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습관 - 예술과 실용 사이 좋은 습관 시리즈 24
김선동 지음 / 좋은습관연구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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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라는 분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이번 책이 첫 독서였다. 독서도 서평도 망설여졌으나 건축 관련 내용이라기 보다 건축가의 자기계발에 대한 내용이라는 말씀에 독서 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읽고 보니 자기계발이라고는 해도 건축가분의 건축 철학을 구현하기 위한 일상의 노력과 해당 분야에서의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물론 각 전공 분야의 전문가의 삶을 통해서도 늘 배울 바는 깊다고 생각한다.

 

건축가의 습관을 다룬 1부의 스케치라는 장에서는 건축을 위한 스케치를 하는 것을 조선시대 막사발을 만들던 도공의 예를 들며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많은 시도를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양이 질로 전환되는 순간이 온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있다. 안성진 작가님의 [내 안에 잠든 작가의 재능을 깨워라]라는 저서에서도 같은 예가 등장한다. 많은 조각을 만드는 노력이 끝내 마스터피스를 만들어내는 것이란 걸 상식과 일상을 통해 깊이 느끼게 되는 바이기도 하다.

 

독서의 장에서는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독서를 통한 자기계발은 언제나 이어져야 한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저자는 [타이탄의 도구들]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언급하는데 어떤 한 가지 분야에서 상위 1%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두 가지 이상의 분야에서 20% 안에 들어서 그 분야를 함께 활용하는 것이 좀 더 쉽게 자신을 특화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다. 사회에서 활동하는 많은 분야에서 적용될 내용이 아닌가 싶었다. 어느 전공자라도 자신의 전공 분야를 제외한 다른 세부적인 활용들에 잡다한 노력을 필요 이상으로 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연구자가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글쓰기 상위 1%가 되려 하고 빅데이터 운용에서 상위 1%가 되려 하고 이미지 파일 편집에 상위 1%가 되려 하는 식으로 잡다한 모든 것에서 최상을 노리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과 활용 능력은 적절한 수위에서 필요하기에 필요 대상에 대한 최적의 능력은 갖추어야 한다는 데 공감이 되었다.

 

순서의 장에서는 건축가가 설계한 것이 실제 시공으로 이어질 때 설계와 실제 시공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는데 이럴 가능성이 있는 부분들을 미리 생각해 두고 시공사에 수차례 당부를 드리고 주의해 줄 것을 요청한다고 한다. 이것을 저자는 예측 사격이라고 표현하며 네덜란드의 유명 건축가 렘 스쿨하스도 이 표현을 쓴 적이 있다고 한다. 예측 사격이란 전투기 파일럿이 공중전을 할 때 적기가 어느 지점으로 이동할지 예측하고 그 지점으로 미리 사격을 한다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이 개념은 건축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영역에서 실전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아닌가 싶었다. 오류나 반발을 미리 예측하고 대응안을 마련해 두는 경우나 재수정을 거치는 과정은 어느 영역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건축가의 습관]이라는 이 책의 1부는 책 제목과 같은데 스케치, 글쓰기, 독서, 디테일, 관찰, 재료, 장소, 사람, 루틴, 신뢰, 경청, 조율, 겸손, 순서, 전략, 공부, 홍보, 일기라는 18개의 소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디테일부터 사람까지는 건축가로서의 필요가 담겨있다면 신뢰, 경청, 조율은 소통과 관련한 장이라 할 수 있고 스케치, 글쓰기, 독서와 순서, 전략, 공부, 홍보, 일기는 개인의 역량을 증진하는 자기계발의 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장마다 저자 자신이 건축 철학을 완성해 가는 노력의 과정이 담겨 있겠지만 개인의 역량과 소신이 커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생각되었다. 한 분야에 천착해 전문가가 되어가는 과정은 또한 한 인물의 성장 과정이기도 하기에 이 책은 한 명의 건축가가 성장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는지가 궁금하고 개인이 성장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가 궁금한 분들에게 의의가 있는 책이지 않은가 싶다.

 

2[못다한 건축 이야기]에서는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건축주가 묻고 건축가가 답하다라는 장은 제목처럼 건축에 대해 일반인들이 궁금해 할 부분들을 담고 있다. 건물이든 주거할 주택이든 건축할 계획이 있는 분들에게 필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

 

본서를 읽고 건축과 개인의 성장에 대한 관심을 다소나마 충족시켜주는 책이라는 감상이 들었다. 어떤 분이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나는 나의 성장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나 하는 자성과 관찰이 이어지게 되리라 생각된다.

 

 좋은습관연구소로 부터 책을 제공 받아 읽고 남기는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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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2-23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하라님, 이번주 일요일이 크리스마스예요.
추운 날씨 조심하시고,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메리크리스마스.^^

이하라 2022-12-24 01:5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께서도 추운 날씨지만 포근하고 다정한 주말 되세요. 메리크리스마스^^*
 















[5. 제사, 영혼, 구세주 : ‘영적 돌파구’]라는 장에서는 슬쩍 엿보기라도 한 익숙한 내용들이 등장해서 기분 좋은 독서였다. 무엇보다 본서에서 내가 가장 기대하던 주제로 이제 들어서기 시작하는 것 같아 기분 전환이 되는 독서였다.

 

제물(인신 제사를 포함한)에 대한 대목과 대모신, 황소, 신성한 돌에 대한 대목은 나름 익숙한 내용이었다. 이러한 의례와 원형에 대해서는 죠셉 캠벨의 저작들과 융의 저작들, 인도 철학과 상징에 관련한 저작들을 통해 다소 눈에 익은 내용들이다. 저자는 몇몇 상징들을 고대의 상징들 외에 그리스 로마의 산화나 그리스도교에서 비슷한 맥락을 찾고 있다. 나로서는 익숙한 한단고기(환단고기)와 동이족 신화 전승이 떠오르기도 했다.

 

영혼에 대한 관념의 발전을 다루며 고대 이집트의 kaba나 메소포타미아의 나피스투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서는데 나피스투가 신체 일부인 목구멍을 상징하는 말에서 확장되어 숨, 생명, 영혼을 가리키게 되었다는 데서 우리 선도의 달굼(수행)에서의 용어들이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에서 선도의 특정 지점을 이르는 말이 된 것이나, 내면을 뜻하는 ’, 처음을 뜻하는 ’, 태양을 뜻하는 가 합쳐져 이하라마음이 되었듯, 관념과 지칭의 융합이 또 다른 관념을 낳는 것처럼 애초에 형이상학적 관념에서 시작되어 목구멍을 가르키는 것으로 발전하게 되었을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인도의 [리그베다]의 기원에 대한 정보도 알게 되었다. 원시 인도아리아인은 흑해와 카스피 해, 카스피 해와 아랄 해에 걸친 스텝, 혹은 중앙아시아의 다른 지역 출신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책이 쓰여지던 시점에서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들의 고향은 볼가 강 하류의 아바셰보 문화권과 우랄 산맥 남쪽의 신타슈타-아르카임 문화권이라고 생각되고 있다고 한다. 핀란드의 인도학 교수 아스코 파르폴라는 말의 사육과 인도아리아어는 기원전 1600년경에 남쪽으로 내려가 파키스탄 북부의 간다라 문화에 전해졌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리그베다]를 만든 민족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인도아리안의 기원에 대한 주장으로는, 또 한번 더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을 기준으로 최근 연구로는 리그베다에 나오는 천체의 변화를 연구한 결과 이 문헌의 연대가 전통적으로 알려진 기원전 1900~1200년보다 훨씬 오래되었다고 한다. 앞선 주장과는 다르게 오히려 이들은 인도 북서부의 토착민이고 그곳에서 인도유럽어가 탄생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유럽인들 주장으로는 인도아리아인은 유럽이 기원이고 인도 중심의 주장으로는 오히려 인도 북서부가 인도유럽어의 기원이라는 상반되는 주장이다. 아마도 이 사안에 대해 각 나라에서 각자 지들 좋을 대로 학교 교육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아전인수가 민족의 기원에도 늘 존재해 왔다는 걸 새삼 느꼈다.

 

본서에서는 인도아리아인의 신체, 아수, 마나 이 세 가지 분류 중 아수라는 생명 원리를 그리스의 프시케(머릿속에 존재하는 생명 원리, 사후에 신체의 무형적 형태인 에이돌론이 된다)에 대응하고 마나라는 정신, 의지, 감정이 자리하는 곳을 그리스의 티모스(프레네 또는 심장에 존재하는 정신이나 의식)에 대응하고 있는데 영혼을 본질적 자아로 보는 생각과 어휘는 없는 듯하다고 단정하고 있다. 프라나와 에 대입되는 아수에 해당할 순우리말은 모르겠지만 마나는 분명 순우리말 마음과 동일한 의미이다. 검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내용이지만 우리말은 알타이어족으로 이전의 연구로는 우랄산맥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현재까지의 연구 발전으로는 오히려 중국 요하 지역에서 서쪽으로 전파되었다고 하지 않나? 인도유럽어족인 인도아리아어도 인도에서 서쪽으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러니까 앞선 두 주장 중 후자의 연구가 [리그베다] 속 천체 변화를 연구하여 나온 과학적 주장인 바 더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기존의 인류학 등은 아프리카에서 인류가 기원했고 유럽과 아시아로 전파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성경을 믿는 창조론자들은 중앙아시아에 에덴이 있었고 그곳이 인류의 발원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초고대 인류의 증거가 고고학적 발굴로 확인된다면 기존의 학문들은 총체적 전환점을 맞지 않을까 싶다.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리스 철학부터 들어서며 진정한 이 책의 본론인 생각의 역사들이 서술된다. 기원전 6세기가 지나면서 프시케가 본질적인 자아인 동시에 의식과 생명의 원리가 있는 장소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핀다로스는 프시케가 신에 근원을 두고 있어 불사라고 믿었다. 영혼 불멸이라는 생각을 핀다로스 외에도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와 그 시대에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서 활동했던 다른 그리스인들도 공유했다. (고대에는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가 마그나그라이키아라고 불리던 그리스의 식민지였다)

 

피타고라스, 엠페도클레스, 플라톤은 모두 환생과 윤회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핀다로스처럼 영혼의 근원이 신에게 있다고 믿었고, 여기서 영혼이 몸보다 더 고귀하다는 관념이 싹텄다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아테네인들의 견해는 영혼이 산 사람에게 적대적인 불쾌한 것이라고 여겼단다. 그리스인들은 사후에 삶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고 말이다.

 

이스라엘 종교가 처음 히브리 성서에 등장할 때는 최소한 세 가지 주요한 숭배가 있었다고 한다. 테라핌 또는 드라빔(언급되는 문장이 있는데 문맥을 파악할 때 아마도 조상의 위패를 말하는 것 같다)이라는 가족신의 숭배, 신성한 돌의 숭배, 토착신과 외래신을 포함한 일부 신들의 숭배가 그것이다. 그랜트 앨런이라는 학자는 출애굽기의 광야에서 금송아지가 나오는 장면을 들어 야훼가 원래 젊은 황소의 형태로 숭배받았다고 단언한다. 성경에서 그 장면을 보아도 야훼를 믿으며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모세가 사라진 시간 동안 뜬금없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황소를 숭배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애초에 야훼가 황소로 숭배되었다고 하면 이해 못할 문제도 아니다. 그러던 것이 모세에 이르러 황소인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야훼에 대한 정의가 확장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야훼가 성궤 속에 살고 있었다고 믿어졌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한다는데 출애굽 당시 모세가 이집트의 성궤를 훔쳐나온 것을 두고 확대해석한 것이라고 본다. 이집트는 초고대 인류의 문화가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집트 벽화에는 아즈텍 벽화와 같이 UFO도 등장하고 있고, 기다란 전선에 연결된 전구도 명백하게 등장한다. 초고대 인류의 과학 문명이 전승되지 않았다면 그저 상상만으로 남긴 벽화로 보기 어렵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성궤는 이집트의 성궤를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했을 모세가 자신의 민족을 탈출시키며 절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애초에 미개한 유대인들이 성궤를 지니고 있었고 그것을 이집트인들이 강탈했었는데 유대인들이 탈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성궤를 나를 때는 특수한 제복을 착용했는데 그 제복을 착용하고도 성궤를 나르는 사람들이 쓰러져 죽는 상황은 즐비했다. 성궤 자체가 에너지를 응축하는 발전기체였으며 그 에너지가 방전될 때 그 반경 내에 있는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이건 과거 읽었던 고대의 오파츠들을 다룬 저작에서 본 내용인데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라엘리안 무브먼트라던가 대표적으로는 그레이엄 핸콕과 제카리아 시친을 위시한 이 분야 전문가들은 대부분 현재 인류 문명 이전의 초고대 인류가 존재했으며 그들은 외계인의 문명 전달로 발전한 것이라 보고 있다. 하지만 46억 년의 지구 역사로 볼 때 (현재의 인류와 달리) 초고대 인류가 자체적으로 그들 문명을 이룩한 이후 그들(외계인들)과 교류했다고 본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내용도 등장한다. 그들 경전인 [아베스타]의 찬송가인 [가티스]는 힌두교 베다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의 가장 오래된 형태와 비슷하다고 한다. 아마도 힌두교의 영향을 조로아스터교가 받았던 것으로 보이지 그 둘의 근원이 같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만약 근원이 같다면 경전 자체의 언어까지 같아야 할 텐데 왜 찬송가 내용만 같겠는가?

 

조로아스터교의 교조 자라투스트라는 영혼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고 한다. 그 세 가지는 신체가 죽은 뒤 남는 개인의 일부분인 우르바니, 그들이 죽은 뒤부터 세상에 살아온 프라바시, 양심을 뜻하는 다에나를 말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 주요 종교들이 탄생하는 근본적인 이념 체계를 제공했다는데, 선과 악의 이원론과 그들의 충돌 그리고 종말론, 또 하나 구세주에 대한 관념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발견되고 일부는 사실 불교와 같은 진화한 종교에까지 있는 생각들이기는 하다. 원형이 같다고 아직까지의 고고학적 발견으로는 앞선 시대의 것이니까 무조건적으로 오리진일 것이라는 단정은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아직까지의 결론으로는 일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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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발명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장의 제목부터가 지혜의 도시이듯 도시 생활 이후에야 문자가 발명되었고 문자 발명 이후 가장 인상 깊었던 세 가지는 종교 양식의 변화와 전쟁의 변화를 불러온 탈것의 개발과 법전의 등장이다.

 

학자들은 문자는 수를 기록하기 위한 수단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초기 도기로 기록을 대신 삼던 것이 하나의 상징을 기록해 두던 것으로 발전했고 이것은 사원 등의 출납을 기록하다가 더욱 다양한 상징으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자가 좀 더 체계적이기 전부터 기록은 잉여생산물의 유통을 기록하는 데 적용되었다. 문자가 보다 발전한 이후에는 종교의 심층화로 이어졌다. 종교 사원의 출납뿐 아니라 다양해진 상징체계의 발전으로 형이상학적 사고로 발전해 나가는 계기가 되어 더욱 종교적 깊이가 더해졌다고 보여진다.

 

문자는 문자를 기록하는 자인 필경사들을 양성하게 했고 필경사(두브사르, 수메르어)라는 말은 곧 교양인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우르에서 필경사를 양성한 것은 적어도 기원전 2000년대 중반이다. 기원전 1900~1200년에는 공공도서관만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 서고가 있었고 줄잡아 4천 종의 문헌이 소장되었다. 당시 가장 권위 있는 학문으로 천문학*점성학, 예언문학, 주술을 들고 있다. 아슈르는 이런 학문으로 알네메키, 즉 지혜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도시화는 이런 문명 발전의 전환을 가져왔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보호 받고자 하는 욕구보다 도시화가 먼저라는 것이다. 성벽이 없는 거대 도시가 발굴되고 성벽의 역사는 거주지가 형성된 이후에 생겼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도시화는 종교적 발상이 구체화 되어 현현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지구라트(정상 또는 산꼭대기를 뜻하는 초기 아카드어인 지구아라트가 어원) 같은 거대 구조물들은 거대 도시인구가 등장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바퀴의 발명도 거대 공동주거 이후 있었고 바퀴의 등장 이후 발전 양상은 탈것 특히나 전차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성벽과 전차는 초기 전쟁 양상을 바꾸었다. 최초의 탈것은 기원전 7000년 극지대에 가까운 북유럽의 수렵-어업 사회에서 만들었다(개가 끄는 썰매)고 보고되고 있다. 본격적인 탈것의 전조는 기원전 3000년대 후반 우르크의 그림문자에서 볼 수 있다. 바퀴와 축이 붙은 정식 탈것은 비슷한 연대에 속하는 스위스 취리히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2000년 이전 고고학 유적에서 나온 원반형 바퀴는 덴마크에서 페르시아까지 널리 퍼졌다.

 

후반에 법전 이야기가 있다. 함무라비(기원전 1792~1750) 법전의 등장을 가장 먼저 들고 있으나 그 이전인 수메르 법전(기원전 1934~1924)과 우르남무(기원전 2100년경) 법전의 예도 언급되고 있다. 일상적인 상식과는 다르게 법전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성서나 함무라비 법전의 내용 보다 오히려 그 이전인 수메르 법전과 우르남무 법전에 이런 극단적인 보복형 조항이 없다.

 

당연한 불문법적 조항이라 기록할 필요도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시대가 흐를수록 피해자 우선주의가 더욱 보장되는 식으로 법률이 발전한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문자의 발명과 도시화는 추상적 사고를 불러와 학문의 발전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종교 양식 또한 구조화, 체계화하게 되었고 사회 조직에서 필요한 법과 같은 제도의 발전까지 가져왔다. 수치를 기록하게 되었기 때문에 성벽과 같은 건설도 보다 정교화 될 수 있었다고 본다. 탈것이 전쟁의 양상을 바꾼 것은 인간의 호전성이 문명에 어떠한 식으로 드러나는지는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자 구체적인 사례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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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aUNNuBfrMA?t=88


기어이 인간을 공장에서 대량 생산 가능한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인간의 기술력이 유전자 조작으로 유전적 문제를 제거하고 맞춤 아기를 생산 가능한 시대가 되었네요. 독일의 분자생물학자가 아기를 대량 생산 가능한 시설의 건설을 위한 홍보영상을 제작해 광고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공장만 건설하면 한 번에 3만 명의 아기를 생산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제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간 생명의 존중이 유지될 수 없는 시대로 이행해 가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천부인권이라던가 생명 존중 사상이 등장한 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그리 오래지도 않은 현상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선민사상을 가진 일부 민족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지역에서 생명 존중과 겸애 또는 박애를 외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일부 식자층의 주장일뿐 현실은 전쟁으로 무수한 생명을 앗아가고 살육을 일상에서 경험하며 살아가는 시대가 오래도록 이어져 왔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머리로만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로 보장받고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리가 있는 것이라는 의식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의식의 확장이자 혁신적인 발상이었습니다. 헌데 그 혁신이 이리 빨리 폐기될 시대가 올지는 몰랐네요.

 

선민사상에서 우생학까지 인간의 특권의식은 다양한 양식을 띠며 이어져 왔습니다. 이런 특권의식이 초엘리트층, 초특권층으로 이어진다면 현재 인류의 생존은 보장받기 어려운 시대로 접어들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로봇과 AI로 노동력이 전면적으로 대체되고 부의 정점에 이른 그들(26명의 극소수와 그들에 부수적인 몇천 명의 소수)이 더 이상의 소비자로써의 대중의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될 때 인류는 언제든 제거하고 다시 생산하면 되는 대체재로 전락하고 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든 질병이든 무엇을 일으켜 대량 학살이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생각됩니다. 현재의 식자층 중에도 이제까지의 인류가 각 시대마다의 변혁에 적응해왔듯 다가오는 변화에도 적응하여 살아갈 거라는 관점을 지닌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에 마주한 변화들은 이제까지 인류가 적응해 오던 변화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에 편리와 관련되는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가치를 어떤 방식으로든 정의하게 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AI가 인간의 존재가치를 제고해 보는 시대라는 것도 인간의 어깨에는 부담이지만 같은 인간의 가치 유무를 판단할 초특권층의 결론이 어떠할지가 가장 대중에게 위협이 되는 시대가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이 예견한 것보다 더 암흑적 시대상황에 목격자이자 피해자로서 서있는 것이 현 인류의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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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2-21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하라님, 편안한 하루 보내셨나요.
오늘 눈이 많이 오면서 덜 추웠는데, 다시 밤부터 한파가 오는 것 같아요.
추운 날씨 조심하시고, 따뜻하고 좋은 밤 되세요.^^

이하라 2022-12-22 10:3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오늘도 눈이 오는데 어제 보다는 약간 춥네요.
그래도 눈이 오지 않을 때보다는 훨씬 포근한 느낌입니다.
더 따뜻하게 보내시고 포근한 하루 되세요.^^
 
우리 속에 숨은 사이코패스 - 정상의 가면을 쓴 그들의 이야기
이윤호 지음, 박진숙 그림 / 도도(도서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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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흔히 반사회적 인격장애라 불리는 이들은 어쩌면 인간의 원형에서 선성과 악한 면모 중 한 축을 그려내는 대극의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원형 중 이제까지 한 측면만을 부각해 오고 그러한 모습으로 사회화되어 왔지만 그것도 선성은 아니었습니다. 승자독식, 약육강식, 인간의 이기성에 주목하는 관점이 과연 인간의 선성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이제까지 아마도 인간의 악성을 부각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근간에 [휴먼카인드]라던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저작들로 보아 인간의 선성에 주목하고 그러한 면을 보편화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역시 한 측으로 기울어진 주장이다 보니 인간의 악성을 경험하거나 역사를 통해 인간의 악한 면모를 인식하고 있는 대중들을 설득하기에는 다소 우스운 설득방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에 이르면 인간 원형의 대극에서 악한 측면으로 그 극성이 극한에 이른 것이 아닌가도 싶네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범죄로 드러나고 있고 정치인들 일부의 양상에서도 그런 면모가 찾아집니다. 근래까지도 정권의 교체기마다 관련인들의 자살로 알려진 죽음들과 의문사가 만연해 왔었던 것도 그 증거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나 특정 정치인의 경우 그의 비리 의혹과 관련한 사람들이 4명이나 자살하거나 의문사한 통계적으로 말이 안되는 사례가 있으며 최근 그의 비리의혹과 관련한 또 한 명이 자살시도를 했다는 뉴스가 연일 방송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권력의 정점에 이러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들이 자리한다면 어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으로 그들과 같은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지닌 이들이 권력욕을 추구할 때 이 사회는 너무도 스산하고 잔혹하게 변해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됩니다. 그래서 더욱 그들을 알고 그들을 치유하거나 그들과의 거리를 지키며 사는 법을 대중이 알아가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는 반드시 대중교양서로 널리 읽혀져야 할 책이 아닌가 합니다.

 

살아오면서 보거나 경험한 것들의 누적으로는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같은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갖는 사람들은 태생적이고 유전적이기도 하지만 환경과 사회적 풍토의 영향도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이 사회가 인간의 이기성에만 주목하고 그것을 장려하는 사회상을 띠고 있기에 자라나며 교육에서부터 승자독식주의를 답습하게 되는데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더는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아니라 현대인 일부의 상식으로 자리잡는 것도 이상하지 않고 말입니다.

 

저자 역시 프롤로그부터 [유전성과 개인적 환경뿐만 아니라 사회도 친사회적 혹은 반사회적 인성을 형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점과 범죄학자의 정의가 같은 데 딱히 놀랍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사회 속에 만연하고 범람하는 반사회적 인성이 타고나기만 하는 거란 결론을 갖기는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이코패스는 미국 인구 중 1%를 차지하고 소시오패스는 미국 인구의 3~5%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비율은 재소자 중에서는 더욱 높게 나타나는데 전체 재소자의 25%가 반사회적 인격장애 범주에 속한다고 하네요. 전체 미국 인구 중 1%라고 한다면 33십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사이코패스이고 전체 미국 인구의 3~5%라고 한다면 99십만 명에서 165십만 명이 소시오패스라는 것이니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인구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군대나 직장 등에서 이런 범주의 특징을 보이는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범주의 선임이나 상사를 만나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강제적으로 반강제적으로 비슷한 성향을 보이게 되는 경향도 있습니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라는 것은 알고 보면 하나의 마인드 바이러스이고 재프로그래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영향이 어떠한지 어떻게 종용되고 어떠한 조직이 이런 성향을 강제하거나 유포하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종용한다 강제하거나 유포한다고 하니 설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실제로 영국 공군의 특수부대에서는 이러한 반사회적 특질을 목표로 삼고 그러한 특질을 보이도록 훈련하고 있으며 영국의 은행들은 직원을 뽑을 때 이러한 성향을 보이는지 조사하는데 그건 반사회적 인성을 보이는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고용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사회가 반사회적 인성을 장려하고 추구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 기업의 임원들은 반사회적 인격장애 기질을 가질 확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높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언론에서는 월가 임원들 중 10%는 사이코패스에 해당한다는 기사를 내보낸 적도 있다고 하는군요.

 

사회가 요구하는 성향이니 사회 내에서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지며 자라나는 것은 특이하지도 정상을 벗어난 것이지도 않은 일상적인 상황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회가 과연 권할만 하거나 이대로 유지되어도 좋은 사회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시대입니다.

 

사이코패스가 가장 많이 분포한 직업군을 살펴보면 10위가 공직자, 9위가 요리사, 8위는 성직자, 7위는 경찰, 6위는 언론인, 5위는 외과의사, 4위는 영업사원, 3위는 방송인, 2위는 법조인, 1위는 기업가라고 합니다. 대부분 미디어를 통해 영웅화되고 이상화되는 직업군으로 이런 직업을 가진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는 인물들이 연애하는 로맨스 장르의 TV드라마는 흔히 몇 번이고 보셨을 겁니다. 이들의 직업군과 이들이 드라마에서 보이는 성향이 이상화되어 표현되다 보니 청소년들은 이런 성향을 보이면서 해당 직업군을 가지는 것을 당연시하는 경향을 띠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더욱이 [권력의 심리학]에서 브라이언 클라스가 지적했듯 부패한 권력의 자리는 부패한 인간들을 끌어모으기 마련입니다. 당연히 저 위치의 인간들은 저래야 한다는 상식을 지니게 되면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지닌 이들은 그러한 자리를 추구하게 될 가능성이 다른 경우보다 현격히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가 조성하여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모으고 유지하고 길러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서에서는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정의를 확인할 수 있고 사이코패스의 뇌과학적 특질도 보여주며 타고나는 성향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 여러 사례에서 알수 있듯 본서를 읽고 보면 타고나는 것이 육성되는 것보다 결코 비중이 높지 않다고 결론지어집니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사회가 문제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적절한 대응안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자의 말처럼 사이코패스든 소시오패스든 양육의 방식 곧 사랑이 치료법이 됩니다.

 

승자독식과 황금 만능주의가 결합하고 이기성에만 주목하는 사회상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대물림 하지 않을 때 사회에서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감소하고 그런 성향을 띠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어느 범죄자가 출소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거주를 할 수 없도록 만들자고 하고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위한 나라니 하는 말이 확산되는 건 그러한 범죄자로 자라난 이들을 방치하고 수감 기간에도 치료하지 못한다는 걸 모든 사람들이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태어나는 사람도 양육자와 환경에 따라 사회에 기여하는 인물로 자라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나지 않는 사람도 성장 과정의 문제로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건 그들을 범죄자로 자라나게 하는 사회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고 치유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은 더더욱 문제입니다.

 

수감기간 동안 어떠한 범죄자라도 다 치유되어서 나오는 사회라면 누가 출소한 범죄자의 거주처가 어디가 되느냐로 반발하겠습니까? 상처를 만들지 않는 사회, 상처를 지속하지 않는 사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라면 누구도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뉘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한 벽돌 하나의 역할을 이 책이 해주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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