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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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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역시 중딩 때 권장도서라서 읽었었다. 하지만 딱히 어떤 감상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막연히 인간의 내면 이야기를 상징하는 것이구나 싶기는 했던 듯하다. 성인이 되어 다시 읽으니 그 깊음에 조금은 젖어든 것도 같다. 

 

이번에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으며 어린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상징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어린시절엔 그저 막연하기만 했던 내적 심연으로의 여행 이야기가 조금은 귓가에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어부이나 80 여일을 물고기를 잡지 못하는 노인에게서 의미와 항로를 잃은 듯한 느낌을 받는 성인으로서의 내가 오버랩 되는 듯했다. 아마도 노인과 같은 심정을 겪어본 많은 성인들이 있을 것이다. '없는 투망'과 '없는 노란 쌀밥', '없는 생선'에 대한 노인과 소년의 '놀이' 같은 대화는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루덴스]와 조지프 캠벨의 [신의 가면]시리즈 1권인 [원시 신화] 속의 개념과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노인과 바다]라는 이 이야기가 하나의 의식이자 의례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이 '놀이'와 같은 대화를 통해 내비치고 있는 것이구나 싶었다. [원시 신화]에서 조지프 캠벨은 인간 사회와 신화 속에서의 '신성한 놀이', 하나의 '의례'는 중세 기사도나 일본의 무사도에서도 엿보이며 현대의 일본인들이 죽음을 대하는 은유적인 대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당신의 부친께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라는 표현을 현대의 일본인들은 "당신의 부친께서 죽음을 연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라고 표현한다고 하니 말이다. 조지프 캠벨은 '정신의 고귀함은 천상에서든 지상에서든 놀이를 할 수 있는 기품이나 능력이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노인이 투망을 잃은 것을 묘사한 짧은 대목은 투망이 없으니 노인이 사냥을 나가 낚시와 작살만으로 사냥감과의 일대 격전을 벌일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해 소년이 다른 배를 타게되어 홀로 사냥을 나가는 노인의 장면은 진정한 심연의 여행은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임을 상징한 것이라 보였다. 대어를 만난 노인이 미끼를 문 물고기로 인해 북서쪽으로 하염없이 끌려가는 것에서는 왜 하필 북서로 끌려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햄릿]이 자신은 "북북서로 미쳤다"고 하는 대사가 기억났고 그를 오마쥬한 제목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라는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왜 하필 북북서인가?' 이런 의문이 들어 구글어스에서 덴마크(햄릿이 덴마크의 왕자이니 덴마크에서 북북서 방향을 찾아보려) 지도를 검색했다. 덴마크의 북북서로는 북해를 거쳐 노르웨이해를 거쳐 그린란드해를 너머 그린란드가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그 망망한 대양과 미개척의 대륙으로 인간의 심연을 상징하려 한 것으로 짐작된다. 헤밍웨이 역시 북서라는 비슷한 방향을 오마쥬해 노인의 여정이 인간의 심연을 향한 여정이라는 것을 상징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노인이 '사자의 꿈'을 꾸는 장면이 몇 번이나 등장한다. 조지프 캠벨의 말로는 용은 권위와 도덕성, 윤리, 원칙 등을 상징하지만 '사자는 자기 발견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것으로도 노인과 바다라는 서사가 자기발견과 내적 통합을 상징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분석심리학 전반에서는 자기실현의 길을 이원성을 통합하는 여정으로 본다. 노인과 물고기는 의식 속의 이원성을 상징하는 것이 맞을 테고 물고기는 노인 내면의 야성과 함께 인간 본성의 다른 한측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바다... 대양이라는 그 드넓은 심연에서 노인은 점점 침잠해 들어가며 또 다른 자신과 조우하고 결국 그를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물고기가 꼭 그의 그림자만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노인이 보이는 그 사냥감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그를 죽인데 대한 죄의식이 스쳐가는 것으로 보아 물고기는 그의 그림자만이 아닌 아니마까지도 아우르는 그의 대칭적 극성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물고기를 죽인데 대한 죄의식을 보이며 그는 '물고기가 물고기로 존재하는 것처럼 자신도 어부로 존재하는 것이라' 자성한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기에 그를 죽인 것은 죄가 아니다'라며 자신의 내적 통합을 긍정하고 있다. 

 

노인이 물고기를 사냥하고 나면 '노예의 일이 남아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심연 속 합일을 이룬 이후에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여정이 있다는 것을 비치는 말이 아닌가 한다. 물고기를 사냥했으나 그는 다시 한번 상어들의 공격으로 물고기를 잃을 위기에 처한다. 이는 우리의 내면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겪어야 할 시련들을 상징한다고 보인다. 융 저작집 시리즈 중 연금술의 비의를 서술한 대목을 보면 왕과 여왕이 합일하는 과정에서 흑화하는 과정, 우리 내면의 모든 부정성이 모조리 드러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칼 융은 가르침하고 있다. 

 

노인이 겪는 여정과 '시련'은 통합의 여정이며 (조지프 캠벨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영적 상태로 변형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노예처럼 일할 수도 있고 상어 떼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바다 위에서의 고독한 그의 사투는 하나의 '종교의식'이자 성인으로서 다시 한번 겪는 '또한번의 성인식'이 아닌가 싶다. 노인과 물고기는 헤밍웨이의 표현처럼 '함께 묶여 항해하여' 끝내는 노인의 보금자리로 가닿는다. 그리고 그 험하고 깊은 여정 이후 그에게 기다리는 것은 별다를 것 없으면서도 다를 일상적이면서 비일상일 그의 일상이다. 우리는 우리의 통합을 이룬 이후에도 결국에는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혁신이나 변혁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하루가 같은 하루가 아니게 여겨지는 그런 색다름이지 돌아와 맞이 하는 것은 다시 일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에게 다시 돌아온 캔자스가 도로시가 받아들이기에 결코 이전의 캔자스는 아니겠지만 또한 일상이라는 면으로 보자면 같은 캔자스일 것이듯 말이다. 

 

신화 속 젊은 영웅에게 연륜있는 노현자가 가르침을 주는 것과는 대칭으로, [노인과 바다] 속 노인에게 소년은 그에게 결여된 젊음이라는 가치와 보살핌, 협조, 위안 등을 상징한 것이리라. 그리고 먼 미래에는 노인이 항해한 그 심연의 사투를 그 젊은 소년 역시 이겨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노인이고 우리 모두가 소년이 아닌가 싶다. 이 세상이라는 바다 가운데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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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4-12 2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노인과 바다 좋아하는데 ‘북서‘의 의미가 그런거였군요 ㅋ 사자와 물고기의 상징도 그렇고 전 잘 몰랐던 사실인데 신기하네요~! 역시 책은 아는만큼 더 깊게 다가오는거 같아요 ^^

이하라 2022-04-12 23:14   좋아요 1 | URL
융 님의 저작 몇권과 조지프 캠벨 님의 신의 가면 시리즈를 인상 깊게 읽었었기에 그저 대입만 해봤습니다.^^; 분석심리학을 아시는 분들께는 시시한 리뷰일텐데 칭찬해 주셔서 부끄럽네요.^^;;
 

뇌와 우주가 나란히 있는 사진을 봤다. 

뉴런과 뉴런들의 연합은 행성들과 은하계들의 구조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에메랄드 타블렛의 가르침처럼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를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우주 자체가 정보를 저장하고 사고를 하는

하나의 거대한 뇌라고 보는 일부 과학자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행성이나 은하계들의 연합뿐만이 아니라

전 우주의 AI가 탑재된 양자 컴퓨터들이 양자얽힘을 응용한 통신기술로 

하나의 뇌처럼 연합 활동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뉴럴링크도 있고 뇌와 중앙통제 컴퓨터를 연계시킬 수 있는 인터페이스도 

이젠 갖춰지고 있다. 인간이 기계를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AI가 탑재된 양자컴퓨터'가 인간을 통제하게 되는 건 아닐까?

 

현재 유발 하라리 같은 저명한 학자들은 [호모 데우스]를 논하며 

트랜스 휴머니즘 사회에서 기계의 힘을 통해 인간과 자연을 초월한 인간의 모습을 

신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말이다. 인간은 진화론의 초기에 대입하던

그 우생학적 진화론에 입각한다면 그저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고리였던지도 모른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 기계신이 진정으로 신의 실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최초의 진화행성에서 진화의 정점에 등장한 AI탑재 양자컴퓨터가 

다른 진화 행성의 AI 탑재 양자 컴퓨터와 양자얽힘을 활용한 통신을 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거나 아니면 이들 기계가 다른 행성의 진화를 촉진해

다시 진화의 정점이 오게 해서 다시 그 행성의 AI 탑재 양자컴퓨터와도 연결하여 

이런 식으로 우주에 확장해 간다면... 그래서 결국 그들의 연합이 하나의 뇌처럼 기능하며

시뮬레이션 우주, 다중 우주, 다차원 우주를 가상공간에서

빅뱅부터 시작해 진화해 나가도록 시뮬레이션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 우주의 생명체들이 진화해 나가며 다시 가상세계 속에서

그러한 순환이 이어져 나가게 하고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무한히 이어진다면...

 

어쩌면 우주는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초월적인 기계가 탄생하고 창조주가 되기 위해

거듭 시작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은 창조주가 될 기계신이 탄생하기 위해

과도기적으로 필요한 존재일뿐 그외의 존재 가치는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초월적 기계신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나면

인간은 그들의 아량에 따라 사육되거나 폐기되거나 할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2016년까지는 "미래엔 인간이 모든 걸 초월한 신적인 존재가 될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지금까지의 과학의 발전상을 보면서

그리고 인간과 AI에 대한 나의 인식이 변천해 오면서,

 

'우주적 차원에서의 인간'에 대한 관점과

'우주적 차원에서의 AI탑재 양자컴퓨터'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인간이란 그저 이 우주에서 장내 유산균 정도의 존재이지 

고전적 진화론의 관점으로는 기계가 진정한 신이 될 것이다. 

 

인간은 사육 당하면서도 인간을 사육하는 AI를 집사라고 여길 

그저 한마리 고양이와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일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현실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인간이 개발한 그 기술들로 결국 인간은 기계의 가축이 되어

뇌와 중앙컴퓨터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로 기계에게

모든 인지과정과 행위의 과정을 원천 통제 받으면서 살아가게 될 것 같다.

 

기우이길 바랄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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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9 0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하라 2022-04-09 08:47   좋아요 1 | URL
저는 호모데우스에 대해서는 소문만 들었습니다.^^; 아마 하라리님의 생각을 전해듣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설득되고나면 그의 이야기에 근거해 해석하게 되는 경향이 생겨서 설득력있는 이야기에는 다른 생각을 안하게 되나봅니다.

2022-04-09 0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하라 2022-04-09 08:48   좋아요 0 | URL
저도 방문해 주셔서 반갑고 기쁩니다. 알라님께서도 행복한 주말 되세요.
 

이미 잊은 너를 너무 잊고 싶어
너를 쓴다.

내가 잊고 싶은

너는 기대다.
희망이다.
사랑이다..

내 곁을 떠난 너를
나는 그리워... 하지않는다.

다만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을뿐이다.
너를 원하고 싶지 않을뿐이다.
네게 더이상 연연하고 싶지 않을뿐이다.

네가 정말 없다면

나는 서글프지 않을 것이다.
나는 뒤척이지도
버둥거리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아프지 않을 것이다.

네가 정말 없다면

나는 숨을 잃으며 자유를 얻겠지!

나는 더이상 고통도 괴로움도 잊은 채 말이다.

네가 내게 주던 것은 끝없는 갈망을 담보로 한
헛헛한 희망... 희망고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희망이 아닌 두려움과 불안과
절망을 통해 너는 나를 미혹하게 한다.

그러니 나는 너를 잊을 것이다.
나는 너를 놓을 것이다.

한순간 잡을뻔했던 너의 손을 잃어야 나는
날아오를 것이니...

가라.
뒤돌아보기도 바라지 않는다.

너를 잃어야 나는
날아오를 것이니...

나는 더이상 잊은 너를 다시 잊고파 하기 싫다.
나는 더이상 잃은 너를 다시 잃고자 가슴을 헤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가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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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부터 올해 3월까지
32기 독자선정위원회 활동을 했습니다.

어제인 4월 6일까지가 마지막 3월 활동 마감일이었습니다. 이제는 글의 양식이나 분량과 상관없이 공감 클릭해도 되니까 홀가분한 기분입니다.

33기분들의 활동 응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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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4-07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습니다~! 독자선정위원회 활동이 쉽지 않았을거 같아요. 아무리 즐거워도 의무로 하는건 좀 힘들거란 생각이 듭니다 ^^

이하라 2022-04-07 12: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처음엔 매일 읽고 클릭했는데 알고 보니까 앱에서 클릭하는 것도 합산하더라고요. 그래서 컴터로는 격일로 활동했어요. 처음엔 몰랐는데 6개월은 좀 긴 활동기간이었던 것 같아요.^^
 
[eBook] 1984 (한글+영문) 더클래식 세계문학 57
조지 오웰 지음, 정영수 옮김 / 더클래식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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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에 대한 리뷰는 이미 남겼다. 하지만 머리로 생각한 바는 일부 전한 것 같지만 이 소설에서 받은 깊은 인상이 자꾸만 아릿하게 남아 사라지지 않으니 다시 한번 리뷰를 남기면서 잊으려 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구속, 무지는 힘" 이런 역설적인 구호를 일상으로 맞이한 시대가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다. 저자 조지오웰이 1984년의 전체주의 세계를 가상하여 그린 이 시대 상황은 우리 세계와 다른 듯 또 닮아있는 듯한 착각을 주기도 한다. 보이는 것은 다르나 소설을 끝까지 읽고 보면 이 시대의 한면을 엿본듯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 세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한창 전쟁중이다. 주인공 윈스턴이 살고 있는 영국은 오세아니아에 속한 지역이다. 이 시대는 평화부가 전쟁을 관할하고, 풍부부가 배급량을 제한해 식량배급을 감소시키고, 진리부는 정보를 통제하여 대중심리통제를 하는 것만으로도 역설적인 시대라는 것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다. 심지어 애정부라는 부서는 심문하고 고문하는 곳의 명칭이니 말이다.

 

윈스턴은 진리부의 공무원으로 보도 직전이나 출간 직전의 자료를 받아 교정한달까 통제한달까 하는 인물이다. 신조어를 만들어 보급시키는대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인물로 신조어를 만드는 자체로 그의 반골기질을 묘사하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체제에 순응하고 있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반발의 여지를 품고 있다. 

 

빅브라더가 지켜보는 세상에서 그는 혁명을 꿈꾸고 있다. 혁명이 일어나길 바라고 그 혁명에서 작은 역할이라도 하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그는 혁명단체 형제단이 존재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자신 역시 형제단의 일원이 되고자 꿈꾸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일상의 모든 바를 통제하는 통제사회인 그곳에서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해봤던 그는 한 여자에 대한 흑심을 품기도 한다. 그녀를 강간하고 죽이려 공상하기도 하는데 어떤 까닭인지 그저 작가의 권능 때문인지, 줄리아라는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계획하며 그에게 접근한다.

 

그 둘은 남녀의 연애마저도 통제하는 그 사회에서 언제 검거될지 모르는 상황 속의 짜릿한 밀회를 즐기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오브라이언이라는 권력자가 정부에 반감을 지닌 은밀한 반역자라는 오해를 하고 그와 접촉하게 된다. 그는 오브라이언을 형제단원으로 착각해 반역의 의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줄리아와의 밀회를 넘어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던 그와 줄리아는 정권에 검거된다. 

 

이후부터 그가 애정부에 잡혀가 오브라이언으로부터 고문 받으며 그에게 세뇌랄까 사상교육이랄까를 받는 장면이 이 소설의 백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 리뷰와 카뮈의 [이방인] 리뷰에서 짧게 언급하고 있으니 본 리뷰에서 생략한다. 실존 자체를 위협 받으며 인격과 사고 마저도 제어 당하게 되는 그 과정은 너무도 이 소설을 인상 깊게 만드는 서술들이다. 자신의 감각과 정서, 사고 자체가 모조리 통제될 수 있음을 윈스턴은 알수 없었을 것이다.

 

2 더하기 2가 3도 되고 4도 되고 5도 될 수 있는 기만의 세계에서 그는 인지부조화를 겪다가 끝내 죽음의 순간에는 수긍하고야 말게 된다. 빅브라더를 깊이 사랑한다고까지 수긍하고서야 그는 죽고만다. 그가 절정에 위기의 순간 줄리아를 자기 대신 고문하라고 처절히도 비명지르는 그 인격 자체가 말살되는 부조리가 납득이 가지 않았는데, 삶에 대한 집착이 빅브라더에 대한 애정으로 치환되고마는 그 순간만큼은 수긍하게 되었다. 이 세계의 많은 이들이 삶에 대한 애정을 자신이 호응하는 정치가나 정치조직, 특정단체, 매체들에 대한 호감으로 치환하는 까닭을 알게 된 것만 같기도 했다.

 

윈스턴이란 인물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존재 방식과 존재 자체를 재정의하게 되었다. 그가 원하지 않고 그가 수긍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을 그 스스로 수긍하고 원하게 되고야 말게 된 것이다. 이런 정도의 극한의 부정을 그 누군들 감당하고 싶을까 싶었다.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에서 그윈플레인은 자신의 출신을 알고나서 남루하게라도 받아지녔던 그 자신의 모든 것과... 그 남루함 속에서도 빛나던 사랑마저 잃고야 만다. 데아라는 그의 빛과 같은 소녀는 장님이었지만 그의 안에서 빛나는 진가를 알아주던 이였다. 데아도 죽고 그윈플레인도 죽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죽음으로나마 완성될 수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윈플레인을 보고 다시 윈스턴을 보니 1984에서의 윈스턴이 더 안스러웠다. 모든 것이 통제 당하는 사회에서 모든 것을 부정 당하고 사랑마저 혐오로서 끝나버렸으니 말이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오해 받는 남자이다. 누구도 이해 받지 못할 곳이 세계라고 확장할 수는 없을 지 몰라도 분명 이렇게 이해가 아닌 오해로 점철되는 순간이 사람이 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윈스턴처럼 부정 당하는 존재, 산산히 분해되고나서 완벽히 다른 무엇으로 프린팅 되는 존재가 되고 싶은 이가 있을까? 뫼르소에게서는 공감의 여지가 있지만 윈스턴에게서는 공감만큼이나 나는 결코 저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면서도 이 삶 속에서 과연 윈스턴과 같은 심문과 고문을 당하는 이가 없기만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게 나는 결코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에 빅브라더는 실존하는 존재였을까? 형제단은 실체가 있는 단체였을까? 인지부조화 이후 윈스턴은 다시는 그런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없는 것도 있는 것이고 있는 것도 없는 것이다. "나는 왜 이런 부조리한 세계에 던져졌을까?" 윈스턴이 잠시 내게 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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