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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홀릭 - SBS 김영욱 PD, 내가 사랑한 피아노 명곡들
김영욱 지음 / 북폴리오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처럼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이 흔치 않을 때였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부모님을 몇년을 조르고 졸라 드디어 초등학교 3학년때 동네 피아노교습소에서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 다섯번 숙제로 쳐와라 하면 열번을 쳐가고, 이 페이지까지 악보를 읽어와라 하면 그 다음이 궁금해서 끝까지 악보를 다 읽어가고, 내 평생 이렇게 자발적으로 뭔가를 배워본 적이 있었나 싶다. 지금도 그렇지만 음악을 전공으로 하는 아이들은 그당시는 유일하게 예능계에만 있었던 지금의 특수중학교에 해당하는 예술중학교 시험을 치뤄야했기 때문에 진로에 대해 일찍 결정을 내려야했다. 내가 감히? 와 동시에 나도 한번?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런 갈등을 단칼에 결정내려주신 우리 부모님.
'피아노 전공을 하려면 부모의 뒷바라지가 절대적인데 그렇게 해줄 형편이 안되니 피아노는 취미로만 하거라.'
해보고 싶다고 우겨볼까, 그냥 부모님 말씀을 들어야하나, 어린 마음에 갈등을 겪는 중에 피아노 발표회엘 나가게 되었는데 피아노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곡을 보니 당시 중학교 언니가 치는걸 몇번 들어서 알고 있는, 나는 언제쯤 저런 곡을 칠까 기다려오던 그 곡이었다. 발표회 시작도 전에 얼마나 뿌듯하고 기분이 좋던지. 내가 얼마나 연습을 열심히 했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연습을 하기 시작했음에도 발표회가 다가올 수록 선생님이 요구하는 연습양은 끝이 없었다. 결국 발표회 직전이 되자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그 곡은 듣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고 악보를 발로 밟아버리고 싶은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발표회는 무사히 끝났지만 내가 당시 예술중학교 지원을 하지 못하게 된 상황를 합리화 시키려는 무의식도 작용했을지 모를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데, '피아노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전공으로 하지 않는 편이 낫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겨우 초등학교 5학년짜리가.
이 책의 저자는 피아니스트가 아니고 피아노를 전공하여 관련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도 아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현재 방송국 PD로 일하는 사람이다. 여기까지는 뭐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작가이면서, 치과 의사이면서, 혹은 기업인이면서 음악에 조예가 깊어 이런 책을 내는 경우를 많이 봐왔으니까. 책장을 넘기며 막상 읽기 시작했는데 이건 많은 참고 자료를 옆에 쌓아놓고 편집하여 쓴 책이 아니었다. 오래동안 피아노를 치고 피아노 음악을 들어오면서 자기만의 발견이 있고 자기 나름대로 찾아낸 것들을 아주 아마추어답게 써놓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어느 전문 서적을 읽을때보다 머리에 들어오고 마음에 들어온다. 억지로 읽히는 문장이 아니라 마치 그의 수다를 들어주는 느낌이랄까? 쓸데 없는 수다가 아니라, 형식은 수다이되 내용은 수다가 아닌.
피아노 못지 않게 아이스크림 홀릭이 틀림없는 그가 모짜르트의 피아노 변주곡, 즉 우리가 '반짝반짝 작은별'이라고 동요로 부르고 있는 멜로디로 시작하는 그 곡을 예로 들어 변주곡을 설명하는데, 주제와 12개의 변주를 어느 아이스크림 전문상점의 각기 다른 아이스크림 맛으로 비유를 해놓았다. 명료하고 단순한 주제는 '바닐라', 물흐름 같은 상큼한 제1변주는 '체리쥬빌레', 펼친 화음이 시원스러우면서도 또박또박한 제3변주는 '초코칩',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맛이 느껴지는 제8변주는 '레인보우샤베트', 기교적이고 화려한 변주가 등장하는 제10변주는 '슈팅스타', 뭐 이런 식.
또 한가지. 소나타곡과 소나타 형식은 다르다는 것과 함께 소나타 형식을 설명하는데 김수희의 '애모'를 예로 들었다. 제시부-발전부-재현부를 악보에 표시까지 해주면서. 대중을 상대로 해야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PD답다고나 할까. 클래식에 대한 거리를 앞으로 당겨주기 위한 시도라고 할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있는 작곡가와 피아노곡만 그저 설명하는 방식을 달리하여 친절하고 솔직한 방식으로 소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스카를랏티는 나도 이름만 들어봤지 한번도 주의해서 그의 곡을 들어보거나 알려고 하지 않았던 작곡가이고, 뿔랑 같은 사람은 이름도 처음 들어보았다. 바하의 인벤션이 딱딱하고 기계적인 연습곡으로만 알았지 그것을 이렇게 하나의 작품으로 충분히 발전시킬수 있음을 몰랐다.
더 말이 필요없는 것은, 이 책에 함께 포함되어 있는 한장의 CD이다. 이 책에 예시된 음악들이 열 대여섯곡 서비스로 들어있는 CD이려니 했는데, 앞에 말한 스카를랏티의 피아노곡을 포함해서 모두 '저자가 직접' 연주하여 녹음했다고 한다. 무려 마흔 다섯곡이나.
지금도 쇼팽의 연습곡 전곡 연주에 도전하기 위해 연습중이라는 이 사람. 아마추어들이여, 이 사람을 부러워하라.
('취미로만 하거라' 는 부모님 말씀을 어찌나 잘 들었는지 나는 대입 학력고사를 보기 전까지, 중간에 한번도 그만 두지 않고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오로지 취미로만.)