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과 동생 남자친구와 패밀리 레스토랑(VXXS)에서 밥을 먹었다. 맛있었다. 인공지능 기계 종업원이 그릇을 걷어가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우리 가족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함께 돈까스를 먹은 것은 내 평생 딱 한번있었던 일이다. 어린 시절 가난 에피소드 배틀은 자매들과의 낄낄 포인트라서 넉넉지 못하게 자랐다는 동생 남친도 분위기에 맞춰 없이 살던 시절 에피소드를 내놓았다.
그는 대학에 다닐 때 OOOO(유명 레스토랑 프랜차이즈)에서 맥주가 무한리필이라는 소리를 듣고 친구들과 당차게 입성! 처음으로 (술 먹고 취해) 업혀 나왔다고 오늘은 취하지 않겠다고 했다. 무한리필이라면 저도 할 말이 많아요. 고등학생, 우리 고장에 미피가 들어와 피자 뷔페 이벤트를 한 날이었다. 두 판을 먹을 다짐을 하고 전날 저녁부터 두 끼를 굶고 간 나는. 배가 너무 고팠던 나머지 전채로 나오는 음식들을 집어먹다가. 막상 피자가 나왔을 때는 두 조각 밖에 먹을 수가 없었다. 너무 배가 부른 거예여... 그래서 집에 오는 길에.... 울었다. 점점 배가 꺼지는데 두 개 밖에 못 먹은 게 억울해서 울었어요. 가난 불행배틀 대결. 은. 내가 이겼다. 나 윈. 나 승. 이라고 적었지만... 갑자기 이걸 읽는 사람들이 뭐라 생각할지.
아우씨, 10대 때 맘을 고쳐먹고 부자 되기를 노력했어야 했는데. 가난의 방어기제는 너무도 치명적이라서 20대에는 부자를 미워하는 사상에 심취했다. (그 버릇을 개 못 주고 30대에는 남자를 미워하는 사상에 심취하게 되고마는 데...) 😩😩😩
동생이 억만장자처럼 쇼핑하기라는 중국산 플랫폼 쇼핑몰에 대해 터놓았다. (작년 가을 우리는 미니멀리즘을 함께 보고 물건 중독에 대해 함께 반성한 바가 있었다.) 눌러놨던 욕망이 터졌어. 억만장자가 되고 싶어!ㅋㅋㅋㅋ 부자가 되고 싶으면 싸게 사려는 충동을 버려야 해. 싸면 눈 돌아가는 그거 가난뱅이의 특징이야. 가난뱅이의 심리로는 부자가 절대 될 수 없다!! 참아!
동생 걱정, 나라 걱정, 중국 걱정, 세계 걱정과 인공지능 걱정까지. 자리의 마무리는. 이런 질문이었다. 과거를 돌아보며 우리는 추억에 젖지만. 과거가 좋기만 했냐면, 아니오. 지금이 좋아요. 그러니까 일종의 가스라이팅 아닐까요. 미래의 불안. 미래의 불행. 미래에 대한 조바심. 미래라는 관념을 빌미로 지금을 초조하게 만드는. 우리들은 열심히 살아왔다. 그래서 과거가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는 낫다. 그래도 더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을 하던 커플에게 멈춰보라고 조언했다. 가만히 있어보세요. 그리고 놀아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인생은. 챗GPT는 인공지능은 못 놀아요. 놀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해 질 겁니다. 그리고 뭐 어때요. 일 없으면. 놀면 돼지. (돈을 써야만 잘 놀 수 있다는 동생을 째려보며) 돈 없이도 잘 노는 방법을 연구해 봅시다.
그의 질문대로 책이 나에게 자기 계발이었다면(일정 부분 그런 것도 있지만), 이렇게까지 읽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사실 놀고 있다. 열심히 놀지 못했던 시간까지 보상 받으려는 회복적 놀기 실현이랄까. 논다. 내가 신간 편하게 노는 것을 들키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나를 너무 배 아파할 것 같아서 바쁜척 하면서 열심히 갓생 사는 척 하면서 ㅋㅋㅋㅋ 놀고 있다.
지금부터 적을 이야기는. 어제의 가족 모임에서 하지 못한 약간은 추상적인 이야기. 이며 읽었던 책 #흠결없는파편들의사회 와 #끝나지않은일 에 대한 독후감이며. 실은 30대의 평범한 [번듯한 남성 + 일하는 여성] (아마도 외벌이로는 수도권에 집을 가질 수 없으며 육아가 너무도 부담스러워 결혼을 망설이는) 커플에 대한 인상 비평. 일지도.
참, 그 전에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은 이렇다. 혼자로는 부족해. 두 사람이 온전하다는 것, 그 결합에 대한 판타지 역시도 일종의 관습적 각본이지 않을까. 꼭 이성애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나는 혼자일 때 가장 온전하다. 그리고 이 말이 얼마나 오만하게 읽힐지 알아서 적기 겁난다. 하지만 요점은 내가 만족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결합보다 분리를 원한다. 연결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산하듯 온기가 필요해질 때가 온다면 이 역시 변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의 상태와 상관없이 두 사람은 좋아 보였다. 둘 이라서 정말로 좋아 보였다. 가만히 있는 나에게 느닷없이 둘을 처방하곤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렴풋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오늘 적고 싶은 것은 저번에 다 적지 못한 고독에 대한 이야기.
“(145) ‘우리는 망가진 우정이나 박살 난 사랑의 불안과 고뇌 속에서 타인의 연민을 구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가장 가까운 인연과 갈라놓을 때, 참담한 불행의 그늘 속에 우리는 홀로 앉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가장 위대한 승리와 가장 어두운 비극 역시 홀로 걷는 겁니다.’ 손가락 말단까지 정치적 동물이었던 스탠턴은 이 사유를 여성을 위한 정치적 평등의 필요성과 연결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에게 행동 반경을 확장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의 논거로 그가 아는 가장 강력한 것은, *모든 삶은 궁극적으로 고독하다는 사실*이었다. (중략) ‘삶의 폭풍은 남자들에게 불어치듯 여자들에게도 나침반의 전방위에서 불어 칠 뿐만 아니라 더 치명적인 피해를 초래합니다. 남자들은 자기를 보호하며 저항하고 승리하는 훈련을 받기 때문입니다. (…) 그 모든 영혼은 각자 혼자서 다만 자기 자신만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길고 따분한 행진을 각자 혼자서 해야 합니다. (…) 나는 묻습니다. 누가 감히, 그 누가 감히 다른 인간 영혼의 권리와 의무와 책임을 대신 떠맡을 수 있단 말입니까?” -비비언 고닉 <끝나지 않은 일>
“(164) 동시대의 20-40대 여성들은 성공에 대한 열망이 크며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도 강하다. 이들은 가시화된 성과가 자신을 구제하리라고 굳게 믿으며 직장에 나간다. 어떤 여성들은 성차별을 낡은 패러다임으로 여기고 능력주의를 실존 혹은 도래할 미래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그렇게 인식하는 여성들도 일터의 어디서고 느닷없이 등장하는 ‘여성성 지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19) *유리 낭떠러지는 기업이나 조직의 상황이 좋지 않을 때나 경기 침체 시에 여성을 고위직에 임명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중략) 한국의 정당은 특정 필요에 의해서나 이미지 개선과 쇄신이 요구될 때 여성 의원에게 자리를 주지만 이들의 리더십은 곧 교체될 수 있는, 임시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유리 낭떠러지는 남성동성사회가 갈등 상황에서 어떻게 여성을 희생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직은 소모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능한 개인’으로 여성을 선택한다. 여성은 고위직에 올라갈 기회가 적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이미 남성들이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직무를 떠안고 수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물질적·정서적 지원이 불충분한 상황에서 여성은 실패하도록 설정된 지위를 받아들인다. 일터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면서 여성이 예전보다 쉽게 고위직에 임명되었다가 가파르게 추락할 위험 역시 커졌다. 최고위직에 오른 여성은 마치 ‘피해자 역할에 캐스팅되는 것’처럼 임명되는 것이다.” -김현미<흠결없는 파편들의 사회>
번듯한 남자가 되기 위해 남성은 고독의 시간들을 견딘다. (나는 그가 번듯해지기 위한 시간들을 노고를 치하한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과 고독의 시간. 그 노력의 성과로 일종의 트로피(가정-아내와 아이들-)를 얻는다. 그가 번듯한 성인 남성이 되었으므로 사회의 승인(특히 가장이라는 인정)은 딸려올 것이며 *그는 더 안정적으로* 일에 몰두할 것이다. 가정이 큰 문제(…)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사회적 성취는 쌓이게 될 것이다. 가족 생계부양자 모델 남자의 일생. (물론 그 삶은 어려운 일이다.)
번듯한 여자(그런게 있는지는 모르겠다)가 되기 위해. (실업이 만연한 현대 한국 사회는 유난히 경쟁의 밀도가 높다) 여성에게는 이중 메시지가 주어진다. 특별히 적성에 맞는 행복한 일을 선택한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면 사회생활 내내 여성은 갈등한다. 현모양처가 될 것인가 vs 성공한 여성이 될 것인가. (혹은 어떻게든 일을 좀 쉴 것인가) 후자를 선택, 유리 천장을 뚫기를 결단한 여성들에게는 일에서의 성취감 외엔 트로피가 없다. (이 시점에서 왜 민희진 대표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잘나도 유리 절벽. 애도 안 낳아 본 여자라는 생애 주기의 과업을 팽개쳤다는 미묘한 비난(비난이면 낫지. 스스로 느끼는 셀프 자괴감)과 독하면 독한대로 일 못하면 일 못한다는 평가들을 견디며 모두가 은근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유리 낭떠러지. 시시때때로 일이 포기한 가정(소소한 웃음 소리, 친밀감, 아가들)보다 소중한가 해보는 자문.
번듯한 여성에게 트로피는 무엇일까. 더 번듯한 남자의 사랑?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 폭력이 법적으로는 탄핵된 현대 사회의 ‘고통’이란 대체로 질병 아니면 ‘사회적 고통’임을 마주 보자. 그러니까. 그럴 필요가. 성공의 끝이. 고립무원일 필요가 있는가. 나만 나를 알아주면 되는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소시오패스 일테니. 그런 의미에서 여성은 일종의 계급이 맞았다. 그렇다. 여전히 한쪽 성별은 2등 시민이라는 주장을 나는 하고 있다.
하여 여성의 능력주의와 남성의 능력주의는 다르다. (서백남이 조던 피터슨의 신봉자가 되는 데에는 합리적 근거가 있다. 그 신봉에는 어떤 분열도 없다.) 유리 천장 이후엔 절벽. 여성의 능력주의는 조금 더 서글픈 무엇이 있다. 그리하여 견고한 이성애 중심주의의 사회 안에서 여성의 ‘고독’은 갈 길을 잃는다. 젠더화된 고독. 젠더화된 트로피. 젠더화된 정상성.
내 생각에 1세대 페미니스트. 엘리자베스 스탠턴의 이야기. 여성의 ‘고독’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는 문장은 현시점에서는 *더 직접적으로 ‘번듯한 남자’라는 남성 사회의 신화가 깨져야 한다는 주문*이다. (하지만 그건 남성 사회가 스스로 깨어야 한다. 애꿎은 눈 높은 여자 탓하기를 멈추라!) 이는 뒤집어 말하면 신자유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여남 모두가 ‘돌봄’을 폐기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와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자유주의가 돌봄마저 돈으로 다 치환해 버릴 때까지 한 쪽 성별이 바뀌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 즉 실리콘밸리 남성들의 기획이 바로 오늘날 기술/과학에 대한 추앙의 이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뇌과학 자기계발에 가져다 쓰는 박사님들아 멈춰서 사유 좀 하세요.)
이제는 여남 불문 어른이 된 모두가 각자의 기준에서 각자의 고독을 짊어지고 각자의 돌봄을 수행해야 하는 조건.이 2024년의 한국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셀프로 그럴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생각은 이 글에서는 하지 않는다. 그러면 내 생각이 흩어지니까. 촌스럽게도 내가 ‘실존주의’를 버릴 수 없으며 끝끝내 보부아르(혹은 아렌트ㅋ 명예남성)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종종 탈여성이라고 놀림 받는다) 여기에 있다. 내 몫의 고독을 충분히 감당하고 싶어라 하는 남성(but 가부장의 권위에서는 이탈한)이 되고자 하는 마음.
여기서 또 한 가지 질문. 그런데 남성은 정말로 고독을 사랑하는 여성을 견딜 수 있는가?
남성 자신들이 아닌. (남자들은 또 고독한 남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ㅋㅋㅋ 어후 나르시시즘. 오져. 처자식을 애초에 둘 생각을 하지를 말라니깐요. 둘 중 하나만 해라. 그러나 그게 되겠냐. 남자는 가임기가 없는데. 남자도 가임기 법적으로 처방하자. 서있는 데가 달라지면 사람이 바뀐다.) 글쎄. 있긴 있겠지. 현실에서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있다 하더라도 나만큼 이렇게까지 생각해 보겠냐. 위치가 남성의 몸인데. 내가 게이 책만 읽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단다.
맨 박스에 갇힌 현시대의 남성들에게 *가장의 부담을 내다 버려도 좋다!*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실제로 그 짐을 지려하거나 감당도 할 수 있는 조건의 사내들- 즉 이 시대의 알파남들-에게 나의 이야기는 권력(그들이 고독과 노력을 통해 얻어낸)을 반납하라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거기에 나의 인식이 닿으면 나는 빡이치고 더 극단적인 글을 써서 이들의 에고에 상처를 내고 싶지만. ㅋㅋㅋㅋ 요새는 나의 평안과 안녕을 위하여 안 들을 사람에게 쓸 생각이 없으므로. 냅두고.
나는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계와 대결하는 남성이 아닌 그의 아내가 되기를 은연 중에 주입받아온 이성애 핵가족 중심 사회에서 2등 시민 여성인 우리가 나의 몫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능력주의 이전에) 나의 고독을 마주 보기로 결단하는 것이며. 돌봄의 무능과 고독에의 무능은 확실히 다른 카테고리라고. 돌봄의 가치를 절대 폐기하지 않으면서 고독에도 유능해지자고. 이는 어쩌면 여남 모두에게 살아본 적 없는 완전체에 가까운 삶을 주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누구라서. 인생은 한.번.뿐. 이며. 모두가 아무도 살아본 적 없는 자신의 삶을 산다.
그게 어쩌면 엘리자베스 스탠턴이 말하는.
인간 모두가 겪어야 하는 정말로는 실존적인 고독이며.
연결의 무능에서 나오는 외로움과는 다르다.
여기까지 적고 나니까. 견고했던 사회적 각본과 그에 따른 자신의 낡은 신념을 재고할 겨를조차 없는 여남 개인들에게 신자유주의라는 조건이 복수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존 기계로 만 살기를 거부해야 참 생존이 가능해지는 인류. 모두가 독립해야 하고. 모두가 자아가 되어야 하고. 모두가 개인이 되어야 한다. 강제적 각자도생. 이게 나쁜가. 실존적으로는 원래 모두가 각자 도생이었다. (아, 니체스러워.)
보부아르와 고닉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동인데. (그녀들은 놀랍게도 아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년을 찬미한다!) 나를 돌보기 위해서 나의 고독을 보존하기 위해서! 독서는. 읽고 쓰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언제부턴가 나 역시 늙는 것이 별로 두렵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책 속에 그 여자들이 있으니까. 나는 고독 속에서 이 것을 발견했다. 삶을 살고, 읽고, 멈춰서, 사유하고, 쓸 것. 그것을 반복할 것.
“(207) 이번에도 나는 책이 처음에 상정한 독자가 되기까지 성장해야 했고, 책은 그런 나를 내내 기다려주었다.”
돌봄은 조금 더 공부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