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피는 꽃이 한둘이랴마는
나는 이 꽃을 봐야 봄을 지냈다 싶다
지난 주 낙안읍성에서 본 할미꽃이다.
매년 봄이면 다시 들춰보는 시집으로 고영민의 시집 <공손한 손> 과 유영금의 시집 <봄날 불지르다> 가 있다.
이번에도 이 시집을 꺼내다가 이번엔 옆에 꽂혀 있는 오태환의 시집을 대신 꺼내보게 되었다. 아마 시집 제목때문에 눈이 갔나보다.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
오태환의 시는 우리 말의 숲속을 헤치며 걷는 기분으로 읽는다.
숲속을 뛰어가지 않고, 빠른 걸음도 아니며, 두리번 두리번 덩굴 헤치며 나가듯 읽어야 한다. 겨우 헤쳐나가야 한다. 언어 감각이 거의 묘기에 가깝다고 해야할까.
무너밋골 달빛
하릅강아지 누렁강아지 귀때기처럼 돋는 달빛
양지머리 뒷사태 근 (斤) 가웃 맑은 국거리로 한소끔씩 뜨는 달빛
으슥한 도린결 도린결만 뒤지고 다니는 따라지 달빛
마른 장마 맞춰 벼르다 벼르다 듣는 감또개 같고 감꽃 새끼 같은 달빛
잘 잡순 개밥그릇이나 설거지하듯 살강살강 부시는 달빛
여기서 '감또개'는 꽃과 함께 떨어진 어린 감, '도린결'은 사람이 별로 가지 않는 외진 곳. '가웃'은 어떤 분량의 반 정도 양. 근 가웃이라고 했으니 양지 머리나 뒷사태 반근 정도 분량으로 끓인 맑은 국이라는 뜻일 것이다.
네째 행의 '벼르다'는 방울져 떨어진다는 뜻.
달빛도 빛이되 몇 룩스의 밝기로 강렬하게 어두운 곳을 드러내게 하지 않고, 이렇게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도 구석 구석 우리 눈에 잘 안띄는 곳으로 스며드는 빛이다
이왕이면 책 제목이 된 시도 읽고 넘어가야지 싶어.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
삐뚜로만 피었다가 지는 그리움을 만난 적 있으신가
백금 (白金)의 물소리와 청금 (靑金)의 새소리가 맡기고 간 자리 연분홍의 떼가,
저렇게 세살장지 미닫이문에 여닫이창까지
옻칠경대 빼닫이서랍까지
죄다 열어젖혀버린 그리움을 만난 적 있으신가
맨살로 삐뚜로만 삐뚜로만 저질러 놓고,
다시 소름같이 돋는 참 난처한 그리움을 만난 적 있으신가
발바닥에서 겨드랑이까지 해끗한 달빛도 사늘한 그늘도 없는데,
맨몸으로 숭어리째 저질러 놓고
호미걸이로 한사코 벼랑처럼 뛰어내리는 애먼 그리움,
천지간의 우수리,
금니 (金泥)도 다 삭은 연분홍 연분홍떼의
(원문은 행의 구분이 없다)
죄다열어젖힌 그리움, 소름같이 돋는 참 난처한 그리움이라고 할 만큼 복사꽃은 숨어서 필 수 없는 꽃, 무리 지어 만발하여 자태를 드러내고야 마는 꽃이 아닐까 한다. 숭어리째 저질러 놓듯 피어 드러내는 꽃.
다만, '호미걸이로 한사코 벼랑처럼 뛰어내리는' 이란 구절의 뜻을 확실히 알수 없어 읽어보고 또 읽어보고 있다.
물소리는 백금, 새소리는 청금이란다. 이왕 금에 비유를 했으니 복사꽃도 금과 연관을 지어 마무리 했나보다. 마지막 연 '금니도 다 삭은' 이라고 했다.
당신의 봄엔 무엇이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