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발명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장의 제목부터가 지혜의 도시이듯 도시 생활 이후에야 문자가 발명되었고 문자 발명 이후 가장 인상 깊었던 세 가지는 종교 양식의 변화와 전쟁의 변화를 불러온 탈것의 개발과 법전의 등장이다.

 

학자들은 문자는 수를 기록하기 위한 수단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초기 도기로 기록을 대신 삼던 것이 하나의 상징을 기록해 두던 것으로 발전했고 이것은 사원 등의 출납을 기록하다가 더욱 다양한 상징으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자가 좀 더 체계적이기 전부터 기록은 잉여생산물의 유통을 기록하는 데 적용되었다. 문자가 보다 발전한 이후에는 종교의 심층화로 이어졌다. 종교 사원의 출납뿐 아니라 다양해진 상징체계의 발전으로 형이상학적 사고로 발전해 나가는 계기가 되어 더욱 종교적 깊이가 더해졌다고 보여진다.

 

문자는 문자를 기록하는 자인 필경사들을 양성하게 했고 필경사(두브사르, 수메르어)라는 말은 곧 교양인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우르에서 필경사를 양성한 것은 적어도 기원전 2000년대 중반이다. 기원전 1900~1200년에는 공공도서관만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 서고가 있었고 줄잡아 4천 종의 문헌이 소장되었다. 당시 가장 권위 있는 학문으로 천문학*점성학, 예언문학, 주술을 들고 있다. 아슈르는 이런 학문으로 알네메키, 즉 지혜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도시화는 이런 문명 발전의 전환을 가져왔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보호 받고자 하는 욕구보다 도시화가 먼저라는 것이다. 성벽이 없는 거대 도시가 발굴되고 성벽의 역사는 거주지가 형성된 이후에 생겼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도시화는 종교적 발상이 구체화 되어 현현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지구라트(정상 또는 산꼭대기를 뜻하는 초기 아카드어인 지구아라트가 어원) 같은 거대 구조물들은 거대 도시인구가 등장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바퀴의 발명도 거대 공동주거 이후 있었고 바퀴의 등장 이후 발전 양상은 탈것 특히나 전차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성벽과 전차는 초기 전쟁 양상을 바꾸었다. 최초의 탈것은 기원전 7000년 극지대에 가까운 북유럽의 수렵-어업 사회에서 만들었다(개가 끄는 썰매)고 보고되고 있다. 본격적인 탈것의 전조는 기원전 3000년대 후반 우르크의 그림문자에서 볼 수 있다. 바퀴와 축이 붙은 정식 탈것은 비슷한 연대에 속하는 스위스 취리히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2000년 이전 고고학 유적에서 나온 원반형 바퀴는 덴마크에서 페르시아까지 널리 퍼졌다.

 

후반에 법전 이야기가 있다. 함무라비(기원전 1792~1750) 법전의 등장을 가장 먼저 들고 있으나 그 이전인 수메르 법전(기원전 1934~1924)과 우르남무(기원전 2100년경) 법전의 예도 언급되고 있다. 일상적인 상식과는 다르게 법전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성서나 함무라비 법전의 내용 보다 오히려 그 이전인 수메르 법전과 우르남무 법전에 이런 극단적인 보복형 조항이 없다.

 

당연한 불문법적 조항이라 기록할 필요도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시대가 흐를수록 피해자 우선주의가 더욱 보장되는 식으로 법률이 발전한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문자의 발명과 도시화는 추상적 사고를 불러와 학문의 발전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종교 양식 또한 구조화, 체계화하게 되었고 사회 조직에서 필요한 법과 같은 제도의 발전까지 가져왔다. 수치를 기록하게 되었기 때문에 성벽과 같은 건설도 보다 정교화 될 수 있었다고 본다. 탈것이 전쟁의 양상을 바꾼 것은 인간의 호전성이 문명에 어떠한 식으로 드러나는지는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자 구체적인 사례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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