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심, 혹은 연민, 불쌍함에 대한 어쩌지 못함. 내 욕구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힘들어 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
활짝 웃고 괜찮다고 말하면서, 나의 상처를 능숙하게 감추는 일.
요구를 요구한 적이 없어서 이따금, 도대체가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를 모르겠는 거.
그래서 되려 타인의 요구 뒤에 숨는 것.
누군가를 보호하거나, 누군가를 도울 때만 나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
나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을 대롱대롱 매달고 다니는 거. 그건 사실 내가 누구보다 의존하고 싶다는 것의 반증.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타인의 판단에 맡겨버리는 거.
책임감과 의무감, 해야한다 속에서만 기능하는 삶. 그것이 없다면,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거칠게 단정짓던.

‘나’를 마주보게 된 것은
사실 전적으로 프로이트 덕분이다.

내가 내뜻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너무너무 잘 아는 데, 그걸 해결할 도리가 없어서. 거기에는 나도 미처 모르는 무의식이 작용하는 걸 거라고, 네 어린시절의 상처를 톺아서,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너의 관계 맺기와 선택들을 ‘의식화’해야 한다고 그의 이론을 풀어쓴 책들이 일러줬을 때.

엉망진창인 내 무의식 속의 상처를 들여다 보는 것은 약간의 부담스러운 비용과 꽤 긴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었고, 나의 경우는 특별히 아주 많이 울어야 하는 일이었다. 제대로 울기 위해, 각잡고 울기 위해, 그만 둘 수 있는 것은 다 그만두고, 시간내서 울고, 힘이 빠질 때 까지 울고, 울기 위해 밥을 먹고, 밥먹고 기운차려 또 울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고, 골이 울릴 때까지 울고, 아무튼 어쨌든 울다가 가끔 한번 씩 눈물의 의미를 묻는 일기를 쓰고.. 그렇게 반년 정도 보냈나? 그렇게 프로이트의 제자들에게 돈을 쓰고, 도움을 받아, 건진 것이 있다면. 그건 나 자신이다. 

그 시간들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살았을 거다. 

나는 나를 알고 싶다. 내 삶과 상처를 해석하고 싶다. 그런데 수학 공식을 풀거나, 1000조각 퍼즐을 맞추는 것 처럼 나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나는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나는 계속 변할 것이다. 나를 둘러싼 세상도 변하고 있고. 내 몸이라는 유기체도 매 순간순간 변한다. 프로이트를 알게 된 이후, 내가 새롭게 가지게 된 나에 대한 자세는 나를 공부하되, 나에 대해 잘 안다고 단정짓지 않는 것이다. 나를 모르는 존재로 대할 것. 알기 위해 노력할 것. 살아있는 한 꾸준히. 그렇게 지낼 것. 

그리고 그것을 유난 떤다고 취급하는 이들과는 친구하지 않을 것.

*

“페미니즘-교차하는 관점들”에서 내가 가장 기대했던 파트는 6장 정신분석 페미니즘이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대표적으로 미움받는 위인을 딱 두명만 꼽자면 하나는 마르크스요 그와 동급 혹은 한단계 위에 프로이트가 있는 듯 하다. 20대 내내 나는 마르크스를 좋아했고(세상을 미워했다), 30대가 되어 프로이트를 만나 조금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았다.

프로이트를 공부한 상담샘에게 비용을 꼬박꼬박 지불한 덕에 이별하는 방법(분리되는 방법)을 겨우겨우 습득하였고, 인생은 실전! 비싸게 배운 그 기술을 프로이트에게 아주 잘써먹고 있다. 한 때, 사랑하고 의지했던 두 아재들이 페미언냐들에게 욕을 배불리 먹고 있는 광경을 팝콘각을 하고 아주 재밌게 즐겁게 관전하는 것이다. 

원펀맨 느낌으로 한번에 죽사발을 만드는 싸움도 좋지만. 정말 즐거운 관전 쾌감 포인트는 적의 무기로 적이 제 발등을 찍을 때인 데. (부연하자면 쿵푸팬더가 자기의 힘이 아니라 적의 힘을 반사하는 기술로 싸움에서 이기는 것 같은 느낌의?) 특히 마르크스가 그랬다. 캘리번과 마녀 등을 읽으며 마르크스가 보고도 못 본 ‘재생산’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을 땐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아아!! 이겼다!! 언니들이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겼어!!

그들이 만든 언어와 논리안에서 그들의 맹점을 논파하는 광경을 보는 것은 쾌감을 준다. 서양 철학사 전반이 그렇다고는 하나, 철학도 역사도 언어도 지금껏 여성의 것이 아니었기에 철잘알, 역잘알, 말잘러인 언니들이 제대로 각잡고 고고한 철학자 아재들 뚝배기 깨는 글을 읽는 건 더 큰 쾌감. 쾌쾌쾌감. 

그래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마르크스를 비판 + 갱신한 것 처럼, 정신분석 페미니스트들도 어떻게 보면 더 악독한(?) 프로이트를 호로록 갈아서 마셔버리고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 데. 슬프게도 아직까진 “프로이트 이 바보, 그걸 몰랐어? 으이그, 아재여. 옛다. 니 전제부터 갱신해🥱.” 이렇게 해준 언니는 없는 듯 하다. 
“(314) 대부분의 현대 정신분석 페미니스트들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자크 라캉을 넘어선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긴 하지만, 전적으로 비가부장적인 정신분석 페미니즘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할지는 열린 질문으로 남아있다.”

이리가레 부분을 읽으면서(당연히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많이간 거 아녀? 싶긴 했는 데 “쥘리아 크리스테바가 라캉의 ‘착한 딸’ 이라면 이리가라이는 ‘못된 딸’” 이라는 종류의 언설을 보면, 아직 가야할 길이 더 있나봄. 라캉의 딸.. 그것도 못된 딸이라니. ... 그런데 나도 못된 딸이어서 이리가레 좋다... 핫!

“(307)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정의를 전복하기 위해 .... 여성은 여성에 대한 정의를 ‘과도하게 실천’하기를 시도하다가 무심결에 그 속으로 다시 함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위험에도 여성은 모든 기회를 활용해 상징적 질서에 소란을 일으켜야만 한다. 앞의 논의를 살펴볼 때 궁극적으로 명칭화와 범주화 과정을 끝내야만 한다는 이리가레의 확신과 어쩔 수 없이 이 과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또 다른 경쟁적 확신 사이에 분명한 긴장이 드러난다. 뤼스 이리가레는 자신의 글에 나타나는 모호성과 양가성에 당혹감을 느끼는 대신에, 점점 더 즐거워했다. 뤼스 이리가레에게 자기모순은 남근중심주의가 요구하는 논리적 일관성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

이리가레 글쓰기가 불명료하다고 비판 많이 받은 모양인 데, 그걸 즐거워하신다고... 멋져.

“(p.410-여성주의고전을 읽다: 뤼스 이리가라이) 이리가라이는 가부장제 문화적 근간 전체를, 상상계와 상징계(언어) 그 자체와 그것을 반영한 지적 체계의 핵심을 모조리 문제삼는다. 그 효과적인 대상, 가부장제 사회와 문화의 저변을 담당하는 것이 철학이기에, 그녀는 여성을 체계적으로 배제시켰던 남성-동일자의 표현양식인 서양 철학사와 철학전통 전체의 계보 곳곳에 깃들어 있는 남성중심성을 저며내고, 성적차이를 사유하는 새로운 지평, 새로운 초월의 방식을 만들고자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속적이고 집요하게 사유를 멈추지 않았다.”

“(같은 책 413) 그녀는 1974년 프로이트와 라캉 정신분석의 팔루스중심주의를 비판한, 두 번째 박사학위 논문 ‘스페큘럼’을 간행한다. 이 책의 출간은 이리가라이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직업적으로는 평생의 어려움을 가져다준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벵센느 대학의 교수자리를 잃었고 라캉학파에서도 파문되었으며, 말년까지도 프랑스 대학에서는 정식교수 자리를 얻지 못하게 된다.”

이리가레의 글쓰기 스타일도 멋있는 데, 서양 철학사 통째로 씹어드시겠다는 그 포부도 멋지고, 살아온 인생은 더 멋져버린다. 팔루스중심주의 얼마나 대차게 깠길래 (읽어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고추중심주의ㅋㅋ를 공부해야하는 가?? ) 라캉학파에서 파문당한거여..😮😱  교수도 못됐으면 뭘로 먹고 산거여.. 언니야😭ㅜ_ㅜ... 이렇게 멋짐이 뿜뿜한 이리가레가 궁금해서 뒤져보았으나, 그의 생애사는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고 하는 데, 까닭은 여성 사상가를 하나의 일대기로 축소시키는 전기론(의 가장 큰 예시가 선배 보부아르)에 반대하는 이리가레 본인의 신념인 듯 하다고 위의 책에서 그러더라. 아 일관되다. 대쪽같은 사람이야. 참! 

어쨌든 생애사는 글렀고, 그의 사상을 요약한 것을 읽었으나 (이해는 거의 못한) 느낌적인 느낌으로 이리가레가 엄청 훌륭한 페미니스트이자 철학자라는 건 알겠지만,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는 내 지식의 비루함이 좀 슬펐다. 뭐 스페큘라까지는 먼 훗날에 읽어보기를 기약하더라도 최근에 나온 신간 <식물의 사유>는 읽어보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담았다. 생각해보니까 파이어스톤도 좋다고 좋다고 그래놓고 <성의 변증법> 어려워서 못 읽었다. 

에효. 진짜. 책읽고 싶어서 책을 더 읽어야 하는 상황이 연거푸 발생하는 중인 데-... 결국.. 공부해야 하는 가. 
프로이트도 모르는 데, 라캉을?.... 로 ㅏ.......캉...?

*

어쨌든 앞서 밝혔지만, 나는 나를 아는 게 중요하고. 적어도 요즘의 나를 알아가는 데에는 페미니즘만 한 게 없는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이 독후감을 쓰면서 알아낸 나 자신은 이러하다. 

나는 내 생각보다 더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그리고 이 책 저 책 뒤적이느라 한 권의 책에 도통 집중을 못한다. 그런데 또 어떻게든 읽기로 한 책은 읽는다. 독서 자체는 아무 목적없이 즐기는 편이다. 다만 집어든 한 권의 책을 끝까지 다 읽는 것은 전적으로 ‘책임감’ 때문이다. K-장녀에게 책임감이란, 의식화를 해서 떨쳐내려고 해도 골수에 박혀있는 DNA와 같은 것이다. (앞으로 내 남은 인생의 숙제는 책임감의 범위를 어떻게든 협소하게 줄이고 줄여 홀가분해지는 거다.) 그러므로 평소처럼 오로지 즐기기 위한 독서에 머물렀다면 나는 이름만으로도 어려워했던 이리가라이를 조금이나마 알게되는 즐거움을 놓쳤을 거다. 

결론 : 이토록 좋은 ‘책임감’을 심어주신 알라딘 서재 마을에 서식중이신 페미니즘 벽돌책 깨기 집단에게, 새책을 사면서 땡스투로 꼭 보답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라딘에게만 좋을 일이다. 결국 승자는 알라딘이다. 아이씨. 아직 추석전에 시킨 택배도 덜 왔는 데 또 사고 싶다. 아까 안사기로 마음먹었잖아... 황정은, 백수린은 언제 읽을건 데.. 올해엔 소설도 좀 읽기로 스스로에게 약속했잖아. 그런데..... 10월에는 10월의 책이 있어.. 이번엔 두권이야.. 하지만, <식물의 사유>....ㅜㅜ 오오 이리가라이여. “이리가레에게 자기모순은 남근중심주의가 요구하는 논리적 일관성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 ... 나는 저항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 나는 모순이다... 나는..... ....

....

과연 나의 장바구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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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0-10-06 0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x 10개입니다.

공쟝쟝 2020-10-06 07:56   좋아요 0 | URL
그 좋아요 나도 좋아요 ㅠㅠㅠ

반유행열반인 2020-10-06 0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를 모르는 존재로 대할 것. 알기 위해 노력할 것. 그리고 내가 책을 사 봤자 배때기 부른 건 알라딘이지만 내 배도 조금 부르길 바라며 ㅋㅋㅋ 저는 한 달에 소설 다섯 권 읽기 시집 한 권 읽기 하고 있는데 쟝쟝님도 소설 한 권 할당제 도입합시다 ㅋㅋㅋ사회학 여성학 한 세트 당 소설 한 권 2 1 같은 거ㅋㅋㅋ

공쟝쟝 2020-10-06 07:59   좋아요 1 | URL
저의 든든한 한국 소설 친구 ㅋㅋㅋㅋ 이미 땡스투 몇번 쐈는데?? 몰랏죠?? 사회학, 여성학?? 그거 안읽은지 오래 ㅋㅋㅋㅋ 요즘 저의 읽기는 모두 에세이로 수렴됩니다.. 에세이 넘 좋아, 에세이 쵝오! 소설도 좋은데 중간에 끊으면 너무 힘들어서 ㅠㅠㅠㅠㅠ 중간에 끊기는 소설은 재미가ㅠ없고 ㅠㅠ

수이 2020-10-06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백만개 얹어놓고 갑니다. 쟝쟝님 쌩얼 같은 글이라서 더 좋은.

공쟝쟝 2020-10-06 19:26   좋아요 0 | URL
이 글에 좋아요가 백만20개 되었다!! 비록 탈코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지지)글이라도 코르셋을 벗고 생얼로 쓸 수 있다면..!

다락방 2020-10-06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x 10개입니다. 2

쟝쟝님이 스스로를 들여다보려고 노력하고 또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말도 잘 들어주는 것 같아요. 쟝쟝님과 대화 하다가 나도 모르게 위로받았던 적도 있었거든요. 얼마전에 책읽기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다고 말했지요? 저는 책읽기를 같이하려고 만났다가 좋은 사람들을 친구로 두게 되어서 좋아요.

:)

2020-10-06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10-06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회사 사장님 전화번호 좀 줘봐요. 전화 좀 하게요.
나는 쟝쟝님 글을 더 많이, 더 자주 읽고 싶어요. 기다린 보람이 있었어요! 기다린 보람이 있어요!!!

공쟝쟝 2020-10-06 19:35   좋아요 0 | URL
전 그분의 번호는 물론 회사의 번호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의식적 잊음도 아니고 ㅋㅋㅋㅋ 이건 진짜 무의식이 기억을 방해하는 듯ㅋㅋㅋ 기다렸다니 ㅠㅠ 우왕 ㅠㅠㅠ 나 막 또 쓴다..?

syo 2020-10-06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발 일 좀 줄이고 글 좀 더 써봐요.... 잘하잖아...

공쟝쟝 2020-10-06 19:39   좋아요 2 | URL
앗싸! 어디를 잘썼는 지는 모르겠지만 잘쓰는 사람에게 칭찬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