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커뮤니케이션 이론총서
조현준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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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트러블> 다 읽구 개념 정리하는 차원에서 한번 쭉 읽기 좋았다! 그 말이 그말 이었군!! 책에 나오는 주요 개념들 해제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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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상실에 대한 감정의 정당한 반응이다. 슬픈 기분이 들때,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돌아보는 일기를 쓴다. 찾아질 때도 있고, 못 찾기도 한다. 그것들과 내가 헤어졌구나, 그 시간과 내가 이별하는 중이구나, 인식하게 되면 슬픔이 황당하지 않다. 대상에 쏟았던 마음(리비도)을 다시 거둬들이는 시간을 가져야한다. 이별에 따르는 시원섭섭함과 분노, 안타까움 등 다채로운 감정이 섞인 슬픔을 공들여 느낀다. 주춤했던 일상이 다시 돌아오고, 또 힘내어 하루를 산다. 일련의 과정을 프로이트는 ‘애도’라고 했다.

슬픔의 원인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조금 곤란하지만 슬픈대로 내버려둔다. 많이 자고, 웅크려있는다. 슬픔도 몸의 반응이니까. 몸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떠나보내는 중 일 것이다. 그 부분에서 만큼은 머리보다 몸이 똑똑할 때가 많다.

사실, 진짜로 곤란한 것은 이별에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고, 잃어버렸다는 것 자체를 깨끗하게 잃어버린 경우다. 의식화되지 않은 상실. 강하게 부정당한 이별. 중요하지 않아서 잊은 것이 아니라, 너무 너무 중요해서 억압한 것이다. 상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한들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을 ‘우울’이라고 한다. 뒤에 ‘증’을 붙여 병리적 현상으로 다루기도 하지만 내 생각엔 우울 역시 감정의 정당한 반응이다. 어떻게 모든 것을 의식의 영역으로 다루나. 세상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부지기수 듯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애도되지 않은 상실은 당신의 무의식에 남아 어떻게든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좋은 영향일지 나쁜 영향일지는 살아봐야 안다. 삶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고 느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무의식이 잠궈둔 상처를 의식화하는 방법도 있다. 이 방법의 주의사항은 삶이 ‘다시’ 제대로 굴러가게 만들어주지 않으며, 삶의 방향 자체를 틀어버리기도 한다는 거다. 그러니 그냥 사는 것도 괜찮다. 상실을 거부한 채 무의식에 깊이 보관해 두는 것은 또 다른 방법이다. 아니, 모두가 그렇게 산다. 어떤 삶의 방향이든 살아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니까. 무의식이 의식화되지 않았다고 두려워 떨 필요는 없다. 어쨌든 우리의 무의식엔 의식으로 올라오면 안되는 것들이 몰래 살고 있다. 치명적인 이별, 너무 아픈 상처들, 일상이 불가능할 만큼 중요한 것, 감춰둔 공격성, 금지된 욕망 등등.



“(178) 우울증 환자들은 자기증오의 형태로 상실을 드러내는데, 프로이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구분을 시도한다. ‘애도에서 무의미하고 빈곤해지는 것은 세계인 반면, 우울증의 경우에는 자아 그 자신이다.’ 마치 자아의 일부가, 그것이 애착을 가졌던 대상과 함께 죽어 버린 것처럼 그 상실이 자아에게 떠넘겨지게 되는 것이다. (…) 프로이트는 식인 묘사에 등장할 만한 용어를 사용하여 우울증 환자가 대상을 다시 소생시키는 과정을 묘사하기도 한다. 대상의 상실에 뒤따르는 극단적인 동일시는 ‘내사內射・introjection’ 라고 하는데, 이는 자아가 은유적으로 상실된 대상을 먹어 자신 속으로 집어넣음으로써 자아 자신이 상실된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 <지그문트프로이트 컴플렉스>, 파멜라 트루슈웰


너무도 소중한 대상의 상실에 뒤따르는 대상에 대한 극단적인 동일시(우울증). 이별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그것을 내 안에 넣고 나 자신의 일부로 여기며 살겠다는 인간 심리의 기묘한 역동. 버틀러는 프로이트의 이 이론을 젠더에 가져와 푸코의 방식으로 전유한다. 결론 먼저 말하면, 욕망이 먼저 생긴 것이 아니다. 욕망은 금지의 효과다. 인과론을 뒤집으면서 그녀는 프로이트의 (논란 많은) 오이디푸스 이론을 비틀어 버리는 듯 다. 정신분석학이 오이디푸스 이론으로 효과적으로 금기하는 무의식은 근친애가 아니라 동성애다.

이른바 *‘우울증적 젠더 정체성/우울증적 이성애’*다. 

 
“(206) 동일시는 대상관계를 대체하는 상실의 결과이기 때문에, 젠더 동일시는 금지된 대상의 성이 하나의 금지로서 내면화되는 일종의 우울증이다. 이러한 금지는 분명하게 젠더화된 정체성과 이성애적 욕망의 법을 허가하고 또 규정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결은 근친상간의 금기를 통해, 또 하나 그 이전에 동성애에 대한 금기를 통해 젠더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아이의 최초 욕망은 부모를 향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아는 ‘근친상간 금기’ 때문에 부모를 향한 욕망을 포기해야한다. 금기에 대한 상실의 반응으로 동일시가 이루어진다. 상실한 대상을 자신에게 옮겨놓고 간직하는 우울증 환자처럼 아이는 처음 욕망한 부모를 동일시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아이는 부모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가? 프로이트는 이 대답을 선천적인 ‘성향(disposition 혹은 기질이라고 번역)’이라는 본질주의적인 용어로 비껴간다.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이것을 심문한다. “(207) ‘disposition’은 심리의 근원적인 성적 사실이 아니라, 에고 이상의 공모와 가치 전환의 행위 및 문화가 부과한, *법으로부터 생산된 효과*이다.” “(210) 결과적으로 법은 억압적인 기능을 행사하기보다는 스스로 자기 확장 전략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억압된 욕망을 착상해낸 것이다.” 즉, 유아의 최초 성향(disposition)은 금지의 ‘효과’로서 생겨난 것이다.

무엇을 금지했는가. 이성애적 근친상간 금기 전에 동성애 금기가 있었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의식된 상실(근친상간 금기)은 슬퍼할 수 있지만, 의식조차 되지 않은 상실(동성애 금기)은 ‘우울증적 동일시’로 나타난다. 전 사회의 무의식적 동성애 금기로 인해 내가 금지당한 동성애적 욕망은 의식조차 되지 않은 채 내사(introjection)되어 나의 젠더/섹스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우울증적 동일시’가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사실 더 아름다운 것은 우울증적 동일시가 발생하는 ‘기입(incorporation)’에 관한 설명인 데, 문학동네 <젠더 트러블>의 조현준 역자님은 ‘incorporation’을 ‘합체’로 번역(ㅠ_ㅠ무슨 로보트 합체가 떠오른다. 사라살리의 버틀러 해설 번역은 기입으로 되어있다)하셔서 정작 본 책에서의 아름다움은 그 글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기입’은 *우울증적 동일시가 우리의 육체의 표면에 보관된다는 뜻*인데, 프로이트의 용어는 아니고 정신분석학자 에이브러햄과 토록의 개념을 버틀러가 가져온 것이다. <젠더트러블>을 인용하되 ‘합체’를 ‘기입’으로 바꿔서 써보겠다. 

“(214) 우울증을 통해 유지되는 동일시가 ‘기입’된 것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기입되는 공간은 어디에있는가? 문자 그대로 몸 안이 아니라면 아마도 그것은 몸 위에 있을 것이다. 몸 자체가 반드시 하나의 기입공간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그 표면적 의미와 몸 위에 말이다.” - <젠더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우울증은 내 몸에 ‘기입’된다. 꼭 젠더 정체성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더라도, 논리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 그러나 내가 잃어버린 것. 너무도 사랑해서 도저히 잃어버렸다고 인정할 수가 없는 것. 또는 애도 할 기회조차 박탈 당한채로 무의식 깊숙히 남겨진 그것들은 ‘암호화’되어 나의 몸에새겨 넣어진다(기입). 

사랑했지만 잃어버린 것들이 내 ‘몸’과 내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버틀러의 시각은 나 자신을 들여다 보게 한다. 받아들일 수 없었던 헤어짐. 때로는 거부했던 상실의 경험들. 도저히 잃고 싶지 않았던 사랑의 흔적들은 (프로이트식으로) 내 자아가 와구와구 다 먹어버려서 그것은 내 몸이 되어있다. 그 모든 우울증적 동일시의 흔적들이 곧 ‘나’ 였던 거구나… 일상을 살면서 마주했던 그 동안의 분열들이 조금은 수월하게 인정되고, 슬픔의 총체와도 같은 나 자신이 보인다. 자아를 잘 보듬어 안아 달래주고 싶다. 잃어버린 지난 사랑들을 여기 듯 내 몸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 

읽으면서 아름답다고 느꼈던 사라 살리의 책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을 가져온다. 물론 아래 글들도 <젠더 트러블>을 인용한 것이다. 다른 맛의 번역이 느껴진다. 버틀러의 ‘우울증적 젠더’를 조금은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04) 버틀러는 ‘젠더 정체성을 우울증적 구조로 보면, 동일시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기입”을 선택하는 것을 이해할 수있다’라고 말한다. ‘젠더 정체성은 상실을 거부하는 행위, 곧 잃어버린 대상 그 자체를 육체에 암호화하는 행위를 통해 완성될 것이다. … 기입은 말 그대로 상실을 육체 ‘위에’ 혹은 ‘안에’해석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육체라는 실체로 드러나게 되는데, 즉 육체가 “섹스”를 말 그대로 간직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반드시 포기해야만 하는 대상 리비도 집중의 저장소가 에고만은 아니다. 육체자체도 일종의 ‘무덤’(인용부호로 표시한 것에 주목하라.)이다. 그러나 상실된 욕망들은 결코 그 안에 묻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육체의 표면에 보존되어 우리의 섹스와 젠더 정체성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

“(105) *모든 고정된 젠더 정체성은 ‘우울증적’이다. 그것은 육체 위에 씌어진 최초의 금지된 욕망 위에 세워져있다.* 또한 버틀러가 단언하듯 젠더의 이 견고한 경계들은 타고난, 거부된, 미해결된 사랑의 상실을 감추고 있다. 우울증적 젠더로 고통(이것이 적합한단어라면)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버틀러는 우울증적 이성애를 ‘증후’라고 부르는데 이는 거기에 병리학적 요소가 있음을 암시한다) 이성애자들만이 아니다. 버틀러는 ‘도저히 존재할 법하지 않은 이성애자를 향한 동성애자의 욕망’은 우울증적으로 자신에게 기입되고 이렇게 그/그녀의 이성애적 욕망이 유지된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버틀러는 우리의 문화가 동성애처럼 이성애를 거부하지는 않으므로, 이성애적 우울증과 동성애적 우울증은 실제 동등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사라 살리


이것은 짚고가자. 버틀러에게 ‘젠더’가 구성된 것이듯 ‘섹스’도 구성물이며 ‘육체’ 역시 구성물이다. 이 모두가 안정적이고 고정된 개념들이 아니다. ‘육체(몸)’의 경우도 단지 ‘물질적’(물질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다)인 것으로 가정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어쨌든 여기까지 읽은 나는 버틀러와 푸코가 가닿는 ‘몸’에 대한 통찰이 궁금하다!!! (언젠가는 더 읽겠지…) 

버틀러는 고정되어 있는 본질주의적/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을 모두 푸코적 ‘담론’의 맥락에 위치시키면서 탈고정화시키고 해체하고 ‘구성’된 산물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푸코를 읽는 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번역이 아니라 이분법적 사고방식이었듯, 버틀러를 읽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고정된 실체를 상정해놓고 이해를 명확히 하려는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인 것 같다. 사라 살리가 버틀러를 ‘총명한 헤겔주의자’라고 표현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인가. telos 없는 부정의 부정의 부정의 변증법, 시작도 끝도 없는 과정으로서의 확실함을 비껴가는 논리 전개는 (번역어라 느낄 수 없지만) 난해하다는 그 자신의 문체를 통해 다른 형태의 사고 방식을 주문하는 것도 같다. 

어쨌든 
disposition의 경우 기질보다는 '성향'이 더 나았던 것 같고 
incorporation은 확실히 합체 보다는 '기입'이 
introjection은 내사나 내투사나 다 어려운 말이라서 ‘투사하고 간직한다’ 정도로 풀어쓴 것 같은 번역에 손을 더 들어주고 싶다. 
(그러나 번역의 문제라기 보다는 책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인용구는 <젠더트러블>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려웠던 번역들. 아아, 조금 슬프다. 
사라 살리의 104페이지 글과 비교 한번 해보시라.


젠더 정체성을 우울증의 구조로 볼 때,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방법으로 ‘합체’를 택한 것은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위에서 말한 도식에 따르면, 젠더 정체성은 자신을 몸에 암호화하고 사실상 살아있는 몸과 죽은 몸을 결정하는, 상실의 거부를 통해 설정될 것이다. 반은유적 활동으로서의 합체는 몸 위에 혹은 몸 안에 상실을 문자 그대로 새겨넣어서 몸의 사실성으로, 즉 몸이 문자적 진리로서 ‘성’을 갖게 되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주어진 성감 대에서의 쾌락과 욕망을 금지하거나 그 위치를 설정하는 행위야말로 몸의 표면을 가득 채운 일종의 젠더 특정우울증이다. 쾌락적 대상의 상실은 바로 그 쾌락과의 합체를 통해 해결되며, 그 결과 쾌락은 젠더 특정적인 법의 강제효과를 통해 결정되고 금지된다.
물론 근친상간 금기는 동성애 금기보다 더 포괄적이긴 하지만 이성애적 동일시가 설정되는 이성애적 근친상간 금기의 경우, 상실은 슬픔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동성애적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경우, 상실은 우울증적 구조를 통해 유지된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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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7-28 13:1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대단하다. 너무 아름다운 글이다. 아마 젠더 트러블을 위한 책들을 읽었기 때문일까요? 정말 대단한 글이에요. 존경합니다. 같은 책을 읽은게 맞나 싶어요.
책도 제대로 맞는 임자가 있다면 젠더 트러블의 임자는 쟝님이네요. 근사해요!!

공쟝쟝 2021-07-28 13:38   좋아요 2 | URL
쓰고 나니 빠진 문단 있어서 추가하느라 요 댓글 인자 봤네요 ㅋㅋㅋ 시간이 많아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한에서 가장 많이 이해하기 위한 독서들과 병행하는 중입니다. (저 헤겔 정신현상학 해설도 읽음요... 비트코인 책 만 본게 아니라고 ㅋㅋ) ‘수행성‘만 중심으로 다뤄지는 <젠더트러블>에 트러블을 일으키고 싶었습니다. 버틀러의 주체, 버틀러의 오이디푸스콤플렉스 비판을 꼭 기억해주세요... 물론 이 글은 제가 기억하려고 쓴 글이라고 보는게 옳겠다요 ㅋㅋ

잠자냥 2021-07-28 15:16   좋아요 2 | URL
다부장님 정말 같은 책 읽은 거 맞아요? :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농담입니다. 두 분 모두 짝짝짝.

다락방 2021-07-28 15:17   좋아요 2 | URL
저는 쟝님 페이퍼 읽으면서 ‘젠더 트러블이 이런 책이었어?‘ 하고 있습니다. ㅎㅎㅎㅎㅎ

공쟝쟝 2021-07-28 16:02   좋아요 2 | URL
아고 ㅋㅋ 몸둘바를 모루겄네요 ㅋㅋㅋ 하지만 전 아직 완독자가 아닙니다… (트러블이 계속 있는 한 주가 되고 있다..)

난티나무 2021-07-28 14: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 공쟝쟝님을 따라가는 게 맞았어요! 마침 어제 이 부분 읽고 아 뭐야 😤 @@ 이랬는데 이 글 보니 어렴풋이 아 그랬던 것이었던 것이었구나! 가 되네요!!!!!!
완전 멋져요 공쟝쟝님!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1-07-28 16:04   좋아요 1 | URL
절대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닌 것 같아요 ㅠㅡㅠ 제가 프로이트랑 푸코까진 어케 해보겠는데, 나머지 프랑스-독일놈들은… ㅠㅡㅠ 아아.. 슬프다..

잠자냥 2021-07-28 15: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 쟝쟝 언니 넘나 잘 쓴다. 이 어려운 책을 읽고 이토록 멋진 글이라니. 백수로 지내는 시간이 아깝지 않도다.

공쟝쟝 2021-07-28 16:05   좋아요 2 | URL
백수를 꼭 이렇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한 성찰 중입니다. 어제는 일할 때보다 의자에 더 오래 앉아있었다구요!!!!!!

잠자냥 2021-07-28 15: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쟝쟝 언니 사회과학 공부 좀 계속 해봐요... (진심으로 적극 권장합니다)

공쟝쟝 2021-07-28 16:24   좋아요 1 | URL
언젠 문학도 좀 읽으람서요… 😒

잠자냥 2021-07-28 16:59   좋아요 2 | URL
아니 뭐 그까이꺼 두 개 다 하세요.

단발머리 2021-07-28 17:37   좋아요 3 | URL
저 요즘에 왜케 잠자냥님 의견에 동의할 게 많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두 개 다 하세요, 쟝쟝님!!

단발머리 2021-07-28 17: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수를 짝! 짝짝짝! 기립박수를 칩니다!!! 출력해서 읽어야할 만큼 너무너무 좋은 글이에요. 대단합니다, 우리 똑똑이 친구!!!
근데 다 이해를 못하겠어요@@ 앞으로도 쟝쟝님이 계속 이렇게 <보충공부> 해 줘야하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전 아직 저기 위에, 우울증적 이성애까지 읽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사실 거기까지 읽어도 이해할 자신은 없구요ㅠㅠ)

무엇을 금지했는가. 이성애적 근친상간 금기 전에 동성애 금기가 있었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의식된 상실(근친상간 금기)은 슬퍼할 수 있지만, 의식조차 되지 않은 상실(동성애 금기)은 ‘우울증적 동일시’로 나타난다. 전 사회의 무의식적 동성애 금기로 인해 내가 금지당한 동성애적 욕망은 의식조차 되지 않은 채 내사(introjection)되어 나의 젠더/섹스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애적 근친상간 금기 이전에 동성애 금지가 있었다는 주장을 이해를 못하겠어요. 아이의 최초 욕망은 사실, 부모가 아니라 엄마에게로 향하잖아요. 정확히는 주양육자겠죠. 여성이 양육을 하는 상황을 베이스로 두었을 때, 남아건 여아건 엄마를 욕망하고. 엄마를 욕망하던 남아는 근친상간 때문에 엄마를 포기하고 아빠를 이상화하고, 엄마를 욕망하던 여아는 엄마에게는 ‘그것‘이 없다는 걸 알고 아빠를 욕망하는 걸로. 그러니까 남아에게는 한 번의 절망이, 여아에게는 두 번의 절망이 있다는 걸 읽었던 것 같은데. 전 프로이트 이론을 잘 모르지만, 또 그것만으로 설명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근친상간 금기 같은 경우 레비-스트로스는 인류 문화의 시작점이라고 볼 정도로 중요하다고 판단하잖아요. 동성애의 경우, 그리스 로마의 경우와 비교해보아도 현재와 비슷한 즉 ‘차별‘의 대상이 되었던 건 인류 전체 역사를 볼 때 최근의 일이 아니었던가 싶구요. 제 의문은 근친상간 금지가 좀 더 근원적인 인간 욕망의 금지가 아니었을까 싶은 거죠. 모르겠는데 질문하다 보니 더 모르겠어요. 쟝쟝님이 알고 있으리라 믿고 나는 에헤라~~~

공쟝쟝 2021-07-28 19:13   좋아요 2 | URL
그쵸! 그것이 없었다! 남근선망! 팔루스!! 그것을 우리가 대차게 깨야하는데 (이리가레도 성본질주의를 넘어서지 못해 깨지못한) 그걸 버틀러가 푸코를 가져와서 깨버렸어요 ㅡ 제가 이해한 것들을 적어볼께용!

공쟝쟝 2021-07-28 19:13   좋아요 2 | URL
제가 이해한 건 최초의 욕망이 엄마가 아니고요, 욕망이 먼저가 아니고 금지가 먼저라는 거예요!! 푸코의 권력 작동 방식을 보면 권력은 금지하는 게 아니라 생산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끙끙대며 읽은 성의 역사를 떠올려보면요! 때로는 금지를 통해서 생산되기도(?)하죠. 권력이 담론를 통해 흐르는 방식. 아이는 욕망하기 전에 금지를 당하는 데요, 사회적으로 근친상간보다는 동성애적 욕망이 더 먼저 금지 당하니까요, 그런데 동성애적 욕망이란 말해지지도 않은 매우 무의식적인 거라서 (진짜 너무 심각한 억압 ㅋㅋㅋ) 아이는 그 상실을 애도하지 못해요. 우울증. 이 최초의 금지에 대한 억압은 동일시적으로 몸에 기입되는 거죠. 동성애적 욕망이 몸의 표면에 기입된다.

공쟝쟝 2021-07-28 18:39   좋아요 2 | URL
남근이 잇네 없네는 복잡하고 설명도 잘 안되지만, 버틀러의 전유를 가져오면 섹스는 구성된게 되고 젠더 정체성의 혼란들도 설명이 좀더 수월하죠. 이미 이성애문화가 자연스러운 사회에서 오이디푸스 근친상간적 금기는 애도 가능할지 몰라도 동성애에 대한 애도는 아예불가능하니 우울증적 동일시로 남을 수 밖에 없는데 ㅡ 프로이트는 넘나 이성애쥬의자라서 거기까지는 못내다 보고 그럼 최초의 욕망의 주체는 여성성/남성성 둘중 하나를 선택하는 가?에 그냥 본질주의적으로 기질/성향이다라고 말하고 남근 어쩌고 하게 되는 거죠… 근친애적 욕망이 부정당해서 동일시 하는 거다! 이렇게요. 근데 이 오이디~ 이론 자체가 이성애적 프레임안에서 작동하는 것이쥬(말하면서 내가 헤깔려요..)

공쟝쟝 2021-07-28 18:42   좋아요 2 | URL
제가 백번 엉성하게 설명한 것보다 조현준 역자님의 젠더 이야기 를 가져오는 게 좋겟어서! 찾아왓어요!!
“마지막은 인과론의 전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다는 인과론을 신봉해 왔고 그런 의미에서 원인의 본질적 동인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 왔습니다. 예컨대 정신분석학에서는 누구에게나 무의식적으로 근친애 욕망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금지하는 금기가 생겼고, 근친애 금기가 문명의 시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버틀러는 금지해야 할 근친애적 욕망이 정말로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욕망인지 의심합니다. 만약 근친애적 욕망이 인간의 본질적 욕망이라면 동성에게 욕망을 느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없거든요. 그렇다면 정신분석학은 근친애라는 이성애 욕망을 본질적 원인으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 때문에 문명의 금기가 생긴 것이 아니라 이성 간 사랑을 인간의 근원적 욕망으로 확정하려는 정신분석학의 욕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탄생시켰다는 것이지요.

-알라딘 eBook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 (조현준 지음) 중에서”

단발머리 2021-07-28 18:52   좋아요 2 | URL
우앗!! 쟝쟝님!!! 무슨 말인지 딱 알겠어요! 라고 댓글을 쓰고 싶지만 ㅎㅎㅎㅎ 아직도 모르는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문현답의 아름다운 향연. 앞으로도 많은 지도 편달 부탁해요^^

오디이푸스 콤플렉스 때문에 문명의 금기가 생긴 것이 아니라 이성 간 사랑을 인간의 근원적 욕망으로 확정하려는 정신분석학의 욕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탄생시켰다는 것이지요.

는 조현준님 말은 이해돼요. 버틀러의 주장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도, 쟝쟝님 댓글도 대략적으로는 이해되구요. 그런데도 앞으로 갈길 멀었어요 ㅠㅠㅠ 어쩔 ㅠㅠㅠ 완독하신 분 세 분이시던가요. 저는 아직 어쩔ㅠㅠㅠ 하는 사람...

공쟝쟝 2021-07-28 19:07   좋아요 2 | URL
ㅎㅎㅎ 저도 제가 이해한 것이 맞나 싶어요 ㅎㅎㅎ 누가 좀 알려줘.. 하지만 사랑했던 것이 몸에 기입된다는 생각이 너무 아룸다웠어요… 팔루스 선망이론보다 아름다웠으므로 거기에 손ㅋㅋㅋ 다만 순서적으로 왜 동성애적 금기가 먼저여야하는 가에 대해 버틀러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모든 건 주장일 뿐임을 우린 잊지 말아야합니다ㅋㅋ

- 사라살리 책 106페이지
동성애 금기가 근친상간 금기에 앞선다는 주장은, 젠더와 섹스의정체성이 금지에 대한 대응으로 형성된다는 버틀러의 논의에서 결정적이다. 버틀러는 젠더 또는 섹스를 선천적인 것으로 여기는 대신, ‘젠더 정체성은 금지가 내면화된 것이며, 이는 정체성이 형성적인 것임을 입증한다’(GT : 63) 고 주장한다. 여기서 버틀러가 말하는 금지는 동성애 금기이므로, 버틀러의 이론에서 모든 젠더 정체성은 최초의 금지된 동성애적 리비도 집중 또는 욕망에 기초해 있는 것이 명백하다. 만약 우울증이 실제의 또는 상상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며, 이성애적 젠더 정체성이 욕망의 동성애적 대상에 대한 최초의 상실을토대로 형성된다면, 이성애적 젠더 정체성은 우울증적인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발머리 2021-07-29 08:47   좋아요 1 | URL
아침에 일어나 찬찬히 다시 한 번 읽어보았어요.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흐흐흐흐흐흐.
너무 즐겁네요. 이론이 어떻게 몸을 입어가는지 찬찬히 읽어보려구요. 아직도 꽤 남아있는 트러블이 밉지가 않네요.
덥지만 좋은 날 되세요, 슨상님!!!!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0
사라 살리 지음, 김정경 옮김 / 앨피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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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책 <욕망하는 주체들>을 지나 <권력의 정신적 삶>까지, 주체에서 시작되어 젠더를 경유해 언어, 권력을 바라보는 버틀러의 고유의 철학적 시선들을 훌륭히 해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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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제국주의 - 누가 블록체인 패권을 거머쥘 것인가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40
한중섭 지음 / 스리체어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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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중앙화라는 블록체인의 이상은 순진한 생각. 국경을 초월한 디지털 자산은 월가의 금융자본에 가장 큰 날개를 달아줄 것. 사이버 유토피아를 꿈꾸던 인터넷이 상업화에 얼마나 쉽게 투항했게요? 어쨌든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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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피의 선택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7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한정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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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된 무기력’이라는 말이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어 자신이 극복할 수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포자기하는 것을 말한다. 소설 주인공 소피를 생각하면 ‘학습된 무기력(혹은 무력감)’이 떠오른다. 선택지 같지도 않은 선택을 해야 하거나 자명한 생존의 선택 앞에 죄짓는 선택을 해야 하거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는 경험들의 반복은 그녀에게 지독한 죄책감과 학습된 무기력을 심어주었다.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은 아닐 거다. 다만 고통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동안 고통만이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나쁘다. 고통을 방어하는 동안 다른 가능성이 소거된다. 더 좋은 선택지를 보지 못하고 가까이 있는 당장의 고통을 약화시켜줄 선택들을 한다. *분명 어디까지는 그것이 삶을 구원한다.* 그러나 어딘가부터는 삶을 옥죄기도 한다. 그 적절한 어디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어느 수준까지 망가져야 회복이 가능한 거지? 상처가 너무 깊어 그것을 방어하는 데 온 삶을 다 써야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사실 그런 삶은 도처에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책은 아우슈비츠를 다루고 있다. 소설을 읽고 난 후 나는 상처 이후의 삶을 재건하는 방법에 대해 묻는다. 인간의 무력감에 대해, 의존심리에 대해, 구원에 대해 생각한다. 


‘무기력-무력감’은 한때 많이 생각했던 주제다. 사춘기 이후부터 종종 방문했던 우울증의 징후는 언제나 경미한 무기력을 시작 지점으로 찾아왔다. 점점 일상을 돌보는 것이 소홀해지다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그 시간이 시작되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삶 자체가 되었다. 나는 종종 지옥이 있다면 한증막 같은 곳 일거라 지금도 생각하는 데(덥고 습한 것을 정말 싫어한다) 내 우울은 그런 모습이다. 매우 후덥지근하고 끈적끈적하고 시야를 가리는 뿌연 습기로 가득 차 있는 공간에 나는 누워있고, 몸을 일으켜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는 데, 누워서 숨 쉬고 있는 상황조차 너무 버거운. 무거운 공기. 축축한 공기. 더운 공기.


그 무기력의 근본 원인까지는 모른다. 어떤 선택이나 성장하고 싶다는 욕구 앞에 빈번히 조건과 현실을 이유로 거부당했던 경험들이 떠오른다. 지지나 격려가 없는 상태에서 보란 듯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내면에 내 선택이나 욕구를 믿을 수 있는 힘 자체가 없었던 것 같다. 학습된 무기력. 자포자기.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무력감이 무기력을 불러왔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으니 어차피 내 삶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내 자유의지로 해볼 만한 선택은 나를 망치는 것들이었다. 여러 소설에 등장하는 —빤히 보이는 불행을 선택하는 주인공들— 그 이상한 심리적 역동을 이해한다. 그들과 다른 점은 다만 아주 대놓고 신나게 보란 듯이 스스로를 망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 제대로 망치는 것 역시 에너지를 (그게 분노 에너지라도) 요구했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적당히 망쳐지고 적당히 수습된 나는 아주 간장 종지만 한 에너지 그릇을 수시로 비우고 채우면서 지내고 있다. 당신은 우울증을 극복했나요?라고 누가 묻는다면. 어느 정도는.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울증이 찾아오기 전의 증상을 알아차릴 수 있다. 내 삶을 내가 통제하고 있지 못할 때, 곧바로 무기력이 신호를 보내온다. 읽거나 먹거나 움직이기 싫다. 예전에는 난 왜 이렇게 게으를까 실의에 빠졌는데 요즘은 내 무기력이 고맙다. 지금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는 중이구나, 알아서 척! 알려준달까. 싫은 것도 해야 하는 것이라면 꾹 참고 잘하기 대장이라서 좋고 싫음을 잘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무기력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기준으로 싫은 것을 골라낸다. 그리고 왜 싫은지 생각해본다. 전체인지 부분인지 부분이면 어디까지인지 잘 골라내서 싫은 건 되도록 피한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나눠보고 현실적인 방법을 글로 써본다. 만약 우울증이 다시 찾아온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 한증막의 기분을 느낀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토록 무겁게만 느껴지던 삶 자체가 살아볼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167) 그녀는 자신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음식을 먹기 직전의 그 신나는 순간, 그녀의 콧구멍이 피클의 짠 냄새와, 겨자 냄새, 그리고 레비스의 유대식 호밀빵에서 나는 캐러웨이 향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배에서 육감적인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만 보더라도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호숫가에 배를 깔고 누워서 안도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우슈비츠에서 겨우 살아남은 폴란드 여성 소피는 미국으로 이주해 음악과 음식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살아있음의 감각을 회복한다. 그러던 어느 날 대도시의 지하철에서 성적 침범을 당하게 되고(이 장면도 역했다 ㅜ_ㅜ) 애써 그러모은 생의 의지를 순식간에 상실한다. 


그녀가 우울증을 겪고 있는 모습은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의 나는 누군가가 구원해주길 원했던가. 글쎄. 도저히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구멍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기억한다. 내 앞에 놓인 어떤 삶도 살고 싶지가 않았었다. 누군가 그 삶에서 꺼내준다면 기꺼이 였을 것이다. 일단 거기서 빠져나와야 하니까. 죽은 듯 살던 소피에게 영화처럼 동화처럼 짠 네이선이 나타난다. 죽을 것 같은 그녀에게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고, 부족한 영양상태와 건강을 돌봐준다. 나는 안도했다. 소피만큼이야 했겠냐만은, 곧 죽을 것만 같은 그녀에게 나타난 네이선이  고마웠다. (그가 스팅고에게 200달러 주는 것도 고마웠다. 나란 인간. 친절에 취약해ㅋㅋ)


“(248)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새삼 안도감을 느낀 그녀는 다시 피곤에 겨운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지만 메스꺼움과 으슬으슬한 기운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를 사랑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연하지!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다만 너무 편하다고 대답했다. 이상하게 그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잠이 와. 항상 불안했는 데, 안전하고 보호받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 사랑이 막 설레고 가슴 터질 것 같고 그런 건 아닌 듯. 이것은 나의 진술. 그 옆에서는 항상 졸렸다. 사는 게 치열했는 데 함께 있으면 무풍지대 같았다. 이해하고 이해받고 그런 건, 공감하고 공감 못하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나 몰라라 의탁해버리고 싶은 기분. 그러고 다 너 때문이야! 탓해도 그는 기꺼이 자신 때문이라고 할 사람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런 의존이 필요했다. 내가 안전함에만 머무르지 않으려는 순간부터 관계가 으깨졌지만. 어쩌면 그 의존의 경험이 꼭 필요했을지도 모르겠군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사실 그전까지는 의존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힘들다고 말하는 게 굴욕인 것 같고 그랬다. 생애 대부분 누군가들을 계속 보호하는 역할을 떠맡고 원치 않는지도 모른 채 반복했었다. 의존의 이면, 혹은 건강한 의존에 대해서 예전엔 정말 많이 생각했었다. 모두의 성격이 다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맞는 의존의 방식이 있는 것 같다. 연애할 때의 나는 건강한 의존 상태가 무엇인가에 대해 정말 많이 고민했으나, 요즘 나의 화두는 의존하지 않고 —혹은 적당한 의존을 분배/관리하며— 살아가는 방법인 걸 보면 성격만큼 시기도 타는 것이 ‘의존’ 인 듯. 


“(2권 - 184) 어젯밤에 말이에요. 어젯밤에 스팅고, 당신에게 코네티컷에서 있은 일을 얘기해 주고 난 다음에 말이에요, 처음으로 깨달은 게 있어요. 네이선이 그런 식으로 나를 떠난 것을 내가 기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정말로요. 정말로 기뻐하고 있다고요. 그동안 나는 전적으로 그에게 의존했어요. 하지만 그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죠. 그가 없이는 움직일 수도 없었어요. 아주 작은 일을 결정할 때조차 먼저 네이선을 떠올렸어요. 아, 알아요, 그에게 엄청난 빚을 졌다는 거. 그가 내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해 주었는지도요. *다 알아요. 하지만 그의 귀여움을 받는 새끼 고양이처럼 사는 것은 싫어요. 귀여움 받고 섹스하는 대상이 되는 것은*…….”


너무도 아슬아슬하고 취약한 상태에 있던 소피를 네이선은 말 그대로 구원하고 둘은 연인이 된다. 수시로 기분이 바뀌는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네이선이지만 소피는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애착을 느낀다. 소설의 2권에서 네이선이 소피에게 대해 자아가 없는 것 같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그 부분이 정말 역했다. 소설 주인공 스팅고를 포함해 모든 남자들이 그녀를 욕망하는 까닭이 탁월한 미모에만 있지는 않았다는 확신이 드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원한다. 아름답고 자아가 없는 그녀를. 방점은 ‘자아가 없다’는 데에 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학습된 무기력으로 삶에 대한 통제 감각을 잃어버린 아름다운 소피는 네이선의 통제를 기꺼워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사실 소설의 많은 부분에서 오럴 섹스를 포함한 폭력적인 섹스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그걸 20세기 최고의 섹스라고 말하는 네이선에게 진짜 치가 떨렸다. (이건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 본인의 섹스 판타지이자 욕망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는 부분이기도 함)


나는 네이선의 말대로 그녀가 자아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과 아우슈비츠를 겪으면서 망가진 복구 불가능한 자아를 누군가에게 의탁이라도 해서 살아야 했던 생존 의지를 차라리 느낀다. 원래 간절하고 절박하고 허기진 인간이란 휘둘리기 쉬운 존재다. 휘두르고 싶은 자들은 휘둘리기 쉬운 연약한 존재를 알아보는 법, 네이선이나 스팅고나 여타의 다른 등장인물들이 소피를 사랑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지배욕이고 통제 욕 딱 그 정도의 수준이고 그래서 소설의 ‘나-스팅고’도 싫었다.) 사회나 공동체가 해야 하는 몫이 있다면 인간이 쉽게 휘둘리지 않도록 간절하지 않게 절박하지 않게 허기지지 않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겠지만 20세기는 특별히 더, 그렇지 못했다.


쓰다보니 연약한 자아에 대해서 자꾸 적게 되는데 내가 읽은 소설의 포인트는 선택권의 박탈(소피의 선택에는 선택하지 않을 권리는 없다)에 따른 ‘학습된 무력감’에 있되 자아의 취약함에 있지는 않다. 무력감과 공포에 많이 노출된 사람이 얼마나 쉽게 구원자에 자아를 의탁하는지 그것이 비합리적인 요구라도 받아들이는 지를 소설 <소피의 선택>이 잘 드러내 준 다고 생각했다. (경험적으로도 알고 있고.)


“(422) 강제 수용소는 대량 학살장으로서의 역할만을 했을 때 인간의 미래에 끼쳤을 위협보다 훨씬 더 크고 영속적인 위협이 되었다. 대량 학살을 위한 수용소는 시체만을 만들어 내겠지만, 완전한 지배의 사회는 살아 있지만 죽은 자들의 세상을 만들어 낸다…….”


밥 먹으면서 넷플릭스 다큐를 즐겨보는 편인데 최근에 30분짜리 <폭군이 되는 법>이라는 다큐가 올라왔다. (아마 <독재가가 되는 법>이라는 책과 관련이 있는 듯) 재밌다. 추천한다. 1편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내용인데, <소피의 선택>을 읽은 후에 봐서 더 흥미로웠다. 1920년대의 독일 사람들이 우리보다 어딘가 모자라서 나치에 휩쓸린 것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의 대중들이 시달렸던 것도 무력감이었으며, 자아를 의탁할 구원자를 찾았던 것 같다. 소피에게 네이선이야 말로 가장 치명적인 구원 자였듯 독일의 국민들에게 히틀러도 치명적인 구원자였다. 


당연히 구원은 구원하지 않았다. 



얼마 전 친애하는 알라디너 다부장님께서는 본인은 무척 구원 서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일침을 놓으셨다. 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구원 서사는 좋아하지 않지만 쌍방 구원 서사는 아주 환장한다고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쌍방 구원 서사라 할지라도 - 결국 구원은 구원이니 구원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독후감이 그 과정의 일환이다.) 내가 취약했던 (젊은) 시절에, 취약한 나를 알아보고 사로잡은 인물과 관계들이 있었는 데, 그런데 어쨌든 달콤했던 그 관계들은 결론적으로는 치명적인 상처들로 남았고,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혼자가 되어 돌이켜보니, 그때 그 관계들 참 별로다 하면서도 당시의 나에게는 구원이 맞았어서,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지. 아 그랬네. 그런데. 구원. 어쨌든 어디까지는 좋았는 데, 어느 순간부터는 왜 그렇게까지 나 자신을 잃어버렸던 건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지점들이 있다. 지금도.


스스로에게 내려보는 결론은 나는 아직까지도(!) 구원물을 좋아한다는 거다. 차라랑 샤라랑 신이 임재하는 그런 구원 말고, 상처가 상처를 알아보면서 함께 우당탕탕 성장하는 이야기. 상처가 치유된다기보다는 자기 상처에 심드렁해지고 그렇게 그냥 한 명의 사람이 되는, 일상을 되찾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 역시 이야기라는 장르가 가져다주는 일종의 신화일까? 현실에서 그런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걸까? 잘 풀리면 소설 <노멀 피플>이 되겠지만 언제나 안 풀리면 소피와 네이선이 되는 걸까. 아, 그건 싫은 데. 어디에 배팅해야 하나. 차라리 인생에서 구원 서사라는 장르 자체를 지우는 게 좋을지도…? <노멀 피플>이나 <빌어먹을 세상 따위>를 좋아하는 나의 이 취향은 부족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의 반영인 걸까. 내 개인에게 아직 남아있는 건강하지 못한 의존증/무력감의 증거인 걸까. 


글의 마무리. 지난 세기에 구원 서사가 대중들에게 소구 하는 힘이 있었고, 특히 그게 백마 탄 왕자님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그건 여성들의 처지에 기반한 집단 무의식의 반영이었지싶다. 지금 미디어 서사들의 주축은 여자가 여자를 돕는 이야기라는 생각이고 그것은 고무적이다. (다크 페이트와 퀸즈 갬빗, 블랙위도우를 보라. 벌써 pc 묻었다고 광광대는 자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구원을 바라는 인간 심리 이면에는 현실에 대한 진한 무력감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글을 참 길게도 썼다. 그러므로 나의 이 구원서사에 대한 욕구(?)는 학습된 무력감일지도 모른다. 구하긴 누굴 구해. 상처를 누가 알아봐. 그냥 내가 나를 구하고, 내 상처는 내가 빨간약 바르고 호호하믄 되지. 실은 그것도 성공적 구원만큼이나 차마 어렵다. 누가 누군가를 구할 수 없다면, 그것이야 말로 환상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스스로 강해질 수 있을까. 스스로 강해지면서도 남을 덜 해칠 수 있을까.



[스포일러 주의하며 덧붙이는 글들.]


1. 1권에서 스팅고 총각 떼는 날이 소설 끝나는 날이 될 거라는 내 예감은 적중했다. 450페이지 이상의 2권으로 된 소설에서 대충 850페이지를 읽고 있는데도 가련하게도 그의 슐롱(소피의 표현ㅋㅋㅋ)은 “눈처럼 순결(스팅고의 표현)”했다. 700페이지쯤에 가서 스팅고는 이럴 바엔 차라리 동성애를 하겠다고 한다. 그즈음 해서 결국엔 나마저 그의 고추를 불쌍해하는 지경이 되었고, (약간의 자아 분열을 느끼며) 스타이런 이 변태 새끼라고 욕했다.  


2. 영화는 1982년 작이었고 듣던 대로 수작이었다. 메릴 스트립은 정말 소피만큼 아름다웠다. 추천해 주신 구스 맥주와 함께했다. 탕수육도. 나는 찍먹과 부먹의 이분법을 경계한다. 이날은 그냥 부었다. 사진에서 표현 안됐는 데, 녹색의 눈을 가진 메릴스트립은 진짜, 너무, 아름다웠고 연기도 잘했다. 그리고 소설 속 핑크 하숙집은 저렇게 표현되었다. 신기했다.  



3. 소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겨우 수용소에서 겨우 살아 나온 소피가 음식을 사 가지고 와 공원의 구석에서 음미하며 아주 천천히 조금씩 먹는 장면이다. 영화에서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소피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구원은 구원하지 않는다. 


레슬리만큼 재치 있지는 않지만 멋진 가슴을 가졌다. 토머스 울프가 지적했듯이, 이 유대인 아가씨들은 가슴이 정말 멋지게 발달해 있다.

- 🤔 뭘까. 재치있는 가슴 🤔 - P231

시몬 베유는 이런 종류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체적, 정신적 고통은 경멸감, 타인과 심지어 자기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죄책감을 인간의 영혼에 깊숙이 각인시킨다. 논리적으로 볼 때는 범죄가 그러해야겠지만 실제로는 고통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렇게 파괴적인 죄책감과 단순하지만 강한 동기에 의해 유발된 과묵함이 한데 어우러져 소피로 하여금 일부 사실에 대해서 침묵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소피는 대체로 지옥의 중심에 머물렀던 시간에 대해서는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비밀을 지키려고 했고, 그녀가 정말로 그것을 원한다면 이는 존중받아야 했다.
- P264

문제는 그들의 양심을 극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물리적인 고통이 다가왔을 때 정상인이면 누구나 느낄 동물적인 연민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용된 기술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그런 본능적인 감정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이었다. *즉 살인자들은 ‘내가 이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라고 말하는 대신,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런 끔찍한 일을 지켜봐야 하다니. 이 엄청난 임무가 하필이면 왜 내게 떨어진 것일까!’라고 말하는 것이다.*
- P275

그러나 이에 대한 보상인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더 숭고한 목표가 있다고 나 자신을 합리화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작가였고 예술가였다. 세상의 위대한 작품들 중 상당수는 예술에 헌신한 사람, 자신의 에너지를 함부로 낭비하지 않고 성기가 더 중요하다는 잘못된 생각이 아름다움과 진리라는 더 큰 목표를 파괴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그 런 사람들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이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까전진해라, 스팅고, 나는 축 처진 기분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면서 혼잣말을 했다. 글쓰기에 매진하는 거야. 색욕은 뒤로하고, 네 안에서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는 매혹적인 야망을 이루는 데 모든 열정을 쏟는 거야. 이런 수도승의 다짐을 반복하자 그다음 주에는 산뜻하게 정화되어 비교적 욕정이 가라앉은 상태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되었고, 내 소설에 몰려들기 시작하는 요정들과 악마, 얼간이, 광대, 딸 때문에 고통받는 부모들과의 씨름을 용감하게 재개할 수 있었다.
- 😓 항마력 딸린다.. - P323

소피가 아우슈비츠 역 플랫폼에 첫발을 내디뎠던 그날 오후, 노스캐롤라이나 주 롤리는 화창한 봄날 아침이었고, 나는 거기서 미친 듯이 바나나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은데도 계속 바나나를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로부터 한 시간 뒤에 해병대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열일곱의 나이에 키는 벌써 180센티미터가 넘었지만 몸무게는 55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았는데, 입대를 위한 최소한의 요건을 맞추기 위해서는 1.5킬로그램은 더 찔 필요가 있었다.
- 😠 소설을 통틀어 가장 탁월했다 싶었던 부분.. 바나나먹는 스팅고. - P387

그때 나는 — 지금도 그렇지만, 그리고 성차별적인 생각이라면 용서를 바란다— 가장 이성적으로 보이는 여자들이 실은 그런 초자연적인 전율에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사실에 실망스러웠지만, 소피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마치 다른 데서는 성차별 안한 것처럼 말하네 이 시키가 ㅋㅋㅋ 야, 너는 존재 자체가 성차별적이야 … ㅋㅋ 네 머릿속 사고의 핵심! 코어!라고! 그게 없으면 이 소설도 못썼을 걸? 짜증난다 진짜ㅋㅋ - P101

언젠가 아우슈비츠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용감하지만 터무니없는 문장이었다. 어느 누구도 아우슈비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렇게 썼어야 옳았다.언젠가 소피의 삶과 죽음에 대해 글을 쓸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절대 악이 결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줄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제까지 아우슈비츠에 대해 나온 설명 중 가장 진리에 근접한 것은 단정 짓는 문장이 아니라 되물음이었다.

질문 : "아우슈비츠에서, 신은 어디 있었는가?"
대답 : "인간은 어디 있었는가?" - P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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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천착의 경우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2-06-24 09:20 
    1.어젯 밤엔 <깊은 강>을 읽고 레비나스를 떠올렸는 데, 잠들 기 전에는 아리송했다가 아침에 일어나니 좀 알겠다. 언제가 <소피의 선택>을 읽고 썼던 무력감과 구원서사에 관한 페이퍼(링크)가 있는 데, 그 이야기와 일맥 상통한다. 2차 대전 혹은 전쟁 이후에 남자 작가, 철학가, 사상가들이 천착한 어떤 인간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파고 파고 또 파내려간 심오함이 도달하는 지점에 그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내
 
 
반유행열반인 2021-07-22 20: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단 살고 봐야 하니까 구원 받고 나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해서 쫓아버리고, 를 반복하면 안 되는 걸까 ㅋㅋㅋ누군가는 스스로 구할 만큼 작은 구렁텅이에 빠지거나 타고나거나 물려 받은 유산이 저혼자 구할 만큼 (심리적으로든 체력적으로든) 탄탄하지만 아닌 사람도 많으니까. 예전에 누군가 ‘내가 너한테 좀 기대면 안 되는 거냐’ 절박하게 달라 붙는 걸 아 망했다 도망쳐야 돼 하고 도망쳐봤는데 지나고보니 오죽 힘들면 저랬을까 싶어 짠 하기도 했어서 하여간에 저는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구해야겠지만 절대적으로 기대는 건 안 되겠지만 거기 도움 줄 만한 누군가가 있는 건 산소포화도 부족한 환자가 산소호흡기 다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혼자 숨쉬게 되면 그때 떼어버리면 되지 뭐…

공쟝쟝 2021-07-22 21:01   좋아요 4 | URL
절박하면 구원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그 절박하고 거북 스러운 냄새가 나잖아요. 평범한 우리 모두는 슬쩍 구원자가 되길 거부하고. 그래서 당사자는 더 절박해지는데, 현실에서는 절박함을 결핍을 역이용하는 자들이 많죠. 구원해주겠다고 나서는 구원같은 사람들은 애초에 절박해보이지 않는 사람이 아니고선 손내밀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사이비종교의 법칙 비슷한거. 그래서 애시당초 구원서사는 거대한 사기인 건 아닐까 무튼 그런 딥한 고민을 해봤어요.

2021-07-22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22 2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1-07-23 02: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옥이 있다면 한증막 같은 곳일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무기력증과 의존욕구, 구원서사에 대한 이야기까지. 소피의선택과 관계없이 이 글 자체가 너무 좋네요.

공쟝쟝 2021-07-23 12:51   좋아요 1 | URL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리뷰는 쓰다보면 항상 제 이야기 (다른 리뷰는 아닌 것 마냥?) 하더라구요ㅋㅋ 소설의 스포를 피하기 위해 나름 신경을 쓰다보니 구렇게 되는 건가.. 싶기도?

새파랑 2021-07-23 06: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TV가 크네요 ^^ 그 옆으로 정리되지 않은 책들과 맥주사진이 인상적이네요👍 리뷰가 너무 흥미롭네요 😊

공쟝쟝 2021-07-23 12:52   좋아요 1 | URL
정리안돼다니…. 정리 한거라고요😂😂 책정리가 가지런해야한다는 편견을 버렷!!!! 티비는 거거익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티비에 비해서 집이 작아 목이아픕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