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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 완결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8월
평점 :
같은 책을, 같은 사람이 읽는데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읽을 수 있을까. 새삼스런 일은 아니지만 이 책은 나에게 또 한번 그런 예가 되어 주었다. 스물 몇살, 처음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끝까지 다 읽기는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명성만큼의 감흥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삼십 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 책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몇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 몰입하여 읽고 있었다.
인생이라는 것은 내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는 하나의 실험이다. 선배들이 인생을 살았다고 해서 그것이 나한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앞으로 내가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면, 나는 인생 선배들이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16쪽)
자기가 한 일로 얻은 평판, 즉 자기에 대한 자신의 평가에 얽매여 있는 노예이자 포로일 뿐이다. 세간의 평판은 우리 자신의 사사로운 평가에 비하면 나약한 폭군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 아니 결정한다기보다 암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소위 체념이라는 것은 고착된 절망에 불과하다. 우리는 절망의 도시를 떠나 절망의 시골로 들어가서 밍크와 사향쥐의 용기*에서 위안을 찾아야 한다. 진부하지만 무의식적인 절망은 인류의 경기와 오락이라고 불리는 것 밑에도 숨어 있다. 거기에 놀이는 전혀 없다. 놀이는 노동 뒤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망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지혜의 한 특징이다.
*밍크와 사향쥐는 덫에 걸리면 다리를 제 입으로 물어뜯어서라도 벗어난다고 한다. (책 속의 주석) (14쪽)
절망이 고착하여 체념이 되고 운명으로까지 받아들이면서 그 절망은 어디에 근거하는지 우리는 제대로 보고 있는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알게 된 본성에 근거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한 어떤 일로 얻은 세간의 평판에 의해서인지. 밍크와 사향쥐 조차도 위기의 순간에서 벗어나고자 다리를 입으로 물어뜯는 방법을 써가며 최선을 다하는데 우리는 절망에 절망을 더하여 고착화시킨 삶을 택하고 있지는 않는가.
무의식적인 절망이 팽배한 그 절망의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가, 인간이 아닌 자연에서 발견하는 것이 있고, 절망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지혜라고 했다. 숲속의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하는 행동을 하기 위해 인간은 지혜를 발휘하여야 한다. 인간의 지혜란 동물의 본능일 뿐이다.
거짓투성이의 인간 사회여
세속적 위대함을 좇느라
천상의 온갖 안락이 허공에 흩어지는구나.
(46쪽, 조지 채프먼, 시인)
날마다 아침은 나에게 자연과 같이 소박하고 순결하게 살라고 권했다. 나는 그리스인들처럼 진지하게 새벽의 여신을 숭배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호수에서 목욕을 했는데, 그것은 하나의 종교 의식이었고,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이기도 했다.
하루 중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시간인 아침은 각성의 시간이다.
우리 자신의 타고난 천성 덕분에 잠을 깨는 게 아니라 하인이 기계적으로 흔들어주기 때문에 잠을 깬다면, 공장의 종소리 대신 천상의 음악이 보내오는 파동과 대기를 가득 채운 향기와 함께 우리가 새로 얻은 힘과 내면의 열망에 의해 깨어나 전날보다 더 고결한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그런 날을 과연 하루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날에 대해서는 별로 기대할 게 없다.
하루하루는 어제 내가 더럽힌 시간보다 더 이르고 더 신성하고 더 찬란하게 빛나는 새벽의 한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삶에 절망하여 어두운 내리막길을 따라가고 있는 사람이다. (130쪽)
아침의 몇시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아침에 눈을 뜨면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너무나 고마운 사람으로서, 한번만 읽을 수 없는 구절이었다.
이쯤 읽었을 때 잠시 쉬면서 저자 소개를 다시 읽어보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1817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이 책의 제목 '월든'은 콩코드의 숲 속에 있는 호수들 중 하나이며 소로가 손수 오두막을 짓고 2년 2개월 2일을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4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잠시 떠났던 때를 제외하고는 소로는 거의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열여섯 살에 장학금을 받고 하버드대학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엔 콩코드로 돌아와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학교 방침에 불응하여 3주 만에 그만 두었다. 다음 해에 사설 학교를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형과 함께 자신의 교육 이념에 따른 학교 운영에 집중하였으나 형이 병에 걸리는 바람에 2년 만에 학교를 문닫을 수 밖에 없었다. 소로는 랠프 월도 에머슨과 친분을 가지며 초월주의* 문학의 일원이기도 했고 초월주의 문학 기관지를 편집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초월주의, transcendentalism: 실재를 인식함에 있어서 객관적 경험보다 시적, 직관적 통찰력을 중시하는 태도)
28세 되던 해에 소로는 에머슨의 동의를 얻어 에머슨이 구입해놓은 월든 호수 주변의 땅에 손수 집을 짓고 숲속에서의 독거 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이 곳에 머물면서 그는 <월든>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에만 직면해도 인생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고, 죽을 때 내가 인생을 헛산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이란 매우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체념하고 싶지도 않았다. (132쪽)
그는 이 책에서 한번도 외롭다고 하지 않는다.
내 집에는 많은 친구가 있다. 특히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아침에는 더욱 그렇다. 월든 호숫가에 살면서 떠들썩하게 웃어대는 물새나 월든 호수 자체가 외롭지 않듯이 나도 외롭지 않다. 저 외로운 호수가 도대체 어떤 친구를 갖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호수는 그 파란 물속에 푸른 악마가 아니라 푸른 천사들을 갖고 있다. 태양도 혼자다.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태양이 둘로 보일 때도 있지만, 하나는 가짜다. 하느님도 혼자다. 하지만 악마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악마는 많은 패거리를 거느린 군단이다. 목초지의 현삼이나 민들레, 콩잎, 괭이밥, 등에, 호박벌이 외롭지 않듯이 나도 외롭지 않다. (209쪽)
혼자일 망정 외롭지 않을 수 있다.
그는 숲속 오두막에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고 살지 않았다. 날마다 또는 하루 걸러 마을로 걸어가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적당량만' 받아들이면 나뭇잎의 흔들리는 소리나 개구리들의 울음소리처럼 나름대로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었다는 말 (253쪽) 에서, 적당량만 받아들임이 곧 소로 다움일 것이다. 관심을 넘은 간섭, 선을 넘는 관여를 피할 수 있을 때 기분이 상쾌한 소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 전반에 숲 속 독거 생활에 대한 자기 소신과 자연에 대한 관찰이 잘 어우러져 있다. 일반적으로 처음 이 책을 대할때 지루하게 느껴질 부분이라면 아마 자연에 대한 묘사가 이어지는 곳이 아닐까 싶은데, 이번에 읽을 때에는 새나 식물, 여우, 마멋 ,오리등이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 집단으로 뭉뚱그려 읽히는 대신, 인간과 동등한 하나의 개체,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이 되다보니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인간 사회, 소신보다 남의 이목과 남의 기준에 휘둘리기 쉬운 사회에 나도 어지간히 물려 있나보다 생각했다. 본성과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존이라는 순수한 목적에 따라 포기하지 않는 생을 이어가는 것은 인간 외의 모든 자연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소로는 자연을 관찰하고 느낀 점들을 얼마나 시적이고 아름답게 묘사했는지 모른다.
언젠가 나는 우연히도 무지개의 한쪽 끝부분에 서본 적이 있다. 무지개는 아래쪽 대기층을 가득 채워 주위의 풀과 나뭇잎을 물들였고, 나는 마치 착색된 수정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세상을 무지갯빛 호수였고, 나는 잠깐이나마 그 호수에서 돌고래처럼 살았다. 그것이 좀 더 오래 지속되었다면 내 일과 삶까지도 무지갯빛으로 물들었을지 모른다. (309쪽)
곧 이어 내가 이 책에서 최고라고 꼽은 대목이 나온다.
날마다 멀리까지 낚시와 사냥을 나가거라. 점점 더 널리 돌아다녀라. 많은 시냇가와 난롯가에서 불안해하지 말고 편히 쉬어라. 젊은 날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새벽이 오기 전에 근심걱정에서 깨어나 모험을 찾아 떠나라. 낮에는 날마다 다른 호숫가에 있도록 하라. 그리고 밤에는 어디에 있든 집처럼 편안하게 지내도록 하라. 이곳보다 넓은 평야는 없고, 여기서 즐길 수 있는 놀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이 사초나 고사리처럼 너의 본성에 따라 마음껏 자라도록 하라. 천둥이 울리면 울리게 내버려둬라. 그것이 농부의 수확을 망치겠다고 한들 어쩌겠느냐? 그것은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수레와 헛간으로 달아날 때 너는 구름 아래로 피하라.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을 너의 직업으로 삼지 말고 도락으로 삼아라. 대지를 즐기되 소유하지 마라. 모험심과 신념이 모자라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 있는 곳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무언가를 사고팔면서 농노처럼 삶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것이다. (316쪽)
낚시, 사냥, 천둥, 도락 등의 말을 단어 뜻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마음에 담는다. 이 책의 주제가 잘 요약하여 드러난 부분이라고 내 맘대로 받아들인다.
소로는 세속을 피해 숲속으로 들어가 은자의 생활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소로 자신이 생각하는 삶다운 삶을 선택하여 실행에 옮긴 용기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기준과 가치보다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것이 소로가 생각하는 삶이고 자유였다.
나는 언덕으로 에워싸인 풀밭에 서 있는 것처럼 이 눈 덮인 평원에 서서 우선 30센티미터 높이의 적설을 뚫은 다음 다시 30센티미터 두께의 얼음을 뚫어 내 발밑에 창문을 낸다. 그런 다음 물을 마시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아 물고기들의 조용한 거실을 내려다본다. 호수 속은 마치 젖빛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듯한 부드러운 햇살로 가득 차 있고, 바닥에는 여름처럼 반짝이는 모래가 깔려 있다. 이곳도 해질녘의 호박색 하늘처럼 잔잔한 평온함이 지배하고 있어서, 호수 주민들의 차분하고 한결같은 기질과도 잘 어울린다. 천국은 우리의 머리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우리의 발밑에도 있는 것이다. (438쪽)
이렇게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을 쓴 소로는 온순하고 순응적인 사람이었을까?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학 졸업후 처음 갖게 된 초등교사 자리를 강압적인 학교 분위기가 마음에 안들어 3주 만에 박차고 나왔으며 월든 호숫가에서 지내는 동안 정부에 반항하여 투옥이 된 적도 있다. 노예제도를 허용했던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책 내용중에도 나오고 '시민 불복종'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한 바도 있는, 사회적 관심과 양심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많은 저서를 남기지도 않았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책으로 출간된 것은 이 책을 포함하여 두권에 불과하고 그 밖에 여기 저기 발표한 글과 평생동안 계속 써온 일기가 그가 죽은 후 뒤늦게 출간되었다고 한다.
소로의 월든은 자연과 함께 산 그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주요 목적은 무엇이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단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산 기록이다.
더 늦기 전에, 더 나이들기 전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