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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다정하진 않지만 - 카렐 차페크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영국 여행기 ㅣ 흄세 에세이 5
카렐 차페크 지음, 박아람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평점 :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을 읽고서 이 작가의 다른 책도 꼭 읽어보리라 생각했었다. 카프카, 밀란 쿤델라와 함께 체코 문학을 대표하는 3대 작가로 꼽히는 차페크의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이다. 원제 Letters from England 보다 국내 출판사에서 붙인 제목이 영국 사람의 한 단면을 잘 꼬집어 표현한 제목 같아서 더 맘에 든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4년, 카렐 차페크가 영국을 방문한 데에는 단순한 관광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런던에서 창립된 국제 펜클럽의 초대가 있었고, 원래 친분이 있던 체코의 교육자 겸 언어학자 보차들로가 영국에 유학중이었는데 차페크가 한번 영국에 방문해주기를 오래 동안 권했었다고 한다. 이 당시 체코는 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자유민주주의로의 불안한 첫 걸음을 막 띄기 시작한 때였는데, 후에 나치 독일이 체코를 침공하면서 이 책은 금서가 되었다가 다시 출간, 다시 금서로, 복잡한 스토리를 가지게 되었다. 단순한 기행문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는데, 차페크의 정치 성향 때문이었을까? 영국을 방문한 동안 차페크의 구체적 여정과 활동에 대해서까지 알아보진 못했지만 적어도 이 책은 여행기로서의 매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본다.
우선, 런던 거리에 대한 부분 부터 공감이 되면서 흥미가 돋는다.
노부인들이 길모퉁이에 서서 떠드는 광경을 볼 수 없고,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정처없이 돌아다니거나 점잖은 시민들이 집 앞에서 무릎에 손을 올리고 앉아 있는 광경도 볼 수 없다. 길거리나 장터의 벤치에 앉아 술을 마시는 사람도, 게으름뱅이나 하인이나 나이 많은 교구민도 보이지 않는, 런던의 거리는 그저 지나가는 곳이지 모이거나 즐기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나라와 이탈리아, 프랑스에서는 거리가 훌륭한 선술집이요, 공원이며, 마을 공유지이고 집회장이자 놀이터요, 극장이고 집의 연장이며 문턱입니다. 이곳 (런던)의 거리에서는 사람이나 사물을 만날 수 없습니다. 거리는 그저 지나가는 곳입니다. (23)
내가 영국에 처음 가본 것이 1996년인데, 위의 차페크가 말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런던 하면 또 유명한 것이 박물관과 미술관인데, 차페크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뭐라고 했는가 하면,
런던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원한다면 상아 조각품이나 수놓은 담배 쌈지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뭐든지 다 모아놓았다는 말. 별별 박물관, 미술관이 다 있다) 하지만 이 세계 보물의 보고를 나서면 2층 버스를 타고 몇 시간 동안 수십 킬로미터를 달린다고 해도 아름다움과 화려함으로 기쁨을 주는 인간의 성취는 딱히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이곳의 예술은 전시관과 미술관, 부자들의 방에 있는 유리 진열장 안에 보관되어 있을 뿐 거리를 돌아다니지 않거든요. (48)
대영제국 박람회는 규모가 엄청나고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박제한 사자에서부터 멸종한 에뮤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죠. 4억 명에 달하는 유색인종의 영혼만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영국의 무역 박람회입니다.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유럽인들의 관심사, 그 얄팍한 표층만을 보여줄 뿐 그 아래 존재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68)
칭찬부터 하고 꼬집기다.
마담 투소 박물관에 가서 있었던 일을 읽으면서는 폭소를 터뜨렸다.
저는 실크해트를 쓴 유난히 인상적인 인형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누구인지 보려고 책자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실크해트 신사가 갑자기 움직이더니 가버리는 게 아니겠어요? 오싹한 순간이었죠. 얼마 후 젊은 두 여성이 저를 한참 보더니 책자를 뒤지며 제가 누구인지 찾아보더군요. (52)
그러니까 마담 투소 박물관에서 관람할때는 신체 어느 한 부분이라도 움직이면서 관람해야할 것 같다.
정식 인사가 오고가기 전엔 좀처럼 먼저 입을 열지 않는 영국인이다.
대륙 사람들은 말을 통해 위엄을 과시하려 듭니다. 영국인은 침묵으로 위엄을 과시하죠. (58)
그가 영국의 런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쪽의 스코틀랜드와 북웨일즈까지, 도시 뿐 아니라 시골도 방문한다.
영국의 시골은 도시와 또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다. 높은 산은 없는 대신 잘 자란 풀로 뒤덮인 언덕, 그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마을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그것은 차페크도 인정. 하지만 이번엔 체코의 시골에서 농사 짓고 있는 차페크의 삼촌을 떠올리면서 영국의 경제 구조까지 연관시켜 생각한다. 삼촌이 영국 시골의 초원을 본다면 경작지로 써도 충분한 땅을 그냥 놀리는 것이 이해가 안될거라면서, 밀, 설탕, 감자 등의 식재료를 외국에서 수입해서 쓰는 영국의 경제구조를 생각한다.
잉글랜드의 시골은 일하는 곳이 아니라 감상하는 곳입니다. 공원처럼 푸르고 낙원처럼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곳이죠. (79)
캠브리지와 옥스퍼드를 방문해서는, 장식과 전통을 중요시한다는 명분아래 겉치레로 보일 수 있는 두 학교의 분위기를 이렇게 평가한다.
이 모든 장식과 전통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곳의 목적은 학식 있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사나 귀족을 양성하는 것인 듯 합니다. (86)
영국 사람들이 영국을 벗어나서도 영국 땅을 짊어다니고 있는 듯한 이유로서 섬나라라는 특성을 들어, 개방을 꺼리는 확고한 관습과 소심함때문이라고 했다. 친절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만 결코 이웃이 되려하지 않고 아름다운 우정을 가치있게 여기지만 오직 영국인들끼리만 친구가 되는 듯하다고.
도와주려고 할 지언정 이웃이 되려고는 하지 않음을 알게 되기까지 그가 겪었을 싸늘함이 예상된다. 그야말로 역설의 나라라고 부를만 하다.
내가 영국땅을 처음 밟은 때는 차페크가 영국을 방문하고 72년 후였지만 여전히 그가 영국에 대해 쓴 대부분에 적극 공감하는 것을 보면 영국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말로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차페크 자신이 직접 그려넣은 그림이 잔뜩 들어있다. 그림이 소박하지만 그의 글처럼 위트있다. 이와 비슷한 스페인 여행기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그가 살았던 체코, 여행기를 남긴 영국과 스페인, 세 나라가 다행히 내가 살았거나 가본 곳이라서 다행이다. 스페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썼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차페크가 Lake districts에 대해 쓴 부분이 있는데 이것을 스코틀랜드 항목에 포함시킨 것은 실수가 아닌가 생각된다. Lake districts는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잉글랜드에 속하는 지역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