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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조의 바다 위에서
이창래 지음, 나동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평점 :
지금까지 읽은 작가의 어느 소설과도 비슷하지 않았다. 그리고 읽기에 쉽지 않았다.
일단 시점이 현재가 아닌 미래. 작가가 어떻게 미래를 보고 있고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어하는지, 끝까지 집중하며 읽어야 했다.
'작정을 하고 썼구나' 하는 생각. 단 한줄도 기계적으로 써나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 읽는 사람이 어찌 쓰윽, 쉽게 읽어나갈 수 있겠는가. 이 작가의 소설이 처음이 아닌데도 작가의 의도가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기존의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본 적이 없는 스토리와 전개 방식. 기존의 어떤 작품에서 이미 한 얘기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작정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미래 사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전쟁, 로봇, 핵무기, 신인류, SF, 그 어느 것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앞으로 100년 후의 사회인지, 200년 후의 사회인지도 알수가 없다. 어찌보면 꼭 미래사회랄것도 없이, 현재 어느 사회 한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해도, 혹은 과거의 어느 시대의 이야기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것이 범 세계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어서 우리에게 생소하게 여겨질 뿐.
차터, B모어, 자치구, 이렇게 세 종류로 나뉘는 사회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높은 장벽으로 구분되어 있고 잘 살고 못 사는 위계가 존재하며 정부의 존재는 무색하다. 지금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돌아가는 듯 보이나 딱히 더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외롭고 삭막하고 중심이 없는 듯한 사회이다.
주인공은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중국계 소녀. 이 소녀가 하는 일은 잠수부. 태생과 직업부터 생소한데 이 소녀의 캐릭터도 확실하게 잡히지 않는다. 한가지, 이 소설처럼 복잡한 캐릭터는 아니라는 것.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비상한 두뇌 혹은 빼어난 미모와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이 많거나 자기자신이나 사회에 대해 관심과 포부가 대단한 것도 아니고, 복잡한 인간 관계에 연루된 것도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 캐릭터로 설정할때 작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 사회라는 배경에 맞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캐릭터도 드러내지 않겠다는 의도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남자 친구의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그 남자 친구가 실종이 되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를 찾아 나선다는 줄거리쯤이야 줄거리라고 해도 될까 할만큼 작품 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서 인용했다는 제목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만조 (full sea). 즉 밀물로 바다가 꽉 차올라있을 때, 확장 해석하자면 어떤 일의 호조, 전성기를 의미한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일차 함수의 직선처럼 시간을 x축으로 하여 계속 증가 혹은 감소하는 그래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위로 볼록, 혹은 아래로 볼록한 그래프를 그리는 이차함수로 진행되어 가며 만조의 시기란 그래프의 부호가 바뀌는 극대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아가는 미래는 어쩔 수 없이 만조를 지나 다시 하향곡선을 그리며 나아가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 세계에 작용하는 방식은 수학공식으로만 설명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조를 지나 그것이 하향으로 갈지, 아니면 상향으로 진행될지 정해져있지 않고 예측할 수 없다. 방향성을 잃은 것 처럼 보일 수 있고 그래서 불안하다. 만조의 바다 위에서 개인과 집단은 모두 불안하다.
가독성이 떨어진다, 읽기에 지루하다는 다른 독자의 평을 보았다. 저자는 이런 평에 별로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오히려 예상대로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지 않을까. 하나의 작품에 하나의 서사를 담기보다, 이 사회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통찰의 결과로 내어놓는 작가. 내가 생각하는 이 창래는 그런 작가이다.
* 이 소설의 결말. 오백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이제 몇페이지 안 남기고 다 읽었다는 흐뭇함에 자칫 집중력을 떨어뜨려 내용 아닌 글자로서 주루룩 읽어간다면,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점 하나를 놓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