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구원하지 않는다
라파엘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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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평점 :
1.
어젯 밤엔 <깊은 강>을 읽고 레비나스를 떠올렸는 데, 잠들 기 전에는 아리송했다가 아침에 일어나니 좀 알겠다. 언제가 <소피의 선택>을 읽고 썼던 무력감과 구원서사에 관한 페이퍼(링크:https://blog.aladin.co.kr/jyang0202/12799417) 가 있는 데, 그 이야기와 일맥 상통한다. 2차 대전 혹은 전쟁 이후에 남자 작가, 철학가, 사상가들이 천착한 어떤 인간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파고 파고 또 파내려간 심오함이 도달하는 지점에 그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내면이든 세계의 무엇이든 ‘모성적인 어떤 느낌’을 설명에 섞는 데 —나의 고통은 그들의 고통과는 다르므로 윤리적 비아냥은 할 생각이 없다— 여기에 그것이 그들의 삶을 가능하게 한, 메일 바디가 경험(체험)한, 고통에 대한 어떤 안도가 있나보다… 하고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난 그런 안도/구원을 구할 수가 없으니 이 지점에서 차라리 한나 아렌트(끝까지 안도하지 않기를 주문한)에 관심이 생겨버린다.
2.
이소베, 누마다, 기구치, 심지어 오쓰까지… 이 소설에서 엔도 슈사쿠가 그린 남성 인물들 모두에 나는 이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독서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가 쓴 미쓰코에 대해 (그가 뭘 그리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았는 데)선 딱 절반 정도만 이해했고 이입했다(추후에 <깊은 강> 읽은 여자 독자들의 이입량이 궁금하다). 그리고 이소베의 아내에 대해선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이소베의 아내는 이소베의 판타지거나 엔도 슈사쿠의 판타지다. 그러므로 엔도 슈사쿠는 ‘남자’ 작가다.
쫌 더 성급한 일반화로 가볼까? 슈사쿠가 내세운 인물중 가장 깨달은 자에 가까운(?) 오쓰는 남자고, 그를 시험하며 온갖 위악을 떠는(그 역시 슈사쿠의 내면이겠지만) 인물 미쓰코는 여자다. 일본 전후 문학의 거장 엔도 슈사쿠여, 왜 그렇게 캐릭터를 할당했나요?
3.
인물들이 ‘인도’까지 가서 만난 뒤 인상 깊게 소회하는 소설에 등장하는 (하, 독을 견디며 젖이 쪼그라들어 말라붙은 상태로도 젖을 물리는ㅋㅋㅋㅋ)수난의 여신은, 그 모든 고통과 기아아와 죽음을 ‘견디는’ 메타포다. 나는 여기서 읅ㅋ했다. 으어어, 참으로 인류는 고통을 견디는 주체에 여신을 할당(?)하기를 즐기는 도다(자, 이 지점은 읽고 있는 <가부장제의 창조>를 마저 다 읽고 까는 것으로 하겠다.) 그러므로 차라리 천형 앞에 모두를 위해 대신 고통 받는 주체로 젊은 남자인 예수를 할당한 기독교가 양심(?)있게 느껴져버리는 나다(ㅋㅋ).
고통받은 동아시아 남자는 예수를 양파로 바꾸어 부르지만 나 역시 무엇으로 바꿔 불러도 상관 없다. 내게도 이 지독한 삶을 견딜 신이 필요하고, 양파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고, 어떤 나만의 내면이 필요하다. 고통의 경험 앞에서 그것의 의미를 희구하는 각자들 만이 발견해 낼 수 있는 태도, 방법, 반응이 있는 것 같다. <깊은 강>은 그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이를 구원이라고 부르지 않고 의미라고 잠정적으로 부르고 있는 데, 그 의미의 결론으로써의 어떤 삶/죽음이 있다고 하면 오쓰의 경우 혹은 엔도 슈사쿠의 경우는 품위있게 느껴진다.
4. 공쟝쟝의 경우.
천착, 나는 뭔가를 찾고 있다. 그게 뭘까.
공허함?
나는 공허하지 않다. 삶 자체가 허무하긴 하지만 미쓰코가 느끼는 무료함에 가까운 공허는 잘 모르는 감정이다.
빈 곳?
나는 비어있지 않다. 내가 허덕이는 것은 없음보다는 차라리 압도적인 있음에 훨씬 가깝다. 당연 나의 내면에도 어떤 진공처럼 빈 공간이 분명있다. 그런데 현재의 나는 그것이 비어져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비어져 있는 곳이 아니다. (그것이 채워지리라 기대하지 않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살지 않는다) 채우고 싶다거나 충족하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상황들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그걸 쓴다. 그럼 그걸 채우지 않아도 재밌게 살 수 있다.
의미?
지금으로서는 가장 가까운데, 꽉꽉 들어차 있는 삶을 눈앞에 두고 의미에 몰두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의미로 의미가 없다. 덧붙여 자신의 의미부여가 너무도 심오한 나머지 다른 인간의 생산/재생산에 기대면서 안착(?)해버리거나 초극(!)해 버리는 브루주아적/남성적(동서양막론하고) 무의식…은… 그 맹점이 현재 인류에게 너무 치명적이기 때문에… 와따시는 다른 독자들처럼 그저 심오한 인간애에 감격해서 별 다섯을 줄 수가 절대 없는 것이다.
2차 대전같은 거대한 것을 겪지 않은 나 역시도 (그러나 꼭 그런 거대한 걸 겪어야지 거대한 사유를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통 이후에 삶을 재건하는 방법에 관심이 많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천착하는 혹은 천착해야 할 주제일지도 모르겠다고. 어제 그런 생각을 했다. 각자의 재건 방식이 있겠지만 그것은 내게 신의 존재나 구원은 아니다. 굳건한 물적 토대(피부에 와닿는 것…)와 현실 인식(고통은 현실로 부터 달아나려는 특성이 있는 것 같다)에 근거한 어떤 삶의 태도이고 실천인 데… 아, 아직은 구체화되지 않았으므로 표현이 쉽지가 않다. 그냥 막연히 아렌트… 푸코… 뇌과학… 읽으면…? 이러고 있다.
사실 몇 년 동안 일기를 쓰면서 난 그것이 ‘언어’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더란다(이 지점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생각난다). 그런데 지금은 언어는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비교적 싸다) 재료일 뿐, 내가 살고 싶은 현실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5.
운동을 가야하기 때문에 글을 성급히 마무리 짓자.
‘제2의 성(여성)’인 내 안에 있는 *신*은 ‘고통받는 주체’이기도 전에 먼저 ‘타자’로서 체험된다. 그것이 나의 분열이고, 허덕임의 기원이며, 어쩌면 글쓰기를 일으키는 역량—크리스테바는 이러한 글쓰기가 곧 사랑의 활동이라고 했다. 아, 크리스테바 읽고 싶어ㅠㅠ—이다.
고통이 고통인지도 몰랐던… 내가 분명히 있고, 온전한(온전할 수 있을까?) 자아감의 회복 이후에야 나의 *신*은 정말 ‘신’ 처럼 경험되는 것일지도🤔.
엔도 슈사쿠는 혹은 오쓰는 자신 안에 있는 신을 그렇게 경험하고 살아보려고 했을 테다.
나 역시 그렇게 살면 되지 않을까. 내 안에 있는 *신*을.
덧1, 이소베의 아내는 환생하고 싶지 않았다에 내 손톱을 걸지. 만약 환생한 세상이 2010년대의 한국이라면 페미물 꼭 먹으세요. 환생하고 싶지 않아지실 거에요.
덧2, 그러므로 여기까지가 일본 문학의 성취이자 한계인가? 그렇다면 몇 년 전 내가 일본 남자 소설가들의 작품을 다시는 안 읽고 싶다고 했던 이유는 분명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치자면 인류가 생산한 숱한 고전은 9할 이상이 남자들의 작품이므로…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는 상황인데. 즐겨지지 않음에 내 훌륭함이 있는 것이지. 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