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한달 4주에 걸쳐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 기념 4대 비극 특강을 들었다.
집에 가지고 있어 먼저 읽어놓은 <햄릿>을 제외하고 다른 세 작품은 강의 전에 주문해서 읽을 시간이 없어서 아파트 작은 도서관에서 급한대로 구해 읽었는데 빌려 읽은 책 두권이 알라딘 검색으로 상품 넣기가 안된다. 할 수 없이 복사해서 붙여넣기 해놓는다.
비록 교과서 세계문학이라고 되어 있긴 하지만 요약본 아닌, 엄연한 전역판이라서 불만 없이 하루 전에 빌려다가 다 읽고 강의에 들어갔고, 오셀로는 마침 같은 장소에서 연극을 상연하고 있기에 그것도 챙겨 보는 열의, 아니 재미를 느꼈던, 알차고 좋은 시간이었다.
추정되는 집필 시기가 1599년에서 1606년 사이, 햄릿-> 오셀로 -> 리어왕 -> 맥베스 순서이다.
1564년에 태어나 1616년까지 살다간 세익스피어는 태어난 날과 세상을 떠난 날이 4월 23일로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존 인물이다 아니다, 아직도 종종 논란이 되고 있는 세익스피어는 처음부터 글을 쓰던 사람이 아니라 극단에 소속된 배우였다가 연극 대본까지 쓰게 된 사람.
5막으로 되어 있는 햄릿은 세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첫 장면부터 관객의 시선과 호흡을 끌어모으는 대사로 시작한다. "거기 누구냐? (Who's there?)"
그 유명한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니"라는 대사가 나오는 것도 햄릿. 햄릿의 첫 독백 중에 나온다.
햄릿이 복수를 주제로 하고 있다면 오셀로는 사랑과 질투의 비극이다. 왕이 아닌 일개 장군이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다른 세 작품에 비해 약간 함량 미달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는데, 이 오셀로가 질투, 흑백의 결혼과 인종 편견, 이아고의 악마성, 그 밖에 동성애를 작품 분석의 주제로 보는 의견도 있다는 말을 듣고 뜻밖이면서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든 그렇지 않든 한 작품을 이렇게 여러 견해로 분석할 수 있다는 점에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는 정답이 없지, 답이 하나가 아니란 말이야.
리어왕의 주제를 자식에겐 유산을 절대 일찍 물려줘서는 안된다 라고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처음에 아버지로부터 너는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Nothing!" 이라고 대답해버리는 막내딸 코딜리어의 그 말은 이 작품 전체의 주제가 이래도 저래도 인생은 무상하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라는, 좀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주제에 한치도 뒤지지 않는다. 그걸 너무 늦게,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 이르러서야 알아버린 리어왕의 최후는 불행했다.
맥베스 왕보다 어쩌면 그 부인이 더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일 정도로 맥베스의 야심에 불을 붙이는 것은 맥베스 부인이다. 부인의 사주에 넘어가 맥베스의 악마성은 극에 달하고, 그것을 벌주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맥베스 자신의 양심이었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남아 마지막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양심"이라는 것. 세익스피어의 작품에서 그것은 종종 유령이나 환영으로 나타난다.
참고로, 위의 네 작품을 4대 비극으로 꼽은 것은 세익스피어 자신이 아니라 후대 영국의 평론가 에드워드 다우니라고 한다 (받아적은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이름인지 모름) → 검색해보니 Edward Doughtie (에드워드 다우티)가 맞는 것 같습니다
4주에 걸친 강의를 다 듣고 돌아오는 밤길이 못내 아쉬웠다.
원래는 이 모든 작품들이 산문이 아닌 운문의 형식으로 쓰여졌는데, 우리말로 해석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평이한 산문으로 변신할 수 밖에 없음도 역시 아쉬웠다.
Fair is foul and foul is fair (고운 건 더럽고 더러운 건 곱다).
맥베스에서 마녀들의 주문에 나오는 대사인데, 이런 식의 라임 혹은 댓구를 알면서 읽을 수 있다면 두배는 더 재미있을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