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오이지를 담가달라고 해서 몇 개 얻어 먹고 있다. 늘 부글거리는 속도 편해진 듯 싶다. 내년부터는 좀 정신차리고 오이지를 담가 먹어야겠다고 다짐은 해본다. 마음이 늘 바깥에 있으니 집안 살림은 마지막 차례가 된다. 식구들에게 밥을 해먹이는 일이 평생 과제 중의 과제이다.
도쿄에 다녀온 지 닷새가 되었다. 8박 9일 동안 아사쿠사의 좁아터진 호텔을 베이스캠프 삼아 도쿄 시내를 우왕좌왕하다가 왔다.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누가 가라고 한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아니 아무도 내가 어디를 가는지 관심도 없는데 참으로 열심히 다녔다. 집안 살림은 어설퍼도 여행만큼은 야무지게라고나 할까. 다만 야무지지 못한 위장 때문에 내내 고생을 했는데 이제는 여행의 신도 내 꼴을 봐주지 않으려나 보다.
여행 전에 읽은 책 중 단연 압권은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책.
2007년에 나온 책을 그때 구입하고 앞부분만 조금 읽고 밀쳐놨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너무나 재밌다. 맛집이나 핫플레이스와는 관계가 멀지만 일본을 제대로 봐야겠다는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다녀오고나서 눈에 들어온 책은
궁금해서 일단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첫장부터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새로 책을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반쯤 읽고 여행 중에 읽으려고 했으나 단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그대로 들고온 책으로는
p.124
'후수로 일린다'는 무도 용어인데, 시간적인 지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난제에 재빠르게 대응한다 해도 '선수를 잡았다'라고는 하지 않는다.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릴 때 그에 대해 어떤 답을 가지고 대응하는 행위는 모두 '후수로 밀린다'가 된다.
이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후수로 밀리는' 훈련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질문을 받고, 거기에 어떤 대답을 해서 정답을 맞히면 칭찬받고 틀리면 벌을 받는다는 학교 교육의 형식이 애당초 '후수로 밀리는' 연습이다. 취직을 해도 '후수로 밀리는' 훈련은 계속된다. 이번에는 '주어진 과제를 적절히 해낸다'와 같은 식이다. 과제가 우선적으로 주어지고, 거기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생각하는 틀에 익숙한 사람은 모두 '후수로 밀리는' 사람이다.
왜 우리는 '후수로 밀리는 ' 훈련을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강요당하는 것일까. 별로 어려운 얘기는 아니다. 질문을 하거나 과제를 내는 쪽은 '보스'이고 대답하거나 평가받는 쪽은 '부하'이기 때문이다. '무비판적으로 상급자를 따르는 마인드'를 형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후수로 밀리는' 기술만을 선택적으로 체득한다.
'선수를 잡거나 후수로 밀리거나' 중에서
무엇이 '선수'이고 무엇이 '후수'인가. 누가 '선수'이고 누가 '후수'인가. 나는 '선수'인가 '후수'인가. 이어지는 이런 물음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만하다.
p.145
<사기> 등에 나오는 공자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허구다. 공자는 아마도 이름 없는 무당의 아들로서 일찍 고아가 되어 미천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을 처음으로 깊이 응시한 이 위대한 철인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사상은 부귀한 신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 읽은 부분으로 나머지도 빨리 읽고 싶다.)
이제 본론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고양이 빌딩이다. 구글 지도로 못가는 데가 어디 있나, 싶었는데 이 곳이 그러했다. 지나가는 행인,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 등 8명에게 물어 겨우겨우 찾아갔다. 길 찾기에 일가견이 있는 남편도 힘들어 한 곳이다.
고인이 된 분의 서재를 찾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저 까만 빌딩에 손을 댄 순간 뭔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의 책을 써도 결국은 누구나 죽는구나, 하는 아주 단순한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주인을 잃은 저 검은 빌딩은 고인의 무덤이자 비석 같은 것. 그는 '선수'일까 '후수'일까. 뭐 그런 생각도 무심히 하게 되는 곳.

현관문 앞에서 하릴없이 서성이다가 돌아왔다.
이 책을 쓴 사람, 다치바나 다카시. 참 행복하고 뿌듯하게 읽었던 책이다.
몇년 전 친구가 읽고나서 나에게 넘긴 책. 이제는 눈에 들어올 것 같다.

이어서 찾아간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 와세다대학교에 있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시작으로 참 꾸준히도 책을 쓰고 있다. 사진 속의 칸칸이 모두 그가 써내려간 책이다. 읽는 속도가 쓰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게 하는 작가. 쓰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못 읽겠다고 징징대는 이 누구.
이제 결론이다.
츠바야 서점에도 갔었다.

엄청 커다란 책에 가격도 엄청 나다.

감히 만져보지도 못하고 나왔다.
한바탕의 꿈 같은 여행이었다. 다치바나 다카시도, 무라카미 하루키도, 데이비드 베일리는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