그에 따른 감상이랄 것도 없었다. 단지 막연히 부조리한 판결이고 한 인간에 대한 깊이 없는 판단이었다는 해석이 당시의 내 감상의 전부였을 뿐이다. 막연히 뫼르소의 정서가 메말라 있었다고 느끼던 것과는 이번 독서로 다른 감상을 갖게 되었다.

 

청소년기의 감상과는 다르게 자칭 청년인 중년이 된 지금의 독서로는 뫼르소는 메마른 인간이었다 거나 뭔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했었기에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과는 다른 감상이 일었다. 

 

[이방인]을 통해 사형을 판결 받은 것은 뫼르소만이 아니고 나 자신까지 였다. 세상의 많은 '나'가 이 소설을 읽으며 사형을 판결 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방인은 결코 뫼르소만이 아니라 이 시대에 많은 '나'들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과장된 생각을 품게 된다.

나는 반대로 모든 것이 단순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우리가 사형받는 이유는 '나'가 결국 타자에게 있어 미지의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방인이었다. 병자를 치료하며 사랑을 말하고 겉옷을 원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라며 동행하라던 그가, 칼을 주러왔다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하며 폭력을 행사하기도 마다하지 않던 바로 그였다. 그는 대중에게 단정지을 수 없는, 정형화할 수 없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천국을 말하다가 종말의 시기를 말하면서 너희 세대 안에 그날이 닥칠 거라던 것도 그다. 어느 모로 보나 그 시대 사람들과 지도층들이 불안해 하기에는 충분했다. 가난하고 소외 받는 사람들과 어울리던 그였지만 정작 대중들마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너희는 바라바와 예수 중 누구를 살리겠느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대중은 망설이지 않고 도둑인 바라바를 선택했다. 예수의 모든 말과 행동은 그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것들이었다. 그는 미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은 나름 신중한 판단을 했을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있어 이방인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방인들이 우리 시대에는 무수히 흩어져 있지 않나 싶다. 대중은 또 손쉽게 사형을 판결할 것이다.

 

어떻게 나는 사형 집행보다 더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요컨대 그것만이 한 인간이 정말로 관심을 가져야 할 유일한 것이었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걸까!

 

어쩌면 우리는 사형 판결을 받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보다 늦게 그런 판결을 받는 사람들을 뫼르소가 느꼈듯, 특권을 지닌 것으로 느끼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런 이들은 심각한 고문 휴유증에 시달릴 것이다.

 

"... ... 그런데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러이러하다.'이네.

우리가 이곳에 끌고 온 사람 가운데 우리에게 끝까지 맞선 자는 아무도 없었네.

모두 깨끗이 치료되었네. ... ...

난 그들이 점점 약해져서 흐느끼며 바닥을 기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네.

그것은 고통이나 공포로 인해 흘린 게 아니라 진정으로 참회하며 흘린 눈물이었네.

심문이 끝났을 때 그들은 단지 인간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지"

 

[1984] 중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을 고문하며 한 이 말처럼 대중의 대다수는 끝내 깊은 고문 속에서 인간의 껍데기가 되어 살아남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지 못하는 이들은 결국에 사형 판결을 일찍이 받을 수밖에는 없다. 사형 판결을 받는 이들 역시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수도 뫼르소도 진정 그들을 이해한 이들로 부터 사형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사형을 판결하고 교화시키려는 어느 누구도 그들을 오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무엇보다 판결을 하고 교화를 하려는 어느 누구도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이 소송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전부 사실이면서 사실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뫼르소의 변호인에 변론 중에서

 

사람들은 사실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눈에 담기는 것은 오해 이상인 것이 없다. 2+2가 5가 되는 현실에 익숙해져 버린 이들에게는 2+2는 5뿐만이 아니라 1도 2도 3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더이상 사실을 판별할 의지를 잃어간다. 그러니 자연히 자유는 구속도 억압도 되고마는 것이다. 서로가 이렇다는 것을 분별하고나면 누구나가 서로에게 이방인이 되고 서로에게 사형을 판결하고야 말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악순환은 영원히 지속될수도 있다. [1984]에서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했던 말처럼 말이다. 개인에게서도 사회에게서도 영원히...

 

"여기에서 자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간에 앞으로 영원히 계속될 걸세"

 

나는 재판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싶지도 않고 어느 사제에게 교화의 대상이 되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고 오해 아닌 이해를 받고자 애원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당당히 이방인이 될 것이다. 그런채 떠날 것이다. 세상에 머물더라도 세상을 떠나있고 싶다. 그러게 이방인임을 떳떳히 밝힐 것이다. 

 

뫼르소에게서 '나'를 찾은이들은 결국엔 자신이 이방인이었음을 언제나 자각하던 이들일 거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깨닫게 된 이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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