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심, 혹은 연민, 불쌍함에 대한 어쩌지 못함. 내 욕구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힘들어 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
활짝 웃고 괜찮다고 말하면서, 나의 상처를 능숙하게 감추는 일.
요구를 요구한 적이 없어서 이따금, 도대체가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를 모르겠는 거.
그래서 되려 타인의 요구 뒤에 숨는 것.
누군가를 보호하거나, 누군가를 도울 때만 나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
나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을 대롱대롱 매달고 다니는 거. 그건 사실 내가 누구보다 의존하고 싶다는 것의 반증.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타인의 판단에 맡겨버리는 거.
책임감과 의무감, 해야한다 속에서만 기능하는 삶. 그것이 없다면,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거칠게 단정짓던.

‘나’를 마주보게 된 것은
사실 전적으로 프로이트 덕분이다.

내가 내뜻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너무너무 잘 아는 데, 그걸 해결할 도리가 없어서. 거기에는 나도 미처 모르는 무의식이 작용하는 걸 거라고, 네 어린시절의 상처를 톺아서,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너의 관계 맺기와 선택들을 ‘의식화’해야 한다고 그의 이론을 풀어쓴 책들이 일러줬을 때.

엉망진창인 내 무의식 속의 상처를 들여다 보는 것은 약간의 부담스러운 비용과 꽤 긴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었고, 나의 경우는 특별히 아주 많이 울어야 하는 일이었다. 제대로 울기 위해, 각잡고 울기 위해, 그만 둘 수 있는 것은 다 그만두고, 시간내서 울고, 힘이 빠질 때 까지 울고, 울기 위해 밥을 먹고, 밥먹고 기운차려 또 울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고, 골이 울릴 때까지 울고, 아무튼 어쨌든 울다가 가끔 한번 씩 눈물의 의미를 묻는 일기를 쓰고.. 그렇게 반년 정도 보냈나? 그렇게 프로이트의 제자들에게 돈을 쓰고, 도움을 받아, 건진 것이 있다면. 그건 나 자신이다. 

그 시간들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살았을 거다. 

나는 나를 알고 싶다. 내 삶과 상처를 해석하고 싶다. 그런데 수학 공식을 풀거나, 1000조각 퍼즐을 맞추는 것 처럼 나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나는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나는 계속 변할 것이다. 나를 둘러싼 세상도 변하고 있고. 내 몸이라는 유기체도 매 순간순간 변한다. 프로이트를 알게 된 이후, 내가 새롭게 가지게 된 나에 대한 자세는 나를 공부하되, 나에 대해 잘 안다고 단정짓지 않는 것이다. 나를 모르는 존재로 대할 것. 알기 위해 노력할 것. 살아있는 한 꾸준히. 그렇게 지낼 것. 

그리고 그것을 유난 떤다고 취급하는 이들과는 친구하지 않을 것.

*

“페미니즘-교차하는 관점들”에서 내가 가장 기대했던 파트는 6장 정신분석 페미니즘이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대표적으로 미움받는 위인을 딱 두명만 꼽자면 하나는 마르크스요 그와 동급 혹은 한단계 위에 프로이트가 있는 듯 하다. 20대 내내 나는 마르크스를 좋아했고(세상을 미워했다), 30대가 되어 프로이트를 만나 조금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았다.

프로이트를 공부한 상담샘에게 비용을 꼬박꼬박 지불한 덕에 이별하는 방법(분리되는 방법)을 겨우겨우 습득하였고, 인생은 실전! 비싸게 배운 그 기술을 프로이트에게 아주 잘써먹고 있다. 한 때, 사랑하고 의지했던 두 아재들이 페미언냐들에게 욕을 배불리 먹고 있는 광경을 팝콘각을 하고 아주 재밌게 즐겁게 관전하는 것이다. 

원펀맨 느낌으로 한번에 죽사발을 만드는 싸움도 좋지만. 정말 즐거운 관전 쾌감 포인트는 적의 무기로 적이 제 발등을 찍을 때인 데. (부연하자면 쿵푸팬더가 자기의 힘이 아니라 적의 힘을 반사하는 기술로 싸움에서 이기는 것 같은 느낌의?) 특히 마르크스가 그랬다. 캘리번과 마녀 등을 읽으며 마르크스가 보고도 못 본 ‘재생산’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을 땐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아아!! 이겼다!! 언니들이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겼어!!

그들이 만든 언어와 논리안에서 그들의 맹점을 논파하는 광경을 보는 것은 쾌감을 준다. 서양 철학사 전반이 그렇다고는 하나, 철학도 역사도 언어도 지금껏 여성의 것이 아니었기에 철잘알, 역잘알, 말잘러인 언니들이 제대로 각잡고 고고한 철학자 아재들 뚝배기 깨는 글을 읽는 건 더 큰 쾌감. 쾌쾌쾌감. 

그래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마르크스를 비판 + 갱신한 것 처럼, 정신분석 페미니스트들도 어떻게 보면 더 악독한(?) 프로이트를 호로록 갈아서 마셔버리고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 데. 슬프게도 아직까진 “프로이트 이 바보, 그걸 몰랐어? 으이그, 아재여. 옛다. 니 전제부터 갱신해🥱.” 이렇게 해준 언니는 없는 듯 하다. 
“(314) 대부분의 현대 정신분석 페미니스트들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자크 라캉을 넘어선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긴 하지만, 전적으로 비가부장적인 정신분석 페미니즘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할지는 열린 질문으로 남아있다.”

이리가레 부분을 읽으면서(당연히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많이간 거 아녀? 싶긴 했는 데 “쥘리아 크리스테바가 라캉의 ‘착한 딸’ 이라면 이리가라이는 ‘못된 딸’” 이라는 종류의 언설을 보면, 아직 가야할 길이 더 있나봄. 라캉의 딸.. 그것도 못된 딸이라니. ... 그런데 나도 못된 딸이어서 이리가레 좋다... 핫!

“(307)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정의를 전복하기 위해 .... 여성은 여성에 대한 정의를 ‘과도하게 실천’하기를 시도하다가 무심결에 그 속으로 다시 함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위험에도 여성은 모든 기회를 활용해 상징적 질서에 소란을 일으켜야만 한다. 앞의 논의를 살펴볼 때 궁극적으로 명칭화와 범주화 과정을 끝내야만 한다는 이리가레의 확신과 어쩔 수 없이 이 과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또 다른 경쟁적 확신 사이에 분명한 긴장이 드러난다. 뤼스 이리가레는 자신의 글에 나타나는 모호성과 양가성에 당혹감을 느끼는 대신에, 점점 더 즐거워했다. 뤼스 이리가레에게 자기모순은 남근중심주의가 요구하는 논리적 일관성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

이리가레 글쓰기가 불명료하다고 비판 많이 받은 모양인 데, 그걸 즐거워하신다고... 멋져.

“(p.410-여성주의고전을 읽다: 뤼스 이리가라이) 이리가라이는 가부장제 문화적 근간 전체를, 상상계와 상징계(언어) 그 자체와 그것을 반영한 지적 체계의 핵심을 모조리 문제삼는다. 그 효과적인 대상, 가부장제 사회와 문화의 저변을 담당하는 것이 철학이기에, 그녀는 여성을 체계적으로 배제시켰던 남성-동일자의 표현양식인 서양 철학사와 철학전통 전체의 계보 곳곳에 깃들어 있는 남성중심성을 저며내고, 성적차이를 사유하는 새로운 지평, 새로운 초월의 방식을 만들고자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속적이고 집요하게 사유를 멈추지 않았다.”

“(같은 책 413) 그녀는 1974년 프로이트와 라캉 정신분석의 팔루스중심주의를 비판한, 두 번째 박사학위 논문 ‘스페큘럼’을 간행한다. 이 책의 출간은 이리가라이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직업적으로는 평생의 어려움을 가져다준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벵센느 대학의 교수자리를 잃었고 라캉학파에서도 파문되었으며, 말년까지도 프랑스 대학에서는 정식교수 자리를 얻지 못하게 된다.”

이리가레의 글쓰기 스타일도 멋있는 데, 서양 철학사 통째로 씹어드시겠다는 그 포부도 멋지고, 살아온 인생은 더 멋져버린다. 팔루스중심주의 얼마나 대차게 깠길래 (읽어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고추중심주의ㅋㅋ를 공부해야하는 가?? ) 라캉학파에서 파문당한거여..😮😱  교수도 못됐으면 뭘로 먹고 산거여.. 언니야😭ㅜ_ㅜ... 이렇게 멋짐이 뿜뿜한 이리가레가 궁금해서 뒤져보았으나, 그의 생애사는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고 하는 데, 까닭은 여성 사상가를 하나의 일대기로 축소시키는 전기론(의 가장 큰 예시가 선배 보부아르)에 반대하는 이리가레 본인의 신념인 듯 하다고 위의 책에서 그러더라. 아 일관되다. 대쪽같은 사람이야. 참! 

어쨌든 생애사는 글렀고, 그의 사상을 요약한 것을 읽었으나 (이해는 거의 못한) 느낌적인 느낌으로 이리가레가 엄청 훌륭한 페미니스트이자 철학자라는 건 알겠지만,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는 내 지식의 비루함이 좀 슬펐다. 뭐 스페큘라까지는 먼 훗날에 읽어보기를 기약하더라도 최근에 나온 신간 <식물의 사유>는 읽어보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담았다. 생각해보니까 파이어스톤도 좋다고 좋다고 그래놓고 <성의 변증법> 어려워서 못 읽었다. 

에효. 진짜. 책읽고 싶어서 책을 더 읽어야 하는 상황이 연거푸 발생하는 중인 데-... 결국.. 공부해야 하는 가. 
프로이트도 모르는 데, 라캉을?.... 로 ㅏ.......캉...?

*

어쨌든 앞서 밝혔지만, 나는 나를 아는 게 중요하고. 적어도 요즘의 나를 알아가는 데에는 페미니즘만 한 게 없는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이 독후감을 쓰면서 알아낸 나 자신은 이러하다. 

나는 내 생각보다 더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그리고 이 책 저 책 뒤적이느라 한 권의 책에 도통 집중을 못한다. 그런데 또 어떻게든 읽기로 한 책은 읽는다. 독서 자체는 아무 목적없이 즐기는 편이다. 다만 집어든 한 권의 책을 끝까지 다 읽는 것은 전적으로 ‘책임감’ 때문이다. K-장녀에게 책임감이란, 의식화를 해서 떨쳐내려고 해도 골수에 박혀있는 DNA와 같은 것이다. (앞으로 내 남은 인생의 숙제는 책임감의 범위를 어떻게든 협소하게 줄이고 줄여 홀가분해지는 거다.) 그러므로 평소처럼 오로지 즐기기 위한 독서에 머물렀다면 나는 이름만으로도 어려워했던 이리가라이를 조금이나마 알게되는 즐거움을 놓쳤을 거다. 

결론 : 이토록 좋은 ‘책임감’을 심어주신 알라딘 서재 마을에 서식중이신 페미니즘 벽돌책 깨기 집단에게, 새책을 사면서 땡스투로 꼭 보답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라딘에게만 좋을 일이다. 결국 승자는 알라딘이다. 아이씨. 아직 추석전에 시킨 택배도 덜 왔는 데 또 사고 싶다. 아까 안사기로 마음먹었잖아... 황정은, 백수린은 언제 읽을건 데.. 올해엔 소설도 좀 읽기로 스스로에게 약속했잖아. 그런데..... 10월에는 10월의 책이 있어.. 이번엔 두권이야.. 하지만, <식물의 사유>....ㅜㅜ 오오 이리가라이여. “이리가레에게 자기모순은 남근중심주의가 요구하는 논리적 일관성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 ... 나는 저항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 나는 모순이다... 나는..... ....

....

과연 나의 장바구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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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0-10-06 0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x 10개입니다.

공쟝쟝 2020-10-06 07:56   좋아요 0 | URL
그 좋아요 나도 좋아요 ㅠㅠㅠ

반유행열반인 2020-10-06 0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를 모르는 존재로 대할 것. 알기 위해 노력할 것. 그리고 내가 책을 사 봤자 배때기 부른 건 알라딘이지만 내 배도 조금 부르길 바라며 ㅋㅋㅋ 저는 한 달에 소설 다섯 권 읽기 시집 한 권 읽기 하고 있는데 쟝쟝님도 소설 한 권 할당제 도입합시다 ㅋㅋㅋ사회학 여성학 한 세트 당 소설 한 권 2 1 같은 거ㅋㅋㅋ

공쟝쟝 2020-10-06 07:59   좋아요 1 | URL
저의 든든한 한국 소설 친구 ㅋㅋㅋㅋ 이미 땡스투 몇번 쐈는데?? 몰랏죠?? 사회학, 여성학?? 그거 안읽은지 오래 ㅋㅋㅋㅋ 요즘 저의 읽기는 모두 에세이로 수렴됩니다.. 에세이 넘 좋아, 에세이 쵝오! 소설도 좋은데 중간에 끊으면 너무 힘들어서 ㅠㅠㅠㅠㅠ 중간에 끊기는 소설은 재미가ㅠ없고 ㅠㅠ

수이 2020-10-06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백만개 얹어놓고 갑니다. 쟝쟝님 쌩얼 같은 글이라서 더 좋은.

공쟝쟝 2020-10-06 19:26   좋아요 0 | URL
이 글에 좋아요가 백만20개 되었다!! 비록 탈코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지지)글이라도 코르셋을 벗고 생얼로 쓸 수 있다면..!

다락방 2020-10-06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x 10개입니다. 2

쟝쟝님이 스스로를 들여다보려고 노력하고 또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말도 잘 들어주는 것 같아요. 쟝쟝님과 대화 하다가 나도 모르게 위로받았던 적도 있었거든요. 얼마전에 책읽기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다고 말했지요? 저는 책읽기를 같이하려고 만났다가 좋은 사람들을 친구로 두게 되어서 좋아요.

:)

2020-10-06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10-06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회사 사장님 전화번호 좀 줘봐요. 전화 좀 하게요.
나는 쟝쟝님 글을 더 많이, 더 자주 읽고 싶어요. 기다린 보람이 있었어요! 기다린 보람이 있어요!!!

공쟝쟝 2020-10-06 19:35   좋아요 0 | URL
전 그분의 번호는 물론 회사의 번호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의식적 잊음도 아니고 ㅋㅋㅋㅋ 이건 진짜 무의식이 기억을 방해하는 듯ㅋㅋㅋ 기다렸다니 ㅠㅠ 우왕 ㅠㅠㅠ 나 막 또 쓴다..?

syo 2020-10-06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발 일 좀 줄이고 글 좀 더 써봐요.... 잘하잖아...

공쟝쟝 2020-10-06 19:39   좋아요 2 | URL
앗싸! 어디를 잘썼는 지는 모르겠지만 잘쓰는 사람에게 칭찬 들었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김은주 지음 / 봄알람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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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타자와 괴물을 몰아낸 기반에 뿌리 내린 철학에서, 여성은 타자다. 타자로서의 여성은 자신의 입말이 아니라, 자기를 탄압하고 옥죄는 언어로 사유와 철학을 시작한다. 여성을 타자로 규정한 철학 안에서 철학적 사유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얼어붙고 어두운 시기에,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정한 공간에서 온 힘을 다해 힘겹게 머무는 일이다.”

“(12) 이 책에서 소개하는 한나 아렌트, 가야트리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도나J헤러웨이, 시몬 베유, 쥘리아 크리스테바 여섯 명의 여성 사상가이자 철학자는 주로 20세기에 활동하면서 근대 주체를 비판하고 근대 이후를 모색했다. 이들은 타자와 소수자의 문제를 철학적 문제로 성찰하고, 타자를 동일성의 범주로 판단해버리지 않고, ‘즉시 이해가능하지 않은’ 겸손한 지평에서 타자와 맞닿았다. 말을 길어 올려 새로운 사유를 끌어낸 그들로부터 알게 된 것은, 동일자로 호명되어온 인간이 실은 이방인이며, 타자라는 사실이다.
이 책은 여성철학자들을 단일한 혈통의 계보로 묶기보다는, 이들이 각각의 위치에서 벌인 치열한 사유와 아직 쓰이지 않은 삶에 대한 전망을 축으로 엮었다. 확실히, 사유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살기 위한, 삶을 계속하기 위한, 함께 존재하기 위한 깊은 열정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오랫동안 홀로 생각해온 여자들과 이제는 같이, 문턱 너머 저편으로 건너가고 싶은 갈망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존재하려는 열정이 그녀의 몸에 아로새겨져 있다. 우리가 서로를 발견할 때까진,우리는 혼자일 수밖에 없다(에이드리언 리치).’”


까지 책정리를 했는 데, 혼술에 취해서 뭔가 더 이상 책을 정리할 수가 없다.


괴물과 잠을 자기에는 너무 쫄보고(생각하기가 싫어요), 그러나 그게 궁금하긴 하니까 괴물이랑 잔다는 소문을 듣고 영화 쉐이프 오브 워터를 보고 실망한....(응?) 나로서는, 제목부터 넘나리 매력적인 책이었지만, 여기에 나오는 그녀들을 다 모르는 거라... 그래서 내가 읽는 책 중에서 나오면 한편 씩 독파해야지! 마음먹고 읽기를 어언 2년(참 길었다)... 2018년 4월부터 읽던 책을 이제야 다 읽었다. 쥘리아 크리스테바와 도나J해러웨이를 도통 어느 텍스트에서도 만나기 힘들었는 데... 다행스럽게도 페미니즘-교차하는 관점들 에서 다들 등장해주셨다.

연휴의 막날이라 안취하기 싫은 데, 한 줄이라도 써야할 것 같아서. 
흩어져가는 정신을 붙잡으며 한줄 쓴다.

나는 언제나 처럼 아마 내일도 후려쳐질거다. 절반은 노동자이기 때문이겠지만 절반은 ‘나이들어가는 여성’ 노동자이기 때문이기도 할거다. 네가 여길 벗어나서, 가봤자 얼마나 좋은 곳이겠어?를 묵음처리한 말들이 펼쳐질 것이고, 때때로 호의를 가장하지만 그래서 더욱 비참해지게 하는 염려의 말들을 들으며, 속에서는 비웃을지라도 겉으로는 방긋 웃겠지. 씩씩한 척도 할거다, 아마. 매일매일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런 말들을 들으면서, 표정관리와 멘탈관리와 근태관리까지 하면서. 아무리 의식적으로 싹싹 그러모아도 원체 빈약한 내 자존감은 손가락 사이로 줄줄 새어나갈거다.

술을 (적당히)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쓰거나, 대화를 하거나, 운동장 트랙을 달리거나.... . 깎여나가는 것 만큼의 자기애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지친채로 악착같이, 애써하다가, 눈에 실핏줄이 터지고, 위장에 구멍이나고(여기까진 슬픈 실화), 쌍코피가 줄줄 흐를 수도 있다.

*

여성이 자아를 축소하고 겸손해지길 독려하는 사회에서 기실 내가 배워왔고 익숙한 것은- [겉으로] 일은 완벽하고 빈틈없이 쨍쨍 잘하면서도, 공은 티나게 티내지 않고 그래도 은근히 드러내면서도, 와중에 겸손해야 하고 또 그게 너무 내숭떠는 것처럼 보여선 안되는. [속으로] 사심없는 헌신인 양 애쓰면서도 은근히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응큼하고 모순적인 것들. 분열적이고 때로는 징그럽기도 한.

생각해보면 이미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에서 미치지 않고 적응하려면(변혁하는 방법도 있지만 진즉 투항했다), 역시 자기혐오나 자기연민에 빠지는 게 더 수월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자기비하와 자조좀 섞어 투덜거리는 게 그나마 건강하다는 생각이다. 또 그런 모습이 - 적어도 자기애가 막 만땅에 차있는 것보다는 덜 이질적일 수도 있겠다 싶다. 

잘 정제된 자기혐오나 잘 포장된 자기연민을 난 좋아한다. 타인을 미워하는 것보다 나를 미워하는 게 난 익숙한 데, 그거 마저 이쁘게 포장하는 정성스러움이 느껴지면, 기분이 좋크든요. 유머러스한 고오급 자기혐오.

*

오늘 모순에 대한 지적을 희열로 받아들였다는 어느 페미니즘 철학자를 읽으면서. 한발짝 더 내딛기로 했다. 나를 망치지 않겠다(는 소극적 자세)에서 한 걸음 더. 개소리 하지마, 나는 더 건강해질 거고, 아주 아주 잘살아버릴거다. 그리고 이미 충분히, 당신 보다 잘 살고 있다.!!! 감히 너따위가 걱정해줄 나님이 아니시란 말이다!! (아니... 이걸 인제 깨닫다니 ㅠㅠㅠㅠㅠㅠㅠ 오 나여, 가스라이팅에 취약한 쪼렙이여..) 으하하하하! 언젠가 곰곰히 생각해서 적어볼 기회가 있다면 써보고 싶다. 

나는 나를 긍정하고 나를 사랑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신보다 잘 살아버리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어째서
자기혐오나 자기연민보다 더 어려웠는 지.

*


자야겠다. 내일은 여섯시에 일어날거다.
생각하는 (한국) 여자는 고양이와 함께 잠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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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 교차하는 관점들
로즈마리 퍼트넘 통.티나 페르난디스 보츠 지음, 김동진 옮김 / 학이시습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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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는 파이어스톤, 2위 뤼스 이리가라이, 공동 3위에 오드리로드와 엘렌식수 5위에 앨리슨재거 드리겠습니다. 역자 서문에 좋아하는 페미니스트 뽑으라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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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0-05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무리 숙제까지 아주 야무지게 해버리셨네요!! 수고많았어요, 쟝쟝님!
이 책 읽을 때 나도 참 좋았어요. 모르는 거 자꾸 나와서 심통날 때 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0-10-05 20:45   좋아요 0 | URL
살살읽을 걸 포스트모던에서 빡시게 읽느라 늦게 테잎 끊엇네요! 이번달도ㅠ힘내야지~!

수이 2020-10-05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려요 쟝쟝님~ 👏🏻

공쟝쟝 2020-10-05 20:45   좋아요 0 | URL
꼴등이지만 열심히 한다!
 

(방금 뜯은 따끈한 택배 포함) 이번 주에 산 책! 



모처럼 표지 비평을 하자면 
여기서 베스트는 #티끌같은나 

크으.. 실물보면 더 고급지다. 디자인만 이쁜게 아니라 무게와 판형과 표지의 벌크감과 재질, 책이 가진 두께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다. 걍 딱 내스타일! 훗. 이런 책은 갖춰 놓은 것만으로도 이미 만족. 

사실 조금 갈등했지만 아차상에 #여름의빌라 를 꼽겠다. 백수린 작가의 책들은 언제나 표지가 한 몫한다. 이번 책 진짜 잘썼다기에... 궁금하기도 하고 사실은 표지 땜에 겟! 3위에 황정은 #연년세세 인데.. 작가님의 명성에 걸맞(?)게 창비에서 아주 후가공에 힘 뽝 주셨고, 암요.. 아직 안읽어봤디만서도 양장이 아깝지 않을 가치 충분히 있어보입니다요. 

워스트는 (눈치 챘겠지만) 당연히 #책이게뭐라고 인데 솔직히 #장강명 이 뭐라고 그를 모에화한 캐릭터 그림을 이렇게 본격적으로 표지에 대짜로 실은 거냐😡!!! 진심 지하철에서 읽는데 창피했다. 차라리 bts나 차은우였으면 덜 창피했을 거다.. 안귀여워!!! 안 귀여운데다가!!! 난 장강명 안좋아한다고!!!! 어쨌든 다 읽었으니 빨리 장강명 좋아하는 동생한테 버려버려야겠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즘 #이미지로생각한다는것 을 트레이닝 중인데 책을 읽고 나면 인스타 사진좀 잘찍게 되려나??? (그치만 사진 이쁘게 찍는 게 세상에서 젤로 귀찮소....) 결론은 그르니까 또 샀다.... ㅠㅠ... 아.. 하지만 왜 후회가 안되지??? 그래 사는 건 그렇다치고 언제 다 읽지??하면서 다 읽으기 위해서라도 역시 준비를 해야겠어서 친구에게 빌린 #퇴사를준비하는나에게 으하하! 확실한 건 퇴사하고 나면 시발비용이 줄어들면서 책을 안살거라는 거!! 올해는 글렀고 내년엔 그만 헤어지자, 알라딘 플래티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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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9-26 1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띠끌 같은 나, 랑 연년세세 완전 읽고 싶네요. 책도 모양이 중요합니다!
전 장강명을 좋아하지만 표지에는 좀 아쉬움이 남네요. 한가롭고 행복한 독서의 시간 되시길!

공쟝쟝 2020-09-26 19:36   좋아요 0 | URL
ㅋㅋㅋ 사실 전 장강명작가님을 안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나오는 건 족족이 사서 읽는 참 독자...ㅋㅋ장강명을 좋아하는데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ㅋㅋ 그래서 표지가 더 못마땅했다구요..🤪

단발머리 2020-09-26 19:38   좋아요 0 | URL
나는 장강명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아직 사서 읽지 않은 독자이니~~~
오호라! 얼른 장강명을 사서 보리라! 😜

다락방 2020-09-26 19:56   좋아요 0 | URL
티끌같은 나, 너무 좋아요, 단발머리님! 제가 페이퍼에 언급하긴 했지만,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만한 소설입니다. 정말 좋아요, 정말!! 추천추천!

단발머리 2020-09-26 19:57   좋아요 0 | URL
가자고요! 가자가자아자!!! 💃

공쟝쟝 2020-09-26 20:22   좋아요 0 | URL
추천 받고 추천 고고싱😣 우리에겐 연휴가 있고! 나는 연휴보다 많은 권수의 책이 있다 ㅋㅋㅋ

다락방 2020-09-26 20:29   좋아요 0 | URL
우리 왓츠앱에도 같이 있고 알라딘에도 같이 있는거야 지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맥북도 열려있고 핸폰도 열려있고 와인도 마시고 있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멀티멀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9-26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쟝님 인스타도 보고 흐뭇하게 추천하고 왔지만 누군가 책 샀다고 인증하면 왜이렇게 좋을까요. 힘차게 응원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저도 내일 서점 가서 책 살 거에요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어!
으하하하하.

공쟝쟝 2020-09-26 20:2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절대 막지 않겠노라 다짐합니다 ㅋㅋㅋㅋ 으하하하하하😤😤😤😤 그대 씩씩하게 서점으로 전진하라!!

2020-09-26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8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0-09-28 09: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장강명을 좋아하지도 않고 읽은 책도 달랑 1권 뿐이지만..... 정말 저 책표지 어쩔..;;;; ㅠㅠ 정말 책표지 못생겼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0-09-28 22:0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진짜 팬심으로 팬이 팬을 위해 만든 표지 아니랍니까... ㅠㅠ

han22598 2020-09-29 0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대부분의 책을 이북으로 구입하고 있는터라, 책표지의 미학을 즐기지 못하고 있어서 아쉬워요. 그래도 이렇게 쟝쟝님이 구경시켜주셔서 좋으네요 :)

공쟝쟝 2020-10-07 20:06   좋아요 0 | URL
흐흐 종종 구경시켜드리겠습니다 ^.^

크라시바야 2020-10-07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티끌 같은 나 많이 많이 사랑해주세요 ^^ 기획부터 출간까지 2년 반이 걸려서 그런지 제겐 자식 같은 책이랍니다. ^^

공쟝쟝 2020-10-07 20:06   좋아요 0 | URL
오, 관계자님(?) 너무 재밌고 이쁜 책 감사합니다! 다 읽으면 독후감도 남기겠습니다!
 

지난 주에는 블레이드 러너를 1983년~2017년 것 까지 쭉 (중간중간 프리퀄 단편들까지 전부다)정주행했다. 미래를 다루는 영화를 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비주얼적으로 보는 즐거움이 있는 데다, 내용적으로도 생각할 것들이 많으니까. 대부분 영화들은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그래야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넘치긴 하지. 리들리 스콧의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83년판 블레이드 러너도 좋았지만(기억에 진하게 남는 것은 역쉬 룻거 하우어의 연기였다), 드니 빌뇌브가 감독한 2049가 던지는 질문들이 더 흥미로웠다. 영화에 대해서 쉼 없이 수다 떨고 싶지만, 오늘 쓰고 싶은 글은 그게 아니고...















1983년에 그리는 2019년의 모습, 2017년에 그리는 2049년의 모습. 어떤 것은 바뀌고 어떤 것은 그대로이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흥미로운 소재는 레플리칸트(안드로이드 인간)인데, 두 영화 모두 남성형 레플리칸트는 전쟁용, 노동용으로 쓰이고 여성형 레플리칸트는 전투용으로도 개발되지만 대부분 성판매용으로 생산되는 모양새다. 그러니까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존재하고 우주의 식민지가 개척되는 된다하여도, 계급이 그대로고 차별(인간-레플리칸트)도 그대로인 미래의 인류는..... 당연히(!) 기어코(!) 성판매용 복제인간을 만들버린 것이다! 미래에서도 돈이 없는 인간들은 복제 인간을 살 여력이 없으므로, 대신 AI와 사랑을(아, 그것이 사랑인가요? 그래 사랑이라고 넘어갑시다)나눈다....... 여기에 대해서도 할말이 엄청 많지만, 지금은 또 그걸 더 생각할 시간이 없다... 

하여튼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중요한 소재 중 하나는 레플리칸트 안에서의 ‘재생산(출산)’문제였으니... 아, 재생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의 인류가 또 다른 인류인 레플리칸트를 박해하고 혐오하고 차별할 수 있는 근거이며, 레플리칸드들이 바라마지 않는 기적인 것이며, 현실에서는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엄청나게 논쟁한 그것이었고, 오늘날 저출생이라는 전사회적 문제인 것일 지니....


 “(92-96)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여성들이 교육적·법적·정치적 평등을 얼마나 획득하든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공적 산업에 투입되든지 간에 자연 재생산이 규칙으로 남아있고 인공적인 또는 보조적인 재생산이 예외로 남는 한, 여성들에게 근본적인 것은 결코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출산의 기쁨은 가부장적인 신화다... 더군다나 자연 재생산은 더 많은 악의 근원이고, 특히 인간들 사이에 적개심과 질투의 감정들을 야기하는 소유욕이라는 악덕의 근원이라고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말했다... 그녀는 소유욕이라는 악덕, 즉 한 아이가 자신의 자궁 혹은 정자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아이를 다른 아이들보다 선호하는 것은 만일 우리가 구분적 위계질서를 종식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극복해야할 것이라고 추론했다. 

마지 피어시는 그녀의 공상과학소설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에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마지막 주장을 발전시켜 나갔다. 마지 피어시는 급진주의 문화 페미니스트였지만, 여성이 통제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면 인공 재생산이 여성과 사회에 꽤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여성들이 출산의 힘에 대한 독점을 포기한 결과로 본래의 힘과 관계에 대한 패러다임이 파괴되었고, 마타포이셋 주민은 모두 자신들이 선악, 고저, 강약, 그리고 특히 지배-종속의 위계질서적 개념들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재구성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 피어시의 유토피아가 마르크스주의적 유토피아보다 더 급진적인 이유는, 경제적 단위로서의 가정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단위로서의 가정도 제거되기 때문이다. 개인은 사유 재산도 사적인 자녀도 소유하지 않는다.


그렇다. 난 파이어스톤이 명쾌해서 좋다.
재생산이여, 소유욕이라는 악덕이여. 


2049에서 레플리칸트인 주인공 K(는 남성형이다)에게 돌봄과 보살핌, 애정을 제공하는 것은 홀로그램 AI인데, 이 인공지능 홀로그램은 대량생산 되고 판매되고 있다. 상품의 이름은 JOY인데, 고객님의 취향에 맞추어서 옷을 갈아입긴 하지만 광고는 헐벗은 채인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으로 한다. K는 진심으로 조이를 좋아한다. 케이에게 접근하는 성판매 레플리칸트인 마리에트(꺅!! 이 역할은 우리의 맥켄지 데이비스다)도 당연 여성형이다. 그러타... 페미니즘이 없는 미래의 SF영화의 설정은 이러하였다. (복제인간과 AI마저도 여성의 성은 착취 당한다..) 

우리가 그리는 미래는 우리가 행하고 있는 현재의 반영일 수 밖에 없으니, 이렇게 그릴 수 밖에 없으리란 걸 안다. (난 그래서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가 너무 좋다... 흑흑...!!!)

그렇다면 페미니즘이 있는 미래는 어떨까.

페미니스트들이 쓴 미래(혹은 과거)와 관련된 소설들을 몇 편 읽긴 했었다. 시녀이야기, 허랜드, 읽다 말긴 했지만 이갈리아의 딸들 등등. 그와 궤가 조금 달랐던 페미니즘 소설에 책에 언급된 ‘시간의 경계에선 여자’가 있었다. 유토피아인데 조금 더 페미니즘적으로 구체화되었다고나 할까. 

1970년대 가난한 이혼녀인 코니는 정신병동안 갇혀서 2137년에서 신호를 보내는 루시엔테(미래의 인류)와 접속한다. 코니가 바라보는 미래의 모습도 흥미롭지만, 미래인인 루시엔테가 되묻는 현재에 대한 질문들도 되게 재밌다. 이를테면

“(1권 95) 루시엔테는 극도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 ‘음 당신들이 고기를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사람을 팔아서 먹고 사는 게 일반적이었나요? 아니면 혹시 그게 노예제도예요? 당신 시대쯤엔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루시엔테는 성매매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게 노예제냐고 물어본다...
흑....

“(95) 아. 섹스와 관련된 것이군요. 성매매? 책에서도 봤고 가족을 먹여살리려고 몸을 파는 사람에 대한 드라마도 본 적 있어요!”

아, 성매매를 역사 책으로 배운 미래인이여...
미래인들의 사랑에 소유욕은 없다. 그 까닭은.

“(164) 그건 여성들이 오랫동안 추진해 온 개혁의 결과였어요. 오랜 계급제도를 전부무너뜨릴 때였죠. 우리가 누렸던 유일한 권력이지만 마침내 역시나 포기해야 할 게 남아 있었어요. 그 대신 누구에게도 더 큰 권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죠. 그건 바로 생산의 원천인 출산의 권력이었어요. 생물학적으로 속박되어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동등해 질 수 없어요. 그리고 남성들도 결코 다정하게 사랑을 베푸는 인간으로 교화될 리 없고요. 그래서 우린 누구나 어머니가 될 수 있게 하기로 했어요. 아이들은 전부 어머니가 셋이예요. 지나치게 긴밀한 유대감을 깨뜨리기 위해서죠.”

미래의 여성들은 출산의 권력을 포기했다. 그리고 ‘소유하지 않는 모성’을 정립했다.(참고로 미래세계에서 이 모성은 생물학적 남성들도 가지고 있다. 성의 구별 자체가 무의미한 것 같기도 하지만... )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코니는 묻는다. 아이에게 젖을 물려본 적 없고 출산의 고통을 겪지 않고, 모성을 이야기 할 수 있다고? 미래인들이 역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코니는 자신이 때렸던 딸을 생각한다. 

“(165) 앤젤리나, 나같은 어머니가 셋이었다면, ... 너는 이미 죽었겠지.”

울컥!!
......
여러모로 할 말이 없어지는 장면이어서..
밑줄을 그어놨었다...


또 미래인들은 아래와 같이 지낸다.

“(2권 35) 우리는 자기방어 훈련을 받아요. 서로를 존중하는 훈련도 받고요. 기록을 읽은 적은 있지만 나는 실제 강간 사건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어요. 그건.... 우리가 보기에 특히나 끔찍한 일이에요. 역겨워요. 식인 습성처럼. 현재도 일어나고 과거에도 일어났다는 건 알지만 믿기지 않아요.”

“(107) 우리의 존엄성은 일에서 나오죠. 누구든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거 눈치 못챘어요? 로맨스, 섹스, 출산, 아이, 당신을 구속하는 것들이죠. 하지만 그건 이제 더 이상 여자들의 일이 아니에요. 모든 사람들의 몫이죠.”


성역할이 해체되고, 빈부의 격차도 해소되고, 육아와 출산을 모든 공동체가 함께하며, 가장 사적인 문제가 가장 정치적인 문제가 되는 곳. 아름답기만 할 것 같은 미래의 세상이지만, 이 세상에도 반전은 있고(반전은 누군가 이 소설을 읽을 것 같아서 언급하지 않기로), 무엇보다 미래인들은 이미 우리가 망쳐놓은 지구의 환경을 복원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더란다. 헐.. 너무 그럴듯한 설정이다..... 미래의 인류여, 미안해.. ㅜㅜ 우리가 만들 유토피아는 아무리 그게 유토피아라도 방사능이 있는 유토피아 일거라고 뭔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102) ‘더 갖고 싶다고 바란 적은 없어요?’ ‘전 세계적으로 우리가 좀 더 생산성이 좋아져서 과거의 피해를 복구하는 데 에너지를 덜 쏟아붓게 되면, 꼭 필요하진 않지만 즐겁고 기쁨을 주는 물건들을 생산하는 데 에너지를 더 투입할 거예요. 꼭 그렇게 될 거예요.’”

여기까지는 마지 피어시의 소설이 그리고 있는 페미니즘 유토피아이고, (미래인들이 그리는 재생산에 관한 이야기도 재밌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예술, 사랑, 연애, 노동과 죽음에 대한 태도도 즐겁게 읽었다. 절판된 책이긴 하지만, 구해서 읽어보면 좋을 듯.) 책을 읽는 나는 오오- 하면서 신났더랬다. 아, 그렇구나. 페미니즘이 그리는 미래는 이러하구나! 그 미래 왔으면 참 좋겠다!! 하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급진주의 문화페미니스들은 이 아름다운 유토피아가
“(96)오늘날의 여성들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적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남성들이 여성에게 의존하는 유일한 자원을 여성이 포기한다면 여성의 억압이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지자 알 히브리는... 인공재생산은 남성들이 번식하기 위해 여성에게 ‘굴욕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게’ 한다. 즉 재생산 기술은 여성을 해방하기는커녕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력을 더욱 공고하게 한다. 재생산 기술은 남성들에게 여성의 참여 없이도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이부분 읽는 데........ 급 소름 돋았다.    
아, 그러네? 성적억압이 사라지지 않은 사회에서 재생산마저 여성의 일이 아니라면, 정말 여성은 대상화된 섹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 같다.... 아, 그것 마저도 성노동에 최적화된 레플리칸트가 대신할테니까.... 여성 쓸모가 없고, 그냥 사라지겠구나... 안녕, 여성이여. 우리는 이렇게 멸종할 종족이었구나, ... 굿빠이.... .... 
.......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 감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지금에 빗대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면 역시나 디스토피아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뭐 주절 주절 썼는데, 여성들의 성과 재생산에 관해 아직 말해지지 않은 담론들 너무나 많고, 미래를 다 꿰뚫고 있는 것 같은 SF대작 영화들도 페미니즘을 흡수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요즘 계속 나오는 것 같긴 한데, 부족해!! 그리고 납작해!!!!) 

그래서!!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이미 치열하게 논쟁하셨던 페미니스트들의 교차하는 관점들을 읽고 있자니.
너무... 굉장해!! 대단해!!!

요지는,
읽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많아서 어떡한담.
행복한 데.......
글쓰는 동안 월요일이 돼서 안행복해졌다.. 금새...


오지않은 미래는 다음에 걱정하고, 일단은 월요일의 노동을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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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1 0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1 0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1 0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0-09-21 07:56   좋아요 1 | URL
리들리 스콧, 니가 임신에 대해 뭘알아!! 빼액!! 마지피어시의 소설은 도서관에서 교차대출로 겨우 구해 읽었어요. 소설속 미래인들이 상당히 목가적이고 평온해섴ㅋㅋㅋㅋ 좋았는 데, 그걸 현실 문법에 옮겨 놓으니 살벌한 주장이 되더라고요 ㅋㅋ (출산을 기계로 대체하자) 그것이 선택 가능하려면 ... 먼저 콘돔부터 잘쓰라고 교육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너무 멀리갈 필요 없다, 예, 뭐 그거죠. ㅋㅋ

2020-09-21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09-21 0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상 너머의 세계를 우리가 살고 있네요. 맙소사, 2020년이라니... 우리가 기억하는 옛날이나 현재나 미래가, 내가 보기엔 서로 너무 비슷한거 같아요. 어차피 여자는 주인공이 아니고... ㅠㅠ
블레이드 러너부터 마지 피어시 소설까지 새롭게 읽고 갑니다. 읽는 맛의 대가 공쟝쟝님 출근 잘해요!!!!

공쟝쟝 2020-09-21 07:44   좋아요 0 | URL
83년의 인류는 2019년의 인류가 마스크쓰고 대중교통으로 출근하며 sns를 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듯해요 ㅋㅋㅋㅋㅋ 소유에 기반한 사랑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 대해 더 많은 텍스트가 필요해졌어요. 단발님 추천해주세요~~~ 안토니아스라인 부터 봐야하나요??ㅋㅋㅋ

수이 2020-09-21 0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_ 읽어야지 했는데 쟝쟝님은 주말 쓩쓩 읽고 계셨군요. 오늘은 월요일, 그대는 이미 출근을 하고 있을지도...... 일교차 심한데 따뜻하게 잘 껴입고 나갔을까?! 감기 조심! 읽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다 하면 되는데!! 걱정하지 말자요!

공쟝쟝 2020-09-21 08:00   좋아요 0 | URL
책은 작년 여름에 읽었는 데... 페교관에서 언급되길래.. 주말의 나는...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중국무협영화 두편을 보고ㅋㅋㅋ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열심히 읽다가 ㅋㅋㅋ 장강명 신간 에세이를 읽다가 ㅋㅋㅋ 급 비숲을 보고 밀린 문명특급을 보고ㅋㅋㅋㅋ 아침에 출근하려고 거울보니 눈알에 핏줄이 터져있었다..? ㅠㅠ (tmi 대방출ㅋㅋㅋ) 아 오늘부터 추석까지... 손꼽아..기다립니다...

비연 2020-09-21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쟝님. 조용히 열심히 읽고 계시는군요. 오늘 출근도 홧팅..

공쟝쟝 2020-09-21 10:51   좋아요 0 | URL
출근해서 댓글 달기 시전중. 오늘부터 진짜 열심히 읽을거예욘.

다락방 2020-09-21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레이드 러너가 저런 거였어요? 뱀파이어 나오는 거 아니었어요? @.@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는 우리가 함께 읽은 책 [여자는 인질이다]에도 언급되잖아요. 저는 sf 잘 못읽어서 읽어야지, 생각하면서도 미뤄뒀는데, 오늘 쟝님 페이퍼 읽으니 역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쟝님이 말한것처럼 정말 읽을 책이 많아요!! 언제 다 읽죠?

아무튼 남은 부분도 열심히 읽고 써요, 쟝님. 화이팅!

공쟝쟝 2020-09-21 10:58   좋아요 0 | URL
블레이드 러너..... 그러고 보니 이름만 봐서는 ㅋㅋㅋ 그런느낌이댜ㅋ 저는 공각기동대 이런거 좋아해서, 블레이드러너도 재밌었어요. 사실 2049를 제대로 보고 싶어 앞시리즈 부득불 보긴 했지만,,,, 의외로 재미써서 책도 읽어볼까 싶음...

맞아요, 시간의~는 여자는 인질이다 보면서 함께 읽었었어요. (아, 옛날이여. 왤케 까마득하게 느껴지죠?) 책을 읽다보면 점점 더 읽고 싶어져서 큰일이예요... ㅜㅜ 근데 또 너무 행복하고. 저 어제 깔깔거리면서(아는 부분 나올때마다 너무좋아서) 교차하는 페미니즘 읽다가.. 밤되서 놀랐잖아여..... 독서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